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겨레21에서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며칠 눈감고 있어서 궁금하기도 했지만 속 편했던 '한국 시사'를 따라잡기 위해 언론 사이트들을 둘러보다가 읽게 된 글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8/01/021128000200801310696017.html). 역시나 뉴스거리들은 차고 넘치는 나라가 한국인 것 같고 다른 기사들까지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굳이 '정리'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냥 이 칼럼 정도만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다(아직 알라딘에 퍼온 분들도 없고 해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읽은 국내신문들에서 '영어 몰입'에 대한 유익한 비판칼럼들도 옮겨올 만하지만 좀 뜸을 들일 생각이다. '한국 시사'에 가장 강한 강준만의 칼럼은 역시나 대단히 한국적인 '댓글 문화'에 칼을 대고 있다. 우리의 '실생활'이기도 하므로 일독해봄 직하다. 개인적으로 '악플'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으나(비정규직 강사가 '유명세'까지 치른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불미스런 기억들은 몇 되기에 나름으로 '실감'나는 기사이기도 하다.

한겨레21(08. 01. 31)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

한국의 ‘댓글 문화’는 악명이 높다. 물론 ‘악플’ 때문이다.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한국 대학의 한 외국인 교수는 한국의 ‘댓글 문화’는 서방 국가가 200년에 걸쳐 이룬 민주주의를 50년 만에 압축 도입하면서 계층·세력 간에 형성된 ‘뒤집기 문화’에서 연유한다며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고 비판했다.

소속 집단 중심의 연대 ‘마을 의식’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박노자가 최근에 출간한 <박노자의 만감일기>에서 한국 특유의 ‘관계 문화’를 지목한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가족이든 동창이든 친한 지인이든 정말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한국인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없으며,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라면 ‘상대방’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니까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얌전한 척이라도 한다고 했다. 맞다. 누구든 동의할 수 있는 한국인의 유별난 특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밀물이 있으면 그만큼 썰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특성은 완전한 타인들이 익명으로 서로 접촉하는 인터넷이라면 바로 정반대가 된다는 게 박노자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성향을 ‘마을 의식’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마을 안에서는 예의범절을 다 챙기지만, 바깥에 나가면 속을 풀대로 푸는 전근대적 ‘소속 소집단 중심의 사회적 연대’인 셈이다. 글쎄, 나 같은 사람들은 ‘민족주의’ 등의 거대 담론들을 자꾸 문제 삼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범주는 사실 무슨 ‘민족’보다도 이 ‘마을’(가족, 동창 집단,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인 듯하다.”

골수 악플러들이 일상에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소심한 편이라는 조사 결과는 이 분석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 남궁기는 “상사의 불합리한 주문에는 순응하는 듯하다가 자기보다 힘이 약한 후배의 말에는 버럭 화를 내는 사람처럼, 특정 환경에서 평균 이상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람은 ‘악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이 또한 악플이 현실의 결핍에 대한 분풀이 또는 보상심리의 산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박노자가 지적한 ‘마을 의식’은 댓글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의 작동 방식도 설명해준다. 왜 한국 정당들의 수명은 포장마차 수명보다 짧은가? 왜 한국 정치인들은 자주 철새떼나 들쥐떼가 되는가? 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은 정치 참여만 했다 하면 무조건적 열성 지지자로 변하며, 왜 또 그들 중 일부는 반대파 처단에 앞장서는 홍위병 흉내를 내지 못해 안달하는가? 이 물음들에는 ‘마을 의식’이 좋은 답이 될 것 같다.

