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다룬 바 있다. 그의 책들이 올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90626).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이어서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 연이어 출간됐고 앞으로도 몇 권의 책이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어떤 책들인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겨레의 리뷰를 길잡이 삼아 읽어보실 수 있겠다. 

한겨레(08. 02. 16) '반목의 철학’ 랑시에르의 ‘배제된 자를 위한 정치’

자크 랑시에르(사진)가 국내 지식계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철학자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익숙한 관념에 매달리는 사고의 관성을 깨뜨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여는 일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될 수 없다고 믿는 듯하다. 흐릿한 안개 속에 겨우 윤곽만 보인 랑시에르의 철학적 사유를 좀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 한 달 사이에 잇따라 번역됐다.

먼저 나온 2005년 저작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와 이번에 출간된 2000년 저작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랑시에르 저작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랑시에르를 공부한 오윤성씨가 번역한 〈감성의 분할〉은 옮긴이의 소개문과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랑시에르의 교훈’), 그리고 랑시에르 용어 해설을 부록으로 달아, 랑시에르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1940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랑시에르는 전형적인 ‘68혁명 세대’ 좌파 이론가이자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주창자 루이 알튀세르 문하 출신의 철학자다. 65년 알튀세르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에 공저자로 참여했던 랑시에르는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알튀세르를 떠나 프랑스 마오쩌둥주의로 옮겨간다. 그를 유명인사로 만든 사건은 〈알튀세르의 교훈〉(1974) 출간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알튀세르가 자신의 지적 지배 위치를 지키고 지식 엘리트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비난했다. 학문적 부친 살해라 할 이 책을 통해 그는 옛 스승 알튀세르와 떠들썩하게 결별했다. 이런 거침없는 도발 때문에 그는 ‘반목의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철학적 사유의 여정은 대체로 ‘정치’와 ‘미학’ 두 단계로 나뉜다.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에서부터 그의 정치적 사유가 응집된 〈불화〉(1995)까지가 ‘정치’ 단계라면, 96년 이후 문학·영화·예술에 관한 저술들은 ‘미학’ 단계를 이룬다. 이 미학 시기에도 그는 정치철학적 저작들을 몇 권 펴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그 가운데 하나다. 또 같은 시기에 출간한 〈감성의 분할〉은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미학과 정치를 동시에 주제로 삼은 저작이다.

랑시에르 철학의 독특한 영역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낯익은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재해석에서 발견된다. 통상 자유주의 정치세계에서 정치는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런 과정은 정치가 아니다.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사이의 통치 행위일 뿐이다. 그의 용어로, 이런 정치 과정은 기존 사회질서 유지를 목표로 하는 ‘치안’에 해당한다. 진정한 정치 또는 본래의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기에 귀족과 교회의 지배에 대항했던 ‘제3계급’이 그런 주체화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은 정치의 본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귀족계급 또는 과두지배자들에 맞선 ‘데모스’(인민)의 등장이야말로 정치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주체화란 지배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자신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본래의 정치’다.

〈감성의 분할〉은 그런 정치의 문제를 ‘미학’(감성학)의 엑스레이를 투과해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서 ‘감성’이란 감각되고 감지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오감을 통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 감성이 분할된다는 것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나뉘어 어떤 부분이 배제된다는 것, 그리하여 존재하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한다. “말하는 동물(곧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노예는 ‘말하는 동물’에서도 ‘정치적 동물’에서도 배제돼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배제를 뚫고 일어서 자신이 언어를 되찾고 자신을 보이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랑시에르적 정치다.

지젝은 랑시에르 철학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의 사유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좌파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그의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는 저항하기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수의 견실한 개념화들 가운데 한 가지를 제안한다.”(고명섭 기자)

08. 02. 15.

P.S. 서두에 언급된 대로 랑시에르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무얼 번역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감성의 분할> 또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해서 예전에 복사해놓은 영역본(<미학의 정치학>)을 지난주부터 찾았지만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갑갑합을 달래려면 한번 더 복사하든지 해야 할 모양이다(그렇게 되면 세 번 복사하는 것이 된다. 분량은 100여 쪽에 불과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역시 나는 영어본을 두 번 복사해야 했다. 먼저 복사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당장 손에 들었을 때 읽고 정리해놓지 않으면 기억과 시야에서 멀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뒤적여서야 겨우 영어본을 다시 찾았다. 몇 자 적기 위해서이다.

국역본의 경우 나는 지난달에 30-40쪽 정도 읽다가 덮어버렸다. 교정해가며 읽을 만한 수준도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적은 40자평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그 이상의 오역을 읽게 될 것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30514)인데 이게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는 게시물"이란 역자의 항의에 따라 블라인드 처리됐다. 알라딘의 방침이 그러하다고 하니 따로 왈가왈부하진 않겠다. 대신에 나대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내 판단의 몇 가지 근거를 나열하는 것이 그 '대응'이다.

'서론'에서 랑시에르는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프랑스 사회에서 벌어진 몇 가지 현상들을 나열한다(이 책의 불어본은 2005년에 나왔다). 그 중 하나가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14쪽)이고 영어본에 따르면 이것은 "a Grande E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s"을 옮긴 것이다. 믿기지 않는 노릇이지만 역자는 'Grande Ecole'을 '초등학교'로 옮긴 것이고 이건 그가 '그랑제콜(그랑제꼴)'이 뭔지도 모른다는 게 된다(불어책을 번역한다는 역자가 어떻게 프랑스 학제의 기본 상식도 모를 수 있는가?). 

