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뒤적거려보려고 하는 한 가지 주제는 혁명에 관한 것이다. 혁명이냐 개혁이냐(중국어로는 '개량'이냐). 실용이성과 실용주의 등. 어제 <판란드역으로>의 영어본을 배송받고 리쩌허우와 류짜이푸의 <고별혁명>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거기에 몇 권을 더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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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역으로-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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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나긴 혁명
레이먼드 윌리엄스 지음, 성은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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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별혁명- 리저허우와 류짜이푸의 대화, 위즈북 시리즈 1
리저허우 외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로드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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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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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기의 계속이다.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시간을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다루어야 할, 혹은 다루고 싶은 아이템들이 많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보면 대부분 사장되고 만다(하루에도 서너 가지의 아이템들이 떠오르는 것이니 어차피 모두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연휴가 지나면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 같아서 익사 직전의 아이템 몇 가지는 건져놓으려고 한다. 두 주 정도 미뤄진 이 페이퍼도 그 중 한 가지다.  

 

 

 

 

읽고자 하는 대목은 11장의 서두 부분이다. 일견 평이해보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난해하게' 읽은 대목이다. 그건 국역본들의 번역이 중구난방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그러니까 나만 애를 먹은 건 아니겠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상식적인 발언들인데 벤야민의 원문 자체가 약간 꼬여 있는 듯하다. 어제 차봉희 편역의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도 눈에 띄기에 학교에서 들고 왔는데, 첫 대목을 네 가지 국역본 버전으로 옮겨보면 이렇다.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 장면을 보면 이전에는 결코 어디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볼 수 있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최성만, 131쪽)

"영화,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은 지금까지 그 어느 곳 어느 시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광경은 어떤 사건의 진행과정의 묘사인데, 여기에서는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게 마련이다.(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반성완, 219쪽)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는 예전엔 도저히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비록 구경꾼의 시점이 촬영기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할지라도)."(차봉희, 72쪽)

"영화, 그리고 특히 유성영화촬영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그리고 어느 시기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준다.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관객의 눈의 위치가 촬영기구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으면.)"(강유원, 13쪽)

이 첫대목에서 얘기되고 있는 것은 영화촬영 장면의 독특성인데, 간단히 말하면 연기 과정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구경꾼)의 시야에 모두 다 들어오게 마련인 것이 그 독특성이다. 그렇잖은가? 촬영현장에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과 촬영, 조명 등의 스태프들, 그리고 갖가지 기구들이 잔뜩 모여있는 것이니 말이다. 곧이어 언급이 되지만 이러한 '광경'이 깔끔한 연극무대와는 전혀 다른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다.

반성완본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은 '연기진행에 속하지 않는' 정도로 교정되어야 한다(현장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이해하기엔 가장 편안한 문장이 되는데, 벤야민의 원문은 좀 꼬여 있고 이것을 그대로 옮긴 것인 최성만본이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 

이해가 되시는지? 오역은 아니다. 다만 아주 여러번 읽어야 한다('보는 사람'을 '구경꾼'으로 읽으면 조금 이해가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촬영현장을 '보는 사람'이니까). 요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그런 걸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차봉희본은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전혀 엉뚱한 요령부득의 번역이다. 80년대에나 통용됐을 법한. 강유원본은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옮겼는데, 논리적으론 오역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다. 가령 "영화는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이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떠한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한다."라고 재구성해놓으면 '직역'한 꼴은 되지만 우리말 문장은 아닌 것이다.

괄호안에 덧붙여진 내용도 최성만본을 제외하면 모두 오역이다. 반성완본에서 "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는 거꾸로 옮긴 것이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이라고 옮겨야 한다. 카메라와 동일한 시점에서 연기 장면을 본다면 촬영이나 조명장치, 스태프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만약에 보인다면 NG인 것이고). 차봉희본과 강유원본도 말뜻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만 최성만본의 "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에서도 '눈동자'는 오독을 유발하기 쉽다. 대개는 "보는 사람의 눈동자와 촬영장치의 시점이 일치하는 경우"를 둘이 마주치는 경우로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나부터도 그랬다). '시점'이라고 해야 가장 명료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이제 이어지는 대목이다.