소설가 조선희가 수년 전 ‘악취 진동하는 사이버 토론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온라인 공간이 “한국 정치의 드잡이 난투극을 그대로 닮아가면서 토론 문화의 첨단이 아니라 게토가 되어버렸으며, 오히려 오프라인 시절의 토론 수업 교양 과정을 훌쩍 월반해 최소한 게임의 룰조차 실종된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거점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한 것도 바로 그런 ‘마을 의식’에 대한 고발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희는 “‘욕설·비속어·인신공격’ 글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수질 관리를 하든가, 게시판이나 댓글 공간을 관리 가능한 만큼 줄이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쌍방향 소통의 대의를 당분간 접고 온라인 토론 공간을 폐쇄하는 고육지책이 필요할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첨단’ 인터넷에 주눅들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악플에 너그러운가? 이 물음에는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가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댓글이 특정 여론의 움직임을 읽게 하는 지표 구실을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합리와 이성, 절도가 없는 댓글의 폐해는 정도가 지나쳐 건전한 여론 형성 과정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터넷 강박증에 눌려버린 언론들은 댓글이 불러올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애써 눈을 돌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권위지라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현재 기사에 대한 댓글 제도가 없다. 한때 기사 댓글을 운영했지만 쓰레기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폐지했다. 절제가 없는 의견은 시민 여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기사 댓글 폐지의 이유이다. …언론은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댓글을 과감히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의 추임새를 들을 수 있는 토론 광장을 활성화하자.”

언론의 ‘인터넷 강박증’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 대해 주눅이 들어 있는 ‘인터넷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겠다.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텔레비전 맹(盲)’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준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인터넷 맹’이라고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부적응자로 본다. 인터넷은 첨단을 상징한다. 모두 다 주눅이 들어 있다. 어느 정도인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조차 눌러버릴 정도다.

최근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그간 언론은 악플 피해자들이 법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악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둔감해지는 것이다”라는 식의 조언을 많이 해왔다. “피해를 당하면 극히 일부 미성숙한 아이나 열등한 성인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조언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런 기사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악플을 다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경정신과 의사의 조언까지 곁들여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에선 어느 영역에서건 이름깨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자질은 ‘악플을 참아내는 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그럴까? 무언가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문화평론가 강명석은 언론은 때론 악플러를 비난하지만,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공생관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악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개개인의 윤리적·도덕적 판단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수익을 얻는 언론매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해 방문자를 끌어들이는 포털 사이트의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즉, 악플의 문제는 단지 개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방법으로든 ‘주목’을 받아야 살아남는 포털 사이트와 그 속에서 활동하는 언론매체가 얽혀 있는 산업적인 문제다. 이것이 단지 몇몇 비정상적인 악플러들만을 비난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인터넷 강박증, 인터넷 콤플렉스
한국을 가리켜 ‘인터넷 강국’이라고 한다. 껍데기만 그럴 뿐이지만, 그 껍데기조차 그런 ‘인터넷 콤플렉스’와 ‘인터넷 상업주의’를 먹고 자란 것이다. 웬만한 나라에선 법적인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을 일이 한국에선 마구잡이로 저질러져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국 인터넷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관용은 ‘새것’과 ‘첨단’과 ‘세계 최고’에 걸신 들린 한국인들의 굶주림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자유주의적 착각과 진보주의적 착각이 가세했다.

자유주의적 착각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과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다. 악플의 폐해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그걸 통제하는 것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 얻을 게 더 많다는 논리다. 권력감시, 내부고발, 창의력 발휘 등의 장점이 열거된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이게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사회적 비용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거론된다 해도 ‘분열과 혼란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원론이 답으로 준비돼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을 제대로 만들고, 모든 공적 영역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과 규칙을 완비하는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 가운데, 왜 그런 기능을 인터넷으로 대체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인터넷을 그런 노력에 이용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적 착각은 기존 거대 매체를 보수 세력이 사실상 장악했던 과거와 비교해 인터넷을 진보세력의 대안매체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이념적 ‘편가르기’ 논리가 인터넷에 적용된 셈이다. 실제로 ‘인터넷 실명제’만 하더라도 찬성하는 측은 대부분 보수파였고, 반대하는 측은 대부분 진보파였다.

초기엔 인터넷이 진보세력의 대안매체였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이 점점 더 돈이 되는 산업으로 커가면서 이제 그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특히 노무현 정권이 보수 신문에 대한 견제 매체로 인터넷을 택해 큰 공을 들이면서 포털과 밀월 관계를 누린 건 정권 교체와 함께 부메랑이자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습관과 관성 때문인지 아직도 인터넷에 대한 진보주의적 착각이 횡행하고 있다.



