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일의 갑부가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라는 것 정도는 퀴즈문제에 나올 만한 상식이다. 하지만 두번째는? 여기부터는 '상식밖'일 텐데, 나도 아래의 기사를 읽으며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올렉 데리파스카(1968- )이고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기업이라는 루살의 '오너'이다. 얼마전 GM 지분을 5% 인수한 것과도 관련해서 뉴스에 오르내린 적이 있는데, 이 '잘 나가는' 올리가르흐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러시아의 올리가르히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091634 참조).

 

조선일보(07. 09. 01) '포스트 푸틴’ 대비책? 영국行 엑소더스 논란 

크렘린의 지지를 업고 혜성처럼 떠오른 ‘러시아의 철강왕’ 올레그 데리파스카(Oleg Deripaska·39)가 이번에는 영국으로의 ‘엑소더스’(exodus·대탈출) 논란에 휩싸였다. 혹시 모를 권력의 변덕과 포스트 푸틴 체제에 대한 방어책으로 자산 전체를 영국으로 옮기려 한다는 것이다.

데리파스카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기업 루살(RUSAL)의 오너(owner)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 이은 러시아 2위 갑부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외손녀의 남편으로, 푸틴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인물로 유명하다. 소치 공항을 통째로 인수해 대대적인 재건축에 나서며 러시아의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데리파스카가 때아닌 논란에 휩싸인 것은 런던 고급 주택가 벨그라비아(Belgravia)에 일찌감치 사놓은 저택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개인적으로’ 인수해온 유럽 기업들 지분에, 올해 말로 점쳐지는 루살의 런던증권거래소 상장이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루살은 기업공개(IPO)에 성공할 경우 90억 달러의 자금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까지는 데리파스카가 굳이 러시아를 탈출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는 여전히 푸틴이 가장 신임하는 올리가르히(Oligarchy·러시아 신흥재벌)다. 또 그는 전직 오너가 탈세 혐의로 재판 중인 석유기업 루스네프트(Russneft)의 유력한 인수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영국인 거부가 될 수 있다는 건 달콤한 유혹임에 틀림없다. 그 역시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등 걸출한 올리가르히들의 몰락을 눈앞에서 지켜봐 왔다(*아래는 철창의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그룹의 회장이었던 그는 러시아 최대의 갑부였다).

성공적으로 서방 미디어의 보호막 안에 들어선 아브라모비치의 선례도 있다. 포스트 푸틴 체제는 언젠가 다가올 현실이고, 푸틴 아래서 누렸던 특혜는 다음 정권에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데리파스카는 자신의 엑소더스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일축한다. 그는 루살의 기업공개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주주들이라며 “나는 부끄러운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다. 역사가 나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공언하고 있다.

데리파스카는 1990년대 러시아 알루미늄 산업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알루미늄 전쟁’의 최후 생존자라 할 수 있다. 권력과 마피아가 동원된 이 혈투에서 알루미늄 업자들은 기습과 암살을 주고받았고, 살해된 사람은 수십 명에 이른다.



모스크바대에서 양자물리학을 전공하던 데리파스카는 1992년 국유 재산 민영화의 격동기에 시장 경제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알루미늄 매매 시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당시 알루미늄 산업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계 금속기업 트랜스월드그룹(TWG)의 러시아 대리인 미하일 체르노이와의 만남이었다.

체르노이는, 이재에 밝고 수완을 갖춘 푸른 눈의 이 청년을 알아봤고, 시베리아 남동부 사얀스크(Sayansk)의 알루미늄 공장 사장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데리파스카는 훨씬 큰 야망을 갖고 있었다. 데리파스카는 1998년 트랜스월드그룹의 뒤를 봐주던 정치인의 실각과 체르노이 형제 간 불화로 회사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비밀스러운 증자를 추진했고, 결국 사얀스크 공장의 경영권을 빼앗았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트랜스월드그룹의 오랜 독점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알루미늄 업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애국심을 이용한 선전도 곁들였다. 기자회견을 열어 “러시아에 대한 강탈은 이미 충분하다”며 세금 감면 혜택을 받고 있던 트랜스월드그룹을 공격한 것이다. 자신은 3년 내에 주식을 공개하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1999년 크렘린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트랜스월드그룹이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해 고위관료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고 발표하며 그간의 특혜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데리파스카는 타격을 입은 트랜스월드그룹이 주춤하는 사이 공장들을 인수하며 세력을 넓혀 나갔고, 결국 알루미늄 기업 연합인 루살 회장에 오를 수 있었다.

흑해 연안 크라스노다르(Krasnodar) 지방의 전통 마을에서 태어난 데리파스카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와 친척들 집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는 “삶의 어려움은 재앙이 아니다. 홍수가 있으면 뛰쳐 나가서 맞서면 된다”는 말로 당시 생활을 표현했다. 후에 데리파스카는 정략결혼에 예기치 않은 행운을 더해 수직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



2001년 2월 데리파스카는 옐친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발렌틴 유마셰프의 딸과 결혼했다. 그런데 8개월 뒤 장인 유마셰프가 옐친 전 대통령의 딸인 여장부 타티야나와 재혼했다. 데리파스카는 하루 아침에 옐친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데리파스카는 푸틴에 대해 “러시아의 대통령은 나라 전체를 이끄는 최고 관리자이다. 그는 똑똑하고, 적절하고, 그의 권위는 한계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푸틴은 그런 그에게 “국가에 이바지한 경제인”이라고 화답한다. 언제까지 이런 관계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데리파스카는 몰락한 올리가르히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성적인 행동보다 룰렛 게임에 돈을 걸던 무능력한 무리는 제거됐다. 죽거나 아니면 노동 캠프에 가거나.” 데리파스카의 엑소더스를 둘러싼 논란은 서방 언론들의 푸틴 공격과 맞물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선정민 기자) 

