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의 서론을 읽고 문제가 되는 오역들을 '악의적'으로 지적한 페이퍼에 대해서 역자가 달아준 댓글이다. 역자로선 할말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이후에 본격적인 반박을 아직 접한 바 없어서 그 '할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주에 나는 서론과 1장을 읽고서 이 번역서가 겉모양새와는 다르게 '오역서'라 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페이퍼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그럼 무고죄이다!). 문제는 내가 남 헐뜯기나 좋아하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빚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어긋나서 2장부터는 아주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2장까지도 읽었다. 책의 1/3이다. 하지만 책은 나로선 오역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일부러 두통만 나도록 한' 대목들이 수두룩했다(어느 출판사의 기준으로 하면 이 1/3의 오역/오타만으로도 전부 회수한 후에 개정판과 교환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기준이 다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 걸 지적한다고 해서 이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한다. 오역이 좀 있다고 해서 책값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못봤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동네서점에서 사느라 12,500원의 책값을 다 치렀다. 누가 억울한 건가?

하지만 억울하다는데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맘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제임슨의 소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오역 정도는 알아서 고쳐 읽어도 된다(제임슨 소개서들이 다 그렇다).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오역을 들먹이는 건 '터무니 없는 부당한 악평'으로 역자나 출판사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떨결에 책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친절한 로쟈씨'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오물이 좀 묻었더라도 잘 씻어내면 또 먹을 수 있듯이 약간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더라도 교정해가면서 읽으면 '본전'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곁들여 나처럼 원서를 갖다 놓고 같이 읽으면 원서 독해력의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구입한 몇 안되는 분들을 위한 나의 '친절'이다. 당초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란 제목을 이 페이퍼에 달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로 고쳐달았다. 그리고 카테고리도 '지겨운 책읽기'에서 '즐거운 책읽기'로 옮겼다. 그래도 잘 보여야 이 '오역의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교정을 하며 읽고자 하는 게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란 2장이다, 라고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1장 '마르크스주의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젠장). 원제는 'Marxist Contexts'이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워밍업부터 하자는 얘기겠다. 왜냐구? "제임슨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며, 그의 작업 역시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제임슨의 대표적인 저작이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이다. 우리에겐 <변증법적 문학이론이 전개>(창비, 1984)라고 소개된 저작 말이다.

참고로, 앨피출판사에서 나온 초기의 '크리티컬 씽커즈'와는 달리 이번에 나온 <제임슨>이나 <데리다>에는 참고문헌에 국내 번역서 목록이 다 빠졌다. 방침이 바뀐 모양이지만 국역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조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뭐 이런 건 내 알 바가 아닌지도).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자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총체성'일 것이다. 이 용어를 애용함으로써 '헤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다."(48쪽). 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 나왔다. 총체성. 이거 강조 표시다(미리 말해두자면, 제임슨에게서 또 다른 핵심개념 두 가지는 '소외'와 '사물화'이다. 이거면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다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애덤 로버츠가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이란 말을 애용하는 덕분에 제임슨이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럼 종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헤겔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목적론적인 '총체성'을 거부하는 알튀세르주의도 있다(번역서는 시종일관 '알튀세'라고 표기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라고 해두겠다).이 '알튀세리앵'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화 작용을 우리를 억압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런 배경하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 "어쨌든 제임슨을, 알튀세적 접근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48쪽) 원문은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Jameson is usually seen as a Hegelian Marxist, an inheritor of traditions of Lukacs and Adorno and more or less hostile to an Althusserian approach."(16쪽) 

보면 알겠지만, 원문 어디에도 '올바르지 않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임슨이 일반적으론 알튀세르적 접근법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나 아드르노의 전통을 이어받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겠다."가 나의 번역이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튀세르 진영으로 많이 끌고가고자 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적해두어야겠다'를 '올바르지 않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게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에 관한 기본 초식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세계는 변혁되어야만 한다." 이거 길게 따라갈 필요 없겠다. 넘어간다. 다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인용한 대목(이거 방대한 분량의 정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완역돼 있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1>(청년사, 1998)이 전부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번역은 왜 안 이루어지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나도 두꺼운 영역본만 갖고 있다).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이어지는 내용은 알튀세르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어떻게 수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등에 관한 내용들 역시 상식에 속하므로 넘어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이 비평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이론은, 문학과 문학비평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문화 전체를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57쪽)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문장들인데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Culture, says Jameson, is 'to be thought of as something more and other than... the false consciousness, that we associate with the word idelogy', and is instead something that possesses an 'uneasy existence, an uncertain status'."(21쪽)

일차적인 문제는 that이란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역자가 'false consciousness'가 아니라 'culture'로 잘못본 데 있다(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서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를 다시 옮기면,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연상하게 되는 '허위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론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수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번역문의 뒷부분에서 '억압적인 힘'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마저 옮기면, "문화는 (그러한 허위의식) 대신에 '뭔가 불안한 존재성, 뭔가 불확실한 지위'를 갖는 어떤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단선적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사회의 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전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루이 알튀세이다."(59쪽) 여기서 '새로운 전제'는 'newer development'의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역자의 자유자재로움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알튀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치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인 19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59쪽) 원문은 "Althusser started writing at a time, the early 1960s, when the excesses of Stalinist dictatorship in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 had done much to discredit Marxism as a political philosophy."(22쪽)

알튀세르의 커리어에 관한 대목인데,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을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목으로"라고 옮긴 건 아쉽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라는 소련에서" 정도의 뜻이기에(국역본은 강조할 대목들을 상당수 누락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이면 탈스탈린화 바람이 불던 때이다.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린 시기는 20년대 후반부터(특히 3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이다. 여하튼 그 여파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가 이미 땅에 떨어졌던 시기에 알튀세르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재검토한 뒤 총체성 개념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총체성은 전체적(*전체성) 혹은 전부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방식이다. 다양한 소논문과 비평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적 유산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9쪽) 대신에 "알튀세에게 '역사는 (종결이나 목적을 의미하는) 텔로스 없는 과정이자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70-1쪽)

하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기획(project; 국역본에서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의 정치사상(political ideas; 국역본에서는 '정치적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세계(materal world; 국역본에서는 '물질세계')에 적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로선 주류였기 때문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만, 조금 내용을 챙겨두자면, "1965년에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는 비록 초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후기 마르크스는 헤겔을 극복하여 총체성과 관련한 위험한 논의와 단절했다며 진정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알튀세르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의 이론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단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전기의 헤겔주의자 마르크스와, 초기 저작의 위험한 헤겔주의를 청산한 후기의 과학적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이다."(63쪽)

"당연히 , 알튀세는 '사회질서'나 '전체 체계'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알튀세는 사회가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라기보다는, 다양한 요소가 상호연관된 더 복합적인 체계, 다시 말해 탈중심적 구조임을 강조한다. '사회형식' 등 첨단용어를 사용하여, 알튀세는 총체성의 '해체'를 달성하고자 한다."(63-4쪽) 

알튀세르에 관한 ABC의 나열인데, 눈길을 끄는 건 '사회형식'이라는 첨단용어(!)이다. '첨단용어'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는 없을 뿐더러 이게 'social formation'의 번역이다! '사회구성체' 말이다(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 재출간된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바로 그 '사회구성체', 줄여서 '사구체' 말이다)! 내가 요즘 사회과학서적을 좀 등한히 했기에 그간에 '사회구성체론'이 '사회형식론'이라는 '첨단용어'로 옷을 갈아입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건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무지의 소치이다...  

젠장,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즐거운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게도 '현실원칙'이란 게 있다. 먹고 살아야 한다. 1장에 남아있는 몇 페이지는 건너뛰고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2장은 들어가지도 못했군). "거칠게 말해서, 예술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요소들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알튀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한 그것을 재구축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재구축이 여전히 모순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경제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75쪽)

이 결론부분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이다. 아무리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번역이라손 치더라도 'political sense'를 '경제적 의미'로 번역할 수 있나? 정치, 그거 따지고 보면 다 경제야, 란 계산이 깔린 거라면, 거의 대붕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로선 이렇게 덧붙일 밖에: "번역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윤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참새 머리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로고...

07. 02. 11-12.


댓글(6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푸하 2007-02-18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스틴 2007-02-2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에 대한 비판을 찾아 읽어보니, 번역이 나쁘다고만 하고 왜 어떻게 나쁜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네요. 사실 이런 비판이 최악의 비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말을 돌리지 마시고, 로쟈 님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qualia 2007-02-2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 님, 트랜스 님의 위와 같은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태의 전말을 모르시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말을 돌린 건, 제가 아닙니다. 첫글부터 객관적으로 읽어보세요. 심정적인/주관적인 해석은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고 읽었다는 오해를 사기가 쉽습니다. (제가 오해이길 바랍니다.)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 트랜스 님의 윗말은 앞과 뒤가 연결이 전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 공정한/객관적인/생산적인 논쟁이 되려면, 오히려 원론부터 확실히 하고 가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주관에 끼워맞춘 원론(그런 것도 원론이라면)을 가지고 토론을 한다면, 아무리 토론 할애비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냥 까짓 것 원론 따위는 뛰어넘을까요?