‘배설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하는 지식인들
지난 2006년 8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영국 에든버러 국제TV 페스티벌에서 행한 연설에서 “권력과 돈으로 인한 미디어 통제 때문에 민주주의가 큰 위협을 받고 있으며 해결책은 인터넷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반의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기존 미디어 재벌들이 앞 다투어 인터넷 매체들을 사냥해온 건 보지도 못했나? 언제건 권력과 돈이 없는 사람이나 세력이 쉽게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쏠림’ 현상을 그 속성으로 삼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 가능성의 실질적 가치는 상징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강력 통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거대 담론적 가치를 앞세워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를 무작정 예찬해온 자유주의·진보세력의 자세가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예컨대, 악플의 ‘표현의 자유’엔 너그러우면서 그로 인해 박탈되는 다른 ‘표현의 자유’엔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악플이 지식인의 자기 검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아 오히려 공론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은 건 아닌가?

윤태진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지인 한 명이 칼럼을 쓴 뒤 느꼈던 참담함을 사석에서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의 악의적인 댓글들 때문이었다. 그는 왜 정당하지 않은 비난과 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자기가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그냥 무시하라고 위로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 불쾌감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칭찬하리라 기대하며 글을 싣는 이는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욕설과 비꼼, 비방과 인격적 모독으로 가득 찬 댓글은 글 쓰는 이들 대부분의 힘을 쏙 빠지게 한다”고 했다.

그래도 힘을 쏙 빠지게 하는 건 다행이다. 아예 글을 안 쓰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글을 쓰더라도 논쟁적인 글은 피하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언론매체에도 기사화되진 않지만, 시사적인 글을 쓰는 많은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튀기는 ‘배설물’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배설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을 더 세게 밀고 나가는 지식인도 있지만, 그것도 문제다. 아주 독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기계적 인간들만 제 목소리를 내고, 나머지 대다수가 ‘배설물’을 피하려는 글만 쓰려고 하는 공공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콤플렉스’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일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는 비판엔 불편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질 수 없었던 독재정권 시절의 아픈 과거가 떠오르며, 아직 그 상흔이 다 치유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만한 일까지 자꾸 역사적 상흔을 앞세우거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익명성의 예외적인 사회적 가치를 앞세워, 계속 익명성의 보호막에 안주케 하는 건 우리 모두를 위해 이제 더 이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기존 댓글 문화의 장점도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회적 기회비용에도 눈을 돌려보자.

08. 02. 03.

P.S. <박노자의 만감일기>에 대한 표정훈의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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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겨레21에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1/021162000200801310696099.html). 지난 며칠간 중국 여행을 다녀온 김에 몇 마디 이야기를 덧붙이려고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최악의 항공기 지연 운항으로 어제 오후에 도착했어야 할 일정이 9시간 가까이 지체되는 바람에 생각을 접었다(다시 기운을 차리게 되면 적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씻고 몇몇 메일을 확인한 시간이 이렇게 남들 다 자는 시간이 돼 버렸다. 잔뜩 피곤하던 차였지만 막상 메일들을 확인하는 사이에 잠이 달아나버렸고 막간에 밀린 일들을 해놓도록 한다. 사실 이번주 기사는 월요일에 가판에서 잠깐 제목만 확인했는데,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 같은 '센' 제목은 내가 붙이는 게 아니라 담당 편집자가 붙인다. 그냥 내 얘기는 오랜만에 <논어> 번역본들을 뒤적이다 보니 해석과 주석이 상충되는 곳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한겨레(08. 01. 31)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

“논어를 뒤집는다. 공자를 바로 본다, 다시 본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은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포럼 펴냄)이다. 일반인들이 공자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혹은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게 저자의 의도인데, 제목으로 미루어 그가 문제 삼는 건 공자와 논어를 ‘보수’로 보는 태도다. 비록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에 박수친 바 없으나, 크게 보아 나 또한 그런 태도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정확히 책이 목표로 하는 독자이겠다. ‘공자님 말씀’을 모아놓은 고전이니 기꺼이 여러 종의 번역본을 모셔두긴 하지만 진지하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 독자 말이다.

