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어쨌다구?'(http://blog.aladin.co.kr/mramor/1873059)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가독성이 좋은 번역이지만 몇 가지 오역들이 교정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미에 피력했는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용은 적어두어야겠다. 그 전에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조금만 더 덧붙이면 <에쿠우스>의 극작가 'Peter Schaffer'는 '피터 셰이퍼'(62쪽)이 아니라 '피터 셰퍼'이며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을 주창하는 철학자 'Hubert Dreyfus'는 국내에 '허버트 드라이푸스'(306쪽)가 아니라 '허버트 드레퓌스'(혹은 '허버트 드레피스'로 소개되었다. 가장 유명한 푸코 연구서의 하나였던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인터넷상에서>(동문선, 2003)도 그의 책이다(<인터넷에 대하여>라고 해야 한다. '하버트 드레퓌스'는 또 뭔지?).

 

 

 

 

그리고 <제3의 과학>(대영사, 1996)의 편자로 유명한 'John Brockman'은 물론 '존 브로크먼'(324쪽)으로도 표기될 수 있지만 <위험한 생각들>(갤리온, 2007)을 비롯해서 최근에 나온 책들은 모두 '존 브록만'이라고 읽어주고 있다. 통일시켜주는 게 독자들의 혼동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내 생각을 적자면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Le Mythe de Sisyphe'는 물론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다루고 있지만 통례에 따라 <시지프의 신화>라고 읽어주는 게 낫다(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론 <시지프 신화>). 그건 '카뮈'의 책이기 때문이다('시지프'가 아니라 '시시포스'라고 교정해주는 건 과잉친절이다).

 

 

 

 


몇 가지 오역들을 거론하기 전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의 출판물에서(TV 자막에서는 더 심하다) 여전히 빈발하고 있는 '-로서/-로써'의 혼동이 좀 교정되었으면 싶다(사실 '혼돈/혼동'도 혼동되기 쉬운데 그럼에도 시인들까지 혼동해서 쓰는 건 좀 어이없다. 얼마전 한 영화잡지의 칼럼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혼돈'이다).

가령 얼마전 서평을 쓰기도 했던(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논어는 진보다>(포럼, 2008)에서도 서문에서부터 "공자가 제사를 중시한 것은 그 예禮로의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이지 죽은 귀신의 은덕을 바라서가 아니었다."(18쪽)라는 오기가 나온다. 당연히 '예로서의 기능'이라고 표기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부주의에서 빚어진 오타일 수도 있지만(편집자에게서도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의문이다) 이런 실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더구나 책은 <논어>의 자구 하나하나를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언어는 전달수단으로의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과적인 전달수단인 것도 사실이다."(220쪽)에 이르면 저자가 한문공부만큼 한글공부에도 신경을 써주었으면 싶은 것이고.

<지젝이 어쨌다구?>(새물결, 2008)에도 그런 오기가 한군데 나온다. "모더니즘이 동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해석적 준거틀로 신화를 이용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간극들에 무언가를 끼워넣음으로써 신화를 직접적으로 다시 쓴다."(54쪽) 얼핏 '준거틀로써'와 '끼워넣음으로써'가 호응하는 듯이 보이지만 '해석적 준거틀로서의 신화'는 'the myth as the interpretative frame of reference'(30쪽)를 옮긴 것이다.

그럼 자질구레한 디테일들은 가급적 넘어가고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을 적도록 한다. 먼저 83쪽이다. 책의 1장인 '신화와 그것의 변쳔'에서 마지막 두 절(74-96쪽)은 내가 읽기에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대한 아주 요긴한 요약이다. 번역된 순서와는 달리 <죽은 신을 위하여>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므로 지젝이 먼저 제시한 자신의 생각을 이후에 상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죽은 신을 위하여>가 읽기에 버거웠던 분들은 이 대목만 꼼꼼하게 읽어도 좋겠다.

다시 돌아가, 83쪽의 한 대목은 이렇다.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자기 너머 피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원문은 "As Hegel put it, what dies on he Cross is not the human incarnation of the transcendent God, but the God of Beyond himself."(50쪽)이다. 

여기서 '초월적 신'은 'transcendent God'을 옮긴 것이고 칸트철학의 번역어를 쓰자만 '초재적 신'으로 옮겨도 된다. 말 그대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신'을 뜻한다. 그걸 다시 받은 말이 'the God of Beyond '이다. 역자는 'Beyond'를 'himself'에 걸리는 전치사로 보았지만 내가 보기엔 명사다(그래서 대문자로 씌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다시 읽으면,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피안의 하나님 자신이다."