"그럴 바에야"라뇨? 어디 qualia 댓글에 그런 의도가 처음부터 표나게 드러나보이던가요? 자세히 증거를 대주시죠? 트랜스 님, 초장부터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이럴 바에야, 저는 댓글조차 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제기를 왜 했느냐구요? 왜 한 게 아니라, 문제점이 보였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애초에 제 문제제기는 로쟈 님의 조롱조 비판글과, 남의 오류를 비판하는 마당에 자기자신까지 오류를 겹으로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에 대해서, 로쟈 님이 피장파장식 반론을 qualia한테 가해 오면서,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거듭 저지르셨구요. 그런 오류들을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만약에 위의 오류에 대해서 피차 간에 매듭이 있었다면, 논의는 좀더 실질적인/생산적인 오역 논쟁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왜 qualia가 그렇게 <괴델, 에셔, 바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 구체적인 오역 사례는 제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qualia는 로쟈 님 번역 비판글에서 무엇이 그렇게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보는가 하는 점, 로쟈 님은 오역 사례의 교정에서 어떤 실수를 저지르시는가 하는 점... 따위를 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논쟁이 제자리 맴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몹시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qualia 2007-02-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님, 푸하 님의 앞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더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제 견해를 확실히 할 것입니다. 여기는 아주 시끄럽고 담배연기 매캐한 피시방이기 때문에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는군요. 글을 올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로쟈 2007-02-20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확인하지만,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의 '상대자'가 접니까? 아니면 이것도 "저는 결코 로쟈 님을 지목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에 해당하는 건가요?..

qualia 2007-02-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물으신 것에, 트랜스 님처럼 최악의 비판이라고 강력 비난한 것에, 푸하 님이 근거를 대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 "학실하게" 답하겠습니다. 로쟈 님과 푸하 님, 트랜스 님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qualia 너는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그렇게 (근거도 없이) 강력하게 비판만 하던데, 그러는 네가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이냐?" 특히 로쟈 님은 이러한 심사를 밑에 깔고 다음과 같이 qualia에게 우회적으로 역질문합니다.

로쟈 님 → "저는 부러 냉소적이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비평' 운운할 생각은 없습니다. 번역에서 오역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가 어디까지 관대해야 할까요?(그냥 알아서 원서대조해가며 감지덕지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해야 할까요? "곽상순님이 번역한 <프레드릭 제임슨>은 완전한 오역의 종합판입이다. 이런 불량 번역판을 찍어낸 출판사와 번역자는 크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번역자 곽상순님과 도서출판 앨피 측에게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푸하 님은, 로쟈 님의 위 댓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재논박/재재논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되묻습니다.

푸하 님 →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로쟈 님 대응에서 분명한 것은 "피장파장(너도 역시you, too)" 식의 되받아치기입니다. 즉 qualia가 맨처음 로쟈 님의 번역비판에서 지나치게 냉소적인 "조롱조 문체"를 지적하고 나오자 → 로쟈 님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해야 할까요?" 하고 되묻고는 → 곧장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에서 거두절미한 한 대목을 따와, → 자기자신의 문맥 속에 절묘하게 끼워넣습니다. 즉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제3의 사안, 즉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건에 대한 qualia의 언급을, 마치 qualia의 입을 빌어 로쟈 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둔갑시켜 역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것은 qualia 자신의 말로 qualia 자신을 논박해 qualia의 자기모순/자가당착을 폭로하겠다는 수(사)법입니다. 즉, 나 로쟈는 이렇게 했는데, 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럼 결국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피장파장인데, 뭔 말이 그리 많으냐? 너도 할말 없지? 뭐 이런 식의 대응입니다.

허나, 이런 피장파장식 되받아치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자신의 논리적 정당성/타당성/근거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역증명하는 자기파기적self-defeating 결과로 낙착된다는 게 기본적/초보논리적 사실이죠. 아니라면, 초보논리적 명제까지 부정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택일해서 응답할 수 있는지요?

잘 아시다시피, 너도 잘못하고 있으니 내 잘못은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강변은 남의 잘못을 들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초보적인 어거지 수법이라는 것, 아시죠? 이게 아니라면, 대체 뭐하러, 애초에 사안도 아니었던, 엉뚱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을 인용하는 건가요? 더군다나,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비판 문맥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비판 문맥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유추적으로 인용해 물귀신 작전을 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따로 곧 할 것입니다.

푸하 님,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위에서와 같이 qualia가 누차 답변하고 재답변하고 재재답변했는데도, 근거의 형식이 없는 건가요? 푸하 님은 qualia가 방금 설명한 로쟈 님의 의중이 안 보입니까? 과연 qualia가 말한 초보논리 중 비논리/반논리/무논리적인 점이 어디 드러나 보이는가요? 위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하 님이 인정하기 어렵다면, 대체 푸하 님이 말하는 근거의 형식을 갖춘 진술이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다시 부언하면, 로쟈 님 같은 분이라면, 똑같은 글귀/낱말이라도 그것만 달랑 떼어내서 원글과는 전혀 다른 문맥contexts 속에 가져다 놓을 경우, 미묘한 풍자/빈정댐/희화화의 극적인 효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는 것이죠. 본능적인/원초적인 글감각/풍자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의 글에는 곳곳에서 이런 예민한 심리적 촉각/글감각이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허나, 위 댓글들에서와 같은 예, 다시 말해 피장파장식 인용, 비린내 피우는 오류red herring fallacy(논점 회피의 오류),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 등등의 건에서는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강변하셔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글쓰기의 금과옥조를 순간적으로 망각하신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로쟈 님의 qualia에 대한 비난이 이러한 오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인터넷 대중에게 버젓한 진실로 전파된다면, 애먼 사람 하나(나 그 이상)의 양심을 손쉽게 죽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누명을 뒤집어쓴 qualia가 논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평범한 진리가 때로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이 위와 같은 왜곡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부당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부당한, 초보논리에도 닿지 않는, 잘못된 비난을 받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qualia 2007-02-21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괴델, 에셔, 바흐>의 엉터리 번역은 이미 출판계/번역계에서 공인된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박사학위 논문까지 있습니다.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그리고 번역가 이덕하 님께서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이 얼마나 심각한 엉터리 번역판인지 제법 상세한 영한대역식 대조를 해가면서 비판한 글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셨습니다. "비평고원"(cafe.daum.net/9876)에 들어가보시면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비판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까지 달려 있죠.

국역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안 좋군요... 06.07.18 19:22
 
첫번째 이덕하님의 오역지적부분을 읽고 할말을 잃었습니다. -_- 번역본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군요. 어서 영어본이나 구해놔야겠습니다. 06.07.28 01:42

그래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이 어떠한 전후 문맥/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그 비판의 주된 초점이 무엇인지, 적어도 로쟈 님은 "학실히" 아실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러한 공인된 정황/사실에 근거하고, 심지어 로쟈 님까지 이미 알고 계시는, qualia의 비판 문맥을 로쟈 님이 "7-8년쯤 기다려보고"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겠다는 투로 조롱하며 전혀 엉뚱한 문맥으로 바꿔치기한 것은, 말그대로 qualia의 정당한 로쟈 비판에 대한 로쟈 님의 피장파장식 민감반응이라는 것이죠. 그 대응의 수사법은 말할 나위도 없이 빈정대기에 불과한 것이죠. 즉 개인적 감정이 담뿍 실린 대응이라는 것이죠. 즉 인신공격적 요소까지 있다는 것이죠. 즉 그 말의 진짜 의도는 진정한 번역비판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인 즉슨, 인용의 형식을 빌린 상대방 조롱에 있다는 것이죠. 부정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저는 누차 지적했고, 재지적했고, 재재지적했고, 그 가짜 진정성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로쟈 님이 표명하도록 (간접적으로) 묻고 물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qualia를 비아냥거렸다고 속시원히 토로하셨다면, 이렇게까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느 근엄한 학자님이 제정신으로,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라는 어떤 정신나간 허수아비"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하고 운운할까요? 이게 실없는 소리가 아니고 뭡니까? 아니라면, 그런 우스꽝스런 개그 코미디를, 그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진짜로 하셨다는 건가요? 게다가, "님(즉 qualia)의 충고"라고 대놓고 말씀하시던데, 아니 어떤 삐에로가 그런 "헷소리"를 로쟈 님께 일러주던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의법스런 질문에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어떻게 답하실 건가요? 요컨대 조롱이냐/말씀이냐 중에 무엇을 택일해 답변하겠습니까? 제발, 토 달며 또 회피하지 마시길!