알다시피 '그랑제콜'은 '초등학교'이기는커녕 '대학 위의 대학'으로 프랑스의 소수정예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그러니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지만 나름대로 진실, 무의식적인 진실을 드러내주긴 한다. '그랑제콜' 수준의 책을 '초등학교' 수준으로 번역해놓고 있다는.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한 그랑제콜은 대안적인 입학제도를 도입했다" 정도이다. 그렇게만 적어놓으면 프랑스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지만 우리에겐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영어본 주석에 따르면, 2001년초에 정치분야 그랑제콜의 하나인 '씨앙스포(Sciences Po)'가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대안적인) 입시안을 도입했다고 한다. '학력' 외에 다른 변수를 고려한 것이고(가령 서울대의 농어촌 특별전형 같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에의 요구'들을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결부시킨다("이게 다 민주주의 탓이야!"). 물론 이런 정황에 대해 역자가 이해하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어지는 번역이 이렇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신선한 화두는 아니다.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만큼이나 이에 대한 증오 역시 오랜 세월 쌓여왔다. 그렇기에 이 용어는 생성과 동시에 용어 자체에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15쪽)

"Hatred of democracy is certainly nothing new. Indeed it is as old as democracy itself for a simple reason: the word itself is an expression of hatred."(2쪽)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영어본에 따르면 그저 '단순한 이유'란 뜻이다. 대체 어떤 번역으로 읽는 게 수월한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분명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그러한데,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건 그 부연설명인데, 아무리 '번역'이라고 해도 우리가 꼭 이런 식의 한국어 문장을 읽어야겠는가?

"최초에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는데, 거기에는 극천박한 대중정부에 의해서 정당한 위계질서가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한 그리스인의 경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사람의 권능에 비례해서 호칭되고 출신가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사람들의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It was, in Ancient Greece, originally used as an insult by those who saw in the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 the ruin of any legitimate order. It remained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everyone who thought that power fell by rights to those whose birth had predestined them to it or whose capabilities called them to it."

영어본에 준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원래 다수(데모스)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에서 모든 합법적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말이다. 권력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워진 자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자들에게만 속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말은 혐오와 동의어로 남았다."

'익명적 다수'를 뜻하는 'multitude'는 요즘 '다중'(네그리)으로 옮기지만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를 그냥 '다수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라고 풀어서 옮겼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에게 '다수의 지배'는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이다(혹은 반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그렇겠다. 민주주의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론 과두제 아니냐는). 참고로, 민주주의의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데모스demos는 '사람들(people)' 곧 '어중이떠중이'을 뜻하고 크라토스kratos는 '권력(force, power)을 뜻한다. 그걸 결합한 '데모크라시'란 고대 그리스에서 일종의 '욕'이었다는 것. "에잇, 민주주의 같으니라구!" 

"그런데도 이 용어는 인간 공동체 편재(遍在)의 유일한 합리적 근거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15쪽) "And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 construe revelations of divine law as the sole legitimate foundation on which to organize human communities."

역시나 말도 안되는 번역문이다. 불어본 구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본은 생략문이다.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라는 건 "it still is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those who-"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민주주의란 말이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고? 이런 엉터리 번역이 계속 존속하는 건 독자들이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개의치 않기 때문은 아닌가?(그래서 나는 역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본다. 독자들에게도 방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명예와 신망을 위해서 다시 옮기면 "그리고 민주주의는,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 공동체 구성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라고 간주하는 자들에겐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책의 제목 자체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혐오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번역본에서 간취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몇 걸음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이어서 민주주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대목.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 형국을 경험해 왔다. 민주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15-6쪽) "Alongside this hatred of democracy, history has born witness to the forms of its critique. Critique acknowledges something's existence, but in order to confine it within limits."

번역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여 둘을 동일시했지만 '증오'와 '비판'은 구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함께 역사가 보여주는 건 민주주의 비판의 형태들"이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무엇인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지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 비판의 두 가지 형태(양상)만을 더 따라가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체제의 두 가지 주요 양상을 혹평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실세로 인정받고 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길 원하던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이 그 한 양상이다. 또 다른 양상은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실제로부터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개념 추출을 지향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전형으로서, 추출된 개념의 균형과 그 효력 배합작업의 전형을 의미한다. 이렇게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미국 헌법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양대 축이란 최선정부(best government)와 소유자 위계질서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6쪽)

번역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형태(양상)가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과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으로 돼 있지만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두번째 비판의 형태의 아직 언급되지도 않았다. 인용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 전체가 한 가지 '양상'인 것이다. 이런 번역에서 대체 무얼 읽으라는 것인가? 역자는 '최소한의 성의도 인정하지 않는' 40자서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듯한데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성의'는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이런 함량 미달의 번역서는 내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을 영어본으로라도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There have been two great historical forms of critique of democracy. There was the art of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 who strove to make a compromise with democracy, viewed as a fact that could not be ignored. The drawing up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is the classic example of this work of composing forces and of balancing institutional mechanisms intended to get the most possible out of the fact of democracy, all the while strictly containing it in order to protect two goods taken as synonymous: the government of the best, and the preservation of the order of property."(2쪽)

문장이 조금 길어서 얼핏 난해해보이지만 국역본처럼 난감하지는 않다. 다시 옮기면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줄기가 있어 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한편으론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최선의 정부'와 '소유권 질서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엄격하게 한정한 고전적인 예이다."

'민주주의라는 현실'로 옮긴 'the fact of democracy'란 말은 '주어진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요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경우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더 큰 가치(재산)의 보호를 위해 제약하고 있다는 것. 민주주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의 존재 자체, 즉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과 대세는 인정하지만, 그 인정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제약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해서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 좋은 제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라는 구문이 민주주의 비판의 전형적인 틀이 되겠다(알다시피 유신 정권이 내세운 '토착적 민주주의'도 이와 동일한 구문과 논리를 갖고 있었다). 번역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한 대목만 더 읽어본다.