참고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이상 저 너머의 피안에 거하지 않고 (종교적 공동체의) 성령으로 변해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으로 '번해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공동체 그 자체가 새로운 영적 단계로 '변해가게' 하는 소멸하는 중개자/중간자이다." 여기서 '소멸하는 중개자'는 'vanishing mediater'를 옮긴 것이다(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옮겨졌다).

지젝의 기독교론은 기회가 되면 다른 자리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고 스핑크스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격언만을 여기에서는 챙겨두도록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남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이집트인들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다."(90쪽) "The Enigmas of the Egyptians were also enigmas for the Egyptians themselves."(56쪽) 

이 대목을 인용한 건 이 책이 아니라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잘못 옮겨졌기 때문이다(이 책의 몇몇 오역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거기서는 똑같은 문장을 "이집트 사람들의 비밀은 이집트 사람들 자신을 위한 비밀이기도 하다."고 오역했다(224쪽의 각주). 지나는 김에 보태 적자면 지젝은 이어서 데리다의 '해체'가 갖는 문제점(아포리아)에 대해 지적한다.

"'해체'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해체적 정화는 우상화의 궁극적 형태이다. 타자를 해체하고 남는 것은 타자의 자리 - 메시아적 약속으로서의 타자성의 순수 형식 - 밖에 없다. 해체의 한계는 여기 있다. 즉 해체가 근원적이 될수록, 해체에 내재하는 해제 불가능의 조건 - '정의' 라는 메시아적 약속 - 에 의지해야 하는 정도도 커진다(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 메시아의 약속은 데리다의 믿음의 진정한 대상이며,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 원칙은 이러한 믿음이 환원 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죽은 신을 위하여>, 224쪽)

이 대목은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집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답변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마르크스와 아들들(Marx & sons)'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글/책은 조만간 번역돼 나온다고 한다(http://blog.aladin.co.kr/balmas/1862975 참조). 곁다리로 지적하자면 인용문에서 "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는 오역이다. 원문은 "as Derrida himself has realized in the last two decades"(139쪽)에서 보듯이 현재완료형 문장이기 때문이다('20년 전'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깨달아온 것이다).  

이어서 148쪽. "여기에는 권력에 반대하는 '민중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문장은 오역은 아니지만 우리말로 중의적이다. 무엇에 대한 불신일까? 'people as opposed to Power'에 대한 불신이다. 권력에 대립한다고 하는 민중에 대한, 그러한 민중상에 대한 불신이다. 즉, 여기서 표명되는 건 민중은 궁극적으로 권력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지식인들의 인식이다(지난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그러한 실망/환멸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때문에 1989년의 시점에서 동독의 지식인들은 '자유선거'에 반대했다. "만약 자유선거가 실시된다면 다수의 민중들이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적 소비주의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개의 경우 지식인과 민주주의는 불편한 관계이다.)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대목: "반체제 인사들보다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느끼고 있던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도 이와 동일한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은 'Some Western Social Democrats'의 번역이다. '서구의 몇몇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오역이라고 해야겠다(혹은 '사민주의자들').   

'우울증과 행동'을 다루고 있는 4장의 끄트머리인 288쪽에서는 한번 잘못 읽은 오역이 몇 차례 반복되고 있다(사실 제목에서 'act'를 굳이 '행동'이라고 옮긴 것도 불만이다. 그간에 대부분의 번역서들에서 'action'과 구별하여 'act'를 '행위'라고 옮겨왔기 때문이다. 역자는 'action'에는 어떤 번역어를 할당하려는 것인지?). 내용은 좀 선정적인데, '강간'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 있어서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수치심이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떠맡은 수동성이라고 강조해왔다. 만약 내가 강간을 당했다고해보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수치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내가 강간당하는 것을 즐겼다면, 나는 수치심을 느껴 마땅하다."(287쪽)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부끄러움은 오직 그러한 수동적 처지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자기는 부인하는 내밀한) 환상과 접촉할 때만 나타난다."