분명히 하기 위해, 로쟈 님의 (에둘러 피하기식 = 역질문식) 재질문 기법(?)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드리죠. 푸하 님도 yoonta 님도 우회적 역질문 수(사)법을 편들면서 오히려 qualia를 누차누차 역공박했으니까요. 로쟈 님 왈,

"qualia님/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오역서가 발견되면 처음엔 정중하고 따뜻하게 예의를 갖춰서 오역사항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역자나 출판사에 알리고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한다, 가 되는 건가요? 님의 불만은 저의 비평방식인가요, 아니면 타이밍인가요?(둘다일수도 있겠군요.) 한편,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해서 오역에 대한 비판은 있어 왔지만 그 상세한 내용을 저로선 접할 수 없었습니다(역자/출판사쪽에만 알리신 건가요?).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네요(님이 비공개로 돌리셨으니). 오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경력으로 치자면 저도 그 정도는 됩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위 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에 대해, 로쟈 님은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이라고 제가 토를 달았습니다" 하고 그야말로 "토"의 "토"를 거듭 다시더군요.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토에 불과하다고 발뺌하시면서, 그 토에 불과한 가정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운운하는 로쟈 님의 "결론/결심"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로쟈 님은 정리도 틀린 정리를 가지고 가정을 한 다음 → 그 그릇된 가정을 전제삼아 → 분명히 qualia를 빈정대는 결론으로 슬그머니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논리적 말법입니까? 이런 명백한 바꿔치기 지적에 대해 솔직하고 정면돌파적인 응답/인정이나 반박/부정을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은 한 번이라도 했는가요? 그러기는커녕 (푸하 님의 경우, 바꿔치기 이전까지의 "토"만 전략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논리적 술수는 애써 숨긴 채), 거꾸로 qualia의 요점이 뭐냐고 자꾸 되묻는 역질문 전략을 집요하게 펴지 않았습니까(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슬쩍 회피하는 것입니다. 뭐랄까, 일종의 "비린내 피우는 오류(주의 전환의 오류)red herring fallacy"라고나 할까요. 뻔한 내용을 자꾸 반복 재반복해 역질문 하시니, 그에 대한 논박 재논박도 매번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로쟈 님이 위와 같이 수상한 심리적 비웃음을 밑에 깔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 논쟁의 대상자한테 인신공격적인 분위기를 뒤집어씌우면, 로쟈 님같이 막강한 필력을 휘두르는 분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수많은 인터넷 대중에게 그 대상자는 순전한 "비아냥거리"나 "비열한 놈"으로 낙인찍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먼 사람 웃음가마리로 만드는 거 손가락 하나 까딱입니다. 게다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가 필요이상으로 조롱조인 로쟈 님의 비난 때문에 입었을 감정의 상처를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로쟈 님 말씀대로 "충고를 받아들여서" 약으로 쓸 만한 진정성 담긴 비판은 진정코 없는 건가요? 물론 아니겠지요.

그럼, 로쟈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을 꼬투리잡던데, qualia는 이에 대해 뭐라고 답변할 건가? 거듭거듭 누차누차 말했듯이,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과 괘를 달리합니다. 즉,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의 주된 초점은, qualia가 최초의 댓글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구체적인 번역내용이라기보다는 "번역가의 (독자/원저자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마음가짐과 (번역에 대한 사명감/책임감/정성/엄밀성 따위의) 번역정신"입니다.

이미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의 심각한 문제점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까지 나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게다가 로쟈 님과 같은 번역비판가/번역비평가 분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판국에, 또 다시 구체적인 오역 사례를 일일이 꼬집어내는 것보다는, 비판의 다른 측면 즉, 수많은 비판이 직접 해당 번역자한테  전달됐는데도, 그 문제의 심각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예컨대, 로쟈 님이 주장하시듯 독자들의 돈낭비 시간낭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도), 번역자가 자신의 오역을 인지하고 충분히 검토/반성하고 구체적 소명이나 대책을 내놓을 시점이 훨씬 지났는데도, 무대책/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는 번역자의 비양심적 작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이런 비양심적/반지식인적 행태야말로 제가 정면비판한 것입니다. 엄청난 지식의 부도 사태가 출판계/대학계/지식계에서 햇볕 쨍쨍하니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몰라라식으로 동반책임을 유기하며 무책임/비양심/반윤리/반지식인적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작금의 비겁한 지식인 세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게다가 난센스의 극치는 서울대(서울대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명예감투/막강권력/상품가치로 작용하는지 아시죠?)까지 오역의 종합판 <괴델, 에셔, 바흐>를 100권의 추천도서로 앞뒤안팎 내막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강권(서울대라는 권력은 사회적 강권아닌 강권이라 할 만하다!)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TV, 책을 말하다"보다 서울대 추천도서 100권이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인 광고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저런 무책임한 번역자/출판사의 책을 국민들한테 버젓히 권할 수 있는가? 그동안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소위 한국 최고라는 자타의 공인 아래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할 서울대가 이 모양이니, 희대의 세계적 과학사기꾼을 탄생시킨 이력에 <괴델, 에셔, 바흐> 100권 추천건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이런 정황/사실/문맥을 알고도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동급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동급으로 다루더라도 "동급최강" <괴델, 에셔, 바흐>의 번역자/출판사를 따라올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알라딘에 떠있는 번역자의 변명을 한번 들어봅시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죠.

번역의 부족함에 대하여 따끔하게 꼬집어 주신 독자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일차적으로 5년전에 도전한 이 번역에서 저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지만, 부족한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번역하면서 도중에 그만 두려는 생각을 한 두번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 이전에도 수 많은 번역자들이 포기를 했었고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번역자입니다.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무모하게 번역한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부족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을 차후에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로 거듭 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번역자 나름대로의 위안은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 동안 번역의 오류를 꼼꼼이 지적해 주신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어판과 대조하면서 읽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2003년 11월 26일 알라딘에 보내주신 작가코멘트) - 박여성(옮긴이)

위 옮긴이 말은 겉으로는 반성하고 있는 듯합니다. 반성하는 사람한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것이 과연 진정한 반성일까요? 혹 반성의 형태를 빈 변명은 아닐까요? 그러나 반성의 진정성은 번지르르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조치에 있습니다. 게다가 위 글은 진정한 반성보다는 변명과 합리화에 기울어 있습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다는 둥,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이라는 둥,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라는 둥,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라는 둥, 실로 무책임하고 오만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해당 번역자는 도대체 독자들을 뭘로 보기에, 저런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는가?

<괴델, 에셔, 바흐>의 원저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이라고?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그만이라고? 신비의 원서를 과감하게 번역해서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다른 번역자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자기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고?

이에 대해 일일이 타박을 놓기는커녕 번역자의 궤변에 기가 질려 저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재귀준거의 틀 운운하는 데는 헛웃음밖에...―,.― (사족이지만, self-reference는 괴델/호프스태터 문맥에서는 자기지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를 두고 재귀준거라고? 도대체 그런 개념으로 어떻게 <괴델, 에셔, 바흐>의 복잡한 논증을 읽어나갔는지?)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 일부를 인용해보죠.

호프스태터가 쓴 <한국어판에 부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의 번역자인 박여성 교수의 여러 해에 걸친 정성스런 번역은 독자들의 부담을 한결 덜어줄 것이며, 한국어로 정착된 독자적인 GEB의 운명을 짊어지고 책읽기의 색다른 묘미를 선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xix) 

<역자 후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부분의 번역판을 호프스태터 교수가 감수했듯이, 그는 한국어판에서도 검증을 요구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 책의 가치와 번역의 엄정성을 위해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984) 

위에 인용된 저자와 역자의 말은 이 책의 번역이 양호함을 암시한다. 이런 식 과대포장은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하필이면 14<TNT 및 그것과 연관된 체계들의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비판한 이유가 있다. 14장은 어떤 면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14장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의 증명이 완결되는 부분이며 이 정리는 이 책의 핵심 테마다. 이 정리를 이해하지 않고 이 책을 이해하려 한다면 수박 겉핥기를 넘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번역서로는 골치아픈 이 책의 핵심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아래의 구체적인 비판이 이런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28(영어판 23) 분량의 번역문에서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한 오역만 76개다.