07.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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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독서의 주제 중 하나를 '제국'으로 정했는데, 마침 한겨레에서 '우리시대 지식 논쟁'이란 기획기사를 만들면서 '제국'을 첫번째 테마로 다루고 있어서 옮겨놓는다(네그리/하트의 <제국>은 리스트에서 제외했지만).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라는 테마 타이틀에 세 명의 필자가 가세하는 모양인데, 첫번째 타자는 네그리/하트의 제국론의 지지자인 조정환 다중네트워크 대표이다. 이후 정성진, 이진경 교수의 글들도 옮겨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9. 01)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제국 시대

이번주부터 매주 한차례씩 학계의 주요 쟁점을 보는 전문 연구자들의 각기 다른 시각을 엮어 내보낸다.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시사성 있는 쟁점에 대해 그 논리의 틀거리와 각기 다른 논지의 차이를 세밀히 들여다볼 계획이다. 풍부한 논리 소개로 해당 주제에 대한 독자 이해도를 높이고자 원칙적으로 매주 한 꼭지의 글로 한 면을 채우기로 했다. 시리즈의 첫번째 쟁점은 ‘제국이냐 제국주의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책 <제국>이 지난 2000년 출간된 이후, 이 주제는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됐다. 지은이들은 현재의 전지구적 권력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국’을 내세운다.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고 권력의 중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제국주의론’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국주의론’에 사망 선고를 내린 셈이다. 이들은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으로 미국 등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제국’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오늘의 세계는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 과정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제국론의 지지자인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상임간사?)의 글에 이어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제국주의론의 견해에서 반론을 펼치며, 이후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제3의 시각을 제시한다.(편집자)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 ① 왜 제국인가

왜 미국은 양귀비가 주요 산품일 뿐인 농업국 아프가니스탄에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붓고 있는가?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나 독일인이 어째서 탈레반의 인질로 이용될 수 있는가? ‘전지구적 주권질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주권의 확장메커니즘을 설명했던 ‘제국주의론’은 20세기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었지만 탈식민화가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적실성을 잃기 시작했다. 신제국주의론,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탈식민주의론 등은 그것의 부적실함을 메우고자 만든 이론들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더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물론 제국주의 현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국익’을 위하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작은 나라들을 침략·점령한 뒤 석유·가스와 같은 자원을 약탈하거나 그 수송로를 매설하고 무기를 비롯한 상품을 팔고 자본을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을 제치고 소련 제국주의와의 냉전에서 승리한 뒤 점점 더 거대한 제국주의 초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일면적이다. 그것이 감추는 다른 면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전비는 점령을 통한 자원 확보나 상품 수출을 통해 볼 수 있는 이익을 훨씬 초과한다. 게다가 전후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거대한 자금이 원조로 제공되어야 한다. 저항이 끝나지 않음으로써 전쟁은 항구화하고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행동은 미국 자신을 연간 7000억 달러의 무역적자와 연간 40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기록하며 평균 매일 20억 달러를 차입해야 하고 또 매일 50억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빚더미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론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제국주의론의 좀더 발전된 판본은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한다. 그 종속국의 범위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독일과 같은 이전의 적대국, 그리고 프랑스·영국과 같은 옛 제국주의 맹주국들도 포함할 만큼 넓다. 동맹국들을 거느리는 데 드는 높은 비용 때문에 미국의 부채는 부단히 증가한다.

그래서 빌 보너의 <부채의 제국>,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차머스 존슨의 <제국의 슬픔> 등은 미 제국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언한다.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등장을 보지 못하고 국민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상의 이론들은 미국의 군사적 강대화와 경제적 취약화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실천적으로 제국주의론은 민족해방을 아직도 유효한 투쟁전략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미국에 맞섰던 사담 후세인을 군사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탈레반을 민족해방운동의 전위대로 지지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테러와 납치도 민족해방운동의 부득이한 전술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도 반제국주의 보루로 보일 것이다. 반면 미 제국론은 미국의 붕괴를 예상하면서 미국을 대체할 대안제국(가령 유럽이나 중국)을 상상하는 데 머무른다. 이러한 정치학이 가져올 퇴행적 결과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듯 이들이 국가행동에 정치의 초점을 맞추는 한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들의 국경을 넘는 전지구적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태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하자면 오늘날 주권이 일국적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은 주권의 이러한 전지구적 구성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제공한다. 각 층에 각 3단의 작은 계단을 가진 3층 피라미드의 주권 구성체 그림에서 미국은 피라미드적 주권 질서의 최상층, 최상단에서 전지구적 무력사용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미국은 강대한 용병국가로서 지구에 산재한 미군들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군대들을 지구제국을 지키는 용병으로 결합함(이른바 ‘연합군’)으로써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한다. 한국의 파병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미국 대통령은 이런 의미에서 전지구적 용병대의 우두머리다.

그 아래로 전지구적 통화수단을 통제하면서 국제거래를 조절하는 일단의 국가들의 연합체(주요8국, 파리클럽과 런던클럽, 세계경제포럼 등). 그 아래 단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처럼 군사적 혹은 재정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제단체들이 놓인다. 이상이 제국을 ‘통합’하는 군주층이다. 그 아래의 귀족층은 초국적 기업들 및 시장을 조직하는 세력들(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등과 같은 국제경제기구들)과 국지적으로 영토화된 국민국가들(유럽연합 등)에 의해 ‘절합’되어 있다. 이것이 귀족층이다. 그 아래의 민주층에 전지구적 권력배치에서 민중의 이해를 ‘대의’하는 집단들이 놓인다. 유엔을 통해 다중을 대의하는 국민국가들, 미디어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들 등이 그것이다.

