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와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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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 강.신.주 " 라는 이름이 자주 보였다. < 감정 수업 > 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책을 좀 읽는다 하는 알라디너들에게는 필사의 목록'처럼 보였다. 인문학 서적이 인기가 좋으니 반길 만했다. 이래저래 구미가 당기는 책'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한 때와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 에티카 > 를 먼저 읽고 나서 < 감정 수업 > 을 읽어야 하는 게 순서에 맞을 것 같아서 < 에티카 > 를 읽기 시작했는데, 아... 맙소사 ! 그동안 축적한 내 독서 편력 가지고는 스피노자를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 같아서 읽다가 접었다. 기억나는 문장이라고는 " 이로써 이 정리는 증명되었다 " 밖에 없었다. < 에티카 읽기 >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당연히 < 감정 수업 > 을 읽을 기회 또한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나는 틈틈이 강신주 강연 동영상'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강신주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강연 속 철학자'는 철학자'라기 보다는 약장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용옥을 벤치마킹한 것 같다는 느낌 ?! 그는 철학을 가지고 인생 상담을 하고 있었다.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 의 철학 버전이요, 점집의 우아한 변형이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마침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표에 가깝다. 끝말잇기처럼 말이다. 철학이란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지 답을 제시하는 수학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법륜 스님처럼 즉문즉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항상 "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 " 고 말했는데 이 말은 마치 걸리버'가 거인국에서 빨간 핸드마이크를 들고서 " 거인'을 거부해야 된다 ! "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본주의가 병들었다고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 있을까, 한국 정치가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정치를 거부해야 옳은가 ?
더러운 자본주의, 조까라 ! 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통쾌할 수는 있지만 실천 불가능한 것을 두고 저리 쉰소리를 하면 유니버셜을 넘어 아스트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강신주가 립서비스'만 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 냉장고를 없애라 > 는 주장이다. 나는 이 말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왜냐하면 냉장고가 대형 용량으로 바뀌면서 겪게 되는 병폐를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대형 김치 냉장고를 포함해서 총 3개의 대형 냉장고를 가지면서 냉장고를 꽉꽉 채우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김장 김치의 90% 는 버렸고, 냉동실에 갇힌 온갖 식품들은 봄만 되면 폐기처분되어야 했다. 냉장고 용량이 잘못된 소비 습관을 양성시키는 주범이다.
그런데 강신주가 말한 " 냉장고와의 전쟁 선포 " 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는 "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 경향일보, 칼럼 " 고 주장했는데 이 선동은 자본주위에 대항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냥 그 흔한 절약 정신'일 뿐이다. 새마을 운동 버전으로 말하자면 근면, 성실, 절약 정신을 생활화하자는 것이고, 서구 버전으로 말하자면 청교도 윤리(protestant ethic) 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이미 칼뱅이나 루터'가 나태와 사치는 악덕이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 단테의 < 신곡 > 에 나오는 7가지 대죄 가운데 하나가 " 탐식 " 이라는 점은 이미 자본주의 이전부터 낭비'를 악덕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강신주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려온 캐캐묵은 윤리'를 마지 자본주의와 대항할 무기'라고 소개하는 꼴이다.
자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인류 공생을 위한 필수인 것이다. 냉장고를 없애면(용량을 줄이면) 자본주의는 붕괴하는가 ? 애꿎은 DIOS를 파산시킬 수는 있어도 CAPITAL를 붕괴시킬 수는 없다. 최근 타임 라인'을 뜨겁게 달구는 내용이 하나 있다. 강신주가 중앙 선데이'에 쓴 글인데 다음과 같다. " 노숙자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다. 그래서 간혹 노숙자는 강시 혹은 좀비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 중앙선데이, 강신주의 감정 수업 : 치욕 또는 수치 中 "
이 문장에 대한 비판은 이미 뜨겁게 타오르고 있으니 내가 굳이 나설 일은 아니지만 강신주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하고 싶다. 이것은 비판도 아니고 비난도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서울역 앵벌이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러미널이라는 감기약을 한번에 20알 정도씩 삼켰는데 앵벌이를 하기 30분 전에 삼키고는 했다. 그들에게 들은 바, 약 기운은 대개 1,2시간 정도 지속된다고 했다. 환각 말이다. 약을 다량으로 삼키면 눈이 풀리고, 앉은뱅이처럼 주저앉게 된다. 그리고 심하게 침을 흘린다. 그 상태로 전철 안에서 구걸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부작용은 만만치 않다. 뼈가 썩는다. 내가 하도 답답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야, 이 등신들아 ! 구걸하더라도 맨정신으로 구걸해라. 약 빨다가, 이게 뭔 짓이냐. 쪽팔리지도 않냐 ? "
그런데 앵벌이는 내 예상을 깨고 이런 말을 했다. " 아놔.... 그러니깐, 쪽팔리니깐 쪽팔리지 않으려고 먹는 거예요. 맨정신으로 어떻게 전철 바닥을 기면서 앵벌이를 합니까. 쪽팔리니깐, 근데 약 ... 먹으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아는 사람 마주쳐도 난 모르니깐, 안 쪽팔리니깐 먹는 거예요. " 그렇다, 그들은 쪽팔려서 약을 먹고 일을 나간 것이었다. 강신주는 노숙자들이 자존심(수치심)을 못 느껴기에 좀비'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숙자는 그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지 수치심을 몰라서 아랑곳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누드를 선 모델은 구경꾼들의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지만, 1000번 넘게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은 모델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데 강신주는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을 마치 수치심을 몰라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말한다.
강신주의 논리대로라면 패션쇼 무대에서 토플리스 차림으로 당당하게 워킹을 하는 모델들은 모두 수치심을 모르는 좀비 같은 인간이 된다. 강신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노숙자가 왜 생기는 줄 아세요 ?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화된 교육을 받는데, 전문화된다는 것은 그 일 외에 다른 일은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전문 영역에서 일할 자리를 잃게 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 여기가 그가 하고 싶은 말 테엽 감는 시계는 수많은 톱니바퀴 부품 중에서 아주 작은 부품 하나가 없으면 전체가 멈추지만 자본주의는 부품 하나가 없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노숙자가 생기는 이유는 작은 톱니바퀴를 대체할 가용 자원(톱니바퀴')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자리'가 없기에 생기는 사회 현상인데 강신주는 느닷없이 수치심 운운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나쁜 것'으로 규정했는데 자본주의란 말 그대로 돈(資)이 기본(本)이 되는 체제(主義)이다. 그렇다면 노숙자'라는 계층'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가촉천민 취급을 당하는 무리'이니 노숙자는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약자'가 된다. 결국 노숙자는 자본가의 반대편에 있는 진영이 된다. 여기서 내가 노숙자를 자본가와 싸우는 투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 노숙자 " 는 자본주의적 가치 때문에 불가촉천민으로 추락한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강신주는 입으로는 < 자본주의 조까라 > 를 멋지게 외치면서 정작 자본주의적 가치 때문에 불가촉천민 취급을 당하는 노숙자'에 대해서는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이것은 명제논리 모순'이다.
자본주의 조까라, 라고 외치던 사람이 정작 한다는 소리가 자본가들이 내뱉는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돈 없고 집 없어서 노숙을 하는 인간에게 과연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라고 명쾌하게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 노숙자 = 좀비라는 사고는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시선이 아니었던가 ? 그는 지금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는 꼴이다. 그렇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