문제의 내막이 바로 위와 같습니다. 더 중언부언할 것 없이, 문제의 심각성이 저 정도라면, 번역자와 출판사는 문제의 오역판을 당장이라도 전량 회수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더는 서점에 깔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번역자 변명에도 나와 있듯이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 번역판으로 내기로 하였다면, 일차적인 조치가 뭔지는 깨달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번역자와 출판사는 오역 문제가 불거지고 비난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서 오히려 1만 얼마하던 책값을 올려 상/하권 도합 4만원에 계속 출하를 하고 있습니다. 책값낭비, 돈낭비, 시간낭비를 결부시켜 표나게 번역판의 오역을 지적하시는 로쟈 님은 이런 후안무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보다 더 심각한 게 독자들을 엉터리 번역, 잘못된 지식으로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 엄청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와 같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책임회피적 발언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반지식인적 행태는 어떻구요?

그런데 이 엉터리 번역판과 번역자/출판사의 엉터리 양식/양심에 놀아나며, 사정/내막도 모르는 순수한 독자들은 <괴델, 에셔, 바흐>를 놓고 자기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그 책의 심오함과 난해함에 경탄하며 금쪽같은 돈을 들여 금쪽보다 더 귀한 시간을 헛되어 소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 오히려 비리의 몸통은 보호받고 내부고발자는 철창 가는 게 당연한 대한민국, 양심가는 바보등신 취급받고 사기꾼은 거들먹거리며 사회 유지나 지도층으로 존경받는 대한민국, 이런 따위로 뒤집힌 나라에서는 <괴델, 에셔, 바흐> 오역쯤이야 아무런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입니다. 젠장,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만수산 드렁칡하고 살죠, 뭐... 이렇게 하면 됩니까?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qualia의 <괴델, 에셔, 비판> 번역판 비판과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은 그 정황과 문맥과 초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을 가지고 qualia를 걸고 넘어진다면, 그것처럼 유치하고 우스꽝스런 꼬투리가 어딨을까요? 그러니 로쟈 님이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qualia가 비판한 것을 가지고 qualia를 넌지시 조롱/비난한 것은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에다 피장파장의 오류에다 비린내 피우는 오류에다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까지 매우 복합적인 오류를 저지르신 것이 됩니다. 이런 오류들을 아예 못 보시거나 애써 외면하고 역공을 펼치신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 모두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셨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줄 압니다.

트랜스 님, 비판이 추상같기에 이렇게 길게 지겨운 얘기를 했는데, 답변 됐는지요? 로쟈 님, 푸하 님 qualia의 답변에 지겹지 않으셨는지요? qualia도 사실 이런 뻔한 얘기 하기 싫습니다.


로쟈 2007-02-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는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 상태와 그 심각성을 qualia님이 잘 아시는다는 것이겠네요. 하니 다른 번역서들은 같이 놓고 비교하면 안된다? qualia님이 모르시는 건 그만한 오역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라고 흥분하시지만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 경우에도 오래전부터 해온 일입니다(<괴델, 에셔, 바흐>만이 문제라면 한국사회를 들먹일 일도 없습니다.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그래서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2007-02-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qualia 답변 → 언어의 경제학 지적은 받아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qualia 자신도 언어의 경제학에 신경써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죠.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로쟈 님 →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① 비판의 방식: → qualia가 최초 댓글에서 문제삼은 것 중 하나는 바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를 로쟈 님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첫 댓글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못 읽으셨다면 다시 찾아 읽어보시죠. 또 하나는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도사린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제 지적이 옳지 않다면, 증거를 들어서 역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qualia는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로쟈 님이 항상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판의 타이밍: → 이에 대한 답변도 이미 드렸습니다.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취지로 여러 차례 답변드렸습니다. 소위 비판의 타이밍은 qualia의 비판 항목이 결코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그럼 좀 더 확실하게 답변드리죠. 비판의 타이밍이 1년이냐, 2년이냐, [...], 7-8년이냐 하는 장단의 문제만 따질 경우,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놀음이고 꼬투리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단어조차 로쟈 님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맞죠? qualia는 비판의 타이밍을 결코 문제삼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문제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해당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 게다가 둘 사이에 비판의 과정에서 갈등/상호불신/인신공격이 뜻하지 않게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런 것 따위도 얼마든지 이성적/생산적/상호존중적인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로쟈 님의 지나친 조롱조 문체는 상호존중적 대화를 이끌어내기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제 비판의 최초 동기였고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다차원적인 복잡다단한 절차와 과정을 어떻게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문제는 이런 점들을 로쟈 님이 더 잘 아시면서, 자꾸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을 들고나와 qualia에게 들이대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qualia의 비판글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로쟈 님이 그렇게 읽어들이셨다고 끝까지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qualia의 표현능력 부족으로 알고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변은 앞으로 포기하겠습니다. qualia의 이 포기를 로쟈 님이나 다른 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도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로쟈 님 →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제 생각에 로쟈 님은 너무 형식적이고 단선적인 시각으로 번역비판 대 번역수정 절차의 평면적 도식을 qualia의 입장이라고 들이대시는 것은 아닙니까? 로쟈 님 왈,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qualia의 입장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쟈 님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타이밍과 직결된 요약이군요? 맞죠? qualia의 주장은 그런 형식적/단선적/평면적/도식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디 번역비평가와 독자와 번역자와 출판계 간의 의견교환 관계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단순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qualia는, 이 점에 대해서 로쟈 님도 분명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결국 로쟈 님과 qualia의 궁극적인 견해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qualia는 로쟈 님의 기본적인 비판정신에는 모두 동의/동감합니다.

혹시 제 답변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콕 찍어서 다시 질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로쟈 님은 qualia의 질문에 대해서 한 번도 답변을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굳이 하시지 않겠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로쟈 님과 댓글 공방을 벌이며 다소 날것에 가까운 표현을 해서, 로쟈 님께 의도하지 않았던 비례를 저질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qualia가 깝죽댄다고 해도 로쟈 님 발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댓글 공방 이전부터나 공방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로쟈 님께 느꼈던 첫인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적어도 논쟁의 객관적 자세와 개인적 감정 사이의 엄정한 구별쯤은 항상 지키려고 노력했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진리와 양심과 비판정신만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챙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본의 아니게 로쟈 님께 누를 끼친 데 대해 마음으로 사과드립니다.

2007-02-21 16:06

 


qualia 2007-02-22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trawalk 님,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합니다. extrawalk 님의 의견은 extrawalk 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증거를 대면서 비판했으면, qualia가 받아들이기에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이었고, 어느 정도 공정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여기서 qualia의 개인적 의견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제3자만이 어느 정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평가할 수 있겠죠.

extrawalk 님 → 애초에 누가 먼저 말꼬리를 잡고 토를 단 건지 저로서는 참 의아스럽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의 맨처음 댓글은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과 오역을 비판하는 번역비평가 자신의 치명적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말꼬리를 잡은 것이라고 extrawalk 님이 주장하신다면, 그런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하겠습니다.

extrawalk 님 → 로쟈님의 이번 페이퍼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qualia님께서 처음부터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던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위 qualia님께서 남기신 댓글의 문맥을 살펴보면 결국 "비평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에 다름 아닌데, 이거 너무 맥빠지는 얘기 아닌가요. 다시 말해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말하고자 했던 동기, 핵심, 논점 모두 다 qualia의 최초 댓글에 들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지켜보셨다는 분이라면 어떻게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지요? extrawalk 님같이 요약할 수 있는 분도 있구나 하고 저는 그렇게 이해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extrawalk 님의 요약은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의 요점은 바로 윗글, 즉 로쟈 님께 드리는 답글에 더 선명하게 나와 있으니 정확하게 읽고 반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사실에 대해서만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extrawalk 님 →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제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qualia는 어디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 하고 제법 준엄하게 충고하시는데요. 로쟈 님은 학생(이나 국민)을 가르치는 분인데, 게다가 수많은 누리꾼들이 로쟈 님의 글을 읽고/퍼가고/참고하는데, 그런 분이 저지르는 오류를 목도하고도, 가만히 못 본 척 있으라 이거군요? 저는 제 스승님한테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받아들인다 해도 이 점만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extrawalk 님 → qualia님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지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너무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어떤 사안을 스스로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고 그러시지 말기 바랍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자중지란에 빠졌다고 하셨는데, 그 구체적 증거를 들어서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허점에 빠졌는지 날카롭게 증명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저는 저의 허점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강력하게 비판해주시는 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분석도 없이,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선입견이 스민 인상비평이나 감정적 편견만 내세우는 비난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할 뿐입니다. qualia가 무엇을 복잡하게 꼬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비판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qualia가 처음부터 extrawalk 님식으로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구체적 반박사례도 없이, 로쟈 님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면, 댓글 대접조차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2007-02-21 17:40

 


푸하 2007-02-2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공들인 글 잘 읽었습니다. 님 글의 주된 대상이 되는 저이기에 여러 1차적 판단과 인상 그리고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속에 물결 치듯했습니다. '아'와 '어'는 다르다는 것, 이게 논리적 판단의 기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시기를 정하기 어렵지만 되도록 빠른 시간내에 구체적으로 검증가능하도록 이야기 하겠습니다.