"이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은 성공을 거두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민주주의 세력의 성공 자양분이 되어왔던 것이다. 젊은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지배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여하튼 마르크스는 지금도 소진되지 않고 있는 한 표준 이념을 확립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인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행사 매개체에 불과하며, 이런 영향력 하에서 법과 제도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파악했었다."(16쪽)

"The success of that critique en acte naturally fuelled the success of its contrary. The young Marx had no troubles exposing the reign of property lying at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an constitution. The republican legislators had made no secret of it. But in so doing he was able to set a standard of thought whose resources have not yet been exhausted: the notion that laws and institutions of formal democracy are appearances under which, and instruments by which, the power of the bourgeois class is exercised."(2-3쪽)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비판자는 청년 마르크스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공은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비판을 유효하게 만들었다는 것. 'critique en acte'는 'critique in action'의 뜻으로 보인다. '진행/작동중인 비판' 정도일까.

다시 옮기면, "이러한 실효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그 반대파의 성공을 가져왔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토대에 소유권의 지배가 놓여 있음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한 가지 표준적인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 사상의 원천은 아직도 고갈되지 않았다.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일 뿐이고, 그러한 외양 아래서 혹은 그러한 외양을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관철되고 있다는 사상이다."

마저 읽어본다.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겉치레에 대한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이 되었지만,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17쪽) "The struggle against appearances thus became the path leading to 'real' democracy, where liberty and equality would no longer be represented in the institutions of law and State but embodied in the very forms of concrete life and sensible experience."(3쪽)

비교해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국역본의 번역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 여기서 제시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상을 과연 독자가 읽어내는 게 가능한 것인지? 다시 옮기면, "외양만의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그리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어본으로 치자면 서론의 두 문단이고, 분량으론 한 페이지 반 정도이다. 국역본은 시종 이런 식이니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오역학의 교재로서는 아주 유용하겠다.) 바로 이어지는 문단의 첫문장만 읽어본다. "이 책의 화두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민주체제의 어떤 모델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의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을지라도."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역자는 이런 문장에 '자신의 명예와 신망'을 걸 수 있는가?

영어본의 문장으론 "The new hatred of democracy that is the subject of this book does not strictly fall under either these model, though it combines elements borrowed from both."이다. 다시 옮기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 모델에 다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로부터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정도이고.

번역에 대한 새로운 증오가 솟구치기 전에 그만 적어야겠다(이후에도 각종 난이도의 오역들이 속출한다). 이런 식의 번역이라면 어떤 독자라도 관대하게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알라딘 관계자가 전한 역자의 말은 진의와 다르다고 하여 삭제함). 그냥 이 정도 번역이면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것인가?..

08. 02. 15-16.

P.S. 이 페이퍼 또한 역자의 요구에 따라 책소개 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입에 쓰면 뱉는다는 식인가 보다. 상식이 있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기 이전에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처분하고 개역판을 내야 한다는 게 나의 '몰상식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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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 / 02 / 29
    from Le mai 3 : The R Review 2008-02-29 21:20 
    방학동안 한 일이라곤 Monthly Review에서 몇몇 에세이를 들여다 본 것과,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영어로 조금씩 들떠본 것 밖에는 없다. 당장 오늘이 지나면 3월인데, 정말 손에 꼽을 만큼 한 일이 없다. 푸념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 랑시에르의 책을 읽다가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것 같아서 영어판을 비싼 돈 주고(!) 사 두긴 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 번역했겠지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xnekans 2008-02-16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이 나왔다기에 서점에서 살펴보다가, 책의 어느 부분에서 Ulrich Beck을 얼리치 벡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바로 던져두고 왔더랍니다. ㅎ 원래 저렇게 읽는 건가, 순간 자신없어지기도 했지만... ㅎ <감성의 분할>도 읽으면 읽을수록 미심쩍은 순간들이 종종 있더군요. 결국은 이러나저러나 영어본을 꺼낼 수밖에 없겠더군요. 후.

로쟈 2008-02-16 11:08   좋아요 0 | URL
색인에는 없어서 몰랐는데, '얼리치 벡'이라니 우습군요. '얼치기 번역'의 여러 징후들이라고 할 밖에요...

안용태 2008-08-20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책이 저렇게 오역 투성일 줄이야. 정말 관심이 많은책이라 사서봤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걍 내 무식을 탓하며 접었더랬죠.

근데 저런 오역이 문제였다니... 쩝... 할말이 없군요.

그랑제꼴을 초등학교로 옮긴부분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랑제꼴이 어떤곳인지는 정말 먼나라 이웃나라만 열심히 봤더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알라딘에서 저 책 소개엔 로쟈님 글이 안보이던데 블라인드 처리했을줄이야..

조금만 이글을 더 빨리봤더라면 국역본을 안사고 걍 영어본을 샀을텐데요..

로쟈 2008-08-20 07:53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보셨군요.^^; 참고로, 더 자세한 번역비평은 람혼님의 서재에 있습니다...

바르타쉐비치 2010-01-0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동안 랑씨에르를 탐독할려고... "감성의 분할","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무지한 스승", 문학의 정치","미학 안의 불편함"을 모조리 샀답니다. '감성의 분할"을 20장도 채 읽지 못하고... "문학의 정치"를 펴 들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나의 무지 탓이려니 하다가... 아침에 로쟈님 검색창에 랑씨에르를 쳤더니... 이런 글들이 있네요.
물려 달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아직 못 펼쳐 본 책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작년부터인가 '정조 바람'이 하나의 출판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데 올해도 그 바람은 계속 이어질 듯하다. 최근에도 '우리시대의 역사 이야기꾼' 이덕일씨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고즈윈, 2008)이 출간됐다. '정조'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시각에 관한 기사를 참고삼아 읽어둔다.  

