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전혀 고맙지 않은 한주였다(*이 글은 2003년 3월 중순에 씌어졌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서점을 순례하는 것은 짧은 앞치마로 쏟아지는 선물들을 받아야 하는 일만큼이나 곤욕이다. 혹은 손바닥으로 물을 움켜쥐는 일만큼이나 신나면서도 허전한 일... 요즘은 로또에 대해서 차츰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하여간에 쏟아진 책들 가운데, 일간지 리뷰에서 크게 다루지 않은 책들을 중심으로, 그럼에도 나의 눈길을 끈 책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일종의 독전감(讀前感)이다.

 

 

 

 

가장 먼저 순위에 올려놓고 싶은 책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벨러(1928-1997)는 니체 전문가인데, 독일 관념론 철학에 대한 연구서들을 갖고 있고, 슐레겔 전집의 편집자 및 국제적 학술지 <니체 슈투디엔(니체 연구)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번 그의 책은 얇지만 독일학계에서 나온 데리다론 가운데 손꼽히는 저작이고, 영역본(Confrontations: Derrida, Heidegger, Nietzsche)도 나와 있다.

한국어/독어본 제목에는 빠져 있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니체와 데리다의 대결이 아니라 니체를 사이에 둔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대결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유명한 니체론에서(1/4이 <니체와 니힐리즘>(철학과현실사)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니체를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규정하는데 반해서, 데리다는 <에쁘롱>(동문선, 1998)을 비롯한 여러 니체 읽기를 통해 오히려 하이데거 자신의 니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독해를 비판하다. 여기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에 대해 맞장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 뜻밖의 번역서는 물론 나를 즐겁게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번역 수준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데리다를 다룬 책들 가운데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이후 나를 감동시킨 유일한 번역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부실한 번역에 대한 지적/비판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정작 좋은 버역에 대한 격려는 드물다는 지적도 없지 않은데, 이 자리에서 인심을 좀 쓰자면, '정말 좋은 번역'이다. 역자의 이름은 박민수인데, 연대 독문과를 나오고 현재는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같은 역자가 번역한 볼프강 벨쉬의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1,2>(책세상, 2001)도 거금을 주고 사버렸다...

 

 

 

 

이런 좋은 번역을 빛내주기 위해서 조야한 번역 두 가지도 적어둔다. 역시 독일 학자 H. 키멜레의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는 저자의 수준도 기대에 못미치지만 역자의 이해 수준은 한술 더뜬다. 그리고 또 만프레드 프랑크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문예마당, 1996). 연대 독문과 출신들의 공역인 이 책은 정말 '읽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아주 조야한 수준의 번역서인데,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1.2>(인간사랑)의 번역도 기대에 못 미치는 걸 보면, 한국어 프랑크는 좀 불운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책세상에서 나온 <현대의 조건>(2002) 정도가 체면을 지켜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 역사> 제3권(동문서). 4권짜리로 완갈될 이 책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바로 다음달인 4월에 제4권이 출간됐었다! 참고로 영역본은 2권짜리이다). 역자는 제2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웅권. 한때 신뢰했던 번역자에 대해서 지난 제2권 때문에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었는데, 이번에 만회가 될지 궁금하다. 68년을 전후로 한 프랑스 지성사의 현장을 역사학자 도스는 마치 CNN기자처럼 추적해 들어가는데, 읽은 소감은 나중에 다시 적기로 한다(*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부분적으로만 읽었다. 구입하는 건 '모험'으로 여겨졌기에).

동문선에서 나온 또다른 신간은 데이비드 혹스의 <이데올로기>이다(*이미지도 뜨지 않는 이 책은 번역이 미덥지 못하다