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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108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9월
평점 :
읽을 수 있을까,의심하며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이렇게 방대한 지식으로 결집된 책을 과연?..펼쳐든 책은 이미 서문에서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실은 무척 읽고 싶었던 책이었나 보다.서문에서 이미 이렇게 심장이 제어 불가능이라니! 하지만 읽어 나가는 동안은 책의 두께만큼 묵직하게 읽혔다.
책을 덮고 나니 갑자기 '나'란 존재감에 대해 다시 들여다 보게 된다.나의 모든 것을 들켜 버린 듯한 느낌도 들어 보부아르란 여성의 통찰력의 깊이감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 힘들다.
그리고 현재 50 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40 후반의 나이가 아닌 20 대에 이 책을 읽었었더라면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닌 좀 더 다른 내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생긴다.왜 그때 나에게는 이런 책이 있다고 권해 주거나 또는 진보적인 여성상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이 없었을까!!!!
충고해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시절 나도 책 읽을 시간 없을 정도로 그저 놀기 바빴으니...요즘 들어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한 회한이 밀려 오는 구나!! 젊은 사람들은 시력 좋을 때 많은 책을 읽었으면 싶고, 느꼈으면 싶다. 특히나, 젊은 여성들이라면 꼭 '제2의 성'을 읽어보았으면 부탁드리고 싶다.어쩌면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기혼 여성이다.결혼이란 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결혼을 했다.남편을 20 살에 만나 교제를 시작했던 탓으로 독신이란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주변에서 때가 되었다고 하니 결혼을 해야 되나 보다 싶어 결혼을 했고,주변에서 또 때가 되었다고 하니 당연히 애를 낳아야 하는 것인 줄 알고 낳았고,그래서 세 아이 엄마가 되었다.그게 순리인 줄 알고 살아왔다.생각해 보면 나의 인생은 순간 순간 걱정은 많이 하고 살았지만, 아무 고민 없이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어쩌면 큰 고민들을 애써 피하며 살아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순리대로 살면서 문득 문득 드는 생각이 있긴 하나..아닐거야! 지워버리는 생각들이 있긴 하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에게 묘한 열등감을 갖고 살아 온 듯하다.20 살에 만난 남편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받던 동기였었다.군대를 일찍 갔던 터라 같이 수업을 받은 적은 고작 1학기 정도 였지만 그래도 같은 학번이었으니 친구다.친구가 만나 결혼을 해서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면 친구는 서로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할 터인데...일찍 직장을 그만둔 탓에 나는 경력단절 전업주부의 위치에 서 있고,남편은 계속 전공을 살려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남편이니까 내조 잘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살아 왔지만 때때로 공허함이 밀려 오는 것은 나의 열등감과 무능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아니야, 아닐거야..잘하고 있어!' 애써 나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속마음, 열등감과 무능함의 모공 속까지 들켜버린 느낌이다.
내가 왜 직장을 일찍 그만두었을까?시간을 거슬러 생각해 보니 아마도 여성이란 한계를 일찍 깨달았던 것 같은데 그것으로부터 일찍 도망을 쳐버렸다.직장내의 상사 여직원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었다.그 분은 기혼 여성이었고 아이가 어렸었다.그리고 둘째도 임신 중이었다.나는 그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신분이었는데 사무실에서 나만 miss였다.여직원 세 분은 모두 다 결혼을 한 기혼여성이었다.그 시절엔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 두는 분위기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다닌 회사에서는 기혼 여성들을 좀 반기는 분위기였었다.그래서 나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도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겠구나!기대하며 다녔던 회사였었지만 나의 모난 성격 탓에 기혼 여성이었던 그 대리님과의 관계가 위태위태하여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만만찮았었다.애교가 없는 경상도 여자 사람이고,낯가림 심한 소심한 성격 탓에, 서울 태생인 다른 여직원들처럼 대리님께 싹싹하게 굴지 않아 처음부터 눈밖에 났던 것 같다.또한 나는 그 시절, 왜 여직원들은 죽어라고 외부 손님들에게 커피를 타줘야 하며 전화업무도 늘상 여직원들이 받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터라..눈치 없이 커피 타는 것이나 전화 업무를 게을리 하는 miss 직원이 얼마나 얄미웠을까?살아오면서 대리님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가긴 한다.