"가령 두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동적인, 이른바 해당된 여성이다. 다른 한 여자는 남자 친구가 자신을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강간하는 공상을 은밀하게 즐기고 있다. 만약 두 여자가 모두 강간을 당할 경우 두번째 여자가 첫번째 여자보다 훨씬 더 외상적인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강간이 '그녀의 꿈의 소재들'을 '외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실현하게 되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287-8쪽, 강조는 지젝)

강조된 부분의 원문은 "for the very reason that it will realize in 'external' social reality the 'stuff of her dreams"이다. 문제는 이것을 부연설명하는 대목이다.  "왜 그런가?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 그보다 표면 쪽에는 그혹은 그녀의 상상적인 그리고/혹은 상징적인 자기동일시가 있는데, 그 사이에 둘을 영원히 갈라놓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88쪽) 원문은 "why? There is a gap which forever separates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 from the more 'superficial' modes of his or her symbolic and/or imaginary identification"이다.

역자는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을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라고 풀어서 옮겼는데, 이 '주체의 환상적 중핵', 곧 '주체를 떠받치는 핵심적 환상'이 가리키는 것은 '주체라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내밀한 꿈' 혹은 '꿈의 소재들(stuff of dreams)'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환상)과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외적인 사회 현실') 사이에는 영원한 간극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환상의 핵심인 나의 존재를 (상징계 안으로 통합해 들인다는 뜻에서) 완전하게 떠맡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에서도 완전하게 떠맡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환상의 핵심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핵심적 환상(fantasmatic kernel of my being)'이다. 미묘하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있고 번역문은 계속 이를 혼동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존재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나의 존재를 너무 가까이할 때, 주체에는 아파니시스(성적인 욕망의 사라짐)라는 사태가 벌어질 뿐이다."라는 식으로 계속 오역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when I approach it too closely, when I get too near it, what occurs is the aphanisis of the subject"를 옮긴 것인데, 역자가 '나의 존재'로 받은 'it'이 가리키는 것은 '핵심적 환상'이다. 다시 옮기면, "내가 나의 핵심적 환상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그 환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때, 벌어지는 일은 주체의 아파니시스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의 존재라는 환상의 핵심'은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교정하여 정리하면 이렇다.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이 사회적 현실에서 강제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주체에게는 최악의 사태이며 가장 모욕적인 형태의 폭력이 될 것이다. 그 폭력은 나를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노출시킴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토대 자체를 뒤엎어버리고 만다."

 

 

 


 

5장('문화연구는 정말 전체주의적인가?'로 넘어가서, 306쪽에 나오는 건 단순오역이다. "철학과 과학 사이를 건너뛰는 이러한 단락은 오늘날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허버트 드라이푸스)이나 인지과학적 불고(프란시스코 바렐라)에서부터 양자물리학과 동양사상의 결합(카프라의 물리학의 도), 심지어 해체론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대표적인 두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고 하고서 '해체론적 진화론'과 '인지과학적 불교'를 도마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해체론적 진화론'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앞에서 'deconstructionist evolutionism'을 '해체론적 불교'로 오역하는 바람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309쪽의 인용문에 나오는 건 '멋진 오역'이다. '멋진 오역'이라고 한 건 우스개이고 사실 오역이 아니라 원서에 잘못이 있는 드문 경우다. 지젝이 데넷의 <해명된 의식>에서 인용한 대목: "'서사적 중력장의 중심으로서의 자기라는 생각'이 아직 내 독자적 사상으로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이미 어떤 소설이 그걸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심경이 얼마나 복잡했겠는지 한번 상상해보라. 그 책은 데이비드 로지의 <멋진 세계(Nice World)>였는데 해체론자들 사이에서는 이 책이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중인 모양이다."

