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 모더니티에 관한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가 몇 시간째 오역과 씨름하고 있다(열댓 페이지 읽는 데 몇 시간이 걸리다니!). 모더니티/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도 준비할 겸 집어들었던 것인데 오히려 혹만 더 붙인 셈이다. 이 난감한 번역에 대해 또 불평을 늘어놓으려다가 정신건강을 위해서 잠시 영화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지난 12월 개봉작으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영화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2006)이다. 그의 전작인 <과거가 없는 남자>는 챙겨보았었는데, 어쩌다가 이번엔 놓치게 됐다. 비록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로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성냥공장 소녀> 등을 더 본 정도이지만 카우리스마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보고 싶다). 흔히 '노키아의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내게는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일 정도이다. 뒤늦게(!) 그의 최신작에 대한 리뷰와 함께 감독 소개를 옮겨놓는다.

씨네21(06. 12. 13) 인생의 고독과 비애 <황혼의 빛>

영화관은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가보지 못한 세상에 데려다주고, 현실에서는 해볼 수 없는 감정과 사건을 체험하게 해주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적 경험을 즐길 수 문화적 공간이다. 그런데 영화는 소비되는 지점에서는 서민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되는 수준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소비의 측면에서는 복제 예술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산의 측면에서는 일단 제작되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고 더 많은 대중과 만나기 위해 실제에서 불가능한 꿈 혹은 달콤한 환상을 제공해야 하기에 대중의 현실과 멀리 떨어진 곳을 스크린 위에 담는다. 그래서 현실에 밀착된 우리의 삶을 담아내려는 감독들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 지경이다. <황혼의 빛>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런 감독의 명단에 빠져서는 안 될 이름이다.

켄 로치가 하층민의 삶을 사회운동 차원에서 전투적으로 다룬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것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켄 로치의 영화는 다소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의 삶이 직면한 절박함에 시나브로 물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떠도는 구름>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어 ‘빈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황혼의 빛>에서도 동일한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대도시의 야간 경비원인 코이스티넨(얀 히티아이넨)이다. 그는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허름한 집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금발의 여인 미리야(마리아 예르벤헬미)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고 꿈같은 데이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미리야의 배후에는 코이스티넨이 경비를 도는 백화점 보석상을 노리는 범죄조직이 있었고, 그녀는 코이스티넨에게서 경보장치의 비밀번호와 열쇠를 훔쳐내 조직에 알려준다. 사랑의 단꿈에 빠져 있던 코이스티넨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절도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빈민 3부작’은 공통적으로 상실의 과정을 다룬다. 세 작품 모두 서사적 시간의 진행과 더불어 주인공은 무언가를 잃는다. <떠도는 구름>에서 주인공 부부는 평범한 직장과 소박한 가정이 있었지만,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처하고 가정까지 붕괴될 위험을 맞이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는 영화 초반에 모든 기억을 잃는다. <황혼의 빛>에서 코이스티넨도 (애초에 거짓된 것이기는 했지만) 사랑은 물론 직장과 집 그리고 전 재산까지 잃게 된다. 세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원래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서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당하게 잃고 빈민화되는 과정은 신파적으로 소화될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감독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삶에 동정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눈물 한번 흘리는 법 없고, 절규 한번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사건들이 삶의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버텨내야하는 오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 투정부릴 정도로 유아적이지도 않고, 울며 나뒹굴 감정적,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다.

스스로를 ‘마음 따듯한 아저씨’라고 평하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무언가를 계속 잃고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해야 하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라는 출구까지 닫아두지는 않는다. <떠도는 구름>의 부부는 실직한 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월급을 떼어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꼼꼼하게 작성한 창업계획서가 자본문제로 폐기처분되기 직전 기적처럼 옛 직장 상사의 도움을 받아 ‘노동’(Work)이라는 레스토랑을 내게 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기억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지만, 바닥부터 시작한 새로운 인생에서 사랑을 만난다. 점차 그에게 과거가 돌아오지만 그는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서 인생의 답을 찾는다.

<황혼의 빛>의 주인공 코이스티넨이 우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꿈을 꾸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의 따돌림과 상사의 무시를 경험할 때마다 경비업체의 사장이 될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금발 여인에게 농락당한 뒤 자신의 꿈을 지탱해줄 씨앗마저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코이스티넨은 유일한 말동무이자 감옥에 간 그를 기다려준 아이라(마리아 헤이스카넨)에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관객이 그럴 만도 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릴 즈음, 그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아이라가 던지는 한마디. ‘희망을 안 잃었다니 다행이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주인공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꾸만 솟아나오는 희망이다. 그것이 <황혼의 빛>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코이스티넨의 생사에 대해 눈으로 본 것보다 ‘여기서는 안 죽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크 오몽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재현하는 집약체로 ‘얼굴’을 이야기한다. 얼굴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가면인 동시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는 아무런 대사나 음악도 없이 인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 클로즈업이 많이 등장한다. <황혼의 빛>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우리는 고독하게 살아가는 코이스티넨의 무표정한 얼굴을 수시로 마주해야만 한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서도 변명 한마디없이, 부당한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견뎌내는 삶의 태도가 그의 담담한 얼굴표정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된다.

