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강의를 앞두고 책장에서 찾지 못해 결국 서점 두 곳을 순례해야 했다(먼거리는 아니지만 버스를 세번 탔다). 푸슈킨의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때문. 통상 대표작 <스페이드 여왕>(1833)과 같이 묶여 있다(제목이 <스페이드 여왕>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에도). 강의에서는 두 작품을 모두 다룬다.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고 대부분 갖고 있지만 이럴 때는 또 눈에 띄지 않는다. 강의보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건 이렇듯 강의책을 찾는 일이다.

<벨킨 이야기>의 원제는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의 이야기>이고 액자 형식의 구성으로 다섯 편이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문학사적 의의를 말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예술산문이라는 것(나보코프의 평가다). 곧 예술적 가치가 있는 최초의 러시아 산문소설이다.

이 작품이 1830년에 출간된 것은 여러 모로 시사적인데 1830년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학사적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문학시장의 핵심 장르가 운문에서 산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비단 러시아문학에서뿐 아니라 유럽문학 전체가 그렇다. 푸슈킨과 생년이 같은 발자크의 데뷔작이 발표되는 게 1829년, 초기 흥행작 <나귀가죽>이 나오는 게 1831년이며, 비록 나중에야 진가를 인정받지만 스탕달의 <적과 흑>이 1830년작이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러시아 근대장편소설(노벨로서의 로만)의 탄생이 프랑스에 비해서 조금 늦다. 푸슈킨의 경우 <대위의 딸>(1836)이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인데, 사실 분량이나 스케일에 있어서 중편쯤에 해당한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인 장편소설의 탄생은 투르게네프와 함께 시작되는 러시아 사실주의문학을 기다려야 한다. 그 시이에 놓인 고골의 <죽은 혼>(1842)은 ‘서사시‘(고골 자신의 표현)내지 ‘산문시‘(나보코프)에 해당한다. <고리오 영감>(1835)이나 <적과 흑>에 견줄 만한 러시아 소설은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866)이다(일종의 지체현상이 벌어지는 건 러시아 중간계급 성장의 부진 때문이다). 내가 강의에서 자주 강조하는 것이 이런 표준적 소설들이 갖는 의의다.

내일부터 공교롭게도 19세기(8강)와 20세기(8강) 러시아문학을 같이 강의한다. 19세기 문학은 푸슈킨과 고골에 한정되지만 다양한 장르의 대표작들을 이번에 다룰 예정이고, 20세기 문학은 체호프의 <벚꽃동산>(1904)에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까지다. 이 강의들을 마치면 겨울의 문턱에 서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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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9-10-0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앞에만 읽고 낼은 체홉인데, 왜 푸쉬킨 책을 찾으셨을까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ㅎㅎㅎ 19C도 하시는군요!

로쟈 2019-10-09 23:25   좋아요 0 | URL
11일부터는 광진도서관에서도.^^;
 

시차 적응을 위해서라도 삼일간의 휴식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내내 누워 있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정신을 차리고 이번주 남은 일정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막간에 마사 누스바움의 신간에 대해 적는다. <정치적 감정>(글항아리).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가 부제다. 몇년전에 원서를 구입해놓고 번역본을 기다리던 책.

˝이 책에 담긴 정치적 감정들에 관한 놀랍고도 독창적인 누스바움의 분석은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녀는 정의롭기를 갈망하는 품위 있는 사회에서 사랑의 자리를 탐구한다. 또한 고도의 지적인 힘과 감정의 힘으로 우리가 인간애를 잘 다룰 수 있는 복잡한 것 가운데 정치적 사랑을 고양시키는 방법을 설명한다.˝(조슈아 코언)

감정에 대해서라면 누스바움이 이미 전작들에서 많이 다룬 주제다(특히 혐오감과 수치, 분노 등). <정치적 감정>은 종합판으로서 의미가 있겠다. 입문서라고 하기엔 분량이 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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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9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9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1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맘 2019-10-1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와 사랑,
진작부터 읽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바로 주문해야겠네요!
기대됩니다^^

로쟈 2019-10-13 00: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대.~
 

고객대기실에선 누구나 고객이 된다
분주한 하루도 일없다는 표정으로
나란히 벤치에 앉는다
고독이 벤치에 앉았다고 적으려다
한갓 고객임을 깨닫는다
무엇도 고객의 무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대기실의 기계음을 잠시
우주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듣는 시간
소음이 신호로 바뀌는 걸 기적이라 부른던가
대기실의 기계음은 언제 목소리가 되는가
고객대기실에선 많은 걸 바랄 수 없다
기차는 도착할 것이고 고독은 남겨질 것이다
고독은 고독의 소음으로 오래 뒤척일 것이다
고객대기실에선 누구나 고객으로 방치된다
고객이 사랑받는 방식이다
고객대기실을 떠나야 한다
고객대기실을 나선다
고객의 유령이 벤치에 남는다
기차는 도착할 것이고 사랑은 잊혀질 것이다
고객대기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아무도 대기하지 않는다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기차가 도착했고 고객대기실을 떠났다
우주의 소음 속으로 곧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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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10-1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차를 기디리며 플랫폼에 앉았을때의 그 느낌이 고독이었군요ㅎ
플랫폼 벤치의 그 묘한 감정,
그 벤치에 저의 유령도 떠돌고 있겠군요 ㅎ 다시 그곳에 가는날
주변을 살펴봐야겠어요ㅎㅎ

로쟈 2019-10-13 00:13   좋아요 0 | URL
^^
 
 전출처 : 로쟈 >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7년 전에 쓴 글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몇마디 적었는데 이후에도 해설서도 여럿 더 나왔다. <국가>에 대해 강의한 지도 꽤 되었는데 이번 하반기에는 정치철학에 대한 강의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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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사라진 모나리자와 그림 너머에 있는 것

지방강의가 있는 날인데 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시외버스 대신 기차를 타기 위해 영등포로 향했으나 철도노조의 준법투쟁(파업)으로 40분 이상 지연운행되고 있어서 다시 서울역으로 이동해 KTX를 타고 내려가는 중이다. 시차 부적응으로 인한 해프닝이랄까. 도착해서도 바쁘게 택시를 잡아타야 한다. 그나마 내일은 강의가 없으니 한숨 돌릴 테지만 이후엔 또 강의 일정이 빼곡하다(여행의 여운을 느낄 사이도 없군). ‘지난오늘‘을 들춰보다가 9년 전에 쓴 리뷰를 소환한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에 수록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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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9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