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이 없는 건물은 있지만

문이 없는 건물은 없다.

 

 

※ 어제 급히 < 투명사회 > 리뷰를 올렸는데 생각해 보니 성의 없이 쓴 티'가 " 확 나서 " 다시 읽으니 " 화나서 " 다시 쓴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 위에서 다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 " 라는 말씀을 신도들에게 전파한다.  " 그분이 다 보고 계십니다 " 라는 말은 곧 " 그분은 다 알고 계십니다. " 라는 뜻이 된다. 종교가 가진 위엄'은 바로 " 투시 / 투과(성) " 에 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겉을 꿰뚫어 속을 속속들이 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 다 한들, 신 앞에서는 벌거벗은 초라한 소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신 앞에서 시력 자랑하지 마라. 신은 " X- (ray) eye " 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벌거숭이가 된다. 이 투시'를 푸코'는 약간 다른 각도로 비튼다. " (하느님의) 내려다보심 " 과 " (부처님의) 손바닥 안 " 을 하드코어 - 느와르 - 와이어리스 - 바디 투 바디 - 감옥 - 아크로바틱 - 악숀 - 무우비 버젼으로 변형하면 < 판옵티콘 > 이 된다. 

 

판옵티콘이란 원형감옥 core에 위치한 높이 솟은 탑의 감시창에서 감시자가 죄수들을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pan은 < 모두 >, optic은 < 본다 > 는 뜻이니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요즘 불티나게 팔리는 차량 블랙박스 " 다본다 " 라고 할까 ?  판옵티콘은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사회학자 토마스 마티센'은 현대의 감시 체제'가 판옵티콘에서 시놉티콘'으로 이동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체제 " 에서 " 다수가 소수를 주시하는 체제 " 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신상털기 " 가 좋은 예'이다. 옛날에는 선그라스 낀 7급 공무원이 < 그 짓 > 을 하더니 이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 그  짓 > 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감시하면도 동시에 감시당한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요, 파놉티콘 수감자이면서 빅브라더'이다.

 

a를 b가 감시하고, b를 c가 감시하고, c는 a가 감시한다. 21세기 디지털 시민 사회에서 시민은 자경단 역할을 자임한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선그라스를 낀 특수 요원을 파견하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흘린 정보를 기관은 그저 수집할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소비하는 형태 : 전화 통화, 검색어 기입, 이메일, 신용카드 기록, 페이스북 좋아요 클릭 유형, CCTV, 동의서 작성 행위는 온갖 개인 정보를 타인에게 공개하는 꼴이 된다. 문제는 이 정보'가  쉽게 털린다는 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접근 가능한 투명성은 이제 공포로 다가온다. 한병철은 < 투명사회 > 에서 투명한 사회는 신뢰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감시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 '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 ' 라는 구호는 사실 '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 ' 로 바뀌어야 한다. ( 98쪽 ) " 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불투명성'이 필요한 사회라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한병철이 말하는 " 투명성 " 은 잠금 장치는 있지만 커튼이 없는 투명한 창문과 같다. 잠금 장치가 있다고는 하나 커튼이 없으니 속이 속속들이 다 보인다. 비밀은 쉽게 폭로된다. 사실 < 알 권리 > 보다 중요한 것은 < 알려지지(보이지) 않을 권리 > 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알려지지 않을 권리는 무시한 채 알 권리만 강요한다. 소비자는 무조건 약관에 동의해야 한다. 당신이 약관에 동의한 정보는 장사꾼들에게 팔린다. 장사꾼이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면 신음소리뿐이다. 오르가슴 시 당신은 아, 소리를 내는지 오, 소리를 내는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애, 매모호한 소리를 내는지 그 사실만 모를 뿐이다.  

 

 

세월 호 침몰 사고 보도를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언론은 " 알 권리 " 를 내세워 지나치게 피해자를 벌거벗긴다. 그것은 폭력이다. 거리 두기'를 무시한 카메라는 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 타인의 고통은 " 은 기사에 실려서 " 클릭 " 된다. 그리고 클릭 수에 따라 수익이 창출된다. 전형적인 어뷰징'이다. 세월 호를 보도한 카메라는 영화 < 피핑 톰 / 마이클 파웰, 1960 > 에 나오는 살인 카메라 장치'다. 카메라는 찍는 게 아니라 찌른다 !  한병철은 과잉(포지티브)에 대항하기 위해서 결핍(네거티브)를 옹호한다. < 투명사회 > 에서 보여주는 문제 인식은 곧 전작인 < 피로사회 > 와도 일맥상통한다.  피로사회와 투명사회 속 구성원들은 모두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피가학적 이상 행동을 보인다. " 아이구야, 아프구나 ! " < 피로사회 > 가 행복에 대한 강박에 시달려서 스스로를 피로하게 만들었듯이,

 

