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가 열서너 살 때(1929년생이니 1942, 3년쯤일까), 유대인 작곡가에게 작곡을 배우러 다녔다. 유대인들이 차츰 탄압받던 시기에 쿤데라의 아버지 루드빅은 그런 방식으로 동료에 대한 우의를 표하고자 했다. 아파트를 빼앗기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던 스승님의 피아노 앞에서 쿤데라는 연습곡들을 연주했다. 그 시절을 회고하는 단락은 쿤데라 에세이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아름답다. 그가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 작곡가의 이름은 파벨 하스(1899-1944)다(결국 나치의 수용소에서 생을 마친다). 그의 딸 올가 하소바(1937-2022)는 오페라 가수이자 배우로 쿤데라의 첫번째 아내이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 가운데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를 흠모하는 마음과 이미지 서너 개뿐이다. 특히 이 이미지가 그렇다. 수업이 끝난 뒤 그가 나를 바래다주다가 문 가까이에서 멈춰서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에게는 놀랄 만큼 약한 이행부들이 많아. 하지만 센 이행부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약한 이행부들이야. 잔디밭처럼 말이야. 잔디밭이 없으면 우리는 그 위로 솟아나는 아름다운 나무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을 거야."
묘한 생각이다. 그것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묘하다. 아마도 내가 스승의 내밀한 고백 하나를, 어떤 비밀, 오직 터득한 자들만이 알 권리를 갖는 한 가지 위대한 꾀를 듣게 된 걸 명예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스승님의 그 짧은 성찰은 일생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나는 그 성찰을 옹호했고, 그것과 싸웠으며, 한 번도 그 끝까지 가 보지 못했다.) 그 성찰이 없었던들 분명 이 글은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소중한 그 성찰보다 더욱 소중한 것, 그것은 그 잔혹한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 아이 앞에서, 드높은 목소리로, 예술 작품의 구성 문제를 성찰하던 한 인간의 이미지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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