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포커스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9). 최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을 번역해낸 정해창 교수가 '실용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하고 있는 글이다. 실용주의에 대한 개관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교수신문(08. 01. 29) '가능한 대안’ 모색하는 실천의 언어

1.
최근 서구에서 실용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의 철학을 주도해온 분석철학이 ‘분석을 위한 분석’에 매달리다 그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신들이 무의식 중에 딛고 있던 실용주의 지반을 인식하고 그 진면목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활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이 ‘분석철학의 트로이 목마’라고 불리는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의 출간(1979)이다. 고전 실용주의자들인 퍼스, 제임스, 듀이가 활동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를 실용주의의 탄생기라고 하고, 20세기 중엽을 실용주의의 확장 및 정체성 확립의 시기라고 한다면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후를 실용주의 부활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 시기 뿐 아니라 당대의 실용주의자들도 실용주의에 대하여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자는 퍼스가 실용주의에 이름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곡조씩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는 어떤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 초 태동기의 실용주의는 사후 한 세대 이상 묻혀 있던 비운의 천재 퍼스를 제쳐 놓는다면 제임스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이자 진리론으로서 실용주의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출간(1907)되면서 그 대강의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실용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을 정의해온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관념은 그 의미와 진리를 행동을 안내하는 유용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도출된다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얼핏 인식론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앎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철학이 추구해온 앎의 ‘객관적’,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준거이다. 달리 말하면 앎은 다양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찌 한 가지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기준을 통과한 것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인간의 끊임없이 인식작용에서 사변보다 실천, 행위를 우선시한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실용주의를 인식론적 지평을 넘어서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전통적 인식론이 ‘객관’이라는 제약 아래에서 평면적이고 수동적으로 되기 쉬운 반면에 실용주의는 광범위한 실천을 바탕으로 변화와 새로움 그리고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로 가치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고전 실용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우주가 진화한다는 것은 우주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대륙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처녀림이나 다름없었던 미국은 그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위니즘은 이런 지적, 문화적 환경과 잘 융합하는 이론이었고, 실용주의는 전통적으로 무시간적 진리만을 고집하던 철학에 시간 즉 변화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변화는 곧 행위를 의미하고 “모든 관념, 사유는 행위를 위한 계획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언명은 모든 지적인 노력은 인식자와 무관한 관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순수하고 이론적 앎으로 귀결된다는 전통적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유 양상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가 행위로 이어지지 않거나 종료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정신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기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언명은 ‘개간해야할 땅이 너무 많았던’ 미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 온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가져온 과학적 철학관이 실용주의와 유사하여 일종의 상승 작용을 하며 발전하였다.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이론은 실용주의가 천명하는 ‘현금가치’로서의 의미 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이 개념들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자연과학적 방법, 실험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거대한 경험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태도가 실용주의 전통에 접합되면서 실용주의가 보다 기술주의적(technocratic)인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다. 즉 퍼스나 제임스가 강조하던 공동체적이고 참여적 성격이 개인적 자유와 사적 추구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강조하는 진보적 성향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시기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가 뒤범벅되면서 듀이의 해명을 기다려야 했고, 도구주의에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실증주의화되고 과학화된 실용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 종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용주의 부활의 단계인 세 번째 시기는 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중심에 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은 사실상 과학화된 실용주의에서 과학주의를 털어버리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 초 인간을 달에 보내면서 과학기술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나 곧 그 부정적인 면이 함께 부각되었다.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요인들은 과학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좁은 의미의 경험적 합리성, 객관성보다 광범위하다. 즉 과학주의가 배제하는 윤리적, 미학적 고려, 제약 없는 표현, 공동체적 협력 등과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관념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곧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와 결별하고 인문학적 ‘이야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분석철학자였던 로티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매달려 온 유일한 진리, 합리성, 선의 추구는 연기를 손에 잡으려는 시도 또는 불의 색깔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이 허망하고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이 메마른 땅에서 겉도는 이유를 경직된 관념적 질서에서 찾는다. 