< 투명사회 > 인 디지털 판옵티콘 시대는 불특정 다수와 커뮤니케이션(친밀성)를 맺기 위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폭로해서 시장에 내놓는 이상한 사회'로 발전했다. 공유하지 않으면 우정 따위는 없어.   원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디지털은 가상의 창문(원도우)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 커튼이 없다는 가정에서 ) 창문은 문과는 달리 닫아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다. 그러므로 원도우 체제는 잠금 장치가 없는 문보다도 더 투명하다. 여기에는 오로지 노출과 관음만 존재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54년에 만든 위대한, 위대한, 위대한, 위대한 걸작 < 이창 / rear window > 은 21세기 디지철 창문(윈도우)의 세계를 적확하게 예언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은 많으나 자세한 내용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 이창 / rear window > 를 통해서 개인의 사생활이 실시간으로 노출된다면, 21세기  " digital window " 는  이제 트위터, 블로그, 페이스북이 되어 실시간으로 온갖 정보를 제공한다.  어제 타임라인을 엿보니깐 어떤 새끼는 지금 자신이 똥싸고 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남기더라 ! 똥을 몇 가닥으로 나눌지 고민이라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말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폭로해야지만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영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 rear > 은 < real > 과 형태상 유사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 햄릿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R이냐 L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 내 귀에는 rear이나 real 모두 [ríər] 로 들린다. ) 우리는 디지털 윈도우 세계'가 " real " 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 rear "다. 그러니깐 디지털 원도우는 실제가 아니라 욕망을 배설하는 뒷간(rear)에 불과하다. 

 

< 깃발 > 은 사람이 눈으로 직접 < 바람 > 을 볼 수 있도록 고안한 발명품이다. 엘리어트 카네티가 한 말'이다. 만약에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필요 없는 물건이다. 가까운 미래에 당신이 화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나 깃발 따위는 가지고 가면 안 된다. 그곳에는 바람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바람은 선-존재이고 깃발은 후-존재이다. 창문과 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창문이 없는 건물은 있을 수 있지만 문이 없는 건물을 있을 수 없다. 깃발이 휘날린다는 사실은 바람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제공하듯이, 창문이 있다는 사실은 그 건물에 반드시 문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선-존재는 문이고, 창문은 문을 위해 존재하는 후-존재'다.

 

현대 사회는 창문( 알 권리와 투명성 역할)의 개방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문( 보이지 않을 권리와 불투명성 역할)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이다. 비밀을 보장하는 문이 없다면 창문이 아무리 전망 좋고 투명하다 한들 무슨 의미랴. 창문은 있으나 문이 없는 건물은 기형적 구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은 선-존재이고 창문은 후-존재'이다. 부정성의 철학자 한병철은 이 책에서 창문이 가지고 있는 포지티브'보다 문이 가지고 있는 네거티브에 주목한다.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와 함께 마들렌을 권했다면 나는 < 투명사회 > 와 함께 영화 < 이창 > 을 권한다.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 좋은 궁합 아닌가 ?

 

 

 

 

 

덧대기 : 이 책은 철학 에세이'이지 철학서'가 아니다. 철학서에 촛점을 맞추면 내용이 아쉽고, 에세이로 보자면 충분하다. 나는 이 책을 에세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 2014-04-2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투명성의 방향이 완전 뒤집혀 거꾸로 된 세상이에요. 또한 그 방향이 제대로 잡힌다한들 말씀대로 문이 없으면!

여튼 요즘 곰곰발님 성정에 맘고생 몸고생 많으셨을 줄 압니다. 건강 챙기시길.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7 05:41   좋아요 0 | URL
새벽 님 오랜만이군요. 국가적 재난이고 국가적 애도 기간이죠. 어처구니없는 일을 매년 봅니다.
변하는 것은 없고 답답하군요....

마립간 2014-04-2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베란다의 큰 유리로 된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필요한) 미닫이 ; 창일까요. 문일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7 05:40   좋아요 0 | URL
당연히 창입니다. 큰 창입니다. 문의 기본적 성격은 불투명성이죠. 문은 무조건 안이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수다맨 2014-04-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 한동안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요즘 이 정권 하는 짓 보고 있으려니 정나미가 다 떨어져서요. 사악한 것을 넘어 이제는 무능과 허위의 극치로 가는 것 같더군요. 이런 인간들이 위정자라니 이제는 한숨만 나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8 12:29   좋아요 0 | URL
분노 이런 거 보다는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냥 죽이고 싶습니다. 분노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생각함'이 있기에 가능하지만.... 선원들보다 더 얄미운 것들이 있죠..

만화애니비평 2014-04-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 덧글이 없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8 13:22   좋아요 0 | URL
알라딘은 덧글 확인이용이하지가 않습니다. 사랑을 전합니다.

rendevous 2014-05-12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인훈의 시대만 해도 남한은 밀실이었는데 이거야 뭐... 순결한 전자광장이여!

곰곰생각하는발 2014-05-12 10:37   좋아요 0 | URL
최인훈이 바랐던 것은 광장 그러니깐 열린 사회'였죠. 그런데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열린 구조에 의한 개인 침해가 문제가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