문학이론가이자 소설가인 데이비드 로지의 <아주 작은 세상(Small World)>(영웅, 1991)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멋진 세계>란 책도 썼나 싶었지만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로지가 쓴 소설은 'Small World'와 'Nice Work'였다. 그러니까 데넷이나 지젝이 'Nice Work'를 'Small World'와 혼동하여 'Nice World'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겸사겸사 바람을 적자면 두 권 모두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그리고 또 데리다를 다루고 있는 312쪽에서 'differance(디페랑스)'를 그냥 '차이'라고 옮겼는데, 소리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지만 'difference'와는 구별해주어야 하므로 '차연'이라고 옮겨주거나 '차이' 옆에 원어를 병기해주어야겠다. 그리고 'animal nature'을 '생물의 본성'이라고 옮기는 건 좀 특이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동물론은 데리다가 말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주제이다). 340쪽에서도 '주체적 입장(subjective position)'은 문맥상 '주관적 입장'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더불어 지적하자면 역자는 'existence'를 모든 경우에 기계적으로 '실존'이라고 옮겼는데 보통 일감은 '존재'다. '실존'이란 번역어가 적합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제한돼 있다. 'existence'의 번역은 내가 요즘 이론서 번역의 수준을 가늠하는 한 가지 지표이다). 그리고 343쪽에서 '부상하는 질서(emerging order)'는 '창발적 질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다. 린 마굴리스와 프리고진 그리고 복잡성 과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끝으로 흥미로운 내용 한가지. 현실과 허구(쇼)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결론에서 지젝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에 있는 마을 '셀러브레이션'이다. 디즈니에서 만든 '기획마을'인데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2,700여명이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미국식의 아담한 전원풍 마을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는 이 마을의 거주자들 또한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거나 혹은 '자신들의 삶을 무대 위에서 살고 있다. 텔레비전은 우리의 실제 사회적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어떤 허구적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도피적 오락거리로 제공한다고 여겨져 왔다 - 하지만 '리얼리티 쇼'에서는 마치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적 허구로 제공되고 레크리에이션(재-창조)되는 것만 같다... 어떤 면에서, 하나의 원이 그렇게 닫혀버린다."(384-5쪽)

인용문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은 'real-life re-creation'의 번역이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듯한, 이 가장 '전체주의적'인 마을이 '당신이 영혼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축복받은 마을'이라는 건 뭔가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나? 미국인들의 수수께끼?..

08. 02. 08.

P.S.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대해 시사IN에 쓴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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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8-02-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주문해 놓고 있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듯싶습니다. 사시인에 쓰신 것도 잘 읽었구요. 물론 저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고요. ^^ 퍼갑니다. 감사감사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마니 받으시구요.

로쟈 2008-02-10 13:20   좋아요 0 | URL
^^
 

스튜어트 홀과 문화정치에 관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대처리즘과 이론적 지반으로서의 그람시, 바흐친/볼로시노프의 책들도 몇 권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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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스튜어트 홀
제임스 프록터 지음, 손유경 옮김 / 앨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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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스튜어트 홀 지음, 임영호 옮김 / 한나래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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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은 없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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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대성과 현대문화- 문화교양 5
스튜어트 홀 외 지음, 전효관.김수진.박병영 옮김 / 현실문화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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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주목받지 않은 지난주의 신간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좌파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2008)이다.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1999)이라는 논문모음집과 몇 권의 교재용 공저가 출간된 적은 있지만 그의 단행본 저작이 소개되는 건 이번에 처음인 듯하다(두 책은 역자가 같다). 두툼한 고가의 책이지만, 그리고 20년전 저작이지만, 손에 들어볼 마음이 생기게 하는 건(사정상 도서관에 들어오길 기다려봐야겠지만) 역시나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라는 한국적 정세와 관련이 있다. 관련기사의 초점도 거기에 맞춰지고 있다.

한국일보(08. 02. 05) 노동자·농민·88만원 세대는 왜 좌파를 등졌을까

중소자영업자, 노동자와 농민, 88만원 세대들…. 좌파진영에 표를 던져야 할 이들은 왜 보수정권의 등장을 염원했을까?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귀결된 지난 대선은 좌파진영에 심각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성별, 지역,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투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 노동당 정권의 경제실정을 비판하며 장기집권(1979~1990)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출현을 연상하게 한다. 대처의 성공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경제드라이브의 성공 때문이었을까?

최근 발간된 영국의 좌파 문화 이론가인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발행)는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대처리즘의 성공요인을 들여다본다. 경제정책의 성공 뿐 아니라 대중의 도덕적 복고주의를 자극함으로써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전통적 계급장벽을 뛰어넘은 이 같은 성공을 저자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대처는 탈학교화, 관용적 교육 등이 떠받들여지던 학교현장에 높은 교육수준의 회복과 권위의 수호 같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고, 권위와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필요하다면 도덕적, 법적 무력을 정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부과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전파시켰다.

