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내가 지킨다잉!
9.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어벤져스
아버지는 성탄절이 되면 " 오리온 과자 종합 선물 세트 " 를 사 들고 오셨다.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온갖 주전부리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어서 기뻤지만 이내 동생과 나눠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했다. 사탕 네 개를 고를 것인가, 아니면 껌 한 통을 고를 것인가 ?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선택은 그리 합리적인 소비 형태'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자 속 과자들 대부분은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잘 팔리지 않는 제품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재고 정리'였다. 차라리 그 돈으로 내 입맛에 맞는 과자를 맘껏 고르는 게 낫다. 영화 < 어벤져스 > 를 보면 오리온 과자 종합 선물 세트 같다. 뚜껑을 열면 그 안에는 아이언맨,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호그 아이 따위가 진열되어 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했던가 ?
영화는 끊임없이 볼거리를 제공하며 관객에게 " 딴생각 " 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블록버스터'가 지향하는 미덕이니깐 말이다. 어어, 하다가 와와, 하며 박수를 치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2시간 동안 반응했다는 사실에 바보가 된 느낌이 든다. 관객을 바보로 만드는 이들이 서울에 입성했다. 보아 하니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들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모양이다. 이에 슈퍼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고 결국에는 찬란한 태양이 지구를 비추리라( - 뭐, 이런 내용이겠지 ? ) 서울 시민이여, 폐허가 된 도시는 걱정할 필요 없다. 악당들이 신나게 때려부순 마포대교와 63빌딩은 이명박에게 맡기면 된다. 요즘 그 양반, 한가하니깐 말이다.
대만 감독 차이 밍량이 이런 소리를 했다. "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좋은 영화는 자신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 이 말에 무릎 탁, 치고 아, 했다. 맞는 말이다. 슈퍼히어로는 스케일이 " 큰 재앙 " 에만 관심을 보인다. 뱁새들 노는 마당에 백로가 놀 수는 없다는 태도'다. 그들은 세계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두 주먹 불끈 쥐며 세계 치안'을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뿡뿡 치지만 자국 내 치안 문제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그들 안마당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거창하게 세계 치안 따위나 걱정하니 하는 꼴이 가관이다. 마블 슈퍼 히어로들은 " 작은 재앙 " 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 큰 재앙 " 에만 관심을 쏟는다. 총기 난사 사건 따위는 지구 종말 사건에 비하면
얼마나 째째하고, 꾀죄죄하며, 옹졸한 사건인가. 김수영은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라는 시에서 옹졸한 짓만 골라서 하는 자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폼 나는 짓만 골라서 하려는 지식인의 지적 허세를 은근히 지적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이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누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마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이 시에는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따위는 없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겨겨겨겨격정 신파도 없으며, 왜 사냐는 질문에 그냥 웃는, 동문서답도 없다. 시인은 날것 그대로인 일상을 마음 속 검열 없이 폭로함으로써 " 시인 " 이라는 낭만적 가객 이미지를 낱낱이 부순다. 그는 김지하처럼 투사도 아니며 서정주처럼 절대 미학을 탐하는 자도 아니다. 그저 갈비에 기름덩어리만 잔뜩 붙어 나오길래 화딱지가 나서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며 먹거리 엑스 파일에 제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시인이 있을 뿐이다. 이게 무슨 시인인가 !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시인이 쪽팔리게 닭벼슬도 벼슬이라고 구청 직원이나 동회 직원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애먼 야경꾼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적어도 그는 양심을 팔지는 않았다. 김수영은 쪽은 팔더라도 양심은 팔지 않은 시인'이었다.
다시 한번, 차이 밍량'을 인용하자면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 척하는 " 영화이고, 좋은 영화는 자신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쪽은 팔아도 된다. 째째하게 굴어도 된다. 어깨를 쩍 벌릴 필요도 없다. 양심만 팔지 않으면 된다. 오늘도 서울 한복판에서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어벤져스 팀에게 딱 한마디만 하고 싶다. " 너나 잘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