"다른 어떤 상황도 아닌 바로 이런 상황이 영화제작소에서의 장면과 연극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하찮은 유사성으로 만든다. 연극에는 원칙적으로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함부로 환영적인 것으로서 꿰뚫어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촬영 장면의 경우에는 이러한 지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은 2차적 성격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이다."(최성만)

"바로 이러한 면이 그 어떠한 다른 면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한 장면 사이의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의 경우, 우리는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곧 바로 환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성격은 이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반성완)

"그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이, 영화촬영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유사성을 피상적이며 중요치 않은 것으로 만든다. 연극에서는 원칙적으로, 무대 위의 사건을 별 어려움 없이 그냥 환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촬영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영화가 지닌 환상적인 성격은 제 2단계의 것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차봉희) 

"이러한 상황은 어떤 다른 상황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성립하는 이른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는 원칙적으로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즉시 허상으로 간파될 수 없는 장소임을 알고 있다. 이에 반해서 영화에서의 촬영장면에는 이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허상적인 본질은 2차적 [후속 작업에서 생겨난] 본질이다; 그것은 편집의 산물이다."(강유원)

첫문장의 요점은 앞에서 묘사한 영화촬영장(스튜디오)의 특징이 연극무대와의 큰 차이점이라는 것. 그에 비하면 같은 '연기 장면'이라는 공통점(유사성)은 피상적이며 사소하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연극적 환상'과 '영화적 환상'을 대비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때 '환상'이란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현실'로서 인지하는 걸 말한다(이런 장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흥분한다거나 하는 모든 정서적 반응은 그러한 환영적 효과의 산물인 것이고). 때문에 번역문들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벤야민의 논점은 연극무대에서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음에 반해서 영화촬영 장면에서는 전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영화촬영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와 배우를 동시에 보게 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배우와 상황에 대한 전적인 몰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연극무대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있고 영화촬영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없다(물론 연극적 환상을 폭로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예외이겠다). 영화적 환상은 편집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이차적 성격의 산물이다. 번역은 이러한 요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통상적인 환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대목의 '환상'은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풀어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이란 "영화속 이미지들을 정말로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성격"을 가리킨다...

08.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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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8-02-1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해설을 읽어보니 사실 별것 아닌 내용인데..번역문만 놓고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았을 만한 내용이네요. 덕분에 벤야민 글 독해에 도움되는 유용한 팁 하나를 더 얻어갑니다. ^^

로쟈 2008-02-10 19:52   좋아요 0 | URL
뒷부분에도 복병들이 나오더군요. 요약정리는 간단하지만 읽기는 난감한 텍스트입니다.--;

느림보 2009-06-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번역된 영화 관련 이론서적들을 읽다보면, 특히 동문선 책들이 그런 경우인데, 심하게 말하자면 그냥 번역기에 돌린걸 문맥 파악도 하지 않고 책으로 내 버린건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영화 이론 서는 관련 지식도 좀 있고 현장이 기본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번역하는것이 좋겠지만, 또 그렇게 모두를 아우르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까지 가능한 경우는 희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감수자를 통해서 내용을 점검하던가 하는 절차도 필요할 텐데, 그런식으로 책임있는 책만들기가 진행된 경우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괜히 짧은 영어 실력에 원서를 읽어 볼까 생각이 드는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로쟈님께서 친절히 지적해주신 부분 감사합니다.
 

교수신문에서 포커스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9). 최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을 번역해낸 정해창 교수가 '실용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하고 있는 글이다. 실용주의에 대한 개관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교수신문(08. 01. 29) '가능한 대안’ 모색하는 실천의 언어