좌파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헤픈 국가가 벌지도 못하는 부를 함부로 써버리고 일반인들의 자립을 해친다”는 담론으로 대항했다. 또한 복지정책의 수혜자를 사회가 주는 혜택으로 살아가며 제 몫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자신들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치환해 인종주의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런 도덕적 리더십을 포기한 좌파정당은 정책의 유효성과는 별개로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 타임스> <선> <이코노미스트> 같은 대중매체들의 도덕주의 전파도 대처리즘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그렇다면 좌파들이 대처리즘의 성공에서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계급정치에서 탈피해 문화적 주제에 주목해 대중을 블록화하는 방식으로 지지를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역자인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홀은 1980년대의 영국사회라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분석은 시공간차이를 넘어서 문화의 정치성을 주목하게 한다”며 “진보 역시 전통적 지지자를 결집하기 보다는 이른바 전통적인 진보세력 속에 내재한 보수적 요소(인종주의, 가부장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성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8. 02. 07.

P.S. 대처리즘 이후를 장식한 건 18년만에 정권을 탈환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이다. 알다시피 그가 기치로 내건 건 '제3의 길'(기든스)이다. 홉스봄과 스튜어트 홀의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은 <제3의 길은 없다>(당대, 1999)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블레어 정권의 1년 6개월간의 공고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그가 드러내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에 대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비판과 지지라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비시키고 있다. 특히 영국의 대표적 사학자 홉스봄과 문화이론가 홀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제3의 길이 허구임을 비판한다." 지난 30년간의 영국 정치사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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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2-07 21:39   좋아요 0 | URL
우연히 이 블로그를 알게 되어 작년말부터 찾아오고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나, 나이 40이 넘어 직업과 관계없이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만, 책 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제가 이 블로그 이야기를 했더니 제 처가 로쟈선생님께 몇 달 전 미학 강의를 한 동안 들은 적이 있다 하더군요.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로쟈 2008-02-07 21:44   좋아요 0 | URL
앗, 한 다리 건너면 '2촌관계'쯤 되는 건가요?^^ 책값 때문에 애를 먹는 건 저도 마찬가지고요(거기에 '공간' 문제도 심각합니다).--; '제3의 길'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MEME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책들과 자주 만나는 한해가 되시길...

박균호 2008-02-08 08:47   좋아요 0 | URL
MEME님..방갑습니다. 저도 40넘은 나이에 공부를 해보겠다고 이곳 저곳 알아보고 있는 처지라서 더욱 방갑네요. 로쟈님의 리뷰보러 자주 들립니다만 여기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교육대학원을 이미 졸업해서 무슨 대학원을 또 갈까 고민중입니다. 경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어서 제약도 많고요. 저도 물론 직업과는 상관없는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고요. 로쟈님이 혹시 이 글을 본다면 괜찮은 분야를 소개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고요. 여튼 복많이들 받으세요.

로쟈 2008-02-08 10:42   좋아요 0 | URL
인문학은 누굴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40넘은 나이에' 할 만한 공부라면 삶을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한 공부여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제가 아는 분야야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역사나 고전학 분야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관심사에 따르시면 되지 않을까요...

모래한알 2008-02-08 09:02   좋아요 0 | URL
파크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뜻에 맞는 공부의 길을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정진하겠습니다.
 

어제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 등을 구입하러 교보에 나갔다가 덩달에 손에 든 책은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다. 근간예정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출간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가 워낙에 조야한 수준의 번역을 선보인 터라 불만스러웠는데(내가 올려놓은 40자평이 상품 페이지에서 지워졌다) <감성의 분할>은 일견 깔끔해보인다. 영역된 그의 책들을 대부분 모아두었던 터라 개인적으로 반갑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도 될 듯하다. 몇 차례 관련기사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랑시에르와 함께 아감벤의 책들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들리는 바로는 국내 인문출판사들이 두 사람의 저작 판권을 앞다투어 사들였다. 지젝의 경우와는 달리 조잡하지 않은, 제대로 된 책들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이왕에 수입하는 철학이라면. 가장 최근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8. 01. 28) "민주주의가 사회적 소수자 배척한다”

