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란 무엇인가 ?
클리셰'란 상투적인 표현이나 장치'를 뜻한다. " 우레와 같은 박수" 라든지, " 장대 같은 비 " 가 그 예이다.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글 좀 쓴다는 고수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차라리 수박 같은 박수 혹은 젖가락 같은 비'가 더 신선해 보인다. 이 판에 박힌 표현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장을 볼 때'는 꼭 장바구니 속에 대파'가 들어있는 식이다. 그리고 알뜰 주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콩나물 흥정'이다. 콩나물 가격 흥정하며 실랑이질하다가 ( 주인 동의 없이 ) 콩나물 한줌 봉투에 담은 후 냅다 도망친다.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장면이다. 이것은 < 흥정 > 문화가 아니라 < 절취 > 다.
내가 드라마 속 상인이었다면 그 여자를 콩나물 절취'로 고소했을 것이다. 클리셰란 원래 인쇄할 때 사용하는 연판(鉛版) 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순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판박이 혹은 틀에 박힌 틀 정도 되겠다. 그러니깐 클리셰란 진부한 모든 것'이다. 진부하다는 것,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예측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측불허의 반대말이 클리셰다. 뻔한 한국 드라마 속 클리셰를 보자 : 운명이란 지랄같아서 끌린다 싶으면 오누이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 뒷목 잡고 쓰러지면 의식불명 상태이고, 눈을 뜬다 해도 기억상실증이다. 누구떼여 ? 오누이가 아니다 싶으면 둘 중 하나는 불치병이고, 싸가지 없다 싶으면 재벌2세요 ( 설령 싸가지가 있는 재벌2세라면 그 부모가 싸가지가 없다 ) ,
설상가상 재벌은 꼭 가난한 사람'에게만 꼴린다. 계급 사회인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네버, 결코 벌어지지 않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드라마 1회만 보면 16부작 기획 드라마 마지막 쪽대본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청자는 " 내가 네 오빠다 ! " 라는 진부한 커밍아웃보다는 스타워즈에서 선보인 " 내가 네 애비다 ! " 라는 의외의 반전에 열광하지만, 이런 명대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 다스베이더가 주인공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미리 예상했던 놈 나와 봐라 ! ) 당신이 내 아비라니, 다스베이더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와 영화'는 끊임없이 클리셰'라는 진부한 장치'를 이용한다. 왜냐하면 익숙한 설정이 관객들에게 친숙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콩나무 무단 절취 에피소드만 해도 그렇다.
이 한 장면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시청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등장인물 k 주부'는 알뜰주부이면서 동시에 억척스러운 아줌마이며, 내 몸 치장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다. 이 인물 설정을 콩나물 무단 절취 장면으로 간단하게 끝내는 것이다. 이처럼 클리셰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놈이다. 마찬가지로 느와르 영화에서 우리는 영화 속 팜므파탈'을 단번에 파악하게 된다. 챙이 넓은 모자에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100퍼센트 남자 주인공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요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오로지 영화 속 탐정뿐이다. 느와르 영화에서 감독이 이런 진부한 영화적 장치'를 자주 이용하는 까닭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챙 넓은 모자, 얼굴을 가린 베일, 새빨간 킬힐 그리고 담배라는 클리셰 4종 세트'는 중심 캐릭터가 아닌 주변 캐릭터를 설명하느라 뜸을 들여야 하는 시간들을 최소화한다. 런닝 타임이 정해진 영화에서 골든 타임'보다 언저리 타임'이 길게 되면 그 영화는 망한다. 우리는 이 소품'이 의미하는 바' 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클리셰 4종 세트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등장한 금발 여자가 무대에 나오자마자 관객은 외친다. " 나쁜 년 ! "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그녀는 관객의 괄약근을 조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감독이 노리는 것이여 ! 하지만 이러한 장치'를 지나치게 남발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 알고 보니 오누이' > 라는 클리셰가 나쁘지는 않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그렇게 대충 그까이꺼 뭐 그런 미지근한 사랑을 해서
애 낳고 그냥 그렇게 대충 그까이꺼 뭐 그냥 구질구질하게 살았더라, 라는 평범한 드라마를 볼 인간이 어디 있는가 ? 시청자와 관객은 특별한 사랑을 원한다. 그래서 < 알고보니 오누이 > 라는 극한의 설정에 끌린다. 그런데 문제는 알고 보니 어릴 때 헤어진 오누이'인데 누이 양'은 백혈병이다. 설상가상 오 군'은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기억상실이닷 ?! 알면서 속는다지만 이 정도면 해도 너무한 설정이다. " 오 군, 나야. 누이... 나, 누이라고 ? 서...설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 오 군은 누이 양을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는 펄펄 끓는 물 속의 계란처럼 부들부들 떨리지만 이내 냉정을 찾는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면 다시 얌전한 자세로 돌아오는 계란처럼. " 당신은, 누....
구세요 ? " 방긋 !!!!
기억상실인 줄 알았던 오 군은 떠나가는 누이 양'을 보면 눈물 흘린다. 알고 보니 기억상실 환자인 척한 것. 누구를 위해서 ? 누이 양을 위해서 ! 얼씨구, 세상의 간지는 모두 오 군의 몫이구나... 바로 이런 것이 막장이다. 대한민국 막장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바로 < 이명박 정부 > 다. 1부만 봐도 16부의 줄거리 밑그림이 그려진다. 뻔하다. 그래서 뻔뻔하다. 결말이 뻔히 보이는 막장이다. 반전은 없다. 병역 면제 문제로 탈락되면 그 자리를 다시 병역 면제 받은 놈이 총리 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민다. 뭐 대충 이렇게 돌아간다. 그러니 이 드라마가 재미있을 리가 없다. 이런 진상 드라마는 채널을 돌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돌린 채널에서는 지금 드라마 < 박근혜 정부 > 가 시작된다.
그러니 고개를 돌려서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시청자 게시판에 불꽃싸다구를 날려야 한다. 우, 우우우우. 불륜드라마, 적당히 합시다,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