1.
최근 서구에서 실용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의 철학을 주도해온 분석철학이 ‘분석을 위한 분석’에 매달리다 그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신들이 무의식 중에 딛고 있던 실용주의 지반을 인식하고 그 진면목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활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이 ‘분석철학의 트로이 목마’라고 불리는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의 출간(1979)이다. 고전 실용주의자들인 퍼스, 제임스, 듀이가 활동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를 실용주의의 탄생기라고 하고, 20세기 중엽을 실용주의의 확장 및 정체성 확립의 시기라고 한다면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후를 실용주의 부활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 시기 뿐 아니라 당대의 실용주의자들도 실용주의에 대하여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자는 퍼스가 실용주의에 이름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곡조씩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는 어떤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 초 태동기의 실용주의는 사후 한 세대 이상 묻혀 있던 비운의 천재 퍼스를 제쳐 놓는다면 제임스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이자 진리론으로서 실용주의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출간(1907)되면서 그 대강의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실용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을 정의해온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관념은 그 의미와 진리를 행동을 안내하는 유용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도출된다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얼핏 인식론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앎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철학이 추구해온 앎의 ‘객관적’,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준거이다. 달리 말하면 앎은 다양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찌 한 가지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기준을 통과한 것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인간의 끊임없이 인식작용에서 사변보다 실천, 행위를 우선시한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실용주의를 인식론적 지평을 넘어서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전통적 인식론이 ‘객관’이라는 제약 아래에서 평면적이고 수동적으로 되기 쉬운 반면에 실용주의는 광범위한 실천을 바탕으로 변화와 새로움 그리고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로 가치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고전 실용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우주가 진화한다는 것은 우주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대륙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처녀림이나 다름없었던 미국은 그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위니즘은 이런 지적, 문화적 환경과 잘 융합하는 이론이었고, 실용주의는 전통적으로 무시간적 진리만을 고집하던 철학에 시간 즉 변화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변화는 곧 행위를 의미하고 “모든 관념, 사유는 행위를 위한 계획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언명은 모든 지적인 노력은 인식자와 무관한 관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순수하고 이론적 앎으로 귀결된다는 전통적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유 양상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가 행위로 이어지지 않거나 종료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정신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기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언명은 ‘개간해야할 땅이 너무 많았던’ 미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 온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가져온 과학적 철학관이 실용주의와 유사하여 일종의 상승 작용을 하며 발전하였다.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이론은 실용주의가 천명하는 ‘현금가치’로서의 의미 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이 개념들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자연과학적 방법, 실험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거대한 경험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태도가 실용주의 전통에 접합되면서 실용주의가 보다 기술주의적(technocratic)인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다. 즉 퍼스나 제임스가 강조하던 공동체적이고 참여적 성격이 개인적 자유와 사적 추구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강조하는 진보적 성향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시기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가 뒤범벅되면서 듀이의 해명을 기다려야 했고, 도구주의에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실증주의화되고 과학화된 실용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 종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용주의 부활의 단계인 세 번째 시기는 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중심에 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은 사실상 과학화된 실용주의에서 과학주의를 털어버리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 초 인간을 달에 보내면서 과학기술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나 곧 그 부정적인 면이 함께 부각되었다.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요인들은 과학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좁은 의미의 경험적 합리성, 객관성보다 광범위하다. 즉 과학주의가 배제하는 윤리적, 미학적 고려, 제약 없는 표현, 공동체적 협력 등과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관념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곧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와 결별하고 인문학적 ‘이야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분석철학자였던 로티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매달려 온 유일한 진리, 합리성, 선의 추구는 연기를 손에 잡으려는 시도 또는 불의 색깔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이 허망하고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이 메마른 땅에서 겉도는 이유를 경직된 관념적 질서에서 찾는다. 이들은 철학을 고귀한 추상의 세계에서 끌어내려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로티는 자신이 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하이데거, 비트겐시타인, 듀이의 맥을 잇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 의미의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데 동의하고 대안으로서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 그리고 듀이는 도구적 사유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철학의 과학화가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한 재앙이라는 인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언어의 추구는 사실상 플라톤의 이상, 실재의 비밀을 열어주는 하나의 진정한 언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고, 로티는 철학의 종언이 사람들을 이런 족쇄로부터 해방하는 문화적 결과를 동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사유, 탐구에서 동료 인간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어떤 궁극적 토대,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언명은 바로 자유 진보주의의 천명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실용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아창조는 진보주의가 우리의 선조들을 취하게 하였던 인간성, 자연권 등과 같은 토대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철학이 이런 본질적인 토대를 추구하는 한,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유효하게 남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삶을 떠받쳐 줄 어떤 확고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리라는 ‘데카르트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신학이 인간을 길들이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주입한 것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고전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재해석되고, 현금의 일류 철학자들, 예컨대, 퍼트남, 데이비슨, 굿만과 같은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실용주의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십세기 초의 언어적 전환 이후 철학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 즉 실용주의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듀이가 사망한 이후 실용주의는 철학사의 한 구석으로 퇴장하는 듯 하였으나 이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부활이 근대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원론적 사유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저항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
내가 실용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이론을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욕구, 동료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대화에 어떤 제약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관념의 주인이 될 때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진다.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관념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거대한 관념만 옳고 그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예컨대, 레닌이나 히틀러와 같은 광기와 결합할 경우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지난 세기에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맑은 정신’의 현실주의자 벌린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최선의 희망 즉 품위 있는 사회의 건설은 대안에 대하여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 즉 다양한 수단과 목적들 가운데 겸손하게 선택하고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음을 전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품위 있는 사회는 잔인함을 최소화하고 그 구성원들이 인내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관념론자들은 덧없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신기루 같은 이상에만 매달린다. 더 나아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까지도 이상적으로 재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상상에 불과할 뿐 인간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세기 이상 미국사회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온 실용주의는 당초 실용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폄하하던 유럽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퍼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뿐 아니라 기호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임스, 듀이는 심리학자나 종교학자, 교육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미국화된 아시아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적인 것의 정신적 토대는 가장 덜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실용주의 연구는 고전 실용주의자들보다는 로티에 집중되어 있다. 퍼스선집을 제외하고는 제임스와 듀이의 주요 저술이 다수 번역되어 있고 로티 번역도 여러 권 나와 있다. 그 외에 루이스, 미드와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퍼스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는 한권의 저서(정해창)가 유일하다. 제임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보다는 심리학이나 종교학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고, 듀이에 대한 연구도 단연 교육학 분야가 지배적이다. 철학 쪽에서는 오래 전에 듀이를 학계에 소개한 김태길이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로티에 대해서는 다수의 저서, 역서를 낸 김동식이 단연 두드러지고, 이유선, 엄정식, 노양진, 김혜숙 등의 비판적인 글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사실상 소수의 학자들만 실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실용주의 연구자가 몇 명 안 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관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인문학자들의 케케묵은 관념을 들어 줄 고객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해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야 할 일이다. 칸트의 말대로 철학자들은 모두 시시포스이다. 돌(관념)을 굴려 정상에 올려  놓을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돌은 영락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20세기만 보아도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전환, 언어적 전환, 포스트모던적 전환, 실용적 전환이라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시시포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청중이 지루해 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철학자들은 기존의 관념이 설득력을 잃어갈 때 끝없는 대체놀이에 의해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왜 우리가 바윗돌을 정상에 올려놓아야만 하는가라고 회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대한 관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탐험 정신이야말로 실용주의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돈을 쫒아 헤매고 있는 한, 인문학은 더욱 답답해질 것이다.(정해창/ 한국학중앙연구원·철학)