사실 유교 문화권에서 공자와 논어가 가진 영향력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경이 가진 영향력에 비견될 만큼 크고 방대한 것이다. <논어금독>을 펴낸 리쩌허우에 따르면, 서양문명과 다르게 중국에는 진정한 종교전쟁이 없었던 것도 유학의 포용성과 큰 관계가 있으니 그 영향은 ‘말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가와 법가가 혼용된 윤리적·정치적 규범 혹은 법칙이 중국 역사 2천 년을 지배해왔다고도 말해지는 것이니 자세를 바로 하고 좀 진지하게 ‘선생님’의 말씀에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예의를 갖춰서 논어를 대할 때, 두 가지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먼저, 리쩌허우의 지적대로 기원전 500여 년에 공자가 한 말을 기록한 내용(말하자면 어록)의 대부분을 오늘날에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물론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의 경우지만 한국인이 중세 국어를 더듬더듬 읽을 수밖에 없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 놀라운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논어에 쓰인 한문은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쉽다”.

하지만 그렇듯 평이하게 읽힘에도 논어에 대한 번역과 주석은 각양각색이며 놀랍게도 심지어는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역시나 리쩌허우에 따르면 “고대문자는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이어서 오늘날의 언어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어야만 잘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데 있다. 논어의 이름난 주석자만 하더라도 2천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예컨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첫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의미인지, '시’(時)의 의미가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저마다 의견들이 다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구절은 “(仁을) 배워서 때에 따라 (禮를) 익히니”로 해석되어야 한다. ‘위정’편 16장에 대한 해석은 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로 읽는 게 전통적인 해석이었지만 저자는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긴다. 이 모두가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번역서도 있지만 전혀 상반되는 해석이 양립 가능하다면 공자가 한 입으로 두말한 것이 되는가?

저자는 “공자의 본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원문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논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문학적 지식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능력”이라고 덧붙인다. 사실 논어에 대한 허다한 번역과 주석들이 모두 원문 읽기에서 나온 것이니 ‘원문 읽기’만으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이 모두 불식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리쩌허우조차도 모호한 대목들은 그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어를 읽는데,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논어를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다. “논어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08. 02. 03.

P.S. 상하이 푸동국제공항에서 장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했는지라 구내서점에도 둘러보았는데, 자세히 둘러볼 만한 면적도 아니었지만 기대했던 '중국 고전들'이 눈에 띄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삼국지>, <서유기> 등의 제목이 보이긴 했으나 나는 <논어>나 <도덕경> 정도는 진열돼 있을 줄 알았다. 중국어-일어 대역/주석본 <논어> 한권이 꽂혀 있는 게 전부였다. 서울의 10배 정도 된다는 상하이의 크기가 갑자기 작아보였다.

돈도 별로 없었기에 나는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의 운치있는 정경들을 담은 사진엽서와 함께 (직원이 잔돈이 없다고 해서) 상하이의 '새 건축물'들을 담은 사진엽서를 구입했다. 중국의 두 얼굴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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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8-02-0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장 9시간의 연착은 중국에 내렸다는 폭설 때문이었나요? 푸동 공항 면세점은 별로 구경할 것도 없던데 시간 보내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하긴 한 두시간도 아니니 면세점 구경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겠지만서도...시사인을 보니 2008년 출간 예정 도서목록에 선생님 이름도 있더군요. 언제쯤 나올 예정인지요? 이래저래 바쁜 한해가 되시겠습니다.
새해 인사를 한번 더 해야겠군요. 설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2-03 19:55   좋아요 0 | URL
상해쪽은 '폭설'이라기보다는 그냥 눈이 좀 쌓인 편 같은데 워낙에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네요. 공항이나 도로 모두 눈에 취약한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여행의 기억은 대합실 바닥에서 다 증발해버렸지요.^^; 책은 이것저것 내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정신없이 또 일년이 지나가게 생겼습니다... 고향엔 가시는 거지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라서 오늘 구입한 책은 가야트리 스피박의 신간 <경계선 넘기 - 새로운 문학연구의 모색>(인간사랑, 2008)이다. 국역본의 제목은 좀 '의역'돼 있는 것인데, 원제는 <한 분과학문의 죽음>(2003)이다. 본문의 첫문장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년 후인 1992년부터 비교문학은 새로운 학문으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31쪽)인 것으로 미루어 그냥 <비교문학의 죽음>이란 제목을 붙여도 좋았겠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것이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들은 비교문학 강의이고 그때 읽은 몇 권의 책이다(지금은 대부분 절판됐다). 최근의 비교문학 교재로 이미지가 뜨는 책들 몇 권을 나열해본다.