 

한겨레(08. 02. 15) 정조 ‘문체반정’에 대한 학계의 두 평가

조선 22대 왕인 정조(1752~1800)에게는 ‘개혁군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규장각을 설치해 문예부흥을 이끌고 서얼을 등용해 신분 차별의 완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또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특권인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 모두가 ‘개혁’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잡문체라고 규정하고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문체 오염을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고증학과 패관소설 등 명말청초의 문집을 포함해 모든 서적의 수입을 금했다. 주자학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유와 지식을 담은 명말청초 서적들이 금서로 묶여 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안쪽과 바깥쪽〉(소명출판) 등에서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문체반정의 본질을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를 색출한다는 것”이라며 정조는 그가 다스리는 세상이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도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문체반정은 문예부흥 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정조의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라고 규정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사학(邪學) 종식’이라는 정조의 명분을 앞세워 실학자 등 개혁 세력 탄압에 나선다. 때문에 정조 사후 전개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에 정조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게 김 실장의 견해다.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고즈윈, 각권 1만2800원)에서 다른 견해를 폈다. 그에 따르면 문체반정은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면 탄압을 막고 당시 지배층인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깊은 노림수가 담긴 방책이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노론과 대립하고 있던 남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 소장은 문체반정의 시발이 된 시점이 양반 출신의 두 천주교도가 부모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도는 ‘진산 사건’ 때와 같은 점에 주목했다. 천주교 금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한 정조가 대신 패관소품과 명말청초 문집을 비판하면서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것이다. 천주교를 뜻하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천주교에 대한 전면 탄압을 피해 갔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문체반정으로 반성문을 썼던 관련자들이 모두 노론 가문 출신이었음을 강조했다. 자파 가문 출신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계속 적발되는 상황에서 노론이 더 이상 천주교 공격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는 게 이 소장의 해석이다. 그는 또 문체반정을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고한 성채 쌓기’라는 해석에도 이견을 보였다. 중국 서적 수입 금지는 중국 학문에 기대는 조선 사대부들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또한 우리나라의 책을 읽는 것이 마땅하다”(정조, 〈일득록〉 5)는 것이다. 특히 정조의 고증학 비판은 그 이단적 사유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장악한 청나라 지식인들이 현실을 비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과 무관한 고증학에 몰두하고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성리학자를 자처하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 북벌에 뜻을 두지 않고 청나라의 고증학에 경도되느냐”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정조가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 삼은 대목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정조의 내심은 박지원을 크게 등용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편 지어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라고 요구한 뒤 “(그렇게 한다면)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했다. 문임은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을 뜻하는 요직이다. 박지원과 같이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음관이 이 직위를 맡은 적이 거의 없으니 대담한 회유책인 셈이다. 이 소장은 또 박지원이 노론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예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면서 그가 5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고 마무리했다.(강성만 기자)

08.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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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에 교수신문 지면에서 벌어진 촘스키 논쟁을 옮겨놓는다. 소쉬르 전공자인 김성도 교수의 촘스키 비판에 대해서 촘스키 전공자인 장영준 교수가 반박하면서 논쟁이 오고갔다. 개인적으론 논쟁의 내용보다는 스타일에 관심이 있어서 읽어보게 된 글들이다. 자료 삼아 모아놓는다.   

교수신문(06. 06. 05) 학문비평 :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다

언어학 및 인지 과학 분야에서 촘스키 혁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의 매스를 가하는 작업은 아직도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인다. 촘스키라는 지성의 아우라가 여전히 심오하고 그가 쌓아올린 상징권력의 보루가 요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언어 이론을 한 때의 유행이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촘스키의 언어학 혁명이란 것이 도대체 존재한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72년 ‘촘스키 혁명’을 외쳤던 언어철학자 존 썰(J. Searl)은 2002년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서평 논문에서 촘스키 혁명의 애초의 목적은 변질되고 포기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이라는 진단을 내린바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지식 사회학자(Murray), 언어학사가(Koerner), 과학 철학자(Itkonen), 언어 철학자(Katz), 이론 언어학자(Botha) 등 촘스키 언어학 혁명의 역사적,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비판적 연구가 전개되었으나, 문제는 정작 이같은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생산적 대화를 촉진시켜야 할 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식 사회학의 관점에서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은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음을 실증적으로 밝혀내었고, 과학 철학의 시각에서는 촘스키가 주장한 언어학의 자연과학적 경험성이 근거가 없다는 점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 결과?
촘스키는 생성문법이라는 새로운 언어학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인지과학의 혁명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맹렬한 정치 평론가와 사회운동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그는 마침내 내년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내년이면 '작년'이었는데, 한국 방문이 무산된 모양이다). 하지만 촘스키에 대한 이같은 중간적 평가를 기축으로 그의 언어학에서의 업적에 대해서 국한시켜보더라도, 지극히 폄훼적인 입장에서 가장 예찬적인 담론에 이르기까지 촘스키 언어 사상의 평가는 다양한 평가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에 기초하여 서술하고 있는 최근의 부정적 평가에 따르면,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치부된다. 즉, 그가 누리는 과도한 평판과 명성은 인간의 이해에 대한 의미심장한 공헌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과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이 가해진다.

실제로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변화시키면서 촘스키의 혁명이라는 공표가 발설된 지 올해로 정확히 반세기가 흘렀는데, 이 기간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 탐사를, 컴퓨터의 발명을 통한 정보 혁명을 경험하였다. 흔히, 열성 촘스키주의자들이 비교 대상으로 삼는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그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

반면, 촘스키 언어학에서 성취된 결과물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과학사의 의미에서 진정한 독창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 부정적 평가의 시각이다.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이론적 정당성과 과학적 타당성이 입증되기도 전에, 그는 절대 다수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적 토대에 기초하여 생성 언어학이라는 동일한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자극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서 지난 50년 동안 단일 인물이 한 학문 분야의 지적 생산 방식을 독점한 것을 현대 언어학의 큰 손실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Beyond Chomsky’라는 웹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언어의 본질과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직면한 주요 장벽은 촘스키 패러다임의 지나친 형식주의적, 반경험적, 반역사적 영향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촘스키 이론의 진화는 정확히 10년을 주기로 새로운 이론들이 창발되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10년마다 종합된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거의 종교적 신앙을 연상시킬 정도의 맹목성에 기대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와 추진력으로 세계 언어학계에 자신의 이론을 유포 확산시켜왔다. 하지만 이 과정은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