08.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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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05 04:02   좋아요 0 | URL
Peirce가 생각했던 pragmatism의 의미와 후대의 '응용'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중국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

로쟈 2008-02-05 09:54   좋아요 0 | URL
아시다시피 퍼스 자신은 아예 'pragmaticism'이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듀이나 제임스와는 거리를 두지요. 로티는 그를 '칸트주의자'로 분류하여 실용주의의 본류와는 다르게 보고(아예 퍼스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중국은 50년만의 폭설로 사정이 안 좋은데, 저로선 우연히 50년만의 '설경'을 보고 온 것이니 나름으로는 의미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던 대로 '이달의 읽을 만한 책'들을 꼽아본다. 참고로 삼고 있는 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민병욱)의 목록인데, 2월에는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등 10종이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 발표됐다(http://www.kpec.or.kr/). 과학분야의 <삼엽충>은 지난달에 내가 '1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문학=D에게 보낸 편지(앙드레 고르/임희근·학고재) ▲역사 친절한 조선사(최형국·미루나무) ▲철학=이분법을 넘어서(장회익,최종덕·한길사) ▲정치=시대정신 대논쟁(이영성,김호기·아르케) ▲경제경영=세계화?(토머스 슈뢰터/유동환·푸른나무) ▲사회=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전의우·양철북) ▲과학=삼엽충(리처드 포티/이한음·뿌리와이파리) ▲예술=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조수철·서울대학교출판부 ▲교양=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차익종·르네상스) ▲아동=안녕, 스퐁나무 (하은경 글/이형진 그림 문학동네)

2월은 설 연휴가 끼어 있는 데다가 날수도 짧아서(올해는 윤달이어서, 그래봐야 1-2일이지만)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다. 간략하게만 꼽아보도록 한다.