감독은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지만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은 관객에게 인물의 영혼과 바로 접속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러한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코이스티넨뿐 아니라 미리야의 얼굴에도 많은 시간을 허용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일종의 팜므파탈인 그녀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뭔가 끊임없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악행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운동이 정지되거나 청각적으로 음이 소거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템포 빠른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인물의 얼굴만 멀뚱멀뚱 들여다보라는 감독의 요구가 때때로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황혼의 빛>은 말없는 얼굴이 쏟아지는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김지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이자 전세계 예술영화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컬트 감독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미국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배급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뉴욕 맨해튼, 파리, 베를린 영시네마 포름 등에서 거의 ‘숭배’ 차원으로 열광하는 관객들을 만난다. <오징어 노동조합 Calamari Union>(1985),<햄릿, 장사를 떠나다 Hamlet Goes Busi-ness>(1987),<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와 같은 기상천외한 제목을 단 그의 영화들은 예상을 불허하는 블랙유머의 뇌관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심드렁하다. 88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오징어 노동조합>이 상영됐을 때 관객과의 토론에 참석한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최악이에요. 왜 자리를 뜨지 않지요? 당신들은 마조히스트인가요?”

1957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카우리스마키는 형 미카가 설립한 빌레알파영화사에서 첫 장편영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1982)을 발표한 이래 비교적 다작한 편이다. 거의 해마다 한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햄릿, 장사를 떠나다>는 덴마크를 떠나 헬싱키로 장사를 떠난 햄릿이 사기꾼에게 속고, 강도에게 털리고 설상가상으로 부친이 남긴 회사를 숙부에게 빼앗길 뻔하는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고전비극 <햄릿>의 배경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복판으로 옮긴 블랙코미디인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의 고뇌는 ‘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바뀐다.

<죄와 벌>,<햄릿, 장사를 떠나다>가 고전문학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라면, <천국의 그림자 Shadow in Paradise>(1986),<아리엘 Ariel>(1988),<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1990)는 평단에서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이란 평가를 듣는 영화다. 계급적 위치면에서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이 삼부작의 공통된 주제다. <천국의 그림자>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소녀와 중년의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외국을 동경하다가 결국은 에스토니아행 배를 탄다는 줄거리인데, 두사람은 배를 타고 나서도 자기들이 왜 망명을 결정했는지 모른다. <아리엘>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카스리넨은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무작정 길을 떠났다가 미혼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사람은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남미로 가는 밀항선 ‘아리엘’을 타고 탈출하는 신세가 된다.

카우리스마키의 이런 국외자적 강박감이 가장 잘 녹아들어가 있는 작품이 <성냥공장 소녀>다.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거의 없는 이 영화는 작은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리스가 지긋지긋하고 전망이 없는 삶을 살다가 못된 세상에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쥐약을 넣어 주위사람들을 몰살한다는 이야기이다. 불행에 빠진 소녀가 운명을 극복한다는 동화적인 설정을 잔인하게 비튼 이 영화는 엄격한 무기교의 기교스타일을 통해 섬뜩한 감동을 전해준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성냥공장 소녀>와는 달리 희극적 감성이 녹아 있는 블랙코미디로 북구의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핀란드 촌놈들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해프닝을 담았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지만 미국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모의 땅임을 영화 속 황량한 풍경을 통해 자질구레한 설명없이 묘사한다. 60년대 유럽영화의 상투적인 스타일과 다른 것은 로드무비의 쓸쓸한 풍경에 슬랩스틱 코미디와 개그를 덧칠해 넣는 카우리스마키의 유머감각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뿌리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고다르 영화의 60년대식 사랑과 무정부주의에 대한 향수, 새뮤얼 풀러와 로버트 올드리치류의 할리우드 고전영화에 대한 애착,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소설의 달콤한 냉소주의 등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화면에 배어 있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진정한 실체는 핀란드와 헝가리의 보헤미안 전통일 것이라고 영국의 평론가 피터 코위는 말한다. 이것은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가 낭패를 보는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I Hired a Contract Killer>(1990)나 돈이 없어 밥을 못먹어도 돈을 빌려서라도 술잔치를 벌이며 호기있게 인생을 사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보헤미안의 삶 La Vie de Boheme>(1992)과 같은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코미디로, 가끔은 비극으로 그려낸다. 이 괴짜 핀란드 감독의 좌충우돌하는 유머는 보헤미안 정신의 영화적 형상화라 할 것이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07. 02. 11.