그래도 프라다 명품을 모르는 것은 수치라고 던지는 농담보다는 다락방님처럼 여성의 진보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줬더라면 그 분께 구박을 받더라도, 나는 여자 직원과 남자 직원에 대한 고민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윗 상사인 남자 직원의 보조 업무밖에 하지 못하는 여성의 커리어라면,월말 마감을 해야 해서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대리님은 열이 펄펄 나서 엄마를 찾는 아이를 달래는 전화를 끊고 울면서 컴퓨터 작업을 하던 모습은 내게 큰 충격이어서 이렇게까지 마음 고생하는 여성의 커리어라면 나는 못하겠다고 두 손을 들어 버렸다.나는 저렇게까지 비참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나의 큰 자만이었고,또 무지 했었고,상황에 순종 잘하는 비굴한 삶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윗분께 내게도 업무 분담을 더 맡겨 달라고 부탁을 하며 더 일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어야 했고,야근을 하면서 아이 걱정에 울고 있던 대리님을 따뜻하게 안아 주며 위로를 했어야 했다.그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상념에 사로 잡혀 대리님과의 관계에만 집착 했었다.똑똑하고 할 말 있으면 똑 부러지게 해서 남자 직원들을 쩔쩔매게 했었던 멋졌던 그 대리님과 함께 연대를 했었어야 했는데..그 시절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라서 우리들 관계가 다였던 걸로 시간을 소비했었던 것이다.
지금의 직장 분위기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하지만 보부아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 나와 같은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무조건 내 손으로 키워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임신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 두었고,아이를 내 손으로 키웠다.물론 쌍둥이를 급작스럽게 낳는 바람에 큰 아이를 잠시 친정 어머니께 몇 달씩 맡기기도 하고,쌍둥이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엄마의 도움을 많이 받긴 했었다.육아는 엄마 혼자서 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닌 일이다.그래도 그 아이들이 결국 성장을 하긴 했다.
아이가 커 가는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경탄하는 일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없다.그런데 아이들이 많이 자라 큰 아이는 20 살이 되었고..작은 아이들은 내년에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는 시점이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내겐 공허함이 밀려들곤 하는 것이다.
아들은 올 해 대학이란 곳을 가게 되었고, 기숙사를 굳이 가보고 싶다고 고집하여 보냈었다.기숙사를 보내고 아들의 텅 빈 방을 보면서 갑자기 우울해 지는데 이게 뭔가? 싶었더니 그것은 바로 '둥지 탈출 증후군'이라고 했다.아이들이 자라 내 품을 즉, 둥지를 벗어나 탈출을 하여 빈 둥지을 보았을 때 느끼는 우울감을 '둥지 탈출 증후군'이라고 한다.하루 정도는 자다가 베갯잎을 적셨는데,곧 눈물이 채 마를 새도 없이 아들은 갑자기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하여 집으로 돌아와 둥지 속에 안착...현재 삼 시 세끼를 얻어 먹고 있다.둘째들의 기나 긴 줌 수업도 끝이 나려는지 올 2학기는 전면등교를 해주어 두 끼를 차려 주게 되어 한 숨 돌리게 되었지만, 아들의 삼 시 세끼는 코로나 기간의 연속이다.공부가 얼마나 재밌었으면? 내년에도 또 재수를 하고 싶다고,삼수를 노리고 있어...아...나의 삶은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보다도, 밥상을 언제까지 차릴지가 더 막막하고 힘든 하루이고 밥상을 차리다가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뭐 그런 나날의 연속인 것이다.
