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없는 소설‘은 윌리엄 새커리의 대표작 <허영의 시장>(1848)의 부제다. 원래 소설은 1847-8년에 19개월간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그것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새커리가 붙인 부제가 ‘영웅 없는 소설(A Novel without a Hero)‘이다. ‘hero‘란 말이 중의적이어서 ‘주인공 없는 소설‘이란 뜻으로도 읽힌다(나는 강의에서 ‘주인공 없는 소설‘이란 점을 핵심으로 다루었다).
















<허영의 시장>은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강의에서는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다. 강의교재를 확정한 뒤에 웅진지식하우스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있었다면 사전에 비교해보았을 텐데, 이 경우엔 강의를 먼저 진행하고 사후에 검토하는 게 되었다. 일단 웅진판에서 옮긴이의 말을 읽었는데, 두 가지 교정사항이 있어 적어둔다.

먼저 단순 탈자.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소설‘이 ‘19세 영국의 대표적 소설‘로 표기되었다. 첫 페이지의 첫 문장에서 이런 오탈자를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지 싶다. 그리고 의외의 주장. ˝연재 당시 제목은 <영웅 없는 소설: 펜과 연필로 그린 영국 사회의 스케치>였는데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 저자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가 <허영의 시장: 영웅 없는 소설>로 제목을 바꾸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내용이어서 다시 확인해보았는데(위키피디아) 아무래도 역자의 착오로 보인다. 1847년에 간행된 월간지 표지 제목에 분명히 <허영의 시장>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제목은 연재시나 단행본이나 똑같고 부제만 바뀌었다. 하지만 역자는 ‘영웅 없는 소설‘이 제목이었다가 부제가 되었다고 쓴다. 19세기 영국문학 전공자가 이런 착오도 범할 수 있는 것인지.














연재시 부제가 ‘펜과 연필로 그린 영국 사회의 스케치‘인 것은 새커리가 소설의 삽화도 그렸기 때문이다(펜으로 소설을 쓰고 연필로 삽화를 그렸다는 뜻 같다). 웅진판에는 그 삽화가 빠진 대신에(마지막 삽화만 옮긴이의 말에 들어가 있다), 동서문화사판에서는 이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원작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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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웅진판에 대해서 로쟈님께서는 ‘사실‘ 이외에 달리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이 글을 읽고 있자니 제겐 어떤 결심/결정 같은 것이 생기네요.

로쟈님께서는 딱히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요...

로쟈 2019-05-13 00:25   좋아요 0 | URL
네, 삽화가 있느냐 없느냐만.^^
 

빼곡한 강의일정 때문에 관심도서들을 제때 못 읽고 지나치곤 하는데 롭 리멘의 <정신의 고귀함>(오월의봄)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네덜란드의 ‘공공 지식인이자 작가‘라고 소개되는데 <정신의 고귀함>이 처음 번역된 책이라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순전히 책의 제목 혹은 주제에 대한 반응이다.

˝네 편의 짧은 에세이로, 문명의 본질은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 어떻게 문명과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지,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인지, 자유란 무엇인지,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책이다.˝

아무튼 나로선 제목에 끌려 영어본까지 구했는데 막상 읽을 읽어볼 여유가 없었다. 다시금 떠올리게 된 건 <존엄하게 산다는 것>(인플루엔셜)이란 책이 눈에 띄어서다. 저자 제럴드 휘터는 독일의 저명한 신경생물학자(뇌과학자)라고 한다. 뇌과학자가 품격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한다고 하니까 흥미를 갖게 된다.

˝인간다운 삶, 품격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게랄트 휘터가 필생의 연구에서 길어 올린 통찰을 담은 이 책은 신경생물학과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21세기 복잡한 세계를 헤쳐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존엄’을 제시한다.˝

독일 아마존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독일 독자들은 어떤 책에 반응하는지 참고할 수도 있겠다. 덕분에 다시 상기하게 된 <정신의 고귀함>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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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지방강의를 마치고 귀경중이다. 요즘은 매달 두 차례 지방강의가 있다 보니 한달의 절반은 지방에서 주말을 나게 된다. 그나마 아무리 먼 거리라도 KTX로는 3시간 이내라서 가능한 일이긴 하다(물론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집까지는 다시 한 시간여 소요된다).