등장하고 있는 전지구적 주권질서에 대한 이 그림은, 수많은 크고 작은 권력체들이 위계질서화된 그물 속에 마디들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물 주권기계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중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적 삶의 생산자라는 사실의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 전지구적 주권기계의 기능은 다중의 삶활력을 권력흐름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민주층의 대의회로를 거친 그 힘들을 귀족층에서 마디마디 절합하면 군주층이 통합하여 단일한 세계명령(보편공리)으로 만든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는 자본 착취의 무제한 자유를, 테러에 대한 영구전쟁은 다중의 삶자유에 대한 무한한 억압을 공리화한다. 이 명령기제를 통해 다중의 생산적 활력은 제국주권의 동력으로 포획된다.


요컨대 제국의 재생산은 다중으로 하여금 창조적으로 살되 공포와 예속 속에서 살게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와 같은 사회적 갈등들은 물론이고 외형상 국가간 전쟁형태를 띠는 갈등조차 실제로는 다중에 대한 제국의 전쟁, 곧 전지구적 내전이다. 21세기의 전쟁들은 자본의 이러한 필요에 따라 각층 각단의 주권마디들의 명시적 혹은 암묵적 지지 아래 일상적·보편적·항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구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군대는 지구상 어느 오지라도 파견된다. 그런데 그에 수반되는 전비는 누가 치르는가? 미국은 동맹국들로부터 전비를 거두는데 이것은 해당국 다중들의 세금에서 나온다. 미국 자신의 전비는 부채(국채판매)로 충당하는데 미국의 국채를 구입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 같은 여러 나라이며, 그 주요 자금은 국민들의 연금·기금·보험료·저축 등이다. 결국 전세계의 다중들이 다중 자신을 공격하는 제국의 전쟁에 전비를 치르는 셈이다.

미국의 부채는 미국이 붕괴되지 않는 한에서만, 아니 전쟁 강국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다른 부채를 통해 상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결국 전지구적 전쟁질서로 말미암아 미국은 부단히 ‘제국주의적’ 행동을 일삼게 되고 그것은 다중의 건강과 노년, 다시 말해 생존과 안전을 볼모로 잡는다. 

이 착종되고 역설적인 상황을 깨뜨릴 대안은 무엇인가? 그 답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주권질서 자체가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중 자신이 다양한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들을 지구적 수준에서 연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길이다. 투쟁하는 다중의 지구적 네트워크의 길을 열어감에서 전지구적 주권질서의 실재성을 보지 못하는 제국주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과제다.(조정환/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07. 09. 02.

P.S. 어휘론적 차원에서 네그리/하트의 <제국>이 낳은 최대 기여는 '제국'과 (특히) '다중(multitude)'이란 어휘의 대중화이다(적어도 지식사회에서는). 나는 말 그대로 '다중적(muliple)' 의미를 갖는 '다중'이란 개념의 현실적 유효성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때문에 "다중 자신이 다양한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 투쟁들을 지구적 수준에서 연결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길이다."라는 선언적 주장에서 '이론투쟁'의 뉘앙스만을 읽는다. 이후의 반박과 지양(?)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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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불의 정신분석>(이학사, 2007)을 영역본과 함께 읽다가 문득 모스크바통신에서 바슐라르에 대해 간단히 적어놓았던 게 생각났다. 찾아보니 '<텍스트>-바슐라르-로트만'이라고 타이틀을 달았던 꼭지이다. 모스크바통신의 내용은 비공개로 돌리기 전에 대부분 새로 정리해서 옮겨놓았었는데, 간혹 빠진 글들이 있다. 이 꼭지도 그런 경우인 듯하다. 간혹 사실에 맞지 않거나 불필요한 일부 내용은 교정을 보면서 옮겨놓도록 한다. 한 줄기 추억담으로. 때는 2004년 5월이었다.

지난주초에 서울에서 온 우편물을 받았다(여기 와서 통틀어 두번째로 받은 우편물이었다).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의 3월호와 4월호 두 권이 들어 있었다(우라!) 우연한 계기로 그 잡지에 ‘로쟈의 노트’라는 걸 연재했었는데, 담당기자는 내가 모스크바에 온 이후에도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고,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메일로 이 곳 주소를 알려주긴 했지만, 책을 직접 보내겠다는 약속은 ‘덕담’으로 흘려도 좋은 것이었는데(비용도 만만찮고), 세상엔 아직 고지식한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 와서 제일 처음 읽는 한글 책이 지난번에 언급한 <항상 라캉에 대해…>와 함께 이 <텍스트>가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의 ‘과제’와 관련된 책 두어 권을 제외하곤 한글책은 한권도 들고 오지 않았고, 영어책도 전공서 몇 권을 빼면, 얇은 데리다 책 세 권(<죽음이라는 선물> 등)과 브루스 핑크의 책 한 권(<라캉적 주체>)이 전부이다. 그런데, 아직 이 책들을 책꽂이에서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읽어야 할 러시아어 책들이 책장을 다 채우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그보다 더 원론적으로 책 읽을 시간도 많지 않았다, 책을 ‘보러’ 다니느라고), 굳이 한글이나 영어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았던 것. 이것의 주된 원인은 길게 건 짧게 건 한글이나 영어로 메일을 자주 보내기 때문인 것 같다(이걸 자제하면 책을 읽게 될까?).

내가 집어든 <텍스트>의 3월호엔 이곳에 오기 전에 사두었던 이지훈의 바슐라르 연구서 <예술과 연금술>(창비)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 <텍스트>를 나에게 배달해준 할아버지가 딱 이 바슐라르를 닮았다. 월요일인가, 화요일 아침부터 문을 여러 차례 두드리길래, 누군가 싶었더니 언젠가 한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편지 몇 통을 내가 사는 7층 수위 아저씨(라기보다는 할아버지) 책상에 갖다 놓아달라고 부탁받았던 배달부 할아버지였다(나에게 우편물에 적힌 주소를 확인시키더니, 장부에 사인을 하도록 했다). ‘스빠씨바!’ 나는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의 별명이 ‘바슐라르’이다(내가 붙인 거지만). 약간 ‘고생한 바슐라르’. 수염은 비슷하게 났지만 약간 검은 얼굴에 좀 말랐다(말도 약간 더듬는다). 그래도, 배달부답게 모자와 배낭을 다 챙겨서 다니신다(영화 <일 포스티노>의 배달부 아저씨가 갑자기 생각난다). 사실, 젊은 바슐라르도 우체국에서 일하지 않았던가! 이 러시아의 바슐라르 할아버지가 밤에는 촛불 밑에서 몽상도 하고, 남몰래 연금술도 꿈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이 할아버지를 자주 만났으면 싶다!