 

 

 

 

1. 문학

먼저 문학분야에 책으로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작가 신경숙씨가 추천한 책은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내는 편지>(학고재, 2007)이다. 이미 작년에 언론에서 크게 소개됐던 책이다. "사르트르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평을 들었던 앙드레 고르는 일생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심층 분석해 온 철학자이며 언론인"이고, 그런 "앙드레 고르가 처음 만나 죽을 때까지 사랑한 아내 도린이 척추 수술로 인한 깊은 병에 걸리자 고르는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와 투병생활을 함께 한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죽기 일년 전 고르가 아내를 위한 글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쓰기 시작한 <죽음으로 봉인한 사랑의 편지>이다."

앙드레 고르의 책으론 정작 그의 '사적인 편지'들이 주저들보다 먼저 소개돼 좀 멋쩍긴 한데 어쩌면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키워든 '사랑'과 '죽음'일 텐데, 이걸 한데 묶어주는 고전이 <신곡> 아닐까? 일본의 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가 그 길잡이로 내가 2월에 읽고자 하는 책이다. 

거기에 작년 2월에 작고한 오규원 시인의 유고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를 물론 빼놓을 수 없겠다. 이 시집과 함께 끌어안을 화두는 '죽음'과 '언어'다(자세한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67292.html 참조).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저술가 이덕일씨가 추천한 책은 최형국의 <친절한 조선사>(미루나무, 2007)이다. 저자도 책도 모두 생소한데 추천사에 따르면 "한 시대 사람들의 삶의 총체적 모습을 역사라고 할 때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모습은 엄숙하기보다는 일상적이기 십상인데, 『친절한 조선사』는 각 부분을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 역사책"이다.

그런 일상성도 다루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년말에 나온 중국사로 니시노 히로요시의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북북서, 2007)는 제목의 세 키워드를 통해서 '중국사의 흥망을 읽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다(장성에 초점을 맞춘 책으론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을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있었다). 최근에 중국 관련서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라 손에 들지도 모르겠다(누가 좀 말려줘야 할 텐데). 중국을 다룬 거시사로 레이 황의 <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 2002)도 한번 손에 들면 좀처럼 내려놓기 어려운 책이라 같이 올려놓으면서 저어된다.

 

 

 

 

3. 철학

철학분야의 책으로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책은 마침 요즘 읽고 있는 대담집 <이분법을 넘어서>(한길사, 2007)이다. "물리학자 장회익과 철학자 최종덕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나눈 대화이다. 대화는 고전역학과 현대 물리학, 동양과 서양, 의식과 물질, 삶과 자연 등의 주제를 거치면서 풍요롭게 펼쳐지지만, 장회익의 온생명 개념이 태어난 내력과 그것을 둘러싼 갖가지 문제가 노련하고 해박한 최종덕의 질문 속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주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라고 추천사는 적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 2005)이나 국내 필자들의 <지식의 통섭>(이음, 2007)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이분법을 넘어서'란 태도가 '실용주의'로 귀착될 필요는 없지만 실용주의적 태도는 이분법에 대한 거부를 필히 포함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2월에 읽어보고 싶은 책은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이다. 그와 함께 리쩌허우의 <역사본체론>(들녘, 2004)도 같이 읽어보고자 하는데, 이 책은 <학설>(들녘, 2005)의 보론적인 성격도 갖고 있는 책이다(<학설>은 이번 중국여행에 내가 들고 갔던 책이다). 그 1장의 제목이 의미심장하게도 '실용이성과 밥 먹는 철학'이다. 이달은 소위 '실용정부'라는 이명박 정부가 새로 출범하는 달이기도 해서 '실용'의 의미와 용처에 대해 미리 숙지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로 손호철 교수가 추천하고 있는 책은 <시대정신 대논쟁>(아르케, 2007)이다. 200쪽이 안되는 얇은 책인데, 추천사에서 밝힌 의의는 이렇다. "지난 2007년 대선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 20년, 민주화운동출신 정권 10년만에 새로운 변화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8년 체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국과 ‘61년 체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산업화,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민주화에 이어 ‘08년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는 많은 논쟁이 가능한 논쟁적이면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시대정신 대논쟁: 87년 체제에서 08년 체제로』는 이같은 문제에 대해 각계의 전문가들이 대중적인 언어로 논쟁을 벌인 중요한 우리 시대의 대중교과서이다." 책의 편자로 참여하고 있는 김호기 교수의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아르케, 2007)이 그 교과서의 참고서로 덧붙여질 수 있겠다.

