복면가왕 : 하늘과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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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성'이 << 미녀들의 수다 >> 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키 180 이하인 남자는 루저'라고 말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 촌스러운 취향 고백은 으레 신상 털기 작전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 게시판에는 온통 그녀를 향한 욕설로 도배가 되었고, 출처를 알 수는 없지만 예상 가능한 정체불명의 루머가 떠돌아다녔다. 사생활이 문란한 여자'라는 것. 웃고 떠드는 오락 방송에 나와서 웃자고 한 말(Humor)이 무시무시한 말(rumor)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그녀 입장에서는 단순한 취향을 고백한 것에 가까웠지만 대한민국 불알후드(brotherhood)의 잣대(?)로 보자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 불경 " 이었던 모양이다. 사과 한 개'면 끝날 줄 알았으나 사과 박스 채 조공을 드리며 보시를 해도 대중의 비난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방송사'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해당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그때가 2009년이었다. 쉽게 끓는 물은 금방 식는 법. 180 이하 루저 사건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
났을까 ? 그렇지 않다. 이 사건으로 " 루저녀 " 라는 불명예를 얻은 그녀는 2013년, 한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이내 취직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불알후드(들)이 떼거지로 해당 기업에 전화를 걸어 핏대 세우며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2009년에 벌어진 일이 2013년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 여자의 취향 고백이 연좌제가 되어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꼴'이었다. 불알은 (한) 영혼을 잠식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왜 이렇게 사회 문제'로 번졌을까 ? 간단하다. " 감히 " 여성이 남성의 자존심을 긁었기(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자는 자고이래로 루머의 희생자'였다. 루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쪽은 남성보다는 여성'이었다.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뜬소문은 여자의 일생을 작살내기에 충분했다.
막달라 마리아'도 루머의 희생자'에 속한다. 어쩌면 <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다 > 라는 소문은 가장 오래되었지만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고, 여전히 진행 중인 가장 오래된 찌라시'다. 성서를 이 잡듯이 뒤져보아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기록은 없다. 기독교와 관련된 외전(外典)과 외전(外傳)을 두루 살펴보아도, 그 어느 문헌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조심스러운 추론은 가능하다. 열두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실을 퍼트린 것은 아닐까 ? 당시 예수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가축으로 취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수가 총애하는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이 열두제자의 심기(질투)를 건드렸으리라. 이래저래 남성 권위에 도전하는 여성은 처벌을 받았다.
한마디로 여성잔혹사'인 셈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 하늘과 느티나무 >> 라는 제목에서 동화 같은 시적 낭만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곧 이 순열 順列 이 끔찍한 조합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다음은 1993년 연합뉴스 기사 내용이다. 최협의 <<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 라는 冊을 읽다가 끔찍한 사건'이라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한다.
(서울=聯合) ○...서울 강동경찰서는 3일 애인의 몸에 담뱃불로 문신을 새기고 폭행한 申씨에 대해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 경찰에 따르면 강동구 암사동 K병원 CT촬영 기사인 申씨는 지난 90년 11월 환자보호자로 병원에 찾아온 孫모씨(39.여.다방종업원)와 사귀어 내연의 관계를 맺어오다 지난달 19일 孫씨가 다른 남자와 교제한다는 이유로 병원부근 O여관으로 끌고가 넥타이로 孫씨의 두손을 묶고 수건으로 입을 막은 뒤 담뱃불로 등과 가슴에 '하늘'과 '느티나무'라는 글씨를 남기는 등 온몸에 문신을 새겨 전치 4주의 상처를 입혔다는 것. 지난 83년 결혼해 아들 2명을 두고 있다는 申씨는 경찰에서 '하늘'과 '느티나무'라는 문신을 새긴 데 대해 "남자는 하늘같이 모셔져야 하고 여자는 느티나무와 같은 남자의 휴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며 태연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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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가해 남성이 내연 관계에 있던 피해 여성이 다른 남자와 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강제로 벌거벗긴 후 몸에다 담뱃불로 " 하늘과 느티나무 " 라는 문장을 새긴 사건이었다. 