오늘 강의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었는데 두 시간은 너무 짧아서 투르게네프문학의 의의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돌이켜보니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자료로 대체했다(최소 한 시간은 더 필요했다). 하는 수없는 노릇이다. 다음달에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룰 예정인데 역시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두 시간에 맞추는 것보다는 그렇게 맞추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게 이 작가들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다. 비록 불완전한 강의가 된다 하더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의를 마친 뒤에는 관련서들을 더 주문했다. 국내서로는 더 나온 것이 없으므로 영어로 된 책들인데 한권짜리로 나온 투르게네프 선집과 투르게네프와 플로베르의 서신교환선 등이다. 투르게네프 전기소설도 나온 게 있기에 같이 주문했다. 나로선 그 정도까지가 투르게네프에 대해서 보일 수 있는 관심의 최대치다. 레너드 샤피로의 평전 <투르게네프>의 원서도 장바구니에는 있었지만 책값이 부담스러워서 최종 주문목록에서는 뺐다.

가장 궁금한 건 플로베르와의 서신교환선이다(당연히 불어로 쓰였겠다). 이런 책이 번역돼 나올 가능성은 사실 희박해보이는데(장 그르니에와 카뮈의 서신교환선보다는 플로베르와 투르게네프, 그리고 독일문학에서라면 토마스 만과 헤세의 서신교환선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전자는 나와도 후자의 책들은 나오지 않는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궁금한 독자가 알아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한편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두고서도 두 작가가 의견을 교환한 일이 있어서 톨스토이 강의준비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작가들을 강의에서 다를 때마다 평전들을 구입하는데, 좋은 평전의 번역소개가 갈수록 줄어드는 느낌이다. 책세상판 ‘위대한 작가들‘ 시리즈만 하더라도 모두 절판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조셉 프랭크의 도스토옙스키 평전 같은 대작(축약본이 1000쪽에 이른다)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다른 작가들의 결정판 평전 상당수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뭔가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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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강의를 마치고 창원에 내려왔다. 창원에서는 매달 한 차례씩 러시아문학 강의가 있다. 이번 학기에는 주로 영문학을 강의하고 있지만 러시아문학강의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2학기에는 19세기 프랑스문학과 러시아문학, 그리고 20세기 미국문학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문학강의라면 20년 넘게 해오고 있지만 자각적으로 세계문학 순례에 나선 건 2015년부터다. 그 이전에는 작가나 작품에 더 초점을 맞추어 강의를 기획했었다(<신곡>이나 <파우스트> 같은 대작 읽기). 그러다 제인 오스틴부터 시작하는 영국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2016년에 19세기 프랑스문학을 강의하면서 나대로 근대문학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미셀 레몽의 <프랑스 현대소설사>가 내게 안목을 갖게 해준 책이다). 다시 한순번이 돌아서 영문학과 프랑스문학을 차례로 다룬다고 하니 감회가 없지 않다(올가을 영국문학기행에 이어서 내년가을에는 프랑스문학기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물론 똑같은 반복은 아니고 작가와 작품에 변화를 주면서 확장해가는 방식이다.

가령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여섯 편 가운데(<레이디 수전>을 포함하면 일곱 편), 첫 강의에서는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을 읽었고 올해에는 <노생거 사원>과 <설득 >을 읽었다. 이번 여름에 <에마>까지 다루면 <맨스필드파크>만 남는다(번역본이 가장 적은 작품이기도 한데 일단은 다음 강의를 위해 남겨놓았다). 디킨스의 경우에도 국내에 번역된 작품들 가운데 일단 대표작으로 <위대한 유산>을 읽었고 각기 다른 기회에 <어려운 시절>과 <두 도시 이야기>를 다룬 다음에 올해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다. 강의에서 더 다룬다면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황폐한 집>, 그리고 <작은 도릿> 등이 후보작이다. 그맇게 되면 대략 절반 이상, 번역서 가운데서는 80퍼센트 가량을 읽은 게 된다(디킨스의 장편 완성작은 14편이다). 디킨스에 더하여 올해는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을 읽었다.

대략 4-5년 정도의 주기를 갖고 있기에 아마도 2023년쯤에 다시 영문학 강의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변수가 없지는 않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든가 하는). 그리고 그게 아마도 세계문학 일주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이러한 강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책으로 정리하는 게 목표.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종료될 것이다. 무언가 다른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때 가서 알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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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5-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문학강의여정 중간중간에 우리팀들의 여정이 담겨있어 뿌듯합니다~

모맘 2019-05-10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구는 2014년
봄,라틴문학부터이니 자각적(?)시작은 아니시라는???