 

 

 

 

스피박의 책은 원서의 경우 100여쪽 남짓의 분량에 불과한데 평은 후한 편이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경계선 넘기-새로운 문학연구의 모색』은 문학연구의 미래뿐만 아니라 그 과거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그려낸다. 이 책은 눈부신 시야와 비전을 제시하고, 문학적 지형을 바꾸어 놓으며, 역동적이고, 명료하며, 훌륭하다. '죽음'이 이러한 영감을 제공해 준 적은 드물다."고 주디스 버틀러는 적었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도 "[스피박]은 '지구화'에 반대하는 '전지구적' 관점에 토대를 둔 매혹적인 지적 프로젝트의 윤곽을 그려낸다. 필독서이다."라고 거들었다.

그래서 집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특이한 건 국역본의 역자들이다. '문화이론연구회 옮김'이라고 돼 있는데 역자 소개를 보면 무려 8명이 번역에 참여했다. 원저의 분량을 고려하면 1인당 10-20쪽 정도를 옮겼다는 것인가? 세 장으로 구성돼 있는 만큼 얇은 책이지만 3명의 역자가 공역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8명? 기이하게 보인다.

'역자서문'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역자들은 지적 한계를 실감했다. 혹시 있을 수 없는 오역은 전적으로 역자들의 책임이다. 스피박의 사유체계와 통찰력과 한계가 한국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길 바란다." 솔직한 것인지, 겸양인 것인지는 읽어봐야 알겠다...

08.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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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서 서평 특집호를 냈는데(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2) '내가 생각하는 서평'이란 꼭지에 몇 마디 보탠 글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6). 국내에서도 전문 서평지가 꾸려진다면 출판문화에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다.  

교수신문(08. 01. 29) '소개’와 ‘비평’ 사이에 놓인 판관의 칼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책이 있는 곳에 서평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평은 말 그대로 책의 됨됨이에 대한 평이니까 책이란 물건이 존재하는 이상 서평은 불가피하다. 책에 대한 평이라고 했지만 이때 評은 좋고 나쁨 따위를 평가하는 말이다.그럼으로써 값을 매기는 일이다. 책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풀어서 말하자면 한 책에 대해 품평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원적 의미 그대로 ‘꼴값’을 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별을 위해서 보통은 책을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적어도 넘겨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리뷰(re-view)다.

이 ‘리뷰’란 말 자체에 ‘비평’이란 뜻도 포함돼 있지만 나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닌가 싶다. ‘소개’의 대표적인 유형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와 언론의 ‘신간소개’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어떤 책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어, 이런 책이 나왔네!”란 반응을 유도한다. 반면에 ‘서평’은 그것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인가를 식별해줌으로써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길잡이다. “이건 읽어봐야겠군.”이라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가 서평이 염두에 두는 반응이다. 그에 대해 ‘비평’은 책을 이미 읽은 독자들을 향하여 한 번 더 읽으라고 독려한다. 그것은 독자가 놓치거나 넘겨짚은 대목들을 짚어줌으로써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자성을 촉구한다.

물론 소개-서평-비평은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어서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책에 관한 담화와 담론들은 이 세 요소들을 약간씩이라도 모두 포함하기 마련이다. 다만 분류는 그 비율과 방점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가 그렇게 가늠될 수 있다면 서평의 바람직한 역할이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일반론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보다 세분해서 서평의 유형학을 가정할 경우에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서평의 유형은 다양한 기준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먼저 그 서평의 주체에 따라서 일반독자, 전문독자, 전문가 서평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독자란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책을 사서 읽게 되는 보통의 독자를 가리키며, 전문독자는 주로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란 직함을 달고 여러 매체에 정기적으로 북리뷰나 칼럼을 게재하는 이들이나 언론의 출판면 담당기자들이 지목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가란 서평을 정기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지만 해당 분야의 전공자로서 식견과 조예를 갖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독자 유형 또한 중복 가능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서평의 주체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면 바람직한 것은 이들이 유기적인 분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겠다.

