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한민국 < 국민 > 입니다. 종종 누군가는 < 시민, 여러분 !> 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 짐꾼 > 혹은 < 지게꾼 > 이라고 부릅니다. 제 직업은 7성급 호텔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지게에 이고 나르는 일을 합니다. 호텔은 절해고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동차나 케이블카 혹은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물품을 수송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궂은 일을 우리 같은 늙고 배우지 못한 가난한 짐꾼들이 합니다. 동종업계 사람들은 우리를 < 소금장수 >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여름 산 정상을 향해 짐을 지고 나르고 나면 소금기가 베인 땀이 마르면서 소금 백태’가 옷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죠.
호텔에 근무하는 호텔리어들은 우리를 < 밀가루부대 > 라는 말로 경멸 섞인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손가락이나 턱으로 내려놓아야 할 곳을 지정해 줄 뿐입니다. 그래도 어쩐답니까. 힘은 들어도 이삿짐 센터’에서 하루 일한 품값보다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으니 죽기살기로 오를 뿐입니다. 마누라 약값이라도 벌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어야 합지요. 오늘 제가 절해고도에 위치한 7성급 호텔에 납품해야 할 물품은 생수3000개’입니다. 한 번 오를 때 평균 물품의 무게는 70KG입니다. 갯수로 따지면 생수 200개 정도죠. 오를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답니다. 그래도 남들은 돈 내고 등산을 하는데 저는 돈 받고 등산을 하는 꼴이죠. 허허허.
- 어느 지게꾼의 편지 中
눈물은 왼손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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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시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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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감기처럼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다. 우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울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공감’이라고 말한다. 눈물 바이러스 포자‘는 당신의 뇌하수체를 타고 간뇌와 소뇌’를 감염시킨다. 발현 속도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가장 무서운 전염 속도'다. 하지만 인간은 이 무서운 눈물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한 신약을 개발하거나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지는 않는다. 눈물’은 많은 면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병원균‘이다. 전염성이 강한 눈물이 없었다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에 공감 할 수 없었을 것이며, < 폭풍의 언덕 > 에 나오는 광기 어린 히스클리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동이란 녀석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낯선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눈물, 은 필요하다.
속초에서 나는 여러 죽음‘과 마주쳤다. 모두 가난하고 비루한 죽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결말이 훤히 보이는 상투적인 드라마와 같아서 그들의 마지막 회’는 해피엔딩이 아닌 해피 엔드'로 끝났다. 가장 슬픈 죽음‘은 공교롭게도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부고‘였다. ( 나중에 기억을 더듬었더니 딱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 안양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속을 밝힌 형사‘는 현 거주지를 상기시키며 이 주소‘가 당신이 살고 있는 주소가 맞냐며 물었다. 당시, 나는 전셋집’을 비워둔 채 속초‘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그 주소가 현 주소지’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박**를 아십니까 ?
- 모릅니다.
- 정말 모르십니까 ?
- 네, 그런데 왜 그러시죠 ?
- 박** 씨‘가 죽었습니다.
- 박** 씨'라 ?! ......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곰곰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 모르는 사람입니다.
- 박** 씨가 행불처리되기 전‘에 마지막 거주지’가 지금의 당신 주소‘로 되어 있습니다.
주소 이전을 안 했더군요. 그러니깐, 박** 씨와 곰곰생각하는발 씨’는 혈연 및 동거 관계‘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 네,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서류상 착오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 아... 아... 잠시만요 !
- 왜 그러시죠 ?
- 사망 원인‘은 뭔가요 ?
- 아사입니다. 노숙 생활을 했더군요. 아사와 동사가 겹쳤습니다.
장례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가족과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구멍가게 계단에 앉았다. 바람은 칼처럼 벼린 바람이어서 내 뺨을 때릴 때마다 강한 통증을 동반했다. 비로소 그 사람 이름이 낯익은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끔씩 내가 살던 주소로 날아오던 재판 관련 서류와 재산 압류‘를 통보하는 서류봉투에서 그 이름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나는 그 우편물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는 했다. 내가 안양 반지하 셋집'으로 집을 보러 갔을 때에 집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계약이 이루어진 날에 집주인은 내게 열쇠를 주면서 원래는 월세방이었으나 전 세입자가 말썽을 부려서 전세로 돌린다며 투덜거렸던 기억이 났다.