남편이 회사에서 인정받기를 늘 기원했었던 시간들과 아이들이 어서 자라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나의 커리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었던 시간들이...요즘 허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그동안 내 삶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박탈감에 대한 울컥하는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곤 하던데..딸들은 나더러 갱년기 같다고 진단을 내린다.설마 벌써? 의심한 내 생각은 책을 읽으면서 그런 것 같은 확신이 들어 더욱 우울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진실한 아내'를 맞이했더라면 발견했을 이익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내들이 전통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우아해지고 싶고,좋은 주부가 되고 싶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되고 싶어한다. 그것은 곧 무거운 부담이다. 그녀는 남편을 위하여,동시에 자기에게 충실하기 위하여 그 부담을 감당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여자로서의 운명을 충분히 이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남편의 그림자이고자 한다. 자기 자신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남편의 걱정거리들을 함께 떠맡고 그의 성공을 위해 협력하려고 한다.남성 우위를 존중하도록 교육 받은 그녀는 무엇보다도 남자의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또 때로는 그 우선권을 빼앗아 가지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면 가정이 파과될까 두려워한다. 그녀는 자기확립의 욕망과 자기부정의 욕망으로 나뉘어 어느 쪽으로든지 분열되고 만다.(893쪽)
보부아르는 생명의 역사부터 시작해 어린아이,청소년,결혼하지 않은 미혼 여성,결혼을 한 기혼 여성,첩,매춘,그리고 노년의 여성까지 모든 여성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으며,남성들의 심리 또한 하나 하나 열거하고 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 글들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의 이시간에 읽어도 뜨끔해 지고 공감되는 것을 보면 가히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닌 지성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며칠 곰곰 생각을 해보곤 했는데,갱년기라서 우울하다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주저 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란 결론이 내려진다.
지난 달에 독후활동?을 한 가지 했었다.남편과 함께 명절 차례 지내던 제사를 없애기로 협의를 했다.책을 읽다가 분연히 무언가를 결정 내려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숙제 같았던 제사 이야기를 다시 꺼내 결론을 지었다.결정을 내린다면 미래의 며느리가 될 여성도 편할 것이고,내 아들과 딸들도 바쁘게 살아가면서 마음의 짐을 덜 것 같은 일을 내가 앞장 서 행동한..좀 진보적인 여성같아 보여 고무가 되었다.잠깐이나마 남편에게 열등감이 사라진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그래 이런 시간을 많이 만들어 볼 일이다.
딸들도 내년 고등학교를 정해야 하는데 녀석들이 여고를 가길 원한다.내가 그것은 안된다고 남녀공학을 가라고 일러 주었다.남자 아이들과 부딪치며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단점이 보인다면 버릴 수 있는 판단력을 키우는 것은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몸소 터득하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생각해서이다.남녀공학에 진학하여 인생경험이 연애가 먼저라면 뭐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배움의 시간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미리 한다면 좀 후회는 덜 될터이다.(그래야 할텐데..)
남녀에게 동등한 성교육은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훌륭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남녀공학 덕분에 '남자'에 대한 엄숙하고도 두려운 신비감은 생겨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신비감은 일상적인 친숙한 교제와 자유로운 경쟁으로 사라질 테니 말이다.(928쪽)
어쩜....이런 나의 고민마저 꿰뚫고 있을 줄이야.....읽으면서 너무 놀랐다.
많은 부분들을 밑줄을 그었고,포스트 잇을 붙여 두었지만...고작 발췌한 부분은 주절거린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뒷받침한 글밖에 못미쳐 보부아르 여성 철학자의 위대한 책이 평가절하된 느낌이다.훌륭한 부분들은 다른 분들의 리뷰와 페이퍼에서 넘쳐 나니 찾아서 읽으신다면 개인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내 글은 보부아르의 책을 알기 전의 지난 날,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인생 선배?의 거울정도......
내 삶에서 조금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여성으로서 인생이 좀 더 당당하고, 지혜로운 기지로 잘 헤쳐나올 수 있는 삶을 살았을지도..라는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지금 중년의 삶에서 만난 이 책을 만난 나는 그래도, 앞으로의 내 인생에 공허함이 자리하지 않고, 좀 더 풍요로운 삶으로 채워 나가고 싶다.아둔하고 많이 느리지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여성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틀을 만들어 준 귀한 책으로 꽂아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