프랑스의 자크 랑시에르(68),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66). 올해 국내 철학계에 이 두 철학자의 바람이 예고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학자의 책이 잇따라 번역 출간되고 초청강연회가 열리는 등 집중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두 학자는 2000년대 들어 서구 사상계에서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랑시에르는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를 넘어,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넘어 ‘새로운 사유’를 구축해 가고 있는 학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세계 주요 학술 행사의 초청 1순위를 다투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들의 바람은 이미 일어난 상황. 원서로 두 철학자를 접한 사람들이 블로그를 통해 이들의 철학을 알려왔으며 “이 같은 학자들이 왜 여태껏 소개되지 않고 있는가”라며 번역서 출간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랑시에르는 이달 초 저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가 번역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실체와 의미를 조명한 책이다. 이어 그의 대표작 ‘미학의 정치’가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도서출판 b)라는 제목으로 다음 주 출간된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길), ‘불화’(〃), ‘무지의 스승’(궁리) 등도 현재 번역 중이다. 랑시에르는 올해 말경 한국을 찾아 강연회를 열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감벤의 철학은 2월 초 국내에 본격 소개된다. 새물결 출판사는 대표작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5권 연작 출간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권을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부제로 2월 초 발간할 예정이다. 또 다른 대표작 ‘열림: 인간과 동물’, ‘남겨진 시간’ 등도 번역 중이다.

 

랑시에르의 사상적 특징은 어떤 학문적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 그는 좌파 철학자 루이 알튀세의 제자였지만 1974년 ‘알튀세의 교훈’이라는 비판서를 통해 사상적 결별을 선언한 뒤 철학 사회학 역사학 미학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를 번역한 오윤성 씨는 “선배 철학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때문에 ‘반목의 철학자’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랑시에르는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현대 사회에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이들이 있는데 민주주의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평등을 주장해 왔다”고 지적한다. 인도의 수드라(카스트제도의 최하위 계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비롯해 일본의 최하층민인 부라쿠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랑시에르는 철학마저도 소외된 이들을 외면해 왔다고 비판한다.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아감벤도 배제되고 소외당한 이들을 주목한다. 대표작 ‘호모 사케르’의 제목은 ‘벌거벗은 생명’으로도 해석되며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아감벤은 ‘예외 상황’이라는 개념을 덧붙여 권력이 유발하는 소외 문제를 지적한다. 위기가 닥치면 정부를 비롯한 권력자는 ‘예외 상황’임을 들어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한다는 것이다. 나치의 지배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다.

Remnants of Auschwitz: The Witness and the Archive

사회철학자인 이들은 학문적 사상적 특징 외에도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랑시에르는 2007년 프랑스 대선 때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가 “랑시에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들었다”고 말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감벤도 미국의 강연 요청이 잇따르고 있지만 지문 등 생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미국의 입국 제도가 있는 한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금동근 기자)

08. 02. 06.

P.S. 참고로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영역본 대부분은 알라딘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오늘에야 안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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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랑시에르의 새 번역본은 빨리 입수해서 살펴봐야겠군요.

로쟈 2008-02-06 22:23   좋아요 0 | URL
람혼님의 페이퍼가 좀 늘어나겠군요.^^

테렌티우스 2008-02-07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La haine de la democratie인데 haine가 haime으로 되어 있네요, 그것도 표지인데 좀 어이 없군요...

로쟈 2008-02-07 23:07   좋아요 0 | URL
일종의 징후이구요, 번역은 더 가관입니다...

주니다 2008-02-1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은 무사히 보내셨는지? 전 본가에 가서 잠깐 의무방어만 하고 후딱 내려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던 집도 불편해서요 ㅎㅎㅎ 어제 시내 나간 길에 '감성의 분할'을 사들고 들어와서 조금 읽어봤는데, 매끄럽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더군요. 머리에서 쥐가 나면서 감성이 분열되는 느낌을..^^ 로쟈님께서 빨리 길 안내를 좀 해주셔야 할 듯 합니다...

로쟈 2008-02-10 14:40   좋아요 0 | URL
위험한 데 간 건 아니어서 '무사히' 보냈습니다. 밀린 일들이 암담하지만.^^; <감성의 분할>은 영어본을 학교에 둔 것 같아서 번역을 확인해보는 건 며칠 뒤로 미뤄질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본을 몇 쪽 봤는데 머리에 싹 들어오진 않더군요...
 

미디어오늘에서 '강유원의 Book소리'를 옮겨온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255). 이달의 책으로 올려놓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를 다루고 있어서다(오늘 교보에 나갔었지만 책은 구경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권도 비치돼 있지 않은 것인지?). 겸사겸사 요즘 문제가 된 '영어몰입' 교육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있는데, 십분 동감한다.

