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를 지난주에 구입해서 며칠 동안 읽었다. 다른 일들에 매이지 않았다면 하루나 이틀 안에 통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속독이 가능한 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비교적 쉬운 책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번역의 가독성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다. 몇몇 부주의한 오역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교정해가며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이론서의 경우 이 정도 번역도 드물며 역자의 노고를 기억해둘 만하다. 

2001년에 나온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는 국내에 번역된 지젝의 책들을 연도별로 펼쳐놓으면 중간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2000년대 이후의 저작들로 한정하자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2004)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면서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이라크>(도서출판b, 2004),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 앞서는 책이다. '신간'이긴 하지만 진작에 소개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그래서 든다. 영어본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2006, How to Read Lacan, London: Granta Books (also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 2007).

 

 

 

 

2004, Iraq: The Borrowed Kettle, London: Verso.

 

 

 

 

2003, The Puppet and the Dwarf,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3, Organs Without Bodies, London: Routledge.

 

 

 

 

2002, Revolution at the Gates: Žižek on Lenin, the 1917 Writings, London: Verso.


 

 

 

2002,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London: Verso. 


 

 

 

2001, Opera's Second Death, London: Routledge.(*근간 예정으로 안다)

2001, On Belief, London: Routledge.

 

 

 

 

2001,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ś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BFI).

 

 

 


2001,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London: Verso.

 

 

 

 

2000, The Fragile Absolute, London: Verso.

 

 

 

 

가장 읽기 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한 건 아니어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의 경우에도 지젝에 대한 사전 숙지는 얼마간 필요하다.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데, 여차하면 그냥 넘어가도 좋겠다. 그럼에도 읽을 만한 대목들은 많이 있으니까. 여기서는 몇몇 오역과 역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대목들만 나열해둔다(다섯 편의 에세이에 대한 '읽기'는 그 자체로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다룰 수 없다). 지젝을 읽을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약간'이다.  

먼저 고유명사와 관련된 대목들인데, 사실 이런 건 일반 독자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그럼에도 나로선 '교정의지'를 억누르지 못한다. 13쪽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재평가('아렌트 르네상스'란 말까지 쓰지 않는가!) 분위기에 대해서 지젝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하는 대목인데, 가령 1970년만 하더라도 학술 토론장에서 "당신의 논의 전개는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란 말이 나왔다면 당사자가 꽤나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신호가 됐지만 이젠 달라졌다는 것(90년대 이후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렌트가 의당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로 여겨진다. 기본적 성향으로 보건대 당연히 아렌트에게 반기를 들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학자들조차도 자기 이론의 근본적 신조들을 아렌트와 화해시켜 보려는 불가능한 작업에 빠져 있다."

그러한 학자들로 지젝이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크리스테바와 리처드 번스타인이다. "해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정신분석 이론을 묵살해버린 아렌트를 평가할 때나, 리하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계자들이 아도르노에 대한 아렌트의 극단적인 증오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처럼"이 인용문에는 삽입돼 있다. 

'정신분석가'인 크리스테바가 아렌트를 높이 평가하거나(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평전을 썼다)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의 번스타인이 아도르노를 증오한 아렌트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게(번스타인은 <아렌트와 유태인 문제>란 책을 썼다) 지젝으로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Richard Bernstein'을 역자는 '리하르트 베른슈타인'으로 읽었는데, 독일 학자라면 그렇게 읽겠지만 번스타인은 미국 학자이다(이름으로 미루어 독일계이긴 할 테지만). 때문에 나는 '베른슈타인'이라고 읽어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더구나 국내에 '번스타인'이란 이름으로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이 소개돼 있기까지 하므로(후자는 절판된 게 유감이다. 좋은 책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과 하버마스, 가다머 등의 독일철학이 그의 주된 전공 분야다.   

