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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 싫어요 > 버튼이 없는 이유.
< 침묵의 나선 이론' > 이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궁금하신 분은 직접 찾아보시라.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사회적 찬반이 갈리는 블로그 글에 첫 번째 방문자가 덧글'을 달았다고 하자. 그는 일단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최초의 의사 표시자'이기 때문이다. 내 글에 심사가 뒤틀린 그는 다음과 같은 덧글을 남긴다. " ㉠ 곰곰발, 등신 ! 한심하다, 한심해 ! " 두 번째 방문자 또한 첫 번째 방문자와 의견이 같아서 첫 번째 덧글에 동조하는 글을 남긴다. " ㉡ 맞아, 꼴에 사내랍시고 으르렁거리기는... 쪼다 새끼 ! " 그런데 세 번째 방문자는 이들과 의견이 다르다. 그는 곰곰생각하는발'을 옹호하고 싶지만 트러블메이커'가 되고 싶지는 않다.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그는 덧글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진다. 첫 번째 침묵이다.
네 번째 방문자도 욕설로 도배가 된 덧글에 반대하지만 세 번째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침묵한 후 그냥 나간다. 이번엔 다섯 번째 방문자가 들어온다. 그가 보기엔 주인장 곰곰생각하는발은 평소 재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 덧글을 단다. " ㉢ 이 새끼 ! 너희 나라로 돌아가 색휘야 ! "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첫 번째 올라온 덧글의 주장이 대세'가 된다. 비록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침묵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아도 그것은 소수가 되고 오히려 숫자가 더 작은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경향이 있다. 조중동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송할 것이다. ■ 조선일보 : 곰곰생각하는발 ! 알고 보니 등신 ! 네티즌에게 무차별 난타 ! ■ 중앙일보 : 점입가경, 곰곰생각하는발, 여론에 뭇매 ! ■ 동아일보 : 곰곰생각하는발 사태 일파만파, 제 2의 마녀사냥 되나 ?
1%의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경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의 소수가 다수가 되는 이유는 재벌들이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워에서 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천문학적이라며 파업할 때마다 재벌 언론에서 그 기사를 송출하면 그 메시지가 다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자신의 의견이 소수일 때는 소수 의견을 감추고 다수 의견일 때에만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심리가 바로 < 침묵의 나선 이론' > 이다. 쉽게 말하면 대중은 머릿수에 민감하다는 결론이다. 대중이란 옳고 그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쪽수에 따라 움직인다.
몇 년 전에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포장마차 주인이 요즘 경기가 최악이라며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다. 설상가상 포장마차 하나가 더 늘어서 장사가 더욱 안 된다는 소리도 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매출의 20%를 올릴 수 있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알려드릴 테니 안주 서비스'로 달라고 했다. 리트리버의 귀처럼 축 늘어진 주인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세워졌다.
- 뭐요, 총각 ?
- 의상실 가셔서 마네킹 몇 개 얻어오세요. 아님 고물상 가서 사오시던가 말이죠. 흠흠...
- 마네킹 ? 그게 매출 하고 무슨 상관이람, 총각 ?
- 저녁이 되면 십오촉 알 전구 불 켤 때 같이 마네킹을 의자에 앉히면 매출 20% 상승 보장합니다.
- ??!
- 사람들 심리가 포장마차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보다는 안에 사람이 있는 곳에 가려는 심리가 있잖아요.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포장마차 안에, 식당 안에 손님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적 정보'를 제공한다. 반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면 긍정적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식당 안에 있는 손님은 음식의 맛에 동조하는 덧글 하나'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두 개의 덧글이고, 세 사람은 세 개의 덧글이 된다. 결국은 대세가 된다. 이처럼 시각 정보는 맛 정보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텅 빈 상태로 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마네킹을 세워 두면 밖에서 보기엔 네다섯 명의 손님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다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찾아가겠는가 ? 하여튼 결론은 서비스 안주'를 받았다는 훈훈한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다. 내 블로그 글에 반대 의견은 하나도 없고 찬성 의견만 주르륵 달렸다고 해서 내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그냥 침묵의 나선 이론에 따라서 침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자신의 사진을 걸어둔 포스트'에 달린 덧글에 < 예뻐요 > 라는 멘트가 포도처럼 주저리 주저리 달렸다고 해서 자신이 정말 예쁘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 식사하셨어요 ? " 라고 묻는 상투적 질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잠시 매력 있다는 말에 혹한 적이 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라는 단순한 성의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여자에게 매력 없는 놈은 글이나 지식으로 유혹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잘생긴 놈은 얼굴로 승부한다. 글 잘 쓰는 남자, 믿지 마라. 팔 할이 병신이다.
페이스북의 < 좋아요 > 버튼은 있으나 < 싫어요 > 버튼은 없다. 네이버 블로그도 < 공감 > 버튼은 있으나 < 퍽유 > 버튼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내 블로그에 용기를 내서 내 얼굴이 담긴 사진 한 장 올렸더니 공감 버튼은 안 누르고 < 퍽유 > 버튼만 300개'가 달렸다면 블로그 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 아마도 당장 블로그를 닫고는 이불 뒤집어쓰고는 징징거렸을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네이버 쪽에서는 엄청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 싫어요 > 없는 < 좋아요 > 이고, < 퍽유 > 없는 < 공감 > 기능이다. 공감'은 그러니깐... 당신을 위해 고안한 칭찬 시스템이 아니라 거대 공룡인 포털'이 이용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고안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에 공감한다면 알라딘 < 공감하기 > 버튼'을 눌러주세욧.
장담한다. 밑줄 친 문장'을 읽고 공감을 누르지 않은 철면피'가 누가 있으랴. 누구는 재미있어서 누를 것이요, 누구는 어이없어서 누를 것이요, 누구는 남들 다 누르니깐 누를 것이다. 아, 대중이란 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휩쓸리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