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냐 ?
내가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때는 " 거울 " 을 통해서가 아니라 " 기억 " 을 통해서다. 신체에서 노화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슬픈 일에 속하지만 잊으면 안 될 것을 쉽게 잊게 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에 속한다. 예를 들자면 집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요즘 들어 부쩍 얼굴은 생각이 나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배우 조인성 얼굴은 떠오르는데 조인성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쩔쩔맸던 적도 있다. 심지어는 송강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당황했던 기억도 있다. 단역 배우 이름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송강호 이름을 잊을 수가 있을까, 시바. 어제도 그런 경우였다. 송강호 얼굴은 또렷이 떠오르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결국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면서 병신같다는 이웃인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았다.
아하, 송강호였지 ! 송강호'라는 이름을 기억하니 다시 그가 어느 영화에서 날린 명대사'가 생각났다. " 에라이, 시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 " 그런데 이 대사'가 영화 << 살인의 추억 >> 에서 날린 애드립인지,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 날린 애드립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영화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도 송강호는 " 밥은 먹고 다니냐 ? " 와 비슷한, 상상을 초월한 애드립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하균을 물 깊숙한 곳에 끌고 간 후 죽이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 너 착한 거 나도 안다... 내가..너 죽여도..용서해 줄 꺼지 ? " 송강호'라는 배우가 두 영화를 통해 내뱉은 생뚱맞은 대사'는 기표와 기의'가 모두 다르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짐승 같은 살인범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안부를 묻는 것이나
착한 놈이란 걸 알면서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전달하는 엇박자'는 뉘앙스가 비슷하다. 인간이랍시고 인간 행세를 하는 짐승에게도 윤리적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상황과 착한 놈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죽여야만 하는 상황적 판단을 해야 하는 장면은 딜레마'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나는 이 두 대사'가 이음동의어 같았다. 그래서 헷갈린 것이다. 결국에는 눈 부릅뜨고 확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 살인의 추억 >> 을 다시 보았다. 결말 부분만 보면 되는데 타이틀을 꼼꼼하게 챙기다가 그만 처음부터 끝가지 다시 보았다. 열 번 넘게 본 영화이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다. 보다 보니 어느새 그 유명한 기차역 장면까지 도착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김상경은 미국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다. 박해일을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통고'였다.
심증은 100%이나 물증이 0%인 상태'다. 송강호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가 인간이랍시고 인간 행세를 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며 낮게 말한다. 에라시, 시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 변호인 >> 을 본 이후여서 그런지 몰라도 " 밥 " 이라는 낱말이 주는 정서가 새롭게 다가왔다. 송강호라는 배우만큼 밥의 서정'을 가장 진술하게 전달해 주는 배우는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송강호가 밥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 밥 > 은 인간을 지시하는 언어'다. 한국인에게 밥은 과일이나 다른 먹거리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쌀을 씻고, 뜸을 들이고, 밥그릇에 밥을 담아 내놓는 행위'는 오롯이 오랜 문명이 깃든 절차'였다. 그렇기에 단순하게 사과를 한 입 베어무는 행위와 밥 한 숟가락 떠 입에 넣는 행위는 다르다.
인간은 밥을 먹고 짐승은 먹이'를 먹는다. 그러니까 송강호가 박해일에게 던진 " 밥은 먹고 다니냐 ? " 라는 질문은 박해일에게 먹이'를 먹는 짐승이냐 아니면 밥을 먹는 인간이냐고 묻는 것이다. 장면이 바뀌면 송강호 가족이 아침 밥을 먹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트뤼포가 말했듯이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실천은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볼 때마다 새로운 텍스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보고 또 봐도 지겹지 않는 애인'과 같다. 오늘은 집에 가서 << 복수는 나의 것 >> 을 다시 보기로 했다. 박찬욱의 최고 걸작은 << 복수는 나의 것 >>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