로쟈 2007-02-2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답변드리지 않겠습니다. 요는 비판의 타이밍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방식이라는 것. 제 방식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것. 그리고 첫댓글의 표현을 빌면, '엄밀함과 치밀함과 매끄러움'이 부족하다는 것. 이 후자의 경우엔 따로 qualia님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될 거라고 봅니다(바보에게 넌 왜 바보냐라고 몯는 건 소모적입니다. 바보가 아닌 방식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냉소적'이라는 건 가능한 평이긴 하나 정확한 건 아닙니다(제가 냉소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일에 시간낭비하지 않습니다). 조롱 섞인 비평이 차라리 적합한데, 그건 '블랙 코미디'에 대한 제 반응입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비분강개할 수도 있을 사안에 대해서 조롱 섞인 비평을 늘어놓는다는 게(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오역의 정도에 따라서 제 반응은 조금씩 다릅니다) 특별히 비난받을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qualia님의 핵심적인 의견은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것일 뿐 저 또한 그런 '의견교환'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괴델, 에셔, 바흐>의 경우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를 경험하신 건지요? 그 경우에 역자는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시는 건가요?(거듭 말씀드리자면 <괴델, 에셔, 바흐>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제 경우엔 그게 모순적인 주장처럼 여겨지는데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갖춘 역자라면 매 페이지마다 오역이 속출하는 번역을 책으로 내지 않습니다(그게 가능하다고 보시면 저와 의견이 다른 겁니다. 무엇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이고 사명감이며 학문적 양심이고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인가에 대해서). 견해가 다른 만큼 다른 방식의 비평을 택한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싶네요. 저는 평면적 방식을 선택하겠습니다. qualia님이 '입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신다면 상호보완이 될 거라고 믿어집니다. 건필하시길...

푸하 2007-02-2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의 핵심적 입장을 정리하자면 <괴델, 에셔, 바흐>에 관한 비판은 구체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로쟈님의 비판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구체적인 번역비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1. 다른 속성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두 책 모두 오역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도 이러한 두 책을 오역이라는 같은 속성에 기대어 같은 잣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물론 qualia님 입장에서는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주된 속성을 지닌 페이퍼가 구체적인 번역내용을 비판하는 로쟈 님의 페이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공통점을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할 것인지 하는 것은 열려있습니다. 두 책은 오역서라는 무시 못 할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2. 로쟈 님의<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초기단계만 보더라도 출판사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은 파악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오역지적이 형식적일 뿐이겠습니까?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에 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구체적인 번역비판인 동시에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qualia님의 가장 기초적인 진술인 따라서 이후 로쟈 님을 비판하는 논리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는 잘못된 진술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어제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과 함께 주문한 신간은 욜렌 딜라스-로세리외의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이다. 저자나 역자 모두 생소하고 불어본의 번역이라서 망설여지긴 했지만, '토마스 모어에서 레닌까지'란 부제가 암시하듯이 러시아 근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어서 일단은 '참고자료'로 구입을 결정한 것. 그러고 나서 리뷰들을 찾아보니 의외로 많이 뜬다. '유토피아'란 주제가 아직도 언론에서는 '먹히는' 이슈인가 보다. 한데 자세히 뜯어보니 리뷰의 시각이 제각각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두고서도 '무리짓기'가 가능할 정도로. 두 가지 사례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리뷰를 차례로 읽어본다.

한국일보(07. 02. 10) 존재만으로도 큰 매력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 

오늘날, 유토피아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행태일까? 거칠게 말해, 책의 결론은 쓸쓸하다. 이상향에 대한 꿈 따위는 깨라고. 현실이 웅변하고 있지않은가. 베를린 장벽과 더불어 공산주의의 준거틀이 무너지자, 유토피아에 대해 유효하게 남은 것이라곤 미래에 대한 기억뿐이다. 궁지에 몰린 ‘최후의 인디언 부족’과 같은 운명에 놓인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곤 새로운 혁명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미국의 강고한 패권주의에 내몰려 역사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만 같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조차도 끝인가.

그 출발은 당연히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다. 일체의 사유 재산과 화폐를 부정하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은 17, 18세기 계몽주의와 결합해 카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같은 평등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작품으로 계승된다. 감성적 차원의 초기 유토피아론들은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실천적 강령을 갖춰 간다. 평등 아니면 죽음도 불사한다며 기득권에 대해 총칼을 든 그라쿠스 바뵈프에 의해 도구화ㆍ합리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이어 생시몽 등 19세기의 선구적 공산주의 또는 무정부적 신질서론으로 모양새를 갖춰 나간다.

현실 사회의 원리와 공동체의 원리 중 어떤 것을 채택할지, 그들의 후예는 부단히 고민해 오고 있다. 폐쇄적 상업 국가가 될지, 사유 재산과 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사랑과 노동은 모든 이해와 도덕 관계에서 해방되는 사회가 될지, 도대체 어떤 공동체적 사회의 모습을 취할지 그들은 현실 사회 질서에 대한 뜨거운 반명제들을 생산해 왔다. 그 열망은 오늘날에도 엄존한다. 프롤레타리아 없는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과 생활 수준을 향유해야 한다는 주장, 노동에서 해방된 유목민적 생활에의 강조, 나아가 모든 불합리와 억압이 일거에 사라진 ‘가짜 사회’와 그를 위한 어설픈 실험과 정교한 문학 작품 등.

어쨌든 확실한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다.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반파시즘, 반인종차별주의, 반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등 다양한 급진 운동은 유토피아와의 연관 없이는 설명할 길 없다. 또 현재 과학 문명이 일궈낸 가능성도 그에 동참한다. 이데올로기의 틀을 깨고 나온 새로운 전망, 즉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 등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라.

아무 데도 없는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원칙. 공교롭게도 우리 시대가 찾아낸 새 비전은 토머스 모어가 제시했던 저 원칙으로 회귀 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라는 허망한 꿈과 유토피아만이 줄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방대한 공간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모른 척 해오지 않았는지를 책은 묻고 있다. 현실이 가능성 보다 억압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끊임없는 매력이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거지는 대안적 공동체의 비전도 결국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실질적 근거를 두고 있다.(장병욱 기자) 

중앙일보(07. 02. 10) 그대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나

현실과는 달리 행복한 세상, 그야말로 꿈같은 사회를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16세기 악덕 귀족의 횡포에 분노한 영국의 '모범 귀족' 토마스 모어가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간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파리10대학(낭테르)의 사회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유토피아라는 매혹적인 개념의 역사와 본질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풍요'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두 열매를 동시에 따먹으려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반영한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인 '인민의 낙원'은 그런 모순 때문에 현실에서 사라졌다.

꿈꾸는 것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 초 논객인 앙드레 고다르는 '형제애로 단결된 유럽이 십자군의 기치 아래 문명과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꿈을 꾸었다. 조국.노동.가족.종교라는 예언자적 구호로 가득 찬 그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의 바탕이 됐다.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구현해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조반니 로시는 '사회적 화학실험실'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농민들에게 사회주의를 주입,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무정부주의자 세바스티앙 포르는 어린이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고 1904년 시골에 교육공동체를 세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54년 빅토르 콩시데랑은 미국 텍사스에 땅을 사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다.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몽상가들은 실현 가능성은 따지지 않으며,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섞어 사람들의 혼동을 유발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의 태반은 새로운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정치시스템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야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뜻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미권이 아닌 프랑스의 학자가 지은 책답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사상들이 상당히 낯설다. 그런 만큼 자극도 신선하다.(채인택 기자)

07. 02. 11.

P.S. 일단 타이틀에서 두 리뷰의 방점이 어디에 놓일지 암시된다. 전자는 역사상 수많은 시도와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매력과 그 희구의 불가피성을 시사한다면, 후자는 그 매력보다는 '실패'에 초점을 둔다. 문제는 두 가지이다. (1)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낳았다. (2)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밖에 없는 나쁜 세상이다. 과연 미덕은 현재의 나쁜 세상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미래의 유토피아, 혹은 '나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것인가.

 

 

 

 

유토피아란 주제와 관련해서 예전에 읽은 책은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 1999)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이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와 함께 이번에 더 읽어보려고 하는 것은 <유예된 유토피아, 공산주의>(부키, 2005)와 모처럼 나온 국내저작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 2007)이다(후자는 엊그제 주문했다). 중량감 있는 책들은 아니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데에는 얇은 책들이 더 유용할 때가 있다.

