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과 함께 주문한 신간은 욜렌 딜라스-로세리외의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이다. 저자나 역자 모두 생소하고 불어본의 번역이라서 망설여지긴 했지만, '토마스 모어에서 레닌까지'란 부제가 암시하듯이 러시아 근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어서 일단은 '참고자료'로 구입을 결정한 것. 그러고 나서 리뷰들을 찾아보니 의외로 많이 뜬다. '유토피아'란 주제가 아직도 언론에서는 '먹히는' 이슈인가 보다. 한데 자세히 뜯어보니 리뷰의 시각이 제각각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두고서도 '무리짓기'가 가능할 정도로. 두 가지 사례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리뷰를 차례로 읽어본다.

한국일보(07. 02. 10) 존재만으로도 큰 매력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
오늘날, 유토피아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행태일까? 거칠게 말해, 책의 결론은 쓸쓸하다. 이상향에 대한 꿈 따위는 깨라고. 현실이 웅변하고 있지않은가. 베를린 장벽과 더불어 공산주의의 준거틀이 무너지자, 유토피아에 대해 유효하게 남은 것이라곤 미래에 대한 기억뿐이다. 궁지에 몰린 ‘최후의 인디언 부족’과 같은 운명에 놓인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곤 새로운 혁명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미국의 강고한 패권주의에 내몰려 역사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만 같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조차도 끝인가.
그 출발은 당연히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다. 일체의 사유 재산과 화폐를 부정하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은 17, 18세기 계몽주의와 결합해 카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같은 평등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작품으로 계승된다. 감성적 차원의 초기 유토피아론들은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실천적 강령을 갖춰 간다. 평등 아니면 죽음도 불사한다며 기득권에 대해 총칼을 든 그라쿠스 바뵈프에 의해 도구화ㆍ합리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이어 생시몽 등 19세기의 선구적 공산주의 또는 무정부적 신질서론으로 모양새를 갖춰 나간다.
현실 사회의 원리와 공동체의 원리 중 어떤 것을 채택할지, 그들의 후예는 부단히 고민해 오고 있다. 폐쇄적 상업 국가가 될지, 사유 재산과 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사랑과 노동은 모든 이해와 도덕 관계에서 해방되는 사회가 될지, 도대체 어떤 공동체적 사회의 모습을 취할지 그들은 현실 사회 질서에 대한 뜨거운 반명제들을 생산해 왔다. 그 열망은 오늘날에도 엄존한다. 프롤레타리아 없는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과 생활 수준을 향유해야 한다는 주장, 노동에서 해방된 유목민적 생활에의 강조, 나아가 모든 불합리와 억압이 일거에 사라진 ‘가짜 사회’와 그를 위한 어설픈 실험과 정교한 문학 작품 등.
어쨌든 확실한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다.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반파시즘, 반인종차별주의, 반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등 다양한 급진 운동은 유토피아와의 연관 없이는 설명할 길 없다. 또 현재 과학 문명이 일궈낸 가능성도 그에 동참한다. 이데올로기의 틀을 깨고 나온 새로운 전망, 즉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 등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라.
아무 데도 없는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원칙. 공교롭게도 우리 시대가 찾아낸 새 비전은 토머스 모어가 제시했던 저 원칙으로 회귀 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라는 허망한 꿈과 유토피아만이 줄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방대한 공간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모른 척 해오지 않았는지를 책은 묻고 있다. 현실이 가능성 보다 억압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끊임없는 매력이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거지는 대안적 공동체의 비전도 결국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실질적 근거를 두고 있다.(장병욱 기자)

중앙일보(07. 02. 10) 그대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나
현실과는 달리 행복한 세상, 그야말로 꿈같은 사회를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16세기 악덕 귀족의 횡포에 분노한 영국의 '모범 귀족' 토마스 모어가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간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파리10대학(낭테르)의 사회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유토피아라는 매혹적인 개념의 역사와 본질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풍요'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두 열매를 동시에 따먹으려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반영한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인 '인민의 낙원'은 그런 모순 때문에 현실에서 사라졌다.
꿈꾸는 것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 초 논객인 앙드레 고다르는 '형제애로 단결된 유럽이 십자군의 기치 아래 문명과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꿈을 꾸었다. 조국.노동.가족.종교라는 예언자적 구호로 가득 찬 그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의 바탕이 됐다.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구현해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조반니 로시는 '사회적 화학실험실'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농민들에게 사회주의를 주입,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무정부주의자 세바스티앙 포르는 어린이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고 1904년 시골에 교육공동체를 세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54년 빅토르 콩시데랑은 미국 텍사스에 땅을 사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다.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몽상가들은 실현 가능성은 따지지 않으며,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섞어 사람들의 혼동을 유발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의 태반은 새로운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정치시스템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야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뜻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미권이 아닌 프랑스의 학자가 지은 책답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사상들이 상당히 낯설다. 그런 만큼 자극도 신선하다.(채인택 기자)
07. 02. 11.
P.S. 일단 타이틀에서 두 리뷰의 방점이 어디에 놓일지 암시된다. 전자는 역사상 수많은 시도와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매력과 그 희구의 불가피성을 시사한다면, 후자는 그 매력보다는 '실패'에 초점을 둔다. 문제는 두 가지이다. (1)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낳았다. (2)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밖에 없는 나쁜 세상이다. 과연 미덕은 현재의 나쁜 세상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미래의 유토피아, 혹은 '나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것인가.






유토피아란 주제와 관련해서 예전에 읽은 책은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 1999)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이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와 함께 이번에 더 읽어보려고 하는 것은 <유예된 유토피아, 공산주의>(부키, 2005)와 모처럼 나온 국내저작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 2007)이다(후자는 엊그제 주문했다). 중량감 있는 책들은 아니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데에는 얇은 책들이 더 유용할 때가 있다.

참고로,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번에 번역된 <유토피아>의 저자 로세리외는 "파리 10대학(낭테르) 사회학과 교수"이면서 "공산주의와 유토피아 사상 전문가"라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 아마존에서 검색되는 책은 이 책 한권이다. '전문가'가 되는 루트가 따로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