참고로, 러시아에서는 시학자로서보다는 과학철학자로서의 바슐라르를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의 <공간의 시학>이 근년에 번역/소개되었고(로스펜출판사), <새로운 과학철학>과 <부정의 정신>이 함께 묶인 책은 헌책방에서 볼 수 있었다(그리고 <새로운 합리주의>인가 하는 책도). 사실, 이 두 권의 책은 오래전 국내에도 번역/소개됐었다. 물론 (역자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과학철학자 바슐라르의 자취를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건 그간에 제대로 된 번역/소개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학서 번역을 두고서도 논란들이 있었지만. 그 두 권의 책을 낸 곳은 출판사 ‘인간사랑’이다. 하지만 정작, 그 출판사에 부족한 건 ‘책사랑’인데, 이런 날림 번역서를 이미 오래 전부터 서슴없이 출간해 온 것.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그나마 <예술과 연금술> 같은 책으로 바슐라르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건 다행스런 일이다(*러시아어로 번역돼 나온 바슐라르를 나는 이후에 모두 구했다).



하여간에 이 <텍스트>(3월호)를 가방에 넣고 나는 지난 화요일과 목요일에 시내에 있는 <비블리오-글로부스>란 서점을 찾았다. <돔 끄니기>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그래도 손꼽히는 대형서점이라고 해서 한번 찾았고, 보아둔 책을 사기 위해서 한번 더 찾은 것. 그리고 그때마다 볼일을 본 이후에는 정처 없이 시내를 30-40분간씩 산책했다. 아무 전철역이나 다시 나타날 때까지. 나중에 지도를 보니까 돌아다닌 곳이 거기서 거기였지만.

모스크바의 지리를 알거나, 나중에 혹 찾게 될 사람을 위해서 밝혀두면, <비블리오-글로부스>는 빨간색 라인(1호선)의 '루뱐까'역에 있다. 출구쪽으로 나오다 보면 <비블리오-글로부스>로 나가는 쪽 출구를 확인할 수 있고(모스크바 지하철은 입구와 출구가 일방통행이다), 출구로 나와서는 곧장 1분 정도를 걸어가면 된다. 가는 길 오른편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20세기 초의 걸출한 시인(혁명의 목청!) 마야코프스키의 박물관이 있다. 참고로, 내가 한참을 ‘산책’하다가 도착한 역은 각각 '취스뜨이 쁘루드이'와 '수하렙스까야'이다.

<비블리오 글로부스>는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구성된 매장인데, 전체적인 면적은 <돔 끄니기>보다 좀 작아보였지만, 분야별로 ‘방’이 나뉘어져 있어서 둘러보기에는 더 편했다. 물론 <돔 끄니기>의 1층을 내가 자세히 돌아보진 않았지만, <비블리오 글로부스>의 지하 1층에는 오디오, 비디오와 화집 코너가 따로 있어서 ‘구경’은 잘 할 수 있었다. 비디오는 DVD와 비디오CD까지 다 망라돼 있었는데, 비디오CD는 역시 종류와 양이 많지 않아서 내가 새로 살 만한 것이 없었다. 비디오로는 러시아 영화들 외에 명작(클래식) 시리즈로 펠리니, 부뉘엘, 르누아르, 구로자와의 영화들이 여러 편씩 눈에 띄었고(특이하게도 히치콕과 오즈는 안 보였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도 한 켠에 있어서 나를 잠시 즐겁게 했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카바를 보니 무삭제판이다) 옆에.

Империя чувств

대형서점들을 몇 번 찾으면서 받는 인상이지만, 엄청나게 많은 책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꼭 사야 할 책, 혹은 살 수 있는 책은 별로 많지 않다. <비블리오-글로부스>만 해도, 말로만 듣던 <톨스토이 전집>을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이 91권(이게 끝인지는 모르겠다. 너무 높이 꽂혀 있어서 확인해보지 못했다)짜리는 보기만 해도 경탄/경악스럽다. 내가 톨스토이 전공자가 아니란 사실에 안도할 따름. 막심네 가게에서 산 <고골 전집>의 1권(<지칸카 근촌 야화>, 국내에는 8편 중 6편이 번역된 게 있다)도 있었지만, 막심네보다 200루블(8,000원) 이상이 더 비쌌다.

Агата Кристи.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Том 48. Книга 1. Мертвецы не катаются на лыжах. Под парусом среди мертвецов. Фантастическое убийство

포크너 전집(9권), 드라이저 전집(8권) 등 미국 현대작가들의 신간 전집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지만, 나를 또 가장 경탄/경악케 한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이었다. 42권까지 나와 있었는데, 한 권당 보통 700쪽 이상이었고, 어떤 권들은 분권이 3-4권씩 됐다(*전체 48권짜리이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 하지만, 아가사 크리스티는 두려워 할 만했다! 그밖에 20세기 러시아 작가들의 전집들도 많이 나와 있었지만, 나는 눈요기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값도 값이고, 부피도 부피였기 때문에. 19세기만 해도 확실한 거장들의 리스트가 있지만, 20세기는(특히 후반) 거의 (올망졸망한) 백가쟁명의 시대여서 불가코프나 파스테르나크, 플라토노프, 나보코프 등 손가락에 꼽는 작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안 사기에는/안 읽기에는 찜찜하고, 사기에는/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작가들이다(이들이 한 권씩만 썼으면 그래도 다행이련만!).