두 번째로, 서평의 또 다른 분류기준은 분량이다. 원고지 매수로 따지자면 5매, 10매, 20매,  30매 등의 유형학이 가능하다. 분량의 제한이 없는 자유서평이 아닌 이상 대개의 ‘공식적인’ 서평들은 분량의 제한을 요구받으며 이러한 분량 자체가 서평의 내용을 상당 부분 한정한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평하느냐는 전적으로 이 분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서평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평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분량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주요한 학술서나 교양서를 평하면서 원고지 10매 분량도 할애하지 않는 것은 ‘서평 문화’ 자체의 피상성을 양산할 따름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서평을 다루는 매체 또한 서평의 분류기준이다. 이것은 서평의 주체와도 얼추 상응하는데, 주로 일반독자들의 서평이 올라오는 온라인서점이나 개인 블로그, 그리고 전문독자들의 리뷰들이 게재되는 일간지, 주간지 등의 언론매체, 끝으로 전공자들의 학술서평이 실리는 학술지 등이 서평의 유형학을 구성한다. 여기서도 물론 바람직한 것은 각 매체별 서평들의 역할 분담이고 특화이다. 매체에 따라서 요구되는 서평의 성격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그 성격과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서평은 대상도서의 학술적, 사회적 의의를 거론할 수도 있고, 도서 상태의 문제점과 오류들에 대한 지적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책에 대한 권유/만류와도 맞물리는데,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낭비하지 마시길’이라고 충고를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양 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독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서평이란 그러한 권유/충고가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나열한 대로 우리의 ‘서평 문화’는 다양한 층위의 서평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일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론 서평의 경우에 신간들 위주의 표면적인 소개보다는 일정 분량 이상이 전제된 깊이 있는 리뷰들이 보다 많이 다뤄지기를 기대해볼 수는 있겠다. 이런 정도의 소감밖에 피력할 수 없는 것은 ‘주요 서평자’로 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로 해온 일이 본격적인 서평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서평 혹은 책에 대한 수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모아놓거나 늘어놓는 일을 즐겨 하게 됐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얻은 직함이 ‘인터넷 서평꾼’에다 ‘북리뷰어’다. 자임한 직함은 아니기에 정확한 규정 근거는 모르겠지만 ‘서평꾼’은 아무래도 ‘서평가’나 ‘서평자’와는 급이 좀 다르다(무슨 학술서평에 ‘서평꾼’이 등장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일도 약간 좀스럽다. 가령 나는 이런 지적들을 늘어놓는다.



국내에 다수의 책이 번역 소개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대표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의 한 대목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 이 경우 나의 의문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 같은 ‘이상한’ 주장이 어떻게 나오는가이다. 저자가 멍청이라서? 대개 그런 경우는 없다. 문제는 역자 혹은 편집자의 부주의다. ‘이상(理想)’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실상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를 옮긴 것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편집자가 부적절한 개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알고 보면 정상 참작이 가능한 실수이긴 하지만 순진한 독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자학하게 만드는 ‘오류’이다.



같은 저자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은 초판의 오역들을 교정한 개역판까지 나와 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을 뿐 근본적인 교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쿤스투리카’로 개명하고 거기에 ‘Kunsturica’라고 엉뚱하게 병기까지 해놓았다.

이런 지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정작 문제적인 것은 서평이다. 허다한 오류와 오역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은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놓았다(서평자들이 자주 잊어먹는 것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서라는 사실이다). 물론 지면의 성격과 분량의 제약이 서평의 일차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엉터리 책들을 감시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서평을 통한 학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08. 01. 29.

P.S. 나대로의 서평 사례로 인용한 대목은 '오역의 모험'(http://blog.aladin.co.kr/mramor/429942)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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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잃어버린 학술서평을 찾아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9 18:41 
    학술서평의 문제점을 짚은 대학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지난주에 전화로 잠깐 기자의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출판대국의 면모에 걸맞은 (학술)서평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 하루아침에 달라지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일단은 '학술'이 먼저 돼야 학술서평도 뒤를 따를 것이고). 그것도 '문화'라면 매일매일의 한 걸음이 그래도 먼훗날 어떤 궤적을 보여줄지도 모를 따름...    대학신문(09. 11. 09) 잃어버린
 
 
파란여우 2008-01-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우리는 갈고 닦으면서 가야하는거겠죠?
전 이걸 '글의 길로 가는 차력'이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8-01-29 21:38   좋아요 0 | URL
차력도장 가는 길이기도 하네요.^^

비로그인 2008-01-2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향락의 전이. 저도 개정판을 구입하긴 했는데. 늘 찜찜하네요... 조금만 막히면 불안해서 검색하곤 경악하고- 고쳐읽기를 계속하게 된답니다 :)

로쟈 2008-01-30 00:21   좋아요 0 | URL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어야 하는 번역서죠...

