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독서 행위'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실망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책은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읽기 싫은 책을 억지로 읽으려다 결국에는 안 좋은 기억만 쌓이게 되고 고통스러운 경험만 하게 된다는 게 내 주장이올시다. 과연 모든 책을 꼼꼼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 황정민 버전 : " 독서는 고해야, 몰랐어 ? " 이 고약한 경험이 쌓일수록 책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책이 재미없다면 : 망설이지 말고 바로 책을 덮거나 지루한 부분은 띄엄띄엄 읽어도 된다. 당당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책을 더럽게 재미없게 쓴 작가를 욕해도 된다. 비록 그가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피카소'라 해도 ! 쫄지 마, 시바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그들이 당신을 명예 훼손으로 고발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사자명예훼손죄 운운하던데 멍청한 녀석 ! 제임스 조이스가 인간이지 사자'냐 ? 웬 사자 ?! 사바나 초원에서 죽은 사자에게 무슨 얼어죽을 명예훼손이냐. 설령 살아 있는 작가'라 해도 쫄 필요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30페이지 정도만 잘 파악하면 나머지는 대충 흘려보내도 된다는 말이다. 책, 꼼꼼하게 읽을 필요 없다. 물론 독자들이 책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책은 그리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좋은 책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툭 까놓고 말해서 : 책 한 권 분량이 평균 300페이지'라고 했을 때 작가가 하고 싶은 입장과 주장은 30페이지 분량 안에 집약되어 있다. 나머지는 잔소리에 가까운 언저리'다.
1시간짜리 < 창 > 을 모두 절창'으로만 구성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힘을 주고 부를 때와 힘을 빼고 부를 때가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장면은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과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일 것이다. 나머지는 힘 빼고 부르는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고갱이 부분과 언저리 부분 간 경계가 너무 뚜렷하면 긴장감을 잃게 된다. 글솜씨가 없는 작가가 쓴 글은 " 고갱이(30쪽) " 와 " 언저리(270쪽) " 를 구분하기 쉽기에 " 언저리 " 가 잔소리처럼 느껴져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반면 솜씨 좋은 작가'는 " 언저리 " 를 " 고갱이 " 처럼 꾸밀 줄 안다. 그래서 독자는 구분하기가 힘들다. 왠지 이 부분은 중요한 장면 같아서 괄약근에 힘 꽉 주지만 다 읽고 나면 " 이 산이 그 산이 아닌가벼..... " 가 된다.
( 개인적 취향을 고려해서 ) 나름 독서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독자가 속으면 속을수록 독서는 즐거워진다. 별것 아닌 것을 별것으로 만드는 힘'이 곧 솜씨'다. 결국 좋은 작가는 고갱이'를 잘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언저리'를 잘 꾸미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좋은 작가와 좋은 투수는 닮은 구석이 있다. 좋은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잘 던지는 투수가 아니라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던질 줄 아는 투수'다. 다시 말해서 볼을 잘 던지는 자가 좋은 투수다. 타자 대부분이 헛 스윙을 하거나 땅볼 혹은 뜬볼' 로 물러나는 주요 원인은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는 볼'에 방망이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트라이크는 고갱이'이고 볼은 언저리'다. 스티븐 킹'이 이 짓'을 아주 잘한다.