나에게 이 서점을 소개해 준 후배의 메일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는데, 이 <비블리오-글로부스>에도 <북끼니스트>라고 헌책방이 따로 있었다(새로 생긴 것인가?). 하지만, 여기도 한 방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 가운데, 나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책은 몇 권 없었다. 그 중 한 권은 1979년에 나온 <레르몬토프: 연구와 자료>인데, M. 알렉세예프, V. 바쭈로 등이 편집을 맡은 책으로, 러시아와 미국 학자들의 논문과 연구자료 25편 정도가 실려 있다(미국과 러시아의 레르몬토프 학자들이 함께 책을 낸 건 최초라고 서문에 밝혀져 있다). 430쪽 분량이고, 16,300부를 찍을 걸로 돼 있다. 무슨 연구서를 소설보다도 많이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 때문인지 책값은 80루블로 생각밖에 저렴했다. 화요일에는 이 책과 유리 로트만의 동료였던 B. 예고로프의 <로트만의 삶과 창작>(1999)을 73루블에 사는 것에 만족했다.

Физиология символического. Книга 1. Возвращение Левиафана

예고로프의 책은 <신문학평론>(영어로는 ‘New Literary Observer’이다. NLO로 약칭)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인데, 이 NLO는 수년 전부터 러시아 문학연구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출판사이다. 특히 맘에 드는 건 책이 모양새 있게 나옴에도 불구하고 책값이 저렴하다는 것. 아무리 두꺼워도 150루블을 잘 넘지 않고(가장 최근에 나온 건 유럽의 18세기 문학/문화에 대한 얌폴스키(Jampolsky)의 아주 두툼한 연구서이다. 얌폴스키는 앞으로 이름을 기억해 둘 만한 중요한 러시아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이다), 웬만하면 80루블 이하이다(*물론 지금은 가격이 2-3배 이상 뛰었다).

이 노보예출판사는 같은 이름의 격월간 문학잡지도 내고 있는데, 2004년호로는 지난달 중순쯤에 첫호(No. 64-1)가 나왔다(여섯 번이 다 언제 나올 건지?). 가장 유명한 문학잡지의 하나이고, 가장 품위있게 나오는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놀란 건 고작 2,000부를 찍는다는 것. 480쪽에 5천원도 채 안되는 책값이지만, 독자가 그만큼 없는 것인지?(인터넷으로 원문이 다 서비스되기도 하지만.) 이 잡지는 대개 내용도 새로운 경향인데다가 알차지만(적어도 목차상으론), 특별히 고마운 건 권말에 영어로 써머리가 다 돼 있다는 것(그리고 다양한 서평이 풍부하다는 것).

Мифы - эмблемы - приметы. Морфология и история

이번호 <사건으로서의 책>란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저자는 <치즈와 구더기>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의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이다(현재는 UCLA에 재직중. http://blog.aladin.co.kr/mramor/1112172 참조). 그의 선집 <신화-상징-징후>가 작년말쯤에 이 노보예출판사에서 나온 걸 계기로 하여 마련된 특집인데, 긴즈부르그식의 미시사 연구의 특장과 한계를 짚는 글들과 긴즈부르그 자신의 강연원고 한편, 그리고 그가 이탈리아의 문헌학자이자 맑시스트 팀파나로(S. Timpanaro)와 1970년대에 교환한 서신들을 싣고 있다.

다시 예고로프. 그의 책도 러시아에서 공부한 전공자라면 대개 갖고 있는 책인데, 385쪽 분량의 하드카바 책이 우리 돈 3,000원도 안된다. 어쨌거나 반세기에 걸친 로트만과의 오랜 교우를 바탕으로 하여 씌어진 이 책은 저자의 자부심대로 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며, 로트만 연구에 있어서 1차 자료적인 성격을 갖는다. 에스토니아 출신으로(때문에 러시아학계에서 로트만은 오랫동안 비주류였다) 그곳 타르투대학에 오래 몸담으면서(아예 그곳 러시아문학부를 창설했다!) 유리 로트만(1922-1993)은 타르투대학을 러시아 문화기호학의 메카로뿐만 아니라 세계기호학계의 성지로 만들었다(*로트만 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802010 참조).

기호학의 다른 성지들은 그레마스의 파리학파(몇 대학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파리학파’의 선집들도 출간된 바 있다)와 함께, 토마스 세벅의 인디애나대학 기호학연구소, 그리고 비언어기호학을 주로 하는 베를린 공대 기호학연구소(세계기호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독일학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등이다. 물론 그 지명도나 기여도에 있어서 모스크바-타르투 학파는 단연 독보적이지만(물론 로트만 사후에 그 이론적 업적이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레마스 사후의 파리학파가 그렇듯이).

Пушкин. Биография писателя. Статьи и заметки. 1960-1990. `Евгений Онегин`. Комментарий

다른 한편, 로트만은 푸슈킨 연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업적들을 남기고 있다. 이미 그의 전집 한 권이 <푸슈킨>으로 묶인 바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골 연구에 있어서 유리 만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위치를 푸슈킨 연구에 있어서 유리 로트만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순수 러시아’ 학자들은 의견이 다르겠지만). 그건 아마도 학자로서 그 자신이 가장 평가받고 싶어했던 부분들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싶은데, 러시아문학에서 푸슈킨이 갖는 문학적 상징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1991-2년에 행해진 생전의 그의 마지막 TV강연 주제도 ‘푸슈킨’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건 <예브게니 오네긴>에 대한 그의 주석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부분이다. 며칠 전 ‘볼쇼이’에서 공연됐던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팜플렛에서도 로트만의 이 주석은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을 정도이니까(가장 ‘대중적인’ 푸슈킨 학자?!)