L'Utopie ou la mémoire du futur, De Thomas More à Lénine : Le Rêve éternel

참고로,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번에 번역된 <유토피아>의 저자 로세리외는 "파리 10대학(낭테르) 사회학과 교수"이면서 "공산주의와 유토피아 사상 전문가"라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 아마존에서 검색되는 책은 이 책 한권이다. '전문가'가 되는 루트가 따로 있는 것일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7-02-11 19:17   좋아요 0 | URL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쟁겨두어야 겠네요. :) 퍼갑니다.
 

어제 2월 10일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1799-1837)의 서거 170주기가 되는 날이다. 러시아신문을 뒤져보니까 추모기사들이 떠 있는데, 올해는 날짜가 2월 9일인 모양이다. 구력으로 푸슈킨이 사망한 것은 1837년 1월 29일의 일이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월 10일쯤인데, 하루 정도는 왔다갔다 하는 듯하다(이 계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나는 모른다). 지난달 말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틀이 지나서야 몇 마디 적게 된다(날짜가 지나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군).

사실 그의 결투와 죽음에 관해서 내가 할 얘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페이퍼에 적어놓았기 때문에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다. 그래서 국내에 관련기사가 있는지 검색해봤는데, 오래전 세계일보에 실린 것이 눈에 띈다. '철의 실크로드' 기행연재물의 한 꼭지가 '시인 푸슈킨의 고향 모스크바'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이미지를 덧붙여둔다(*아래는 푸슈킨의 결투 장소).  

세계일보(01. 08. 20) 詩人 푸슈킨의 고향 모스크바

"굳이 문학도가 아니라도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푸슈킨의 시 한 두 편쯤은 암송할 수 있습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스페이드의 여왕' 같은 장-단편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까지도 훤히 들 압니다. 그만큼 푸슈킨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작가입니다."

통역을 겸해 취재진을 안내한 조현용(25)씨는 러시아에서 8년간 살면서 느낀 점들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이곳에서 고교를 다니고 모스크바 국립대의 러시아 어문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그지만 러시아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문화적 소양에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학을 즐기고 오페라와 연극 발레를 많이 보아서인지 여기선 웬만한 일반 시민도 한국의 학식 있는 문화예술인이나 문학 교수 못지않게 해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알렉산드르 S. 푸슈킨(1799∼1837)의 작품은 러시아인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그는 시와 소설 등 각 장르에 걸쳐 새로운 전범이 될 작품을 많이 남김으로써 '러시아 근대문학의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그를 기리는 기념관만도 러시아 전역에 20군데가 넘는다. 붉은 광장에서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에는 푸슈킨이 신혼시절 살았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취재진은 이곳을 잠시 둘러본 뒤 다시 프레치스첸크 거리에 있는 푸슈킨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건물은 웅장하고 현대적인데다 전시물도 다양하다. 푸슈킨이 태어나기 전후의 시대상과 풍물, 당시 모스크바 시가지의 모습에서부터 작가의 육필원고와 스케치화, 저작물, 오리깃털 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개인용품과 주변인물, 관련자료 등으로 그 삶의 궤적을 두루 보여준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사회주의 혁명 이후 이 지명은 푸슈킨을 기념해 '푸슈킨고로트'로 바뀌었다)의 귀족학습원의 학생시절부터 빼어난 시작(詩作)으로 주목받았다. 졸업후 그는 시를 쓰면서도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적인 애국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자유' '차다예프에게' 등의 정치시를 쓴 것이 화근이 돼 그는 남러시아로 추방된다. 하지만 유형지의 외로운 생활 속에서도 개성의 자유를 노래하며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사실주의적인 드라마 작품을 많이 썼다. 근위병들이 황제에 반기를 든 데카브리스트 사건이 터진 뒤 그들과 무관함이 밝혀진 1826년에야 그는 유형에서 풀려나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푸슈킨 박물관의 안내인은 작가의 아내 나탈리야와 단테스의 그림 앞에 이르자 취재진에게 시간을 할애해 젊은 작가의 장렬한 최후를 들려주었다.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도 소설처럼 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모든 것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일은 사랑스러우리라"고 했던 시는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는 32세 되던 1831년 13세 연하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다. 일찍이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했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결혼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궁핍한 장모에게는 빚까지 내가며 거액의 혼수금을 쥐어줘야 했다. 게다가 유행을 좋아하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각광받게 된 아내 때문에 갈수록 큰 돈이 들었다. 늘어가는 빚과 사교계의 번잡함 속에서 그는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숨지기 3년 전인 1935년 무렵 그는 황제에게 매수당했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니콜라우스 1세로부터 3만루블을 빌리게 된다. 그만큼 그로서는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였다.

이 와중에 프랑스 출신 청년 근위병 조르주 단테스와 그의 아내 나탈리야의 염문이 불거졌다.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익명의 편지에 분개한 그는 '연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1837년 1월 27일 오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검은 강가에서 둘은 결투를 벌였다. 열 발짝 떨어져서 서로 권총을 쏘되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냉혹한 조건으로. 푸슈킨은 상대가 쏜 첫 발에 이미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눈밭에 쓰러졌으나 그의 총탄은 단테스의 팔목에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이틀 뒤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아직 37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국은 사전에 이 결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탈리야를 좋아했던 황제 니콜라우스 1세는 이를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푸슈킨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세도가들도 단테스와 나탈리야의 염문으로 그가 타격을 입는 것을 즐기는 입장이었다. 푸슈킨의 시신은 당국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미하일로프스코예의 한 수도원에 보내져 새벽에 매장됐다. 그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혹시 불상사가 벌어질까 우려한 당국은 일반인의 장례 참가를 금했고 '과격한' 추도사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작가의 데드 마스크는 눈을 감은 채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승을 떠난 무심한 표정이었다.

"나탈리야요? 그녀는 한동안 언니 알렉산드라와 아이들과 함께 칼루가 현에 있는 양친의 영지에서 살다가 후일 황제의 권유로 다시 궁정에 복귀하지요. 1844년 그녀는 표트르 란스코이와 재혼했습니다. 황제는 가족의 빚을 갚아주고 푸슈킨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습니다. 푸슈킨을 죽인 단테스는 그 뒤 러시아인들에게 짐승처럼 손가락질당하며 그늘진 삶을 살았습니다."

짧지만 열정적으로 살다 간 그는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기념비를 세웠다'며 푸슈킨은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써 놓았다(*'기념비'란 시이다). "나는 완전히 죽지 않으리라친숙한 시 속에 깃들인 영혼은/ 나의 재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며, 부패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찬양받으리라, 지구상에/ 단 한 명의 시인이라도 살아 있는 한."(차준영 문화전문위원)

07. 02. 11.

P.S. 푸슈킨의 결투와 죽음에 관한 기사의 소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나 아직 확증적인 것은 아니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수수께끼들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황제 니콜라이의 '음모설'을 나는 더 지지하는 편이다). 아래는 1880년에 모스크바에 세워진 푸슈킨의 동상. 러시아 전역에 200여개가 넘는 그의 동상들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동상이다. 배경으로는 과거 모스크바영화제가 개최되던 '러시아극장'이 보인다. 자주 가보던 곳인데,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저녁때 모더니티에 관한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가 몇 시간째 오역과 씨름하고 있다(열댓 페이지 읽는 데 몇 시간이 걸리다니!). 모더니티/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도 준비할 겸 집어들었던 것인데 오히려 혹만 더 붙인 셈이다. 이 난감한 번역에 대해 또 불평을 늘어놓으려다가 정신건강을 위해서 잠시 영화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지난 12월 개봉작으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영화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2006)이다. 그의 전작인 <과거가 없는 남자>는 챙겨보았었는데, 어쩌다가 이번엔 놓치게 됐다. 비록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로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성냥공장 소녀> 등을 더 본 정도이지만 카우리스마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보고 싶다). 흔히 '노키아의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내게는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일 정도이다. 뒤늦게(!) 그의 최신작에 대한 리뷰와 함께 감독 소개를 옮겨놓는다.

씨네21(06. 12. 13) 인생의 고독과 비애 <황혼의 빛>

영화관은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가보지 못한 세상에 데려다주고, 현실에서는 해볼 수 없는 감정과 사건을 체험하게 해주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적 경험을 즐길 수 문화적 공간이다. 그런데 영화는 소비되는 지점에서는 서민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되는 수준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소비의 측면에서는 복제 예술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산의 측면에서는 일단 제작되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고 더 많은 대중과 만나기 위해 실제에서 불가능한 꿈 혹은 달콤한 환상을 제공해야 하기에 대중의 현실과 멀리 떨어진 곳을 스크린 위에 담는다. 그래서 현실에 밀착된 우리의 삶을 담아내려는 감독들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 지경이다. <황혼의 빛>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런 감독의 명단에 빠져서는 안 될 이름이다.