 

 

 

 

그리고 29쪽 등에서 <순수의 시대>의 작가 '이디스 워튼(Wharton)'을 '훠튼'이라고 읽어주고 있는데 이미 국내에 <순수의 시대>(오리진, 1993)을 필두로 하여 여러 작품들이 소개된 작가를 다르게 읽어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하기도 한 <순수의 시대>는 지젝이 다른 책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어서 나도 뒤늦게 번역본을 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에 '피터 셰퍼'와 '허버트 드레퓌스', '존 브록만'의 표기에 관한 지적들을 적다가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안돼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걸 포함하여 몇몇 오역들(대표적으론 83, 148, 288, 306, 312쪽 등에 나온다)과 불만들(나는 'act'를 상용되고 있는 '행위' 대신에 굳이 '행동'으로 옮긴 것 등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는다)은 중국에 다녀와서 다루도록 하겠다...

08.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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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지름신의 사도요, 모든 탐욕의 샘이시옵나이다.......;ㅅ;
1.로쟈님 글을 읽고 지젝거리기 시작했다.
2.지젝은 굉장히 열심히, 계속해서 글을 쓴다.
3.역자들(과 출판사들)은 굉장히 빠르게, 계속해서 번역/출간한다.
4.나는 굉장히 허겁지겁, 무리하게 쟁여놓는다.
5.읽으며 머리를 쥐어뜯........거나 혹은 책값을 마련하러 일터로 간다.
라는 순환입니다. (웃음)

로쟈 2008-01-30 00:22   좋아요 0 | URL
사실 지젝은 그 정도의 '보상'은 하지요. 엉터리 번역들만 아니라면...

bongsun 2008-01-3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은 항상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같은 편집자에게 로쟈 님은 감사와 두려움의 대상이죠.^^
이번 글도 너무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인명 표기에 관한 것인데요,
책의 '일러두기'에 밝혀놓았듯이
인명은 원칙적으로 브리태니커 사전의 표기를 따르는 것이 출판사 방침이어서,
역자 선생님도 그 방침을 따라주시도록 설득했습니다.
따라서 인명 표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인 저의) 책임입니다.

중국에 다녀오시는 모양이네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47   좋아요 0 | URL
'브리태니커'에 '베른슈타인'이나 '훠튼'으로 표기돼 있나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를 말씀하신다면 그 또한 음역인데요... 음, 어쨌거나 제 생각은 고유명사 표기의 '고유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라고 굳어진 이름을 '원칙'을 이유로 '발터 베냐민'이나 '해나 아렌트'로 표기하는 건(한겨레 같은 경우가 그런데) 원칙의 남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성 표기에서도 '두음법칙'에는 위배되지민 '류'씨 성 같은 표기를 허용/인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편집자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bongsun 2008-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잘 다녀오셨는지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사전에 책에 언급되는 모든 인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 같은 철자의 다른 인물명 표기에서 따오거나,
다른 책이나 언론 등에서 쓰는 표기를 참조하거거나 했는데,
아무튼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베른슈타인은 명백히 제가 오해했거나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인명 표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는 했는데,
허술한 부분이 상당히 있군요.
지적과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로쟈 님과 모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8-02-04 14:06   좋아요 0 | URL
'번스타인'은 '번슈타인'이라고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저로선 기간된 책의 경우 오류가 아니라면 고유명사들은 일치시켜주는 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처음 번역되는 고유명사라면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bongsun 2008-02-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충고 감사드립니다.^^
(앗, '참조하거거나'(?) - 편집자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ㅜㅜ)

로쟈 2008-02-04 15:13   좋아요 0 | URL
저도 덩달아 오타를 냈네요. '일이라고요'라니요.^^;
 

본의 아니게 이번주에 며칠간 중국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지만 중국의 고대 사상에 관한 책들에 요즘 다시 관심을 갖고 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관련분야의 책들의 대부분은 박스 보관도서다. 예전에 동양고전과 한국철학에 관한 책들은 막연히 불혹 이후에나 다시 집어들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불혹이다! '少年易老 學難成'이 따로 없다). 어제도 도서관에서 사마천의 <사기 열전>의 한 대목을 읽었다. 찾아보니 관련서들이 생각보다는 많이 나와 있다. 이 대단한 역사가에 대한 리스트도 따로 만들어둔다.