이리저리 조각을 짜맞추니 전 세입자는 이사를 간 것이 아니라 월세가 밀려서 강제로 집을 비운 것이었다. 그 집을 내가 들어가 살게 된 것이었다. 지난 일들을 다시 꼼꼼하게 되짚어보니 나는 그와 마주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주인 몰래 찾아와서 쌓아둔 우편물을 찾아갔다. 철문 앞에 선 그는 형색이 초라한 몰골이었다.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길래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낡은 현관 철문 앞에서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한 후 밤 고양이'처럼 뒤꿈치'를 들고 사라졌다. 그 어깨가 기억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늦겨울, 언 수도'가 이른 봄볕에 녹아 느닷없이 녹물을 쏟아내듯이 눈물이 났다. 서류상이었지만, 그래도 그와 나는 동거인'이 아니었던가.
그가 살던 방에 박힌 못을 빼고, 그 구멍을 지우기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다.
나의 얼굴 없는 동거인,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부엌이 딸린 싱크대가 놓인 거실에서 따스한 밥을 지었을 한 때. 문득 그가 못질을 했던 안방'이 생각났다. 키를 맞춰 못을 나란히 네다섯 개 박은 모양새로 보아 옷걸이 대용으로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선명한 가난이 보기 싫어서 이사 하자마자 그 못들을 뽑은 적이 있다. 옷걸이 하나 없는 가난한 삶.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볕이 들던 방에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 ? 빠르게 편집된 영상처럼 그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쳐갔다. 스치듯이 지나간 것이 전부인 인연이었지만 묘하게도 아주 낯익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날, 속초 동명항 방파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굶어서 죽은 남자'를 생각했다.
첫 잔은 예의‘를 갖춰 원을 그린 후 바닥에 뿌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극락정토, 꽃피는 봄이 오는, 일 년 내내 꽃피는 그곳으로 가시라. 문득 그 사내는 왼손잡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재주도 없고, 사기 쳐서 등골을 빼먹는 말재간'도 없으며, 넉살'조차 없는 사회 부적응자'였던 그는 왼손잡이'였다. 오른손잡이'는 칼을 쥘 때 오른손에 쥐고, 왼손잡이는 칼을 쥘 때 왼손에 쥐는 법. 그러니깐 그가 오른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칼을 왼손에 쥐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날 이후로, 왼손잡이'를 볼 때마다 굶어서 얼어 죽은 사내'를 떠올렸고 그럴 때마다 그 사내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나는 왼손잡이'를 만나기만 하면 눈물이 찔끔 났다.
그때부터 내 몸속에 있는 눈물은 왼손잡이'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 또한 왼손잡이'가 아니었던가 ! 어쩌면 왼손잡이에게 느끼는 연민은 나를 향한 자기연민'이었을 것이다. 함민복 시인은 터지는 눈물을 삼키며 눈물은 왜 짠가, 라고 묻는다. 내게는 그리 난처한 질문은 아니다. 가난한 몸은 몸 전체가 염전이다. 소금장수의 등골에서는 소금이 베이고, 가난한 시인이 흘리는 눈물은 짠물이다. 칠장이'였던 내 아비의 몸도 짜디짠 염전이었다. 나는 한때 한여름이면 등에 퇴적층'처럼 쌓이던 아비의 소태'를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다. 빛과 소금이라 했던가 ?
내 아버지가 책 읽는 선비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 아들아, 좋은 소금을 만드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란다. 한줌의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태산 같은 땀을 흘려야 한다. 눈물을 참으면 땀이 되고, 땀은 소금이 된단다. 설탕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으나 소금은 인간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 부자의 몸에서 나는 달큰한 냄새를 부러워 마라. 가난한 소금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 하지만 배움이 부족했던 아비'는 근사하게 말하는 방법을 몰랐다. 이제는 안다. 등골에 퇴적층처럼 쌓인 소태'를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