특히, 언어를 포함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과 정신 활동의 모든 양상들에 대해서 그가 시종일관 적용하는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을 포함하는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다. 인간 언어가 내재적, 심리적 차원과 더불어 외재적이며 문화적 양상들을 엄연히 갖고 있다는 보편적 사실과 어긋나서, 촘스키 전통의 현대 언어학은 주로 내재적 차원(I-language)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생물학적 언어학의 시각에 따르면, 생성 문법은 ‘언어 기관’의 추상적 기술로서 간주되고, 인간 정신과 두뇌는 일정 수준에서 동일할 수밖에 없으며, 이 같은 이유에서 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의 공식에서는 정신/두뇌와 같은 표기법이 사용된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특정 문법 현상의 보편성을 찾아내어, 인간의 두뇌가 특정한 문법적 구조를 선호한다는 증거로 삼는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가설, 보편 문법은 생득적이라는 것과 인간들은 문법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언어 능력의 생물학적 토대를 대중들에게 유포시킨 사람은 그의 추종자이며 베스트셀러 심리학자인 핑커이다(주저 ‘언어 본능’에서 보편 언어의 생물학적 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 워프와 사피어의 언어 상대성 가설을 무력화시키는 논증 과정을 살펴보면서, 진정 이들 언어학자들의 문화 수준과 지적 양심에 강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생물언어학적 시각에서 궁극적으로 I-언어의 연구는, 최소한 원칙적으로 자연과학과 더불어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물리적 현실에 대한 이론들과, 우리의 정신적 능력들에 대한 이론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물리과학과 인지과학의 완전한 통일은 여전히 금시초문이며 언어와 인지에 대한 일방적 자연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 과학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촘스키 언어학이 물리학과 생물학과 같은 진짜 과학이었다면 과학적 성과의 미비로 이미 수 십 년 전에 재정적 지원을 상실하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미 실패한 이론, 대중에게 팔아먹어
중반기까지 촘스키 언어 이론의 추종자였던 레빈과 포스탈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에 따르면 촘스키의 업적 위에 쌓아올려진 저속한 찬양은 빈번하게 그의 초기 활동에서 이루어진 주장과 약속에 대한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라는 것이다. 촘스키의 대부분의 주장들은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아니면 그의 기대와 약속들은 전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이들 언어학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예들과 에피소드들을 명시할 수 없지만, 학문적 진리 탐구 규준에 대한 무시, 자기 선전, 비판자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언어 남용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촘스키의 비양심적 속임수 가운데서 최악의 것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마치 천재적인 발견인 것처럼 판별 능력이 없는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열심히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은 물리학의 용어를 빌려와 동사와 형용사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가벼운’, ‘무거운’ 문장 또는 ‘약한’, ‘강한’ 유인력 따위의 술어들을 사용하여 언어학의 과학성을 과시하려 한다. 이같은 제스처는 촘스키가 노출하는 또 다른 위선이다.

결국 필자가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너무나 과도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인물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비판을 회피해왔다는 점에서 이제 한국 학계에서도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준비할 계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촘스키 혁명이라는 신화가 기정사실로 고착화되기 전에 말이다.(김성도 고려대교수)

교수신문(06. 07. 02) "촘스키의 보편문법, 생물학적 증거 있다”

촘스키 혁명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비판(교수신문 제401호)에 대해 장영준 중앙대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김성도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과학사의 차원에서 독창적 패러다임이 아닌데다가, 촘스키의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소거해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고,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과 함께 촘스키에 대한 맹목적 찬양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평가를 제안하고 있다. 이에 장영준 중앙대 교수의 글과 그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답변을 함께 싣는다.(편집자주)

어떤 강연회에서 촘스키는 자신을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고 소개하는 사회자의 말에 대해 매스미디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촘스키는 자신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 뉴욕타임즈가 바로 같은 글에서 “그가 근거 없는 주장들을 일삼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떤 부분을 인용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타당성 있는 지적으로 성찰 계기돼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 김성도 교수의 글은 타당한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반가운 글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을 대하면서 떠오르는 첫 생각은 모든 언론의 본질적 위험에 대한 촘스키의 지적이 역시 일리있다는 것이다. 제목으로 뽑은 “침소봉대와 날조”, “비언어학자의 무비판적 수용”만 보면, 촘스키는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짧은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의 근거들을 김 교수가 낱낱이, 충분히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조”가 있었다면 이미 윤리적 차원을 떠나 실정법적 문제까지 초래되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매우 격렬한 단어들이 ‘남용’되었다는 소회와 더불어, 김 교수의 비판이 떠올리는 몇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의 결과인가. 김 교수는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이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평가를 인용한다. 촘스키 언어학의 전 세계적 파급과 영향력을 외적 요인의 결과로 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론의 우월성과 생명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의 언어학이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재정지원을 받고, 학술지들이 대거 창간될 수 있었겠는가. 김 교수는 또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 (중략) …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을 인용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독설이자 한 자연인에 대한 ‘독살’이다. 이러한 독설은 전적으로 촘스키 언어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판관의 실수로 보여진다. 잘 알려졌다시피, 촘스키는 기존의 언어이론 자체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그런 점에서는 그는 매우 독선적이고 오만하다). 때문에 기존의 언어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데카르트, 훔볼트, 예스페르센, 전통문법 등의 연구성과들에 그 모태를 두고 젖줄을 대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바꾼 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는 수많은 당대의 반대자들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을 수용하면서 이론을 보강해왔다. 비판자들과 생산적 대화를 게을리 했다는 김 교수의 말은 일면 수긍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둘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꽃피어온 지난 반세기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했을 뿐 아니라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실용인문학을 추구하는 김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하는 학문이 훌륭한 학문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언어학과 같은 연성과학(soft science)과 물리학 등의 경성과학(hard science)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촘스키 언어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사하로프의 물리학 이론이 수소폭탄으로 이어지며 엄청난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을 때 우리가 그를 훌륭한 학자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촘스키 언어학의 이론 내적인 문제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을 보자. 그는 촘스키의 이론이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말한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옳은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법칙들은 그쪽 분야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료하고 간단할지 모르지만 범인들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추상적일 것이다. 문제는 촘스키의 이론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에 있지 복잡하냐, 추상적이냐에 있지 않다. 이 점은 김 교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넷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시종일관 생물학적 결정주의에 빠져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 뿐 아니라 촘스키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촘스키는 언어를 내재언어와 외재언어로 구분하여, 자신의 연구가 내재언어를 대상으로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하여 촘스키에게 있어서 내재언어의 연구는 한 개인에 국한되는 ‘언어기관’의 연구이고 정신/두뇌의 연구이다. 언어학이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고전적 의미에서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생성문법이 더 이상 언어학이기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게 만드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언어학이 생물학으로 환원 내지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코퍼스 언어학이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도 보인다.