로트만 얘기를 갑자기 길게 한 것은 <비블리오-글로부스>의 <북끼니스트>에서 그의 누이가 저명한 푸슈킨 학자인 포미쵸프와 공동으로 주석을 단 <보리스 고두노프>(1996)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맡은 부분은 역사적-문헌적 주석으로 130쪽 정도의 분량이다. 나는 이 주석이 그의 전집 속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지 못해서, 화요일에는 책을 사지 않았는데, 기숙사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까 적어도 그의 <푸슈킨>(1995)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목요일에 다시 <비블리오-글로부스>를 찾은 건 8할이 이 책(더 정확하게는 이 주석) 때문이었다(원전보다 주석이 더 중요하다?). 책값은 128루블.

Ранний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49

나머지 2할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 네차예바의 책 때문이었는데, 그녀의 1979년작 <초기의 도스토예프스키, 1821-1849>와 함께(이건 지난번에 필팍의 <이데아>에서 구입한바 있다), 이전작인 1975년작 <도스토예프스키와 ‘에포하’>(대략적인 제목인데, 형 미하일과 함께 창간한 잡지 <에포하>와 관련된 연구서로 1864-5년을 다루고 있다)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화요일에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해서 안 샀는데, 그 책을 구해달라는 후배의 부탁도 있고 해서 얼만큼 비쌌는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서 다시 찾아간 것이다(200루블대라면 사주기로 하고서). 그런데, 무려 450루블(18,000원).

부피도 300쪽이 안되는 책이건만, <초기의 도스토예프스키>가 120루블인데 반해서, 3배 이상이 비싼 건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만한 돈이면, 로트만의 아내이자, 20세기초 러시아 최대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 연구의 최고 권위자 Z. 민츠의 두툼한 선집 3권을 모두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비록 내가 필팍의 <그노지스> 서점에서 108루블 하는 그 중 한 권을 멀리 수하렙스까야 거리에까지 가서 178루블에 사는 우(愚)를 범하긴 했지만(원숭이도 나무에서 자주 떨어진다!). 해서, 나는 다른 곳에서의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8,000부를 찍은 책이기 때문에, 어디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Философия Достоевского

다시 <텍스트>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책값 얘기를 하나만 더하면, 아마도 첫번째 통신에서 언급했을 라우트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철학>을 <비블리오-글로부스>에서는 42루블(1,700원)에 팔고 있었다(이런 곳에서 책값이 싸서 놀라다니!). 그 책은 엠게우의 헌책방에 아직도 165루블(6,600원)짜리로 꽂혀 있는데 말이다. 나는 <이데아>에서 80루블에 사서 혼자 흡족했었는데, 최저가와 비교하면 두 배나 비싸게 산 셈이 된다. ‘협정가격’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희롱한다!..

이런 식으론 분량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서 막을 나눈다. <텍스트> 얘기부터 히치콕 번역까지의 이야기는 다음 통신문에서 다루기로 한다(*지젝의 히치콕 읽기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837642, http://blog.aladin.co.kr/mramor/836325 등의 페이퍼 참조).

04. 05. 10/ 07.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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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9-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야한 그림이 감각의 제국 러시아판 껍질인가요?

로쟈 2007-09-0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다지 야할 것도 없지만도...

심술 2007-09-0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더 야한 것도 널렸지요.^^
 

토요일 오후에서야 가까스로 '글의 감옥'에서 벗어났다. 많은 분량은 아니었음에도 주말에 세 편의 원고를 몰아서 쓰는 건 정신적으로 너무 곤욕스럽다(지난 이틀 내내 마지막 30초에 쫓기며 바둑을 두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날밤을 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보니 어느덧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당장 개강준비로 읽어야 할 책들이 턱밑까지 쌓여 있다. 그러는 와중에 또 사회적 독서의 목록도 '의무감'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사실 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http://blog.aladin.co.kr/mramor/1366681)을 보니 내가 읽지 못한 책들이 대다수이고 그나마 구입한 책이 절반 가량이다. 휴가도 못 갈 만큼 바쁘기도 했으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대신에 다른 책들을 읽었던 걸 위안으로 삼는다). 어차피 사놓은 책들은 언제 읽어도 읽게 되는 것인지?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니까 '9월의 사회적 독서'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마지막 주는 추석 연휴이니 실질적으로 3주밖에 안되는 데다가 첫주는 개강이라 다들 바쁘지 않겠는가. 해서 '9, 10월의 사회적 독서'라고 해두고, 주제별로 몇 권의 책 정도를 꼽아보도록 한다.  

 

 

 

 

첫번째 주제는 '제국'이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제국에 대한 아주 간단한 입문'(http://blog.aladin.co.kr/mramor/1504292)과 '로버트 카플란과 제국의 보병들'(http://blog.aladin.co.kr/mramor/1507526) 같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거기에 덧붙여서 홉스봄의 4부작 중 <제국의 시대>(한길사, 1998),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2007), 그리고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의 한국어판 <제국의 새로운 전선>(필맥, 2007)을 '역사'와 '시사'를 보완하는 의미로 같이 꼽아둔다(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그 자체로 덩치가 너무 크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두번째 주제는 혁명이다. 특히 올해 90주년이 되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주제이다(10월 혁명은 구력으로 환산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달력으론 11월 7일이 혁명기념일이다). 예의상 관련서들을 한권 정도는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미 여러 차레 페이퍼를 쓴 바 있지만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가 핵심적이지만 가독성이 떨어지기에 대중적으로는 이번에 새로 나온 스티브 스미스의 <러시아혁명>(박종철출판사, 2007) 정도를 권한다. 저명한 러시아사가 리처드 파이프스의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교양인, 2007)과 함께 영어권 학자들의 시각을 일람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문학과지성사, 개정판1999)는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나온 가장 두꺼운 책이다. 올가을에 관련서들이 더 나오면 좋겠다.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 sic vii ([sic] Series)

가령 지젝 등이 편집한 <재장전된 레닌(Lenin Reloaded)>(2007) 정도의 책이 나와주었으면 싶다.