노자읽기 2008-01-3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는 기억의 패턴이 거짓말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어떤 책을 보더라도, 거기서 자신이 확인할 수 있은 사실, 알 고 있었던 것 만을 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새로운 지식을 늘인다거나 새로운 견해를 배운다는 것을 있을 수 없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만큼 새로운 지식이나, 견해가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2-03 11:41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관성적인 읽기와 이해도 한가지 변수입니다...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를 지난주에 구입해서 며칠 동안 읽었다. 다른 일들에 매이지 않았다면 하루나 이틀 안에 통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속독이 가능한 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비교적 쉬운 책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번역의 가독성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다. 몇몇 부주의한 오역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교정해가며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이론서의 경우 이 정도 번역도 드물며 역자의 노고를 기억해둘 만하다. 

2001년에 나온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는 국내에 번역된 지젝의 책들을 연도별로 펼쳐놓으면 중간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2000년대 이후의 저작들로 한정하자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2004)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면서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이라크>(도서출판b, 2004),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 앞서는 책이다. '신간'이긴 하지만 진작에 소개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그래서 든다. 영어본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2006, How to Read Lacan, London: Granta Books (also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 2007).

 

 

 

 

2004, Iraq: The Borrowed Kettle, London: Verso.

 

 

 

 

2003, The Puppet and the Dwarf,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3, Organs Without Bodies, London: Routledge.

 

 

 

 

2002, Revolution at the Gates: Žižek on Lenin, the 1917 Writings, London: Verso.


 

 

 

2002,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London: Verso. 


 

 

 

2001, Opera's Second Death, London: Routledge.(*근간 예정으로 안다)

2001, On Belief, London: Routledge.

 

 

 

 

2001,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ś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BFI).

 

 

 


2001,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London: Verso.

 

 

 

 

2000, The Fragile Absolute, London: Verso.

 

 

 

 

가장 읽기 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한 건 아니어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의 경우에도 지젝에 대한 사전 숙지는 얼마간 필요하다.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데, 여차하면 그냥 넘어가도 좋겠다. 그럼에도 읽을 만한 대목들은 많이 있으니까. 여기서는 몇몇 오역과 역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대목들만 나열해둔다(다섯 편의 에세이에 대한 '읽기'는 그 자체로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다룰 수 없다). 지젝을 읽을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약간'이다.  

먼저 고유명사와 관련된 대목들인데, 사실 이런 건 일반 독자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그럼에도 나로선 '교정의지'를 억누르지 못한다. 13쪽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재평가('아렌트 르네상스'란 말까지 쓰지 않는가!) 분위기에 대해서 지젝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하는 대목인데, 가령 1970년만 하더라도 학술 토론장에서 "당신의 논의 전개는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란 말이 나왔다면 당사자가 꽤나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신호가 됐지만 이젠 달라졌다는 것(90년대 이후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렌트가 의당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로 여겨진다. 기본적 성향으로 보건대 당연히 아렌트에게 반기를 들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학자들조차도 자기 이론의 근본적 신조들을 아렌트와 화해시켜 보려는 불가능한 작업에 빠져 있다."

그러한 학자들로 지젝이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크리스테바와 리처드 번스타인이다. "해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정신분석 이론을 묵살해버린 아렌트를 평가할 때나, 리하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계자들이 아도르노에 대한 아렌트의 극단적인 증오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처럼"이 인용문에는 삽입돼 있다. 