다섯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했다고 지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생물언어학(bio-linguistics)이란 용어가 회자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보편문법은 생득적이라는 주장, 인간의 문법은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은 촘스키 언어학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의 검증을 위해 많은 심리학자, 생물학자, 언어습득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여온 결과, 일부는 근거를 얻은 것으로 보이고 일부는 실패한 가설로 폐기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기존의 어떠한 이론보다도 강력한 학문적 역동성(dynamism)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론에 대한 정밀한 검증 필요
마지막으로 촘스키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대중에게 팔아먹었다”는 김 교수의 비판을 살펴보자. 서두에 언급된 존 썰(Searle)의 비판을 촘스키 혹은 그의 ‘추종자’들이 개의치 않는, 혹은 무시하는 듯한, 이유는 자명하다. 도대체 촘스키의 어떤 이론이 실패했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포스탈(Postal)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했다고 하지만, 막상 그는 여전히 생성문법의 틀 안에서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포스탈은 1995년 이후의 촘스키 이론 모델에 대해 반대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결국 그 분야의 전문가들일 것이다. 물론 전문가만이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김 교수가 언급한 인접 학문의 교수들이 과연 촘스키 언어학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김 교수가 우려하고 있듯이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분명 반성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학자들이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한 촘스키의 기대와 약속들에 현혹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촘스키 자신의 말대로 그는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거나 기대해왔지 추종자(followers)를 양육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업적에 대한 저속한 찬양은 금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각론적이고 정밀한 검증이 없이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실패한 이론을 천재적 발견인 것처럼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공격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이러한 공격은 촘스키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한 언어학의 진정성을 지금까지 점검, 보완, 반박해온 전 세계 수많은 언어학자들을 싸잡아서 비언어학자로 몰아붙이는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총론적 비판이나 단죄에 앞서 각론적인 점검이 수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촘스키가 “학문적,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란 평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전대미문의 어마어마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 인물에 대해서 이제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해야 한다는 김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좀 더 구체적인 논쟁이 양산되기를 기대한다.(장영준 중앙대 교수)

교수신문(06. 07. 02) “구체적 증거 보여달라” … 비판적 언어학 수용사 필요

장영준 교수의 반론을 읽고 난 후 필자의 비평이 최소한 절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 사상의 균형 잡힌 평가의 필요성을 수긍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소 존경하던 국내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인 장 교수가 자신이 수십년 동안 꾸준하게 연구해온 이론적 패러다임의 창시자에 대한 다소 자극적인 수사와 가파른 언어에  대해서 비교적 차분하게 반박 논리를 전개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하지만 그 짧은 글을 통해서 필자가 궁긍적으로 던진 물음의 본질은 거의 전혀 감지되지 못했고, 대부분의 문제 제기는 필자가 사용한 표현들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실상, 장 교수가 강조 표시를 하면서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자극적 독설들은 필자의 것이 아닌, 反촘스키 진영에서 피력된 표현들이다. 더구나 이같이 거친 표현들을 사용한 학자들은 촘스키 언어학을 수십년 동안 추종하고 전파했던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비판의 본질 접수되지 않아 아쉽다”
필자는 다만, 지금까지 예찬 일변도나 백과사전식 상투어들을 지양하고, 기존의 찬동 일변도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필요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논증 전략의 차원에서 그같은 반대 주장을 先텍스트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촘스키가 어떤 절대적 신화가 아닌 이상, 그가 지난 50년 동안 받아온 온갖 찬양과 흠모의 수사에 못지않게, 그의 학문적 성취의 진정성과 의미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논의는 원칙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의 따분함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장 교수가 반론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역반박을 가하는 수순을 밟는 대신 장 교수가 제기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이어서 이 짧은 지면에서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본질적 문제를 다시 환기시킬 생각이다.