미디어오늘(08. 02. 05) 번역·일본·단테의 신곡

요즘 대통령직 인수(引受)위원회인지 국민에게 인내심을 닦게 하는 인수(忍修)위원회인지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다. 시끄럽다가 드디어 아주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영어 교육에 관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정확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에 대해 한마디 보탤 마음은 없다. 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번역이 앞선 나라다. 그러면 왜 이렇게 번역을 열심히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보겠다. 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라는 사람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바바 다쓰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 일본은 ‘번역주의’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뭐든지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을 하면 뭐가 좋은가. 자기네 나라말로 편하게 읽으니까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번역이 습관되면 그것은 단순히 문헌번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물 전반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번역주의는 세월의 두께를 얻으면서 서구의 근대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된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힘일 것이다.



이런 번역의 성과가 잘 드러난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우선 이 책 뒤에는 1910년대 이후 일본에서 출간된 ‘신곡’ 완역본 목록이 나와있는데 15종이 넘는다. 이 책은 15회에 걸친 이마미치 교수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엔젤 재단이 개최한 이 강연은 끝난 후 매회 바이올린 연주와 다과회를 함께 열었으며, 단테와 관련있는 이탈리아 포도주도 마셨다고 한다. 청중석에는 학계의 인사나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쇼와 전공 주식회사 최고고문과 같은 이도 참여했다. 비디오 촬영과 강의 녹음은 후지제록스 종합연구소가 담당했으며, 그것에 후지제록스의 회장과 사장이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책이 출간된 경위를 적은 저자 후기를 읽다보면 부럽다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이마미치 교수의 이 강연은 일본이 학문에 있어서도 이미 선진국에 올라섰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고대 희랍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서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청강자들은 알아듣는 외국어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다양한 종류의 일본어 번역본들을 놓고 필요에 따라 골라가며 읽는다.

전문 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해놓은 덕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외국인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주고받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흥미진진하게 습득한다. 2007년에 한국에서 클래식음악 돌풍을 불러일으킨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 것은 또 어떤가. 이런 게 되어야 선진국인 것이다.

30대 후반의 새파란 나이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거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까지 역임한 이경숙 위원장은 orange juice(나는 영어 발음이 엉망이니 그냥 로마자로 적겠다)를 앞에 두고 서양인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가.

혹시 ‘신곡’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영어번역본으로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의 총장이면 이 정도는 자연스럽게 떠들어줘야 기본을 갖춘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그것이 기본이라고 스승에게 배운 적이 있는가. 발음이 엉망이어서 선진국 못된다는 그 발상, 한마디로 상스럽다.(강유원_철학자)

08. 02. 05.

P.S. 이마미치 교수의 책으론 <동양의 미학>(다할미디어, 2005)이 더 번역돼 있다(중국과 일본의 전통미학을 다루고 있는데, 와병으로 한국에 관한 장은 마저 채우지 못했다고). 간단히 소개된 약력으로 보면 그는 "192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8년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을 거쳐 파리대학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1962년부터 동경대학 문학부 교수를 지내고, 1982년에 정년 퇴직했다. 1996~1999년 파리대학 국제연구소 소장, 국제 형이상학회 회장, 국제 미학회 명예회장, 국제 에코에티카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기억에는 박이문, 정명환 교수 등의 책에서 이름을 본 듯하다.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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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8-02-06 00:09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신곡은 지난주에 주문하고서 미리 볼겸 교보에 갔을 때도 품절 상태여서 실망스러웠는데, 아직도 갖춰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실제로 책을 받아보니, 알라딘 미리보기에서와는 달리 단테의 옆얼굴 초상이 들어간 부분은 책 표지가 아니라, 책의 케이스라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실은 신곡강의에 단테 초상이라는 디자인이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라서 재미없다 싶었거든요. 실제 책 표지는 좋은 질감의 깔끔한 백색이라서 공들인 책이라는 느낌이 제법 들더라구요. 신곡은 사놓은지는 오래인데 아직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 이 책을 읽을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머리맡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기분이었습니다. 발간소식을 듣고서부터 워낙 기대했던 책인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로쟈님께서 학술원 회원님들께 원하시는 저작은 '신곡 강의' 같은 책인가요? 아니면 '동양의 미학'같은 책인가요? 두 책의 차이도 잘 모르지만, 괜한 궁금증이 들어서요. 제 생각엔 신곡강의가 그 난이도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열려있다면, 동양의 미학은 역시 그 수준과 상관없이 비교적 학자들 사이의 저작이라는 느낌입니다.