1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역사의 혼 사마천
천퉁성 지음, 김은희. 이주노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10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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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김영수 지음 / 창해 / 2006년 10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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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기열전 1- 개정2판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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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2- 개정2판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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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8 22:21   좋아요 0 | URL
이제 제가 이립(而立)이니 로쟈님과 딱 10년 차이가 나는 듯 합니다. 이립이라고는 하나 확고하게 세운 것 하나 없어 부끄럽기만 합니다. '少年易老 學難成'이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즐거운 중국 여행 하시길 기원합니다.^^

로쟈 2008-01-29 00:30   좋아요 0 | URL
아주 '소년'이라고 할 만합니다.^^ 일취월장하시길!..

2008-01-28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9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릴리오 읽기 리스트를 만든 김에 리뷰기사도 하나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론 '최근에 나온 책들' 연재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882648) 책을 완독하진 않았다(책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러시아로 떠났었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 중의 하나와 연관되기에 영어본을 찾는 대로 조만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기본적으론 '전쟁학'에 대한 관심이다. '제자백가'의 사상을 낳은 '조건'으로서의 전쟁).

한겨레(04. 03. 12) '속도’는 어떻게 희망서 악몽으로 바뀌었나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폴 비릴리오(72)는 살아서 재발견된 학자다. 1975년 전쟁 건축물을 철학적으로 살핀 첫 저서 〈벙커의 고고학〉을 내놓으며 자기만의 정치적 사유를 시작한 그는 자신의 주요한 저서들이 나오고도 한참 뒤인 199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군사학적 상상력으로 정치의 흐름을 살펴온 그의 이론은 유고슬라비아내전, 9·11 뉴욕 테러와 같이 서구 내부에서 벌어진 파괴적 사건을 거치면서 진지한 연구와 참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그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사상과 연관돼 이제 막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구사한 개념의 상당수가 비릴리오에게 연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 ‘노마디즘’이나 ‘탈영토화’와 같은 들뢰즈·가타리의 핵심 개념은 비릴리오가 1976년에 펴낸 〈영토의 불안정성〉에서 처음 선을 보인 개념이다.

〈속도와 정치〉는 그의 저작 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이다. 1977년에 나온 이 책은 정치를 속도의 개념으로 사유함으로써 전통적인 정치학의 사고방법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내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껏 주로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되던 정치 영역을 ‘시간’을 중심으로 한 정치학으로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이 책에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내놓은 것이 ‘질주학’ 혹은 ‘질주의 이론’이다. 그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현상인 ‘가속화’가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의 본질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정치는 일상적인 의미의 정치라기보다는 전쟁·혁명과 같은 폭력적 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현상이다. 무엇보다 그는 군사적인 차원에서 정치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정치 자체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등 인간의 삶 일반의 변화를 통찰한다.

이 통찰의 바탕에 놓인 아이디어가 ‘군사학적 속도 개념’이다. 가령, 봉건제 시대의 유럽에 존재했던 요새화한 도시는 도시 대중의 순환과 운동량을 규제하고자 등장한 부동의 전쟁기계였다고 지은이는 이해한다. 이 ‘난공불락의 전쟁기계’는 거주의 관성이 지배했던 정치적 공간이자 정치의 특정한 배치였으며 봉건제 시대의 물질적 토대였다.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은 이런 ‘정지된 속도’의 상황이 일변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은 “봉건적 농노제로 상징되던 부동성의 억압에 맞서는 반란”이었고, “임의적인 유폐나 한 곳에 거주해야 한다는 의무에 맞서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동의 자유’를 주장했던 이 반란의 요구는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면서 ‘운동의 독재’로 변질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적 운송장치를 획득하고, 달리기와 같은 생체의 속도, 말·코끼리 등의 동물적 속도를 능가하는 ‘기계적 속도’를 얻었다.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지은이는 서구인들이 인구가 적은데도 동양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서구인들이 기계적 속도를 선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속도는 서구인의 희망’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번 탄력을 얻은 속도는 그 가속화를 멈추지 못한다. 비릴리오는 ‘핵 억지력’, 곧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순수 전쟁’의 상태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이 순수 전쟁의 상태에서 속도는 ‘절대 속도’가 된다. ‘단 1초 만에’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핵무기는 ‘속도의 희망’이 ‘속도의 악몽’으로 뒤바뀌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이 ‘저주의 예언’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의 ‘절대 속도’가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상상력’을 동원해 찾아내려 한다. 그 저항의 형태는 속도의 폭주를 중단시키고 방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총파업은 ‘시간 속에 쌓아놓은 바리케이드’이다.(고명섭 기자)

