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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평점 :
가족의 힘
류근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가죽의 힘 : 죽으러 갑니다.
무악재 오르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수상한 가게가 달랑 하나 있었다. 이곳은 상가 밀집 지역도 아니였고 주거 지역도 아니었다. 무악재'라는 이름이 정보를 제공하듯이 가파른 언덕 길 위에 조그마한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을 뿐더라 그 근처에 사는 사람도 없는 그런 황량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가게 하나가 생긴 것이다. 나는 이른 아침이면 날품을 팔러 버스를 타고 도시로 떠날 때마다 그 가게를 지나쳐 갔는데, 가계 이름이 " 모두가 죽으러 " 였다. 모두가 죽으러? 모두가 죽음으로 ? 모두가 죽으러 간다?!
■ 재 : 길이 나 있어서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 [ 비슷한 말 ] 영(嶺)
가게 유리 창은 검은 선팅을 했기 때문에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을 뿐더라, 버스가 이 가게가 있는 도로를 지날 때면 워낙 빠르게 질주했기 때문에 얼핏 스치듯이 보는 것이 전부였다. 장의사인가 ? 그러다가 어느 날 자세히 보니 모두가 죽으러'가 아니라 모두가 죽으로'였다. 아하 ! 그래. 죽 전문점이야. 죽 전문점 ! 버스 안에서 자세히 볼 틈도 없이 버스는 휑 하니 달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 죽 한 번 먹으려고 이 꼭대기까지 오르다간 먹고 내려가는 데 배가 다 꺼지겠군. 흠흠.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가게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홍제역에 내려서 걸어서 무악재 꼭대기까지 갔다. 자세히 보니 공방'이었다. 가죽 공예 공방 ! 그러니깐 이 가게의 간판 이름은 < 모두가 죽으러' > 도 아니고 < 모두가 죽으로' > 도 아니고 < 모두 가죽으로' > 였다. " 손님, 여기 있는 제품은 모두 소가죽입니다. 시중에 나도는 가죽 제품과는 달리 여기 가죽은 천 번의 무두질로 완성된 제품입니다. " 공방 주인인 듯한 젊은 분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 아, 네에....... " 빈 손으로 나오기 뻘쭘해서 작은 동전지갑'을 하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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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우던 남편이 애인에게 차이고 돌아온다. 서러워서 펑펑 울자 아내가 남편의 둥근 어깨를 토닥거리며 술상을 차린다. " 여보, 이 세상에 널린 게 그런 년들이라오. 하루 정 품고 떠나는 하루살이'들이에요. 다음에는 차차'를 배워보아요. 슬로우 슬로우 퀵 퀵. 끌어당길 땐 젖가슴이 빠개지도록 젊은 년 허리를 확 당기라구요. " 아내가 술을 따르며 바람난 남편을, 그것도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하는 남편을 위로한다. " 향숙이, 그년.... 빠개질 젖이라도 있습디까 ? 다이어트 하네, 뭐 하네.... 축 쳐진 당신 가슴보다 볼륨 없다요. " 아내는 남편의 쪼그라진 번데기'를 보며 속상해 한다. 한때는 단단했던, 딱딱했던...
설상가상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배운 아빠 힘내세요, 를 부르면서 하트 빵 빵'을 열심히 날린다. 속사정을 모르는 " 지나가는 관객 1,2,3 " 은 가족의 화목에 허허허 웃는다. 좋구나, 가족의 힘이란다. 밖에서 보면 화목이요, 안에서 보면 수목(드라마)이다. 막장이란 뜻이다. 이게 다 오해에서 비롯된 풍경이다. 시 < 가족의 힘' > 은 바로 착각이 만들어내는 넉넉한 풍경을 다루고 있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잘난 척하는 세상에, 가족은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 뻔데기'를 응원한다. 아내는 남편의 삑사리'를 눈 감아 주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부르다가 만 삑사리를 대신 부른다. 그것도 러브 하트 핑크 에코 빵 빵'을 날리면서 말이다. 태진아 노래방 연주기'라도 있었더라면 " 어디서 좀 놀아보셨군요 ! " 라는 극찬을 받았을 법하다.
가족과 가죽의 공통점은 질기다는 것이다. 천으로 만든 옷은 찢어지면 버리게 되지만, 가죽으로 만든 제품은 지겨워서 버리게 된다. 기타노 다케시의 말을 빌리면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은 구성원'이다. 지긋지긋한 것이다. 이처럼 가족과 가죽은 의외로 닮은 구석이 있다. 다만 가죽은 지겨우면 버릴 수 있지만 가족은 지겹다고 버릴 수는 없는 존재다. 신파나 통속이라는 말도 사실은 가죽'처럼 질긴 것에 대한 조롱이 아니었던가. 질기다는 것은 지겹다는 말이다. 뻔하다는 말이다.
시집 < 상처적 체질 > 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상투적이며 통속적인 이미지로 꾸며진 시집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 상처的 " 이라는 번역투를 과감하게 끌여들여서 시에 통속성을 부여한다. ( 상처적 체질'이라는 표현은 비문이다. 문법적 오류라는 말이다. 시인이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의도적인 배치이다. ) 가장 흔한 먹물 어투 가운데 하나가 < ~ 的 > 의 남발이 아니었던가. 꼰대에 대한 체질적 혐오'가 엿보인다. 가볍게 읽기에 좋은 시다. 그렇다고 가벼운 시집'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