로쟈 2008-02-06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연휴가 끝나야 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 건 <단테 신곡 강의>를 염두에 둔 것이긴 한데 <동양의 미학>도 상관은 없겠다 싶습니다. 학술적이긴 하나 '교양서'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요...

드팀전 2008-02-06 00: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새해에 드린 복이 조금 부족했다면 설날 다시 담아서 보냅니다.
지젝이 저를 즐거움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미로에 빠지게도 하는군요.켁켁...
명절 연휴에 서울 본가에 가고 또 처가에 가고 바쁩니다.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잠깐 책이나 볼 수 있을까 싶군요...읽던 지젝은 명절과 어울리지 않아서 데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 달린 수잔 손택의 서문을 화장실에서 봤는데...대단한 펌핑이군요.

설 연휴 평화롭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8-02-06 00:42   좋아요 0 | URL
네, 드팀전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명절과 어울릴 만한 책은 저도 찾기가 어렵네요.^^; 손택의 서문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쓰려고 했다가 몇 주째 미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문학은 자유다>에도 수록돼 있는데 비교해서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람혼 2008-02-06 00:56   좋아요 0 | URL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이 말을 오늘의 명문(明文)으로 꼽고 싶군요.^^

로쟈 2008-02-06 11: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40대만 돼도 그냥 서열로 '원로급'이 되는 분들이 많아져서요. 학자는 '학식'과 '업적'으로 원로가 되어야 하는데...

수유 2008-02-06 11:10   좋아요 0 | URL
저도 교보에 갔다가 없어서 영풍에서 구입했습니다. 딱 2권 있더군요...

로쟈 2008-02-06 11:53   좋아요 0 | URL
동네서점도 아니고 교보에도 없기에 좀 어이없었습니다...

이름없는괴물 2008-02-06 11:24   좋아요 0 | URL
얼마전 일본 가서 정말 놀랬습니다. 일본의 교보문고라는 기노쿠니야에 갔더니 정말 놀랄 노자더군요. 우리나라엔 기껏해야 주저만 근근히 번역된 철학자들의 전집이 없는 게 없더라구요. 칸트 전집, 헤겔전집, 플라톤 전집, 하이데거 전집, 라이프니츠 전집, 자본론 2종, 중세 철학 전집, 키케로 전집 등등등... 정말 일본어가 배우고 싶은 순간이었고, 우리나라와 격차를 실감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2   좋아요 0 | URL
'학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해서 좀 회의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륀지'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바벨의도서관 2008-02-06 11:36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저작 중에 [에코에티카](솔출판사)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재밌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어판 서문도 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억이 나네요. 얇은 책이었는데. 한국 학자들과도 교분이 많은 분이죠...

biosculp 2008-02-06 12:09   좋아요 0 | URL
요즘 인수위에서 시작된 영어논란의 편차가 너무커서 종잡을수가 없네요.
십몇년전 부터 영어학하시는 분들은 실용영어를 주장하셨는데, 그정도 영어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것이고요. 더불이 시험제도자체를 바꾸어야 되는것도 애기를 하구요.
그렇다고 영어애기 나오기 전에 한국번역상황이 뭐 좋은것도 아니고, 앞으로 좋아질것 같은 희망이 크게 보이지도 않고요.
인수위 얘기가 워낙 우좡좌왕이지만 비즈니스나 실용영어 애기하는데 단테의 신곡번역얘기하는것이 뭔가 어긋나는것 같기도 하고요. 종잡을수가 없네요.
아예 영어 애기에 공무원시험에 영어 없애도 되지 않냐 이런 애기가 더 맞는것 아닌가도 생각이 되고요.
민추가 국가기관이 된것도 작년이고 대학에서 번역으로 학위준다고 신문에서 본것이 작년인것 같은데.

로쟈 2008-02-06 22:22   좋아요 0 | URL
영어를 잘할 수 있게 하겠다는 건 좋은데, 그게 가능한지 그리고 '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의견들이 다른 것이죠('1000단어 회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한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모국어라 할지라도). '오렌지' 건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는 건 요즘 힘깨나 쓰는 발언자들의 비상식적인(천박한) 문제의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늘 뉴스를 보니 '고1학생'도 잘 지적을 했더군요. 저는 도구적인 언어관 자체부터가 지극히 '비즈니스-후렌들리'한 상(商)스러운 이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