켄 로치가 하층민의 삶을 사회운동 차원에서 전투적으로 다룬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것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켄 로치의 영화는 다소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의 삶이 직면한 절박함에 시나브로 물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떠도는 구름>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어 ‘빈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황혼의 빛>에서도 동일한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대도시의 야간 경비원인 코이스티넨(얀 히티아이넨)이다. 그는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허름한 집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금발의 여인 미리야(마리아 예르벤헬미)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고 꿈같은 데이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미리야의 배후에는 코이스티넨이 경비를 도는 백화점 보석상을 노리는 범죄조직이 있었고, 그녀는 코이스티넨에게서 경보장치의 비밀번호와 열쇠를 훔쳐내 조직에 알려준다. 사랑의 단꿈에 빠져 있던 코이스티넨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절도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빈민 3부작’은 공통적으로 상실의 과정을 다룬다. 세 작품 모두 서사적 시간의 진행과 더불어 주인공은 무언가를 잃는다. <떠도는 구름>에서 주인공 부부는 평범한 직장과 소박한 가정이 있었지만,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처하고 가정까지 붕괴될 위험을 맞이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는 영화 초반에 모든 기억을 잃는다. <황혼의 빛>에서 코이스티넨도 (애초에 거짓된 것이기는 했지만) 사랑은 물론 직장과 집 그리고 전 재산까지 잃게 된다. 세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원래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서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당하게 잃고 빈민화되는 과정은 신파적으로 소화될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감독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삶에 동정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눈물 한번 흘리는 법 없고, 절규 한번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사건들이 삶의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버텨내야하는 오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 투정부릴 정도로 유아적이지도 않고, 울며 나뒹굴 감정적,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다.

스스로를 ‘마음 따듯한 아저씨’라고 평하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무언가를 계속 잃고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해야 하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라는 출구까지 닫아두지는 않는다. <떠도는 구름>의 부부는 실직한 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월급을 떼어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꼼꼼하게 작성한 창업계획서가 자본문제로 폐기처분되기 직전 기적처럼 옛 직장 상사의 도움을 받아 ‘노동’(Work)이라는 레스토랑을 내게 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기억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지만, 바닥부터 시작한 새로운 인생에서 사랑을 만난다. 점차 그에게 과거가 돌아오지만 그는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서 인생의 답을 찾는다.

<황혼의 빛>의 주인공 코이스티넨이 우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꿈을 꾸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의 따돌림과 상사의 무시를 경험할 때마다 경비업체의 사장이 될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금발 여인에게 농락당한 뒤 자신의 꿈을 지탱해줄 씨앗마저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코이스티넨은 유일한 말동무이자 감옥에 간 그를 기다려준 아이라(마리아 헤이스카넨)에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관객이 그럴 만도 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릴 즈음, 그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아이라가 던지는 한마디. ‘희망을 안 잃었다니 다행이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주인공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꾸만 솟아나오는 희망이다. 그것이 <황혼의 빛>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코이스티넨의 생사에 대해 눈으로 본 것보다 ‘여기서는 안 죽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크 오몽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재현하는 집약체로 ‘얼굴’을 이야기한다. 얼굴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가면인 동시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는 아무런 대사나 음악도 없이 인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 클로즈업이 많이 등장한다. <황혼의 빛>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우리는 고독하게 살아가는 코이스티넨의 무표정한 얼굴을 수시로 마주해야만 한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서도 변명 한마디없이, 부당한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견뎌내는 삶의 태도가 그의 담담한 얼굴표정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된다.

감독은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지만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은 관객에게 인물의 영혼과 바로 접속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러한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코이스티넨뿐 아니라 미리야의 얼굴에도 많은 시간을 허용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일종의 팜므파탈인 그녀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뭔가 끊임없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악행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운동이 정지되거나 청각적으로 음이 소거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템포 빠른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인물의 얼굴만 멀뚱멀뚱 들여다보라는 감독의 요구가 때때로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황혼의 빛>은 말없는 얼굴이 쏟아지는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김지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이자 전세계 예술영화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컬트 감독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미국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배급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뉴욕 맨해튼, 파리, 베를린 영시네마 포름 등에서 거의 ‘숭배’ 차원으로 열광하는 관객들을 만난다. <오징어 노동조합 Calamari Union>(1985),<햄릿, 장사를 떠나다 Hamlet Goes Busi-ness>(1987),<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와 같은 기상천외한 제목을 단 그의 영화들은 예상을 불허하는 블랙유머의 뇌관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심드렁하다. 88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오징어 노동조합>이 상영됐을 때 관객과의 토론에 참석한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최악이에요. 왜 자리를 뜨지 않지요? 당신들은 마조히스트인가요?”

1957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카우리스마키는 형 미카가 설립한 빌레알파영화사에서 첫 장편영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1982)을 발표한 이래 비교적 다작한 편이다. 거의 해마다 한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햄릿, 장사를 떠나다>는 덴마크를 떠나 헬싱키로 장사를 떠난 햄릿이 사기꾼에게 속고, 강도에게 털리고 설상가상으로 부친이 남긴 회사를 숙부에게 빼앗길 뻔하는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고전비극 <햄릿>의 배경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복판으로 옮긴 블랙코미디인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의 고뇌는 ‘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바뀐다.

<죄와 벌>,<햄릿, 장사를 떠나다>가 고전문학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라면, <천국의 그림자 Shadow in Paradise>(1986),<아리엘 Ariel>(1988),<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1990)는 평단에서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이란 평가를 듣는 영화다. 계급적 위치면에서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이 삼부작의 공통된 주제다. <천국의 그림자>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소녀와 중년의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외국을 동경하다가 결국은 에스토니아행 배를 탄다는 줄거리인데, 두사람은 배를 타고 나서도 자기들이 왜 망명을 결정했는지 모른다. <아리엘>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카스리넨은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무작정 길을 떠났다가 미혼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사람은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남미로 가는 밀항선 ‘아리엘’을 타고 탈출하는 신세가 된다.

카우리스마키의 이런 국외자적 강박감이 가장 잘 녹아들어가 있는 작품이 <성냥공장 소녀>다.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거의 없는 이 영화는 작은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리스가 지긋지긋하고 전망이 없는 삶을 살다가 못된 세상에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쥐약을 넣어 주위사람들을 몰살한다는 이야기이다. 불행에 빠진 소녀가 운명을 극복한다는 동화적인 설정을 잔인하게 비튼 이 영화는 엄격한 무기교의 기교스타일을 통해 섬뜩한 감동을 전해준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성냥공장 소녀>와는 달리 희극적 감성이 녹아 있는 블랙코미디로 북구의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핀란드 촌놈들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해프닝을 담았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지만 미국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모의 땅임을 영화 속 황량한 풍경을 통해 자질구레한 설명없이 묘사한다. 60년대 유럽영화의 상투적인 스타일과 다른 것은 로드무비의 쓸쓸한 풍경에 슬랩스틱 코미디와 개그를 덧칠해 넣는 카우리스마키의 유머감각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뿌리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고다르 영화의 60년대식 사랑과 무정부주의에 대한 향수, 새뮤얼 풀러와 로버트 올드리치류의 할리우드 고전영화에 대한 애착,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소설의 달콤한 냉소주의 등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화면에 배어 있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진정한 실체는 핀란드와 헝가리의 보헤미안 전통일 것이라고 영국의 평론가 피터 코위는 말한다. 이것은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가 낭패를 보는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I Hired a Contract Killer>(1990)나 돈이 없어 밥을 못먹어도 돈을 빌려서라도 술잔치를 벌이며 호기있게 인생을 사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보헤미안의 삶 La Vie de Boheme>(1992)과 같은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코미디로, 가끔은 비극으로 그려낸다. 이 괴짜 핀란드 감독의 좌충우돌하는 유머는 보헤미안 정신의 영화적 형상화라 할 것이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07. 02. 11.

Аки Каурисмяки. Последний романтик

P.S. 그나마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 영어권에서도 나오지 않은 카우리스마키 연구서가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출간됐다는 사실이고(러시아어 표기로는 '아키 카우리스먀키'이다), 아마도 이달안으로는 내가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점(어제 책을 발송했다는 메일을 인터넷서점측으로부터 받았다). 제목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지막 낭만주의자>(2006)이다. 296쪽이니까 분량은 그렇게 두껍지 않다(하지만 우리 번역본으로 하면 400쪽이 넘는다). 책값은 14,000원 가량(배송비 별도). NLO출판사에서 나오는 '키노텍스트'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는 지난 2004년에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작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세계>, <기타노 다케시, 유년시절> 등이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이 출간됐다(<히치콕>도 같이 주문했다). 이럴 땐 러시아가 맘에 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7-02-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평, 2006년 겨울호에 박인환 특집을 읽었는데, 아래 글을 본 첫느낌이 박인환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얘긴가?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새로운 시어' '모더니티''모더니즘'이라는 단어들이 병렬적으로 눈에 들어오는데 아주 느슨하게 이해되는군요. 일단 박인환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지점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해서인지 알고 싶고요, 박인환 시가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모더니즘/모더니티 관계도 짤막한 논평이 가능할까요^^

박인환의 시어에 대한 자세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낯선 시어의 사용을 들어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정리되고 있는데, 그가 새로운 시어를 통해 새로운 시 쓰기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모더니티의 추구가 모더니즘의 시가 될 수는 있지만 모더니티가 곧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세계에 대한 편향된 인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진정 박인환이 새로운 어휘에 지대한 고나심을 가진 것은 모더니즘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라고 봐야 한다.