Аки Каурисмяки. Последний романтик

P.S. 그나마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 영어권에서도 나오지 않은 카우리스마키 연구서가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출간됐다는 사실이고(러시아어 표기로는 '아키 카우리스먀키'이다), 아마도 이달안으로는 내가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점(어제 책을 발송했다는 메일을 인터넷서점측으로부터 받았다). 제목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지막 낭만주의자>(2006)이다. 296쪽이니까 분량은 그렇게 두껍지 않다(하지만 우리 번역본으로 하면 400쪽이 넘는다). 책값은 14,000원 가량(배송비 별도). NLO출판사에서 나오는 '키노텍스트'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는 지난 2004년에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작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세계>, <기타노 다케시, 유년시절> 등이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이 출간됐다(<히치콕>도 같이 주문했다). 이럴 땐 러시아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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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2-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평, 2006년 겨울호에 박인환 특집을 읽었는데, 아래 글을 본 첫느낌이 박인환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얘긴가?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새로운 시어' '모더니티''모더니즘'이라는 단어들이 병렬적으로 눈에 들어오는데 아주 느슨하게 이해되는군요. 일단 박인환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지점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해서인지 알고 싶고요, 박인환 시가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모더니즘/모더니티 관계도 짤막한 논평이 가능할까요^^

박인환의 시어에 대한 자세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낯선 시어의 사용을 들어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정리되고 있는데, 그가 새로운 시어를 통해 새로운 시 쓰기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모더니티의 추구가 모더니즘의 시가 될 수는 있지만 모더니티가 곧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세계에 대한 편향된 인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진정 박인환이 새로운 어휘에 지대한 고나심을 가진 것은 모더니즘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라고 봐야 한다.

로쟈 2007-02-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더니즘시의 대응어로 '전통시'나 '리얼리즘시'가 가능할 테니까 그와 견주면 될 거 같습니다. '모더니즘시'로서 함량이 좀 미달한다, 는 의견들을 자주 접했지만, 모더니즘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드문 게 아닌가 싶네요. 구체적인 논변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저로선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박인환은 김수영의 프리즘을 통해서 본 박인환이긴 하지만.

글구, 모더니티/모더니즘은 일반적인 정의를 따릅니다. 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가 촉발하게 된 문학/예술사조이고, 각 나라별로 시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에서 보들레르, 미술에서 인상파부터 카운트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린(隣) 2007-02-1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시나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죠.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영화는 다 봤고(한 10년 전 비됴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본 이후, 시네마테크에서 <죄와 벌>, <성냥공장소녀>, <개들에겐 과거가 없다(텐 미니츠 트럼펫)>, <과거가 없는 남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황혼의 빛> 등), 그의 신작이 있다면 항상 볼 준비가 돼 있지요. 물론 <오징어 노동조합>, <햄릿, 장사를 떠나다> 등의 예전 영화도 꼭 보고 싶은 영화 목록들 중에 올려져 있지요. 감독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잘 몰랐는데, 덕분에 잘 봤습니다. 어디서 보니 아주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더군요(그런 점도 좋게 보죠). 칸느에서 <과거가 없는 남자>가 작품상을 못 받자 악수도 인사도 없이 바로 단상에 내려와 짐 싸서 비행기 타고 핀란드로 돌아와버렸다는..^^

특히 <과거가 없는 남자>에 대해선 어린 후배들이 내는 작은 영화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 갑작스런 잡지 폐간으로 끙끙거리며 쓴 글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암튼, 그때 저도 오몽과 들뢰즈의 클로즈업을 빌어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소수자의 얼굴"을 다른 영화들의 얼굴과 비교했던 기억이 있네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는 적어도 희망을 얘기하는가 했는데, <황혼의 빛>은 더 암담하지요. 그렇다고 그가 비관적이라고 생각진 않습니다. 쉬운 타협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다시 암중모색 중이라고 보는 쪽이죠.

로드무비 2007-02-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7-02-1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rsain님/ 네, 멕시코 영화감독 아르투로 립스테인과 함께 전작이 궁금한 몇 안되는 감독입니다. 제 취향이 그런 감독들과 잘 맞습니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신다니까 반갑네요. 전에 쓰신 글도 올려주시죠.^^
로드무비님/ 오랜만에 퍼가시네요.^^

2007-02-11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작년에 나온 전집 말고 또 나오는 건가요? 기이한 일입니다...

릴케 현상 2007-02-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거 50주년이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