로쟈 2019-05-11 18:55   좋아요 0 | URL
남미 대표작가들 읽기였으니까요. 제대로 하자면 16강정도로 구성해야.^^

wingles 2019-05-11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읽기” 기대됩니다. 혹은 강의때 종종 언급하시는 ‘근대문학사에서 본 시민/개인의 의미’ 같은 주제도 책으로 보면 좋을거 같아요^^

로쟈 2019-05-11 18:58   좋아요 0 | URL
별도로 다룰건 아니고 세계문학강의에 포함해서 설명하게 될 듯합니다.

ghig0125 2019-05-11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블로그에서 유익한 정보와 통찰력 있는 말씀 얻어갑니다. 책은 늘 시간과 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장대한 여정을 시작하게 만드는, 그런 점에서 좋은 것 같습니다.^^

로쟈 2019-05-11 18:58   좋아요 0 | URL
네 책의 시대가 열어놓은 가능성이죠.~
 

이번주 한겨레의 '책과 생각'에 실은 연재칼럼을 옮겨놓는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 대해서 어제 오후에 강의하고 급하게 쓴 글이다. 마감이 지나 초읽기에 몰리는 기분으로 쓴 것이라 기억에 남을 듯하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이기도 한 <속죄>는 여러 모로 배울 거리를 제공하는 소설이다...














  


한겨레(19. 05. 10) 모더니즘으로 리얼리즘 구현하기


가장 단순한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걸작들이 있다. 소설의 경우라면 소설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소설들이다.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 <속죄>(2001)도 분류하자면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소설에 대해 심문하고 성찰하는 메타소설이다. 메타소설답게 <속죄>에는 작가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탈리스 가의 막내딸 브리오니가 그 주인공이다. <속죄>는 작가 브리오니가 여러 차례의 개작을 거쳐서 59년간 완성해가기에 그의 첫 소설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소설이다. 그 소설쓰기의 과정이 브리오니에게는 속죄의 과정이기도 하다.



1935년, 열세 살의 예비작가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가 파출부의 아들 로비와 사랑에 빠진 것을 목격한다. 로비는 탈리스 가의 지원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을 수석졸업하지만 탈리스 가의 사람들은 오히려 탐탁찮게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세실리아만 예외적으로 로비에게 열정을 느끼고 급기야 두 사람은 서재에서 정사를 나누기까지 한다. 하지만 브리오니에게 로비는 탈리스 가의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신분상의 구분과 차이가 그 질서의 핵심이어서다. 브리오니는 손님으로 와 있던 사촌언니 롤라가 누군가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로비가 범인이라고 거짓으로 진술한다. 로비는 억울한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가며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프랑스전선에 배치된다.


자신의 진술 때문에 세실리아와 로비가 불행한 연인이 되어 떨어지고 로비가 전선으로 가게 된 것을 알자 브리오니는 속죄의 시도로서 간호사에 자원한다. 더불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을 쓴다. 저택에서 바깥을 내다보다가 분수대 앞에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서 그들의 관계를 처음 의심하게 되었기에 소설의 제목은 ‘분수대 옆의 두 사람’이라고 붙인다. 그 이후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브리오니는 이 소설을 개작하며 1999년에 일단 마무리짓는다. 구성상 <속죄>는 브리오니가 쓴 3부로 된 소설과 거기에 덧붙여진 1인칭 시점의 후기(1999년 런던)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한 질문을 던져보자. <속죄>의 작가는 누구인가? 브리오니가 작가로 등장하지만 그의 실명소설은 3부까지만이다. 후기까지 포함한 전체 소설의 작가는 브리오니라는 허구의 작가까지 창조해낸 매큐언이다. 이런 이중의 틀을 만든 것은 두 가지 문학관을 대비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는데, 바로 소설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란 어떤 존재인가란 물음을 놓고 대비되는 두 관점이다. 그것을 간단히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버지니아 울프를 사숙한 브리오니는 모더니즘의 문학관을 견지한다. 그에게 소설가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다. 소설가는 자신의 세계의 입법자이자 창조자로서 전권을 갖는다. 현실에서의 실패나 결핍은 그의 작품 속에서 얼마든지 보상받을 수 있으며 복원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 따르자면 소설가에게 속죄란 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반면에 리얼리즘의 문학관에 따르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모방해야 한다. 아무리 진실이 냉혹하다 하더라도, 독자의 기대나 희망을 죄절시킨다 하더라도 진실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리얼리즘의 준칙이다. 놀랍게도 <속죄>는 브리오니가 쓴 모더니즘 소설을 결말의 반전을 통해서 리얼리즘 소설로 바꾸어놓는다. 정확하게는 모더니즘 소설을 통해서 리얼리즘의 정신을 구현한다. <속죄>가 매큐언의 대표작이면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19.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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