로쟈 2007-02-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더니즘시의 대응어로 '전통시'나 '리얼리즘시'가 가능할 테니까 그와 견주면 될 거 같습니다. '모더니즘시'로서 함량이 좀 미달한다, 는 의견들을 자주 접했지만, 모더니즘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드문 게 아닌가 싶네요. 구체적인 논변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저로선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박인환은 김수영의 프리즘을 통해서 본 박인환이긴 하지만.

글구, 모더니티/모더니즘은 일반적인 정의를 따릅니다. 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가 촉발하게 된 문학/예술사조이고, 각 나라별로 시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에서 보들레르, 미술에서 인상파부터 카운트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Runa 2007-02-1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시나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죠.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영화는 다 봤고(한 10년 전 비됴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본 이후, 시네마테크에서 <죄와 벌>, <성냥공장소녀>, <개들에겐 과거가 없다(텐 미니츠 트럼펫)>, <과거가 없는 남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황혼의 빛> 등), 그의 신작이 있다면 항상 볼 준비가 돼 있지요. 물론 <오징어 노동조합>, <햄릿, 장사를 떠나다> 등의 예전 영화도 꼭 보고 싶은 영화 목록들 중에 올려져 있지요. 감독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잘 몰랐는데, 덕분에 잘 봤습니다. 어디서 보니 아주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더군요(그런 점도 좋게 보죠). 칸느에서 <과거가 없는 남자>가 작품상을 못 받자 악수도 인사도 없이 바로 단상에 내려와 짐 싸서 비행기 타고 핀란드로 돌아와버렸다는..^^

특히 <과거가 없는 남자>에 대해선 어린 후배들이 내는 작은 영화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 갑작스런 잡지 폐간으로 끙끙거리며 쓴 글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암튼, 그때 저도 오몽과 들뢰즈의 클로즈업을 빌어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소수자의 얼굴"을 다른 영화들의 얼굴과 비교했던 기억이 있네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는 적어도 희망을 얘기하는가 했는데, <황혼의 빛>은 더 암담하지요. 그렇다고 그가 비관적이라고 생각진 않습니다. 쉬운 타협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다시 암중모색 중이라고 보는 쪽이죠.

로드무비 2007-02-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7-02-1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rsain님/ 네, 멕시코 영화감독 아르투로 립스테인과 함께 전작이 궁금한 몇 안되는 감독입니다. 제 취향이 그런 감독들과 잘 맞습니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신다니까 반갑네요. 전에 쓰신 글도 올려주시죠.^^
로드무비님/ 오랜만에 퍼가시네요.^^

2007-02-11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작년에 나온 전집 말고 또 나오는 건가요? 기이한 일입니다...

릴케 현상 2007-02-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거 50주년이다 보니^^
 

엊그제 구내서점에서 본 신간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우리와 그들'의 구별방식에 대한 인류학적, 심리학적 고찰쯤으로 보였는데,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부피가 좀 있는 책이라는 생각 정도. 한데, 언론에 뜬 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뭔가 흥미로운 글감이 되겠다 싶어서 구입을 결정했다. 키워드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부족적 감각'이다('민족주의'라는 말보다는 근본적이지 않은가?). '부족의식' 혹은 '끼리끼리의식'. 국역본의 제목엔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지만 원서는 부제는 '당신의 부족 심리를 이해하기(Understang your  tribal mind)'라고 돼 있다. 원서의 서평을 잠깐 읽어보니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나 베레비의 책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사례를 제공해준다고 한다. 아마존을 검색해봐도 이 책은 그의 처녀작처럼 보이는데,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를 갖게 한다.

뉴스메이커(07. 02. 13)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무리를 짓고 집단 혹은 부류에 속하며 산다. 혼자 동떨어져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리는 결코 어느 하나에 국한하지 않는다. 인종, 종교, 민족, 계급에 따라 한 인간이 여러 개의 부류에 속한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 ‘무리’는 나이, 직위, 정치이념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다. 가정을 갖고 있는 40대 남성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지역사회에서, 직장에서, 학부모 모임에서, 동호회에서, 정치이념에서 여러 무리에 속할 수 있다. 우리도 각자 서는 위치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무리에 속할 수 있다. 무리 속에서 개인은 ‘우리’라는 표현을 아주 쉽게 쓰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 또는 ‘적’이 된다.

이러한 무리·부류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본질적으로 뜻이 맞기 때문에 자연스레 형성된다.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다. 하지만 코드보다 더 중요한 것요소가 있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의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는 사람들이 한 무리·부류를 형성하는 데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가 무척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무리·부류는 나의 위치에 따라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거나 본의 아니게 무리에서 이탈해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새로운 무리·부류에 합류할 수도 있다. 

 

베레비는 이 책에서 인류학부터 신경과학까지 여러 분야를 접목해가며 인간의 ‘부족적 감각’을 설명한다. 어디든 부류에 속하고자 하는 ‘부족적 감각’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부족적 감각’은 당연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디든 속하고 싶어하는 ‘부족적 감각’은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부족적 감각’의 가장 큰 폐해는 뻔히 잘못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부류에 섞여 자기의 뜻을 접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따금 자기가 동의하지도 않는 무리에 속해 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무리짓기는 인간의 주관에 좌우되는 것보다는 놓인 상황에 따른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또한 ‘한 부류는 외부에서 말하고 평가하는 것처럼 되어간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은 근면하다’ ‘B형 남자는 이러이러하다’는 등 외부의 평가에 따라 원래 그렇지 않은 부류도 점점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무리의 생각이 옳다고 느끼고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여전히 그때 옳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때 달리 할걸’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제일 경계해야 할 일로 드는 것은 동지와 적으로 분류하는 ‘무리짓기’이다. 오늘날 ‘코드’는 영원히 맞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드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무리는 언제든지 해체되고 새롭게 조직될 수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상황만 봐도 이는 명백해진다. 불과 몇 년 전 창당 당시의 뜨거웠던 정신은 식은 지 오래고 무리별로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 아닌가. 끼리끼리 무리를 형성하고 다른 무리를 적으로 분류하는 행동은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적은 바로 우리’라는 점, 이것이 저자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임형도 기자)

07. 02. 10.


 

 

 

P.S. <우리와 그들>의 내용을 좀 읽어봐야겠지만, 내가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로 얼른 떠올린 것은 '부족적 감각'이 문명의 수준으로 확대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김영사, 1997)과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룬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동문선, 2004), 그리고 그 기원에 있어서 주체의 불완전성이란 객체의 불완전성의 반영/반복이라는 걸 보여주는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까지이다. 각각 정치학, 철학, 정신분석학으로 대별될 수 있겠다. 거기에 <우리와 그들>의 심리학/인류학을 보태 읽고자 하는 것. '계획'은 언제나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런 계획마저 없다면 나의 책읽기는 한 뼘 이상 더 게을러질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2-10 21:52   좋아요 0 | URL
"문명의 충돌"을 그렇게 엮어 읽는 것 꽤나 신선하네요..^^
근데 문명의 충돌은 '정치학'이라기 보다는 헌팅턴 스스로 부족적 감각을 문명의 수준으로 체현한 것에 가깝지 않을지... ㅎㅎ
곧 새학기 시작인데 계획한 바 최대한 이루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7-02-10 22:03   좋아요 0 | URL
제 짐작도 그런 것인데, 자세한 건 들춰봐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곧 새학기'라서 거의 '플랜 임파서블'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sommer 2007-02-11 00:31   좋아요 0 | URL
'무리짓기'를 근본적 적대의 '강팍한' 차원으로 이해하려는 무리들과 문화 인류학적 혹은 하위 문화의 '유연함'으로 파악하려는 무리들로 대립구도를 만들어 볼 수 있겠네요. 여기에 칼 슈미트의 '적과 친구'의 관계는 두 곳 모두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겠네요.

로쟈 2007-02-11 00:35   좋아요 0 | URL
suture님도 이 참에 흥미로운 플랜을 한번 세워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