먼저 장 교수는 물론, 독자들에게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장 교수의 비평을 보면, 필자가 反촘스키 진영에 서서 그의 지적 성취의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처럼 비춰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가 처음 언어학을 접한 80년대 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촘스키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언어학자들에게 넘어야 할 높은 산이요, ‘문제’ 그 자체이다. 아울러 그가 20세기의 인지과학 혁명을 촉발시킨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기실, 그가 제기한 세 가지 언어학의 과제, 언어의 기원, 언어 능력, 그리고 언어의 사용은 언어 연구의 본령이요,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언어학의 창립자이자 문화과학의 패러다임을 창발시킨 소쉬르가 제시했던 언어학의 3대 과제인 언어의 관찰과 기술, 일반 법칙 추론, 언어학 자체의 한계 설정 및 본질 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시각에서 이들 세 가지 과제들은 섣부른 보편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상의 기술과 설명, 보편과 특수의 미묘한 변증법을 예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촘스키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번째, 과제는 바로 언어학 이론 자체의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철학적 메타적 성찰과 자기 반성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가 시도한 언어학 이론의 비평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면 관계상 장 교수가 제기하는 문제를 모두 답할 수 없어 몇 가지 문제만을 재론한다.  첫째,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성공 요인으로 제시한 제도적 사회적 요인들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 지식의 성공 요인이 이론 내재적 내용과 제도적 여건들 사이의 상호 종속적 관계에 있다는 지식 사회학의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근대 언어학의 제도화 과정을 지식사회학 관점에서 고증한 암스테르담스카(Amsterdamska)의 노작을 참조하기 바란다). 예컨대, 촘스키가 MIT에서 언어학과를 창립하고 초기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것은 촘스키 이론 그 자체의 과학적 탁월성 때문만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정보 처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방성이 자연언어의 자동 번역이라는 국가적 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미 국방성에서 연구비 받은 촘스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본산지로 그렇게 맹렬하게 비난했던 미국방성으로부터 그 자신은 물론 생성 언어학 연구의 상당수가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는 아이러니이다. 심지어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교수 초기 시절 보수의 절반 가량을 국방성으로부터 받았으며, 실제로 군사적 연구와 거리가 먼 언어학의 성격을 변질시켜 가면서까지 연구비를 수주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음을 스스로 발설한 바 있다.

둘째, 장 교수는 필자가 인용한 ‘인접학문의 교수들’이 촘스키 언어학에 대해서 정통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두면서 그 비판의 적효성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들 언어학사가, 과학철학자, 전문 언어학자, 언어철학자들이 촘스키 비판의 자격이 없다면, 누가 촘스키의 비판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들 가운데서는 초기 변형 문법의 창시부터 70년대 초까지 촘스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카츠 교수도 있다) 촘스키 저작은 크게 전문적인 언어학(technical linguistics) 이론서와 언어 이론의 철학적 토대를 다루는 철학적 언어학(philosophical linguistics)으로 크게 양분된다.

그런데 문제는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자들 가운데 이 양자에 대해서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연구하는 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촘스키 생성 언어학의 핵심 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촘스키 언어 이론의 인식론적 구조와 정당성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모국어 화자의 직관에 의존하여 생성 문법 이론을 데이터에 적용하고 그것의 적합성을 따져 묻는 작업만이 중시된 것이다.

끝으로,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주의에 대해서 한 마디. 지난 30년 동안 촘스키는 시종일관 인간 정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 개념의 혼란성을 이유로, 언어 연구는 언어 지식을 구성하는 정신적 구성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인간 언어는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대상이며 자연 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필요성만을 반복해왔다. 이제, 이같은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서 순수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보편 문법 과학성을 입증할 수 있는 생물학적 증거가 현재 얼마나 확보되었으며, 아울러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장 교수를 비롯한 생성언어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가.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문제는 무엇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의 언어학계를 평정하고 그 지적 헤게모니를 휘둘러 온 촘스키의 언어 사상에 대한 총체적 비판의 시점에 임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문제의식은, 하나의 특정 언어학 이론이 과도한 독점적 주류를 형성하여 다른 언어학 이론들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에서 학문의 다양성 정신을 훼손시키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언어학 자체의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교란시켰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느냐가 중요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세 개의 하위 주제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그의 이론의 과학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과연 그가 행동 하는 양심의 선구자인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언어학 이론을 구축하면서 타자의 비판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소통했는지 점검하면서, 그의 학문적 윤리성을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40년 동안 촘스키 가라사대 식의 맹목적 수용과 추종을 당연시한 한국의 언어학자들(여기에는 애석하게도 일군의 국어학자들 역시 포함된다)에게 그의 언어 모델의 획일적 적용을 통해 과연 한국어의 본질과 구조가 얼마나 해명되었는지 점검해, 비판적 서구 언어학 수용사를 진작시키려는 암묵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같은 문제의식을 장 교수가 동감하고 그 취지에 찬동한다면, 필자의 글과 장 교수의 반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사소한 오해나 곡해는 부차적인 문제이다.(김성도 고려대 교수)

08.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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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오랜만에 김우창 교수의 칼럼을 옮겨온다. 그간에 몇 번 '계몽적인' 내용의 칼럼을 옮겨오려고 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된 적이 있는데(때론 바빠서, 때론 굳이 퍼오나 싶어서) 이번엔 대입제도와 관련된 내용이기도 하기에 수고를 무릅쓴다. 마침 해마다 1학기엔 1학년 전공과목을 강의하고 있는데 '자기가 선택하는 삶', 혹은 '자기가 선택하는 공부'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가다듬어볼 필요도 있다 싶다. 새삼스럽진 않을지라도 말이다. 거기에 '저녁이군'에 대한 단상은 음미해둘 만하다. 

경향신문(08. 02. 14) 자기가 선택하는 삶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시 ‘외면적 삶의 노래’는 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면서 인생에 대하여 심금에 닿을 만한 관찰을 담고 있다. 사람의 삶에는 방황과 고독과 고통 또 기쁨과 열매가 있으나,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저런 많은 것을 보아서 의미가 있나?” 하는 물음들이 일게 된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것을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대로 깊은 느낌의 어떤 순간이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래도 ‘저녁이군’ 하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호프만슈탈은 이렇게 말한다. “이 하나의 말-깊은 뜻과 눈물이 흐르는 이 하나의 말”로부터 “마치 벌집 구멍으로부터 진한 꿀 흘러 내리듯” 감미로움이 흐를 수 있다.

저녁은 해의 밝음이 가고 밤의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명암의 교체만으로도 저녁은 특별한 감흥을 준다. 또 이 감흥에는 더욱 지적인 인식이 스며 있다. 저녁 시간은 하루의 끝이다. 그것에 주의하는 것은 하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하나로 포착하는 것이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감흥과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외면화된 삶에서 귀중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내면성의 깨달음을 분명히하는 것이다.