 

 

 

 

세번째 주제는 정치의 계절에 읽는 고전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다양한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건 강정인 등이 옮긴 <군주론>(까치글방, 2003)이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역시나 강정인 교수 등이 쓴 해제 <군주론>(살림, 2005)를 참조해볼 수 있겠고, 레오스트라우스의 <마키아벨리>(구운몽, 2006)은 <군주론>을 이미 읽은 독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한길사, 2003)와 같이 읽어야 한다). 산본마쓰의 <탈근대군 주론>(갈무리, 2005)는 "1960년대 신좌파의 등장,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 탈식민주의 등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꼼꼼하게 읽고 이들의 인식론적 오류와 실천적 결함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탈근대에 다시 씌어질 수 있는 <군주론>이란 어떤 것인지 가늠해보게 한다.

 

 

 

 

네번째 주제는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고독'이다. 정치를 '고독산업'이라고도 부르는 강준만의 <고독한 한국인>(인물과사상사, 2007), 리즈먼의 고전적인 사회학서 <고독한 군중>(문예출판사, 1999), 전설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이레, 2007) 등 고독의 메뉴는 다양하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문학동네, 1998)도 일독해볼 수 있겠고, 폴 오스터의 초기 에세이집 <고독의 발명>(열린책들, 2001)도 꼽아볼 수 있겠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이나 릴케, 김현승의 시까지 거론하게 되면 끝이 없을 듯하므로 각자의 고독은 각자가 챙기시길...

07. 09. 01.

 

 

 

 

P.S. '사회적 독서'에서 '고독'을 주제로 다룬다고 하니까 뭔가 어색하긴 하다. 아마도 더 어색한 건 '단독자의고독'을 다룬 키에르케고르(키르케고르)의 책들을 읽는 것이 될 것이다. 다산글방에서 다시 나오고 있는 임춘갑 선생 번역의 키에르케고르가 이제 다섯 권이 되었다(<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직 안 나온 것인가?). 이번 가을에는 (열외로) 키에르케고르도 한두 권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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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reo 2007-09-01 17:28   좋아요 0 | URL
김학준저작의 <러시아혁명사>가 아니라 번역일 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작년 <한겨레신문>의 한 칼럼에서 그런 뉘앙스의 글을 보았습니다. "전두환때 정치특보"였던 이라면 마땅히 김학준을 가리키는 진술인에요. 원저자를 아실 수 있는지요?

로쟈 2007-09-01 17:33   좋아요 0 | URL
아마도 편저성이 강하다는 뜻일 테구요, 저자가 참조한 책들은 책에 소개돼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요는 여기저기서 발췌/번역도 하고 본인이 채워넣기도 하고 그랬다는 얘기지요...

허리우스 2007-09-02 00:26   좋아요 0 | URL
음 찜할께요. 매번 관심가는 책들을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승하시죠.

로쟈 2007-09-02 10:50   좋아요 0 | URL
관심가는 주제시라니까 다행이네요.^^
 

'세계의 컬트여행지' 연재에서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편을 옮겨온다. 중부 시베리아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광활한 지역인데, 나는 막연하게 시베리아의 한 도시 정도의 표상만을 갖고 있(었)다. 대학 1학년 때인가 러시아어 교재에서 유독 '크라스노야르스크'란 지명이 자주 등장했고, 그때 갖게 된 이미지이다. 이후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지명인데, 레닌박물관과 수리코프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게 됐다. 경관이 수려하다. 

경향신문(07. 08. 30) [세계의 컬트여행지](20)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시베리아라는 지명을 듣는 순간,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란 사실 학창 시절 배운 세계지리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토의 땅 툰드라와 침엽수림지대인 타이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깊다는 바이칼 호수가 있는 땅 정도.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자면 19세기에 정치범들의 유형지였다는 정도일 터.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도 시베리아에 관한 정보란 요즘 여행객들이 찾는다는 바이칼 호수와 노보시비리스크, 이르쿠츠크 등 시베리아 도시들에 관한 것뿐이었다. 목적지였던 시베리아 중앙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에 관한 정보라고는 예니세이강 부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 3대 수력발전소 중 하나라는 크라스노야르스크 발전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아마도 건설될 당시의 랭킹인 듯하다. 현재는 8위 이하로 떨어져 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은 이렇듯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하지만 이 일대는 대형 신석기시대의 묘, 신석기인들의 사냥감인 동물과 훈족의 모습까지 새긴 샬라볼리노 마을의 암각화, 한때 레닌이 유형생활을 했던 슈센스코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는 인류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다.



신석기부터 레닌까지 인류의 역사가 남아있는 대평원

크라스노야르스크 공항에 내린 순간 ‘여기가 시베리아로구나’를 단연 실감케 했던 것은 서늘한 바람과 맑은 공기였다. 서울의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한 공기. 게다가 높고 푸른 하늘 아래로 시계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와 밀밭, 검붉은 땅 위에 수직자세로 선 자작나무들은 이국의 여행자를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은 러시아연방공화국을 형성하는 6대 지역 중 하나로 동서 길이는 1250㎞, 남북 길이는 3000㎞에 달한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에는 하카시아공화국과 에벵키 자치구, 타이미르스키 자치구가 포함돼 있으며 스텝과 타이가, 툰드라, 극지사막 등 다양한 지형이 나타난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 남부 일대는 시베리아에서도 오지에 속한다.

거대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예니세이강을 따라 크라스노야르스크 남부지대로 향했다. 하카시아공화국에 들어서자 드넓은 초지에 검붉은 거석이 드문드문 서 있는 모습이 영국의 스톤헨지를 닮았다. 가까이서 보면 어른 허리께 정도 오는 작은 돌들이 대부분으로 스톤헨지와 비교하면 턱없이 작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10m가 넘는 거석도 있다고 한다. 낮은 구릉 위에 원형 혹은 방형으로 검은 돌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 역시 신비스럽다.