킹이 10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2년에 3편 정도 쏟아낼 수 있는 이유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운 볼'을 능수능란하게 던진다는 데 있다. 힘을 빼고 가볍게 볼을 툭 던져도 독자가 알아서 헛 스윙을 하니 팔이 빠지도록 공을 세게 던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이 힘을 비축해서 소설을 쓴다. << 대한민국 치킨전 >> 을 쓴 사회학자 정은정은 제법 언저리를 능청스럽게 고갱이처럼 꾸밀 줄 아는 작가'다. 그녀는 자칫 딱딱하고 무겁게 느껴질 만한 사회학 서적을 말랑말랑한 말투로 가볍게 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작가'다. 비문학 분야의 김애란'이라고 할까 ? 내가 좋아하는 탐사 르포 작가 매리 로취를 떠올리게 만든다. 정은정은 " 가난한 시절에 먹던 음식은 힘이 세다 ( 27쪽 ) " 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 맛집 탐방 >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옛날, 시골, 없이 살던 시절, 형제간 젓가락질 싸움, 어머니 손맛 따위라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맛을 지배하는 것은 황홀한 레시피'가 아니라 추억'이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옛날 어머니 손맛'은 팔 할이 미원과 다시다'가 만든 합작품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후라이드 치킨은 아빠 월급날이 되어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IMF 이후 치킨집 창업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정은정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든다. 봉급자 생활을 하던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나자 퇴직금을 털어 자영업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만만한 게 < 닭 > 이었다. 한 집 건너 치킨집'이 들어섰다. 결과는 필패'다. 7만 4천여 개 점포 중 5만여 개 문을 닫고,
살아 남은 쪽도 목구멍이 포도청이기는 마찬가지'다. 멀리 볼 것 없다. 내가 사는 동네를 살펴보아도 답은 나온다. 브랜드를 달지 않고 창업한 개인은 망하기 십상이고, 프렌차이즈 가게'라 해도 사정은 비슷하다.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거둬들이는 돈이 크기 때문이다. 공산품 팔다 망한 가게 사장은 이 울분을 " 사장이 미쳤어요 ! " 라는 대자보를 걸어둔 채 떨이'로 물건을 팔며 신세 한탄이라도 한다지만, 동네 영세 치킨집은 그런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다. 그냥 소리 소문 없이 가게 문을 내릴 뿐이다. 대한민국은 치킨 공화국이 되었으나 치킨 때문에 행복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뱃살을 걱정해야 하는 아가씨도, 싸장님'으로 살아가는 가게 주인도, 닭을 키우는 양계 농장 주인도,
앉아 있을 공간조차 없어서 서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사육장 닭도, 쇼바 올린 오도방(오토바이)을 타고 눈 오는 혹은 비 오는 거리를 미친듯이 달려야 하는 배달의 기수' 도 결국 남는 것은 피멍'이다. 승자는 오직 닭과 결탁한 소수 거대 자본 권력'뿐이다. 봄날은 가고 복날은 온다. 이제 대한민국은 닭집과 제 살 발라 먹고 남은, 닭뼈 같은 앙상한 십자가만 우후죽순 늘어난다. 불타는 금요일, 우리는 닭집에 앉아 " 오백 둘에 반반 무 많이 ! " 를 외치고, 청와대는 닭이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그네 아버지 이름은 " 다카기 마사오 " 였는데 어느 순간 내 귀에는 " 닭코기 맛시오 " 로 들린다. 어느 보수 단체가 김영오 씨 단식 투쟁을 비아냥거리는 쇼를 펼치고 있다.
말 그대로 "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 " 하는 퍼포먼스'다. 그 유래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그 뜻을 모른다. 닭다리를 잡았다는 표현은 손으로 다리를 잡았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닭을 잡아먹고 나서 병아리 흉내를 낸다는 소리일까 ? 동화 << 빨간 모자 >> 가 생각난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를 잡아먹은 늑대가 빨간 모자 소녀 흉내를 내며 호시탐탐 할머니마저 잡아먹을 궁리만 하는 ! 하여튼 포악한 포획꾼이 연상된다. 이 퍼포먼스에는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 예의도 > 없다. 그리고 그 고통에 공감하는 < 여의도 > 정치가 실종된 지도 오래'다. 식물 국회'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동물 국회'라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 같다.
그래도 마지막은 희망을 이야기해야 겠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고 절망하기에는 좋은 세월이다. 더운 복날이 지나면 따스한 봄날이 온다, 언젠가는 ! 그런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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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