외적인 순응만 강요된 사회
‘외면적 삶의 노래’는 노년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호프만슈탈이 이 시를 쓴 것은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였다. 이 시를 썼을 때, 그는 빈의 심미주의적 시풍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감흥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이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마음 깊이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겠다는 그의 젊은 시절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법학 공부를 하던 호프만슈탈은 이 시를 쓸 무렵 문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시에서의 내면성의 강조는 그럴싸하게 들리다가도, 시인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이 현실 삶의 도피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내면이 없는 외면이 맹목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외면이 없는 내면도 공허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외면적 삶에 중요성을 두는 경향이 있는 만큼 내면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동의 없이 사는 삶은 결국 나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삶은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바깥세상에서 살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개인의 삶의 문제를 떠나서, 외면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내면적 의미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도 창조성의 근거를 잃고 무엇보다도 안정의 바탕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과 밖이 맞아 들어가는 삶이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젊은 시절은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의미를 실현해줄 삶을 추구하다가도 대개는 사회의 요구에 타협하면서 안착점을 찾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젊은 시절이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교육제도 그리고 대학 입시제도의 혼란도-사실 또 많은 사회 문제도--깊은 근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외면화된 우리의 삶의 방식에 연유하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달로 오랫동안 계속되던 대학 선발 절차가 마감된다. 말할 것도 없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입학은 되었지만 원하지 않는 대학에 입학이 된 사람도 있고, 전적으로 새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할 사람도 있다. 원하는 대로 된 사람에게는 축하의 말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을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입시제도의 난관을 겪는 모든 젊은이들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제도에서, 대학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데에는 수문장이 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문장이 내놓는 물음과 지원자의 답이 맞아들어 가야 한다. “열려라, 참깨!”라는 암호를 발견하는 데에 학생들은 수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원서를 내기 전의 1년 또는 2~3년일 수도 있고, 요즘 추세로 보면 유치원을 들어갈 무렵부터 수문장이 내어놓을 법한 암호들을 익히는 데에 긴긴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려는 것은 얼른 생각하기에는 일류의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류대학의 교육이 참으로 이류와 다른가? 교육의 내용의 높고 낮음은 교수와 교육 프로그램과 교육시설에 달린 것일 터인데, 참으로 이러한 항목들에서 일류와 이류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인가? 일류, 이류, 삼류 하는 말들이 시사하는 차이가 크다고 상정하더라도, 대학 지망생이나 그 부모가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고 난 결과 일류대학을 선택하는 것일까? 대학을 가까이 돌아본 사람이면, 차별화해서 이야기되는 대학들에서 받는 교육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몸 담고 있는 대학의 일류, 이류에 따라서 학문이나 사회봉사 활동에서 교수들의 수준이 반드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난다고 하여도 학부 학생들의 수용 능력을 생각할 때,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시설이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대학의 선택이 참으로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는 대학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다. 전공이나 학과의 선택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싶은가는 중요치 않다. 어느 단과대학, 어느 학과가 나를 받아주고, 나중에 어느 이름 난 직장에서 나를 받아주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직장서 선택 당하는 현실
내가 원하는 공부가 어떤 것인가, 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일이 쉽지 않다. 바른 판단의 한 요소는,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 못지 않게, 무엇을 의미 있는 것으로서 절실하게 느끼는가-이에 관련하여 마음 속에 들려오는 부름을 아는 일이다. 심증이 생길 때까지는 방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시험하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하는 방황을 허용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인생에서 값진 것은 모두 밖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고름에는, 무엇이 내 마음에 드느냐보다는 무엇이 명품이냐가 중요하다. 아파트를 구하는 데에도 기준은 편의나 보금자리로서의 느낌보다 부동산 시장의 전망이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지위의 명품 가치에 의하여 정해진다. 물론 외면적 사회에서, 이름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름은 허영심을 만족시켜준다. 그것은 취직이나 존경이나 사회적 지위와 교환할 수 있는 고가의 어음이다. 그러나 실질과 허상이 교차되는 명품의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인생이다. 나는 참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작은 순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하루가 끝난 다음, “저녁이군”하고 저녁의 감흥에 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극히 희귀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8. 02. 13.

P.S. '저녁이군'이란 말에서 아마도 가장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은 밀레의 <만종>일 것이다. 하루의 고단한 수고를 마무리짓는 '의식'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농부 부부의 모습에서 읽게 되는 그림이다. 생각해보니 저녁노을을 음미해본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저녁상을 차려놓았다고 부르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부랴부랴 동생들과 뛰어가며 바라보던 노을이면 어느새 30년 전이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물기 머금은 저녁.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내일은 '퇴근시간이군'이란 말 대신에 '저녁이군'이라고 중얼거려봐야겠다. 속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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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2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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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4 11:54   좋아요 0 | URL
저는 진로 문제에 대해선 특별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구요, 학부 4학년때 잠시 책이 읽히지 않아서 불안했던 적은 있습니다.^^; 관심사와 여러 주변 여견을 잘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공부도 때가 있다곤 하지만 요즘은 '평생공부' 시대이니까 공부와 취업을 양립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지는 마시길...
 

김윤식 교수의 허다한 책들 가운데 전기 비평 범주에 속하는 책들과 몇몇 신간의 목록을 만들어둔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김윤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4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품절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김윤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절판
김동인 연구- 개정증보판
김윤식 지음 / 민음사 / 2000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품절
염상섭 연구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1월
25,000원 → 25,000원(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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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13 19:21   좋아요 0 | URL
그 '허다한' 책들 중에서 제게도 대략 40~50권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2-13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얼추 40권 안팎일 거 같습니다. 많은 책이 절판되거나 품절된 게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