08.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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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8 22:33   좋아요 0 | URL
Virilio는 후일의 독서를 기약하며 '꿍쳐둔' 사상가였는데, 이 소개글과 아래의 리스트가 왠지 '불씨'를 당기는 느낌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제게 건조한 계절에 특히 조심해야 할 불씨로 보입니다.^^;

로쟈 2008-01-29 00:33   좋아요 0 | URL
네, 조심해야죠. 꺼진 불도 다시 봐야 될 판인데요.^^;
 

프랑스의 사상가 폴 비릴리오의 <동력의 기술>(경성대출판부, 2007)이 작년 늦가을에 출간됐다. 좀 뒤늦게 알게 된 셈인데, 최근 제자백가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손자>도 읽어볼까 하다가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 다시 눈길을 주게 됐다(영어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속도와 정치>를 제외하면 읽을 만한 번역서가 있는 건지 좀 의심스럽지만 리스트는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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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의 기술
폴 비릴리오 지음, 배영달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7년 11월
13,000원 → 13,000원(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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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속도
폴 비릴리오 지음, 배영달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13,000원 → 13,000원(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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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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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미학
폴 비릴리오 지음, 김경온 옮김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7,000원 → 7,000원(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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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쟁과 영화- 지각의 병참학, 패러다임 총서
폴 비릴리오 지음, 권혜원 옮김 / 한나래 / 2004년 4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8년 01월 2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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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8 01:51   좋아요 0 | URL
참, 로쟈님, 혹시 박찬부 선생님의 '현대정신분석비평' 필요하신가요? 절판된 책 구하다가 여벌이 한 권 생겼는데, 다시 헌책방에 내어 놓기도 뭣하고 해서, 로쟈님이나 비평고원 분들 중 혹 필요로 하는 분이 있다면 드리고 싶네요 : )

로쟈 2008-01-28 08:14   좋아요 0 | URL
저는 갖고 있습니다.^^
 

뒷북치는 이야기인데, 작년 12월에 창간된 한 비평저널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 등의 책을 내고 있는 도서출판b 에서 창간한 <악트>가 그것이고, 찾아보니 알라딘에도 뜨긴 뜬다. 필진의 다수는 나도 참여하고 있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멤버들이다. 표제는 'Art', 'Critique', 'Theory'의 앞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지만 지젝과 정신분석에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지젝에 관한 글이 많은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실험적인' 잡지이기에 대중성은 고려되고 있지 않지만 뭔가 '악트'한 비평세계가 개척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컬처뉴스(07. 12. 11) "기존에 없던 저널을 만들겠다"

예술과 비평, 이론을 망라하는 비평저널 『Act』(악트) 창간호가 출간됐다. 『Act』는 'Art', 'Critique', 'Theory'의 첫 글자를 딴 비평저널로, 현대예술, 문학비평, 번역, 리뷰 등 장르에 상관 없이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젊은 글’들이 실려 있다.

