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다고
모두 균형을 잃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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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기울어진다고 모두 균형을 잃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방송'은 생각보다 많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다양한 곳에서 신호가 잡힌다. 기독교 방송이다 보니 교회 목사가 단골로 출연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부분은 개척 교회 분투기로 시작해서 (중)대형 교회 성공기'로 끝난다. 설교와 간증을 빙자한 성공담을 듣다 보면 예수님 삶보다 " (더) 다이나믹 " 하고 " (더) 드라마틱 " 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은 예수를 빛내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기보다는 자신을 빛내기 위해 예수를 카메오'로 출연시키는, 어처구니없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말끝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시고,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위해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고 주장한다.
어떤 목사는 자기 교회 건물을 " 성전 " 이라거나 " 제단 " 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구멍가게를 슈퍼마켓'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교회가 성전이라면 목사는 제사장'이라는 소리인데, 목사와 제사장'은 급이 다른 존재'다. ( 참고로 예수는 대제사장'이다 ) 목사가 그냥 커피라면 제사장'은 티오피'다. 자기 교회를 성전이나 제단이라고 말하는 목사는 과대망상증 환자에 가깝다.
이 성공담은 주님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감동은커녕 쉽게 낙담하게 된다. 과대망상에 따른 비자발적 허언증 환자는 예수를 내가 필요할 때 등장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오라면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존재'다. 이 말 품새'는 입만 열었다 하면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말이야... " 로 시작하는 떠벌이의 허세를 닮았다. < 내가 아는 사람... > 목록에는 항상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가 올라와 있다. < 내가 아는 사람... > 은 대부분 청와대에 근무하거나 고위급 관료이거나 스펙이 좋은 사람'이다. 그들이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는 사람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그와 동급으로 취급하려는 욕망에 뿌리를 둔다.
쉽게 말해서 타자를 이용해서 신분 상승을 꾀하려는 수작'이다. 골때리는 성공담이다. 가만히 듣다 보면 목사가 주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이 목사 치다꺼리'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 주님이 네 시다바리냐 ? "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요즘 동에 번쩍, 동해 번쩍, 서에 번쩍, 서해 번쩍 나타나는 스타 목사가 있다. 그가 말했다. " 저는 목사'라는 직업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 정치적 입장은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 신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 ( 허풍과 만담이 혼합된 생활 개그'를 섞어가면서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요점만 나열했다 ) 쉽게 말해서 정치적 중립을 위해 세월호 사건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는 소리'다.
방송을 보다가 밥을 먹던 내 입에서 밥알 몇 개가 튀어나왔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침묵한다는 그는 정작 오락 토크 쇼에 자주 등장하여 온갖 수다'를 떠는 연예인형 목회자'가 아니었던가 ? 남의 집, 이불 속 속사정에도 흥야항야하는(흥야항야하다: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다는 뜻) 그가 정작 사회적 약자의 억울한 사연에 대해서는 침묵 선언을 하겠다는 자세'는 과연 목회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일까 ? 그는 입을 열어야 할 순간에는 입을 닫고, 입을 닫아야 할 순간에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출연하는 프로그램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 콩나물에 고춧가루 팍팍 뿌렸냐이 ~ " 라며 개인기를 선보일 정도'로 떠벌이였던 그가 유독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 이주일 성대모사를 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
그 후 며칠이 지났다. 채널을 돌리다가 다시 그 스타 목사'가 출연해서 이바구를 날리는 방송을 또 다시 목격하게 되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니 자꾸만...... 짜증이 났다. 그는 여전히 재미있는 만담으로 " 콩나물에 고춧가루 팍팍 뿌렸냐이 ~ " 라며 청중을 쥐락펴락했다. 그는 자신이 어렵게 살아온 나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쌀이 떨어져 밥을 굶기 일쑤요, 홍수가 나 집이 잠겼다는 소리도 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은 " 다이나믹 " 하고 " 드라마틱 " 하며 " 아스트랄 " 해서, 은혜로운 말씀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극이 되었다. 예수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진 그는 방송 인터뷰 내내 자신에 대한 약사略史를 1시간짜리 < 창 > 으로 채웠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간간이 1초짜리 < 추임새 > 정도'로 인용했다.
오, 말씀. 말씀. 말씀. 말씀. 은혜로운 말씀이었다. 그 방송을 보다가 문득 스타 목사'는 왜 정치적 중립'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 속 초기 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피억압자이며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교회가 차별 없는 평등을 주장했기에 가능했다. 인간은 세상 권세와 상관없이 높고 낮음이 없는 형제 자매'였다. 그들에게 교회는 도피처'였다. 그렇기에 바울이 이끄는 고린도 교회'는 비주류, 반기득권, 빈자들의 정치적 결속체'였던 셈이다. 여기서 굳이 정치적 스펙트럼을 말하자면 : 고린도 교회는 기득권 주류 부자 모임'보다는 좌파 소수 정당 모임'에 가까웠다. 그런 기독교가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달라졌어요 !
스타 목사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며 자랑스러워 했지만, 그것은 중립이 아니라 방관자 ㅡ 자세'에 가깝다. 이 세상 모든 방관자'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외면한다. " 가만히 있으라 " 라는 세월호 명령이 섬뜩하게 와 닿는 순간이다. 흔히 정치 성향을 분류할 때 보수(우파), 진보(좌파), 중도파'라고 나누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치 스펙트럼에서 < 중간 > 은 없다. 사람들은 "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 라는 소리를 중립'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소극적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왜냐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소극적 보수주의자'는 많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 소극적 진보주의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진보'라고 한다면 그 말은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이다.
내가 살던 마당 넓은 집에는 정원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하나는 대추나무였고, 그 옆에는 감나무가 있었고, 끝에는 모과나무가 있었다. 모과나무는 이웃집과 이웃해서 나뭇가지가 그 집 담을 넘었다. 가을이 되면 모과가 탐스럽게 열렸다. 이웃집 담장을 넘은 가지에서 열린 모과'는 누구의 것인가. 그 기준은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마찬가지'다. 좌파에 뿌리를 내린 상태에서 담벼락을 넘어 우파 의제'를 지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우파에 뿌리를 내렸지만 좌파 의제'에 한 표를 던질 수도 있다. 철학자 김진적은 이러한 < 유려한 태도 > 를 " 기우뚱한 균형 " 이라고 정의 내린 모양이다. 여기 시소가 있다. 오른쪽에는 몸무게가 많아 나가는 사람이 앉아 있고 왼쪽에는 가벼운 사람이 앉아 있다.
시소를 타는 재미란 ? 그렇다,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에 시소를 탄다. 이 재미를 위해서는 시소 받침을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동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 이르러 균형이 이뤄지니깐 말이다. 당신은 시소 받침이 한쪽으로 쏠렸다고 해서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주님을 섬기는 목회자'라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 편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쪽으로 쏠린다고 해서 균형일 잃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를 보라. 직선주로'보다는 기우뚱한 자세로 곡선주로'로 돌 때 속도가 빠르다. 그렇지 않은가 ? 기울어진다고 모두 균형(중심)을 잃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싸움을 구경하는 구경꾼이라면 피투성이가 되어 맞고 있는 사람이 비록 맞아 죽어도 싼 놈이라 해도 그 사람 편에 서 있어야 한다.
예수가 거리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는 여자'를 무조건 옹호했듯이 말이다. 조건 없는 편애'야말로 아름다운 청년 예수를 읽는 키워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