이들은 철학을 고귀한 추상의 세계에서 끌어내려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로티는 자신이 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하이데거, 비트겐시타인, 듀이의 맥을 잇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 의미의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데 동의하고 대안으로서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 그리고 듀이는 도구적 사유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철학의 과학화가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한 재앙이라는 인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언어의 추구는 사실상 플라톤의 이상, 실재의 비밀을 열어주는 하나의 진정한 언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고, 로티는 철학의 종언이 사람들을 이런 족쇄로부터 해방하는 문화적 결과를 동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사유, 탐구에서 동료 인간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어떤 궁극적 토대,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언명은 바로 자유 진보주의의 천명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실용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아창조는 진보주의가 우리의 선조들을 취하게 하였던 인간성, 자연권 등과 같은 토대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철학이 이런 본질적인 토대를 추구하는 한,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유효하게 남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삶을 떠받쳐 줄 어떤 확고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리라는 ‘데카르트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신학이 인간을 길들이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주입한 것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고전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재해석되고, 현금의 일류 철학자들, 예컨대, 퍼트남, 데이비슨, 굿만과 같은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실용주의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십세기 초의 언어적 전환 이후 철학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 즉 실용주의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듀이가 사망한 이후 실용주의는 철학사의 한 구석으로 퇴장하는 듯 하였으나 이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부활이 근대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원론적 사유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저항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
내가 실용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이론을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욕구, 동료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대화에 어떤 제약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관념의 주인이 될 때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진다.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관념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거대한 관념만 옳고 그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예컨대, 레닌이나 히틀러와 같은 광기와 결합할 경우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지난 세기에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맑은 정신’의 현실주의자 벌린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최선의 희망 즉 품위 있는 사회의 건설은 대안에 대하여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 즉 다양한 수단과 목적들 가운데 겸손하게 선택하고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음을 전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품위 있는 사회는 잔인함을 최소화하고 그 구성원들이 인내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관념론자들은 덧없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신기루 같은 이상에만 매달린다. 더 나아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까지도 이상적으로 재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상상에 불과할 뿐 인간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세기 이상 미국사회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온 실용주의는 당초 실용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폄하하던 유럽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퍼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뿐 아니라 기호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임스, 듀이는 심리학자나 종교학자, 교육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미국화된 아시아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적인 것의 정신적 토대는 가장 덜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실용주의 연구는 고전 실용주의자들보다는 로티에 집중되어 있다. 퍼스선집을 제외하고는 제임스와 듀이의 주요 저술이 다수 번역되어 있고 로티 번역도 여러 권 나와 있다. 그 외에 루이스, 미드와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퍼스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는 한권의 저서(정해창)가 유일하다. 제임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보다는 심리학이나 종교학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고, 듀이에 대한 연구도 단연 교육학 분야가 지배적이다. 철학 쪽에서는 오래 전에 듀이를 학계에 소개한 김태길이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로티에 대해서는 다수의 저서, 역서를 낸 김동식이 단연 두드러지고, 이유선, 엄정식, 노양진, 김혜숙 등의 비판적인 글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사실상 소수의 학자들만 실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실용주의 연구자가 몇 명 안 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관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인문학자들의 케케묵은 관념을 들어 줄 고객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해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야 할 일이다. 칸트의 말대로 철학자들은 모두 시시포스이다. 돌(관념)을 굴려 정상에 올려  놓을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돌은 영락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20세기만 보아도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전환, 언어적 전환, 포스트모던적 전환, 실용적 전환이라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시시포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청중이 지루해 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철학자들은 기존의 관념이 설득력을 잃어갈 때 끝없는 대체놀이에 의해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왜 우리가 바윗돌을 정상에 올려놓아야만 하는가라고 회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대한 관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탐험 정신이야말로 실용주의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돈을 쫒아 헤매고 있는 한, 인문학은 더욱 답답해질 것이다.(정해창/ 한국학중앙연구원·철학)

08. 02. 0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8-02-05 04:02   좋아요 0 | URL
Peirce가 생각했던 pragmatism의 의미와 후대의 '응용'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중국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

로쟈 2008-02-05 09:54   좋아요 0 | URL
아시다시피 퍼스 자신은 아예 'pragmaticism'이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듀이나 제임스와는 거리를 두지요. 로티는 그를 '칸트주의자'로 분류하여 실용주의의 본류와는 다르게 보고(아예 퍼스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중국은 50년만의 폭설로 사정이 안 좋은데, 저로선 우연히 50년만의 '설경'을 보고 온 것이니 나름으로는 의미있었다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