창간호가 나오기까지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있는 ‘도서출판 b’, 현대철학 세미나팀 ‘난곡연구소’, 인터넷 비평 공간 ‘비평고원’, 실험성이 강한 예술가 발굴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갤러리 정미소’의 협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성민 난곡연구소 기획위원은 “기존에 읽어본 적 없는 비평저널을 만들고 싶었다”면서, “‘악트’는 예술과 이론, 비평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저널이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이성민 기획위원은 “이름 그대로 ‘악트’에는 세가지 주제가 장르에 상관없이 실릴 예정이지만 현실적으로 음악비평 등은 필자를 구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당분간은 문학과 미술, 영화 등이 주를 이룰 것”이라면서, “잠재적 필자 속에는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창간호에는 조영일 문학평론가의 「황석영과 가리타니 고진’(입답 대 비평)」, 회사원이자 ‘비평고원’에서 활동중인 김도영의 「최소차이의 미장센을 위한 배경 설정하기」, 미국 남가주대 시네마틱아트 박사 과정에 재학중인 박제철의 「(예술-비평을 가지고)무엇을 할 것이나? : 욕망의 레닌주의적 재발명」 등이 실려있으며, 「아티스트와의 만남」에서는 미술작가 오용석과 김소연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조금은 어렵게 읽히기도 하는 박제철의 글은 맑스의 잉여가치 개념과 라캉의 잉여향유 개념, 지젝의 ‘최소차이’ 혹은 ‘시차’ 개념 등을 연동시킨 선언적 성격이 강한 글이다. 그는 이러한 몇 가지 이론을 돌파함으로써 이론-실천적 유효성을 해명하고 거기에 역사적 계기를 할당하는 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잉여가치를 넘어서’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실천적 테제를 제시한다.

김도영의 글은 리뷰하기 어렵기로 손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김정아 역, 길, 2007)를 이야기하면서, 이 저작에서도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역설을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정교하게 다듬고 적재적소에 변주할 수 있는 탁월한” 지젝의 능력을 높이 평했다. 이 글과 더불어 최근 한 블로그에 실렸던 영화 <300>을 다룬 지젝의 글 「진정한 헐리우드의 좌파」도 함께 실려있다(*내가 정리해놓은 건 http://blog.aladin.co.kr/mramor/1475998 참조).

한편 창간호에서 유일하게 컬러도판이 실린 ‘아티스트와의 만남’에는 간단한 작가 소개 외에 어떠한 텍스트도 없이 소수적인 것에서부터 역겨운 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는 오용석 작가와 현대성의 불안, 현대자본주의의 구조 등을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로 구현하고 있는 김소연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다.

김소연 작가는 “보통 미술잡지에서는 내 작품 자체가 아닌 내 작품을 텍스트로 한 비평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작품을 접하는 이들의 시각이 좁아질 수 있는 데 반해 ‘악트’에서는 작품 자체가 그대로 실려있어 보는 사람 마음대로 읽힐 여지가 있어 좋다”고 전했다. 비평저널 『Act』는 앞으로 연 2회로 출간될 예정이며, 책은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태윤미기자)

08.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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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한국판 'Lacanian Ink'의 탄생 같은 느낌을 주는 잡지로군요. 얼마 전 무용평론가 김남수 선생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잡지인데, 로쟈님도 소개를 해주시니,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로쟈 2008-01-27 21:03   좋아요 0 | URL
은근히 그런 걸 겨냥했을 수도 있지만 라캉주의에 편향된 잡지는 아니구요.^^

2008-01-27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27 21:03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독자들을 겨냥한 책은 아니지요.^^;

비로그인 2008-01-2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계신곳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신촌 '글벗서점'이라는 책방에 갔더니, 다른 이들 손을 거친 러시아어 원서들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더군요. 저야 노어에는 까막눈이라 어떤 책이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혹 필요하신 책이 있을까 해서 알려드립니다.
헌책방이고, 오전 11시 경 부터 자정까지 문을 엽니다. 홍대입구역 2번출구에서 내려 신촌역 방향으로 죽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크게 책방이 보인답니다 :)
혹 들를 일 생기거든 필요한 책 발견하시길 바래요.

로쟈 2008-01-28 00:01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전공 공부를 그만두는 분들이 처분하는 책들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