이들은 고대 무덤인 쿠르간의 범위를 표시하기 위한 일종의 지표석이다. 기원 전 10세기쯤 이 땅에 형성된 시베리아-스키타이 계열의 타가르 문화의 산물이다. 스키타이족들은 시신을 넣은 목관 위에 돌을 쌓고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덮은 뒤 큰 돌로 무덤의 경계를 표시했던 것이다. 무덤을 발굴한 결과 많게는 20여 명이 함께 묻히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무덤은 하카시아공화국뿐 아니라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 남부 일대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베리아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미누신스크 박물관에 가면 하카시아공화국과 투바 공화국, 미누신스크 분지 등에서 발견된 토템 신앙과 거석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살아있음의 흔적을 기록하고자 하는 열망은 쿠르간뿐 아니라 암각화에서도 확인된다. 전형적인 러시아의 농촌마을 샬라볼리노에 가면 기원 전 7000년쯤부터 기원 후 14세기까지 이 땅을 스쳐간 인간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마을 뒤편 투바강을 따라 3㎞가량 형성된 샬라볼린스키 암각화에는 풍요로운 사냥을 기원했던 신석기인들의 바람이 담긴 사슴과 무스 등의 형상에서부터 시베리아를 따라 유럽으로 진출했던 훈족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때묻지 않은 소녀들과의 만남

기록에 대한 열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열망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암각화를 보며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푸른 눈에 금발머리를 한 소녀들이 내 팔을 잡고 학교에서 배운 초보자 수준의 영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아냐고요, 얘는 마리냐, 얘는 야냐예요. 우린 11살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한 소녀들은 한 명씩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했고 내 이름을 물었다. 시베리아에서도 깊숙이 박힌 오지에 사는 금발소녀들에게 검은 머리의 이방인은 아주 신기하고 낯선 존재인 모양이다. 별 것 아닌 질문과 대답에도 러시아어로 속닥이며 까르르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이 아이들은 내가 찾았던 문화재 발굴 현장의 일꾼이었다.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마을 사람들만 알던 암각화의 훼손이 심해지면서 최근 러시아의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펼치고 있다. 마을 주민들과 어린 학생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발굴 작업을 도왔다. 내가 방문하기 하루 전 찾았다는 사슴 암각화도 소녀들의 눈썰미 덕택에 발견했다고 했다.

때묻지 않는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은 수천년을 이어온 문화재를 보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대화를 나눴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사진을 보내 달라기에 e메일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더니 말에 아이들은 정성들여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그러나 수첩을 건내받은 후 e메일 주소가 아니라 러시아 알파벳을 필기체로 쓴 우편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사와는 무관한 듯 오지에 사는 아이들은 인터넷을 몰랐던 것이다. 한 아이는 기념품이라며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력발전소가 새긴 10루블짜리 지폐까지 주었다. 카메라만 달랑 메고 이곳을 찾은 내겐 마땅한 답례품조차 없었다.

헤어지는 순간 아이들은 하나하나 나를 껴안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봤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났는 데도 아쉬웠던지 네 명의 소녀들은 내 양 팔짱을 끼고는 버스 앞까지 배웅을 해줬다. 버스에 있던 가방에서 쓰던 색연필이라도 줄까 싶어 챙기는 사이, 어느새 아이들은 잰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카메라로 마구 찍어댔던 어떤 시베리아의 풍경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기대치 않았던 러시아 소녀들의 따뜻한 환대에 여행길 내내 감동했다. 척박하고 황량하다는 시베리아에 대한 인상은 이 소녀들로 인해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아직 아이들에게 사진을 부치지는 못했다. 이번 주말엔 꼭 사진과 함께 그들이 모르는 미지의 나라, 한국을 떠올릴 만한 선물 몇 가지를 넣어 소포를 부쳐야겠다.

▲여행길잡이

크라스노야르스크로 들어가려면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야 한다. 과거 인천~크라스노야르스크간 직항이 있었지만 현재는 중단됐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중국 베이징을 연결하는 노선이 있다. 베이징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는 비행기로 4시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기차로 하카시아공화국이나 투바공화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차는 한국과 1시간이 난다. 위도가 높아 여름에는 백야현상이 나타난다. 숙소의 형편은 그다지 좋지 않다. 여름철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숙소가 다반사이며 호텔의 수준은 열악하다. 좀더 시골로 들어가면 ‘푸세식’ 화장실은 기본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갈 것. 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에는 레닌기념관과 화가 수리코프의 박물관이 있다. 슈센스코에는 레닌이 유형 당시 거처하던 집과 19세기 말 시베리아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시베리아 민속박물관이 있다.(크라스노야르스크|글·사진 윤민용기자)

07.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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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1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언젠가 로쟈 님께 한 번 러시아 여행을 위한 '준비물'들을 슬쩍 여쭤볼 참이었는데,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로쟈 2007-09-01 19:32   좋아요 0 | URL
준비물이란 게 지역과 기간(계절)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날 듯합니다...

드팀전 2007-09-0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아이 업고..tv를 켰더니 상트페테르부르그 가 나오더군요.걸어서 세계여행이라는 프로였는데..별 구성없었지만 그림이 워낙 좋으니 볼만하더군요.소제목이 햐얀밤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그..뭐 이런 식이었습니다.여름궁전,겨울궁전,그 도시와 함께 이웃에 있는 푸시킨시,무슨 섬에 있는 나무로만 만든 성당 '예수변모성당'이라나...그리고 공연물들,유명 예술인들의 묘지,빅토르 최가 묻힌 공동묘지 등등...로쟈님 생각이 나더군요.^^

로쟈 2007-09-01 19:32   좋아요 0 | URL
가볼 만한 도시들이긴 합니다.^^

소경 2007-09-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베리아 문화에 관심이 가네요. 북동아시아 청동기 문화에 연을 갖는지 관심 갖을 만한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 계속 공부하다 언제간 찾을 날도 있을 것 같아, 꿈꾸며 잘읽었네요. ^^

로쟈 2007-09-01 19:33   좋아요 0 | URL
요줌 이 지역의 발굴기사가 많이 나더군요...

2007-09-02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2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