내가 보태고 싶은 책은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를 포방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동시대인 바울'의 프리즘을 통해서 읽어보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기에.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경제/경영 분야의 책으로 추천한 건 토마스 슈뢰터의 <세계화?>(푸른나무, 2007)이다. 새롭지 않은 주제이고 이미 많은 책들이 나와 있지만 추천의 변이 없지는 않다. "이 책은 ‘세계화’에 초점을 둔 세계경제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한 쪽만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책, 개념만 간단히 설명하는 책, 오늘날의 현상만 말하는 책, 또한 너무 전문적인 책이 아니다. 그 대신 세계화는 어떤 모습으로 탄생하였는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지를 군더더기 없이 소개하면서 세계화의 본질과 논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분량이 얇은 것도 이 경우엔 장점이겠다.

세계화를 다룬 두꺼운 책으론 (이런 책을 누가 다 읽나 싶은) 나얀 찬다의 <세계화, 전지구적 통합의 역사>(모티브북, 2007)가 있다. <세계화와 그 불만>(세종연구원, 2002)의 저자 조지프 스티클리츠 교수의 책들도 계속 소개되고 있는데,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지식의숲, 2007)은 '세계화의 새로운 목표와 미완의 과제들'을 제시한다. 출간 당시 화제가 됐었지만 독자들의 호응은 신통찮다(500쪽에 가까운 경제학 번역서를 읽을 독자들이 국내에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경제 엘리트들은 원저를 읽을 테고). 한미 FTA 비준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정황과 관련해서라도 몇 페이지 뒤적거려볼 만하다.

 

 

 

 

6. 사회

사회분야 책으로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책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양철북, 2008)이다. 저자는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초대 기독교인의 삶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80여년 전에 시작한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리더"이고 제목 그대로 자녀교육서.   

내겐 생소한 책이지만 이미 '좋은 부모'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책인 듯하다. "부루더호프 공동체 리더의 저작인 이 책은 비폭력과 무소유를 지향한다는 공동체의 목표, 30여 년 이상 가정문제를 상담해 왔다는 저자의 경력, 게다가 뉴에이지 풍의 서적들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가족애를 강조하는 또 하나의 당위적 책자로 오인될 소지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 위기의 본질이 빈곤이나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주의적 억압에 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통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라고 추천자는 적었다. 저자의 다른 책으론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쉴터, 2000) 등이 소개돼 있다.

아이들 책만 사준다는 요즘 부모들과는 달리 '자기 책'만 사는 '나쁜 아빠'로서 내가 자녀교육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책은 고작해야 또 다시 번역된 루소의 <에밀 또는 교육론>(한길사, 2007) 정도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에밀>(한길사, 2003)이라고 다른 역자의 번역서가 나온 바 있는데, 아직 절판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 싶다(제목이 달리 붙은 건 순전히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책은 리처드 포티의 <삼엽충>(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고생대의 표준화석으로 외웠던 삼엽충.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30년간 삼엽충을 연구해 온 저자 리처드 포티 덕분에 독자들은 5억 년 전의 생물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고생대 3억 년을 누비며 다양한 모습과 엄청난 개체수로 지구의 역사와 진화의 증거를 고스란히 간직한 삼엽충의 이야기는 화석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이미 지난달에 나도 꼽았던 책이기데 군더더기 말은 필요없겠다. 다만 나도 아직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달의 목표는 서가에 꽂아놓는 것이다.

덧붙여 역자인 이한음씨의 <호모 엑스페르투스>(효형출판, 2008)를 꼽아둔다. 과학서적 전문 번역자의 첫 칼럼집이다. '호모 엑스페루투스'는 '실험하는 인간'이란 뜻. 그런 실험의 대상이 또 '인체'가 되면 좀 '끔찍한' 상황이 연상되는데,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 일본'이란 부제를 단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은 그런 연상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끄는 과학사이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미술사학자.

"런던대 교수로서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미술사학자 타이먼 스크리치는 신미술사학을 방법론으로 취해 에도 시대 일본인들이 서양 의학이나 외과도구에 놀라워하면서도 에도 문화의 심장부를 열어나간 다양한 경로를 탐색한다. 이 책의 주제는 ‘연다는 것의 의미’, 그중에서도 몸의 엶, 즉 해부학이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쇄국 정책을 실시했고, 에도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통로는 네덜란드동인도회사를 상대로 한 무역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상관의 상관장이나 의사 등은 서양 문물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어 문물뿐 아니라 문화도 전파했다. 이렇게 유입된 서구 근대의 지식은 난학 붐을 일으켰다."