일명 " 담배빵 " 이었다. 담뱃불 최고 온도가 850~900c라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 여성이 겪었을 공포와 통증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이 행위는 살인보다 더 끔찍한 폭력일 수 있다. 그는 남성은 하늘이고 여성은 땅이라는 유교적 남존여비 男尊女卑 에 젖어서 남성 권위( 자존심)에 도전한 여성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페니스를 섬기지 않고 다른 남자의 페니스를 섬기게 되니 좆부심이 발동한 까닭이다. 감히..... 네 년이 ! 넓게 보자면 이런 시선은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대한민국 마초 남성들은 IMF 이후 양성 평등 사회,
혹은 여성 상위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IMF 사태로 인해 정리 해고된 쪽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았다. 남성은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이유로 남고 여성 동료들은 직장을 떠나야 했다. 마초 남성의 주장과는 달리 남존여비 男存女悲'였던 셈이다. 그렇기에 IMF 이후 여성이 남성 밥그릇을 빼앗거나 남성 머리 위에 군림했다는 주장은 루머'인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 180 이상인 남성이 좋다 > 라는 말과 < 얼굴이 예쁜 여자가 좋다 > 혹은 < 가슴이 큰 여자가 좋다 > 라는 말은 서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얼굴이 예뻐야 된다는 남성 주장에 대해 비난을 퍼붓지는 않는다. 못생긴 여자에 대한 농담은 단 한번도 사회적 응징을 받은 적이 없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고 강용석은 인기 방송인이 되었다.
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두들겨 패야 한다고 말한 윤종신은 사과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되었다. 과연 이 사회는 양성평등사회'일까 ? MBC 주말 오락 프로그램 << 복면가왕 >> 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이 있다. < 나는가수다 > 라는 서사에 < 복면 > 이라는 미스테리한 요소를 첨가했다. 나는 (복면 쓴) 가수다 ?! 문학으로 비유하자면 순문학에 장르문학이 결합한 꼴이다. 계급장 떼고 편견 없이 노래만 가지고 승부를 가려 봅시다, 라는 제작 의도가 참신했다. 얼굴을 가리자 시청자는 비로소 < 눈 > 으로 보는 대신 < 귀 > 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청자는 뛰어난 가창 실력을 선보이는 복면가왕의 승자가 얼굴 예쁘고 춤 잘 추는 걸그룹에 속하는 여성 가수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는 했다.
예쁜 여성 가수는 노래를 못 부를 것이란 선입견이 은연중 작용한 탓이다. 예쁜 얼굴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이다. 이처럼 선입견은 눈을 감게 만들고 귀를 닫게 하는 작용을 한다. 남성 가부장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는 관습화된 언어 습관이 하늘과 느티나무라는 끔찍한 문장을 만든 것은 아닐까 ? 인간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단지 여자다운 여자로 훈련받고, 남자다운 남자로 교육받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물학적 성(SEX)이 남성이 요구하는 사회학적 성(GENDER)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여자'다 ! 언어 속에 깃든 성차별은 널리고 널렸다. < 남의사 > 라는 낱말은 없지만 < 여의사 > 라는 낱말은 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 여교사 > 는 있지만 < 남교사 > 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여군, 여교수, 여배우, 여대생, 여주인 등. 세상의 반이 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유별난 " 구별 짓기 " 는 성차에 따른 분류'이다. 이러한 성차별성 언어가 일상 생활 속에 스며들면서 남녀불평등 사회'를 만든다. 한국인은 알게 모르게 관습화된 언어를 통해 불평등'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 표현이지만 한국 사회는 복면을 쓸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하여 얼굴(미모)로 평가하지 말고 목소리'만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복면은 오래된 편견을 없애는 도구'다. 티븨 광고 속에서 가장 흔한 말 가운데 하나가 " 사랑받는 아내 " 라는 말이다. 곰곰 생각하면 사랑을 주는 존재는 남편이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내'다. 이러다 보니 칼자루를 쥔 쪽은 남편.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앙칼진 말방구는커녕 알랑방구를 껴야 그나마 사랑을 받을까 말까'다. 이처럼 곳곳에 성차별적 고정관념은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 결국에는 끔찍한 느티나무가 되는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만국의 여성 노동자여, 복면을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