'정신분석가'인 크리스테바가 아렌트를 높이 평가하거나(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평전을 썼다)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의 번스타인이 아도르노를 증오한 아렌트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게(번스타인은 <아렌트와 유태인 문제>란 책을 썼다) 지젝으로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Richard Bernstein'을 역자는 '리하르트 베른슈타인'으로 읽었는데, 독일 학자라면 그렇게 읽겠지만 번스타인은 미국 학자이다(이름으로 미루어 독일계이긴 할 테지만). 때문에 나는 '베른슈타인'이라고 읽어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더구나 국내에 '번스타인'이란 이름으로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이 소개돼 있기까지 하므로(후자는 절판된 게 유감이다. 좋은 책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과 하버마스, 가다머 등의 독일철학이 그의 주된 전공 분야다.   

 

 

 

 

그리고 29쪽 등에서 <순수의 시대>의 작가 '이디스 워튼(Wharton)'을 '훠튼'이라고 읽어주고 있는데 이미 국내에 <순수의 시대>(오리진, 1993)을 필두로 하여 여러 작품들이 소개된 작가를 다르게 읽어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하기도 한 <순수의 시대>는 지젝이 다른 책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어서 나도 뒤늦게 번역본을 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에 '피터 셰퍼'와 '허버트 드레퓌스', '존 브록만'의 표기에 관한 지적들을 적다가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안돼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걸 포함하여 몇몇 오역들(대표적으론 83, 148, 288, 306, 312쪽 등에 나온다)과 불만들(나는 'act'를 상용되고 있는 '행위' 대신에 굳이 '행동'으로 옮긴 것 등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는다)은 중국에 다녀와서 다루도록 하겠다...

08.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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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지름신의 사도요, 모든 탐욕의 샘이시옵나이다.......;ㅅ;
1.로쟈님 글을 읽고 지젝거리기 시작했다.
2.지젝은 굉장히 열심히, 계속해서 글을 쓴다.
3.역자들(과 출판사들)은 굉장히 빠르게, 계속해서 번역/출간한다.
4.나는 굉장히 허겁지겁, 무리하게 쟁여놓는다.
5.읽으며 머리를 쥐어뜯........거나 혹은 책값을 마련하러 일터로 간다.
라는 순환입니다. (웃음)

로쟈 2008-01-30 00:22   좋아요 0 | URL
사실 지젝은 그 정도의 '보상'은 하지요. 엉터리 번역들만 아니라면...

bongsun 2008-01-3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은 항상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같은 편집자에게 로쟈 님은 감사와 두려움의 대상이죠.^^
이번 글도 너무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인명 표기에 관한 것인데요,
책의 '일러두기'에 밝혀놓았듯이
인명은 원칙적으로 브리태니커 사전의 표기를 따르는 것이 출판사 방침이어서,
역자 선생님도 그 방침을 따라주시도록 설득했습니다.
따라서 인명 표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인 저의) 책임입니다.

중국에 다녀오시는 모양이네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47   좋아요 0 | URL
'브리태니커'에 '베른슈타인'이나 '훠튼'으로 표기돼 있나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를 말씀하신다면 그 또한 음역인데요... 음, 어쨌거나 제 생각은 고유명사 표기의 '고유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라고 굳어진 이름을 '원칙'을 이유로 '발터 베냐민'이나 '해나 아렌트'로 표기하는 건(한겨레 같은 경우가 그런데) 원칙의 남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성 표기에서도 '두음법칙'에는 위배되지민 '류'씨 성 같은 표기를 허용/인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편집자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bongsun 2008-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잘 다녀오셨는지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사전에 책에 언급되는 모든 인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 같은 철자의 다른 인물명 표기에서 따오거나,
다른 책이나 언론 등에서 쓰는 표기를 참조하거거나 했는데,
아무튼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베른슈타인은 명백히 제가 오해했거나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인명 표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는 했는데,
허술한 부분이 상당히 있군요.
지적과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로쟈 님과 모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8-02-04 14:06   좋아요 0 | URL
'번스타인'은 '번슈타인'이라고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저로선 기간된 책의 경우 오류가 아니라면 고유명사들은 일치시켜주는 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처음 번역되는 고유명사라면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bongsun 2008-02-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충고 감사드립니다.^^
(앗, '참조하거거나'(?) - 편집자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ㅜㅜ)

로쟈 2008-02-04 15:13   좋아요 0 | URL
저도 덩달아 오타를 냈네요. '일이라고요'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