이왕이면 같은 저자의 신작인 'Sex and the Floating World'(Reaktion Books, 2004)도 소개됨 직하다. 부제는 '일본의 음화(淫畵), 1700-1820' 정도라고 해야 하나(이 책은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추천하지 못하겠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조수철 교수의 <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서울대출판부, 2007)이다. 제목만 보면 번역서 같지만 뜻밖에도 국내서다. 베토벤에 관해서도 무슨 새로운 책이 씌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책에는 글쓴이가 오랫동안 직접 여행과 수집을 통해 모은 생생한 자료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추천사에 따르면 "흥미로운 것은 책의 구성과 시각이다. 이 책은 다분히 인간의 발달과정과 그에 따른 변화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음악과 관계해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베토벤의 음악적 여정을 다시 한 번 베토벤 자신의 심적 상태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이전에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서울대출판부, 2004)를 낸 바 있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모차르트 이펙트>(황금가지, 1999)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국내에 소개된 베토벤 전기로는 메이너드 솔로몬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한길아트, 2006)이 결정판인 듯하다. 내가 더 꼽을 책은 없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르네상스, 2007). 나도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책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전공분야인 20세기 영문학의 주요 작품들의 초판본 수집가/판매상으로 겪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의 미국판 제목이 <나보코프의 나비>인데,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을 '1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두었으니 연이어 <나보코프 블루스>(해나무, 2007)도 교양서로 읽어볼 수 있겠다. 이왕이면 모리스 쿠튀리에가 엮은 <롤리타>(이룸, 2003)까지. 그 정도는 다 '교양'이다.

 

 

 

 

교양에 관해서라면 사실 이달에 읽을 만한 책들이 많다. 분량상 '장서용 교양'으로 분류해서 예외적으로 덧붙이자면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이 대표적이다. 때마침 같이 나온 <헤럴드 블룸 클래식>(생각의나무, 2008)과 함께 서가에 꽂아두고 '사전'처럼 읽어볼 만하다. 최근에 새롭게 번역돼 나온 서머셋 모옴의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개마고원, 2008)은 19세기 '10대 소설'들에 대한 개성적인 안내서이니 필독해 둘 만한 '교양 중의 교양'이다(작년 이맘때 이 책의 출간을 고대한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037161 참조).

 

 

 

 

10. 아동/전기

아동분야의 책으로 추천된 책은 하은경의 <안녕, 스퐁나무>(문학동네어린이, 2007)이다. "화자인 '나’가 아빠와 함께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면서 겪은 경험과 깨달음을 담고 있다"고. 앙코르와트 여행은 당분간 꿈꾸기 어렵고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나는 전기 분야의 책이나 꼽겠다.

이달엔 김덕영의 평전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2008)이다(자세한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67294.html 참조). 김광기의 <뒤르켐 & 베버>(김영사, 2007)도 안내서 삼아 읽어볼 수 있겠다. 재미있게도 부제가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그런 고민을 잠시 해보는 사이에 우리는 봄의 문턱에 닿아 있겠다...

08. 02. 03.

 

 

 

 

P.S. 가외로 꼽는 '2월의 고전'은 <논어>다. 사실 너무 많은 번역/주석서들이 나와 있고 '정본'은 따로 없는 터라 무얼 읽어야 하는지 좀 막연하다. 그럼에도 내가 길잡이로 삼은 건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이다. 거기에 물론 여러 번역/주석서들이 덧붙여질 수 있는데, 손 가까이에 있는 책들은 이강재의 <논어>(살림, 2006),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포럼, 200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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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4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조선사가 눈에 띄네요. 미시사같은데 요즘 조금씩 많아지는 이런 시도들이 반갑기만 합니다. 다만 이런 시도들이 단순한 흥미위주로 흘러버리는 경우도 많아 조금 아쉬울때가 많긴 하지만요.

로쟈 2008-02-04 08:30   좋아요 0 | URL
진지한 미시사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생활사의 이모저모 범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번역된 김에 '실용주의'(혹은 '프래그머티즘') 관련서들을 모아놓는다. 듀이, 제임스, 퍼스 등의 개별 저작과 리쩌허우의 책들을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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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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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 대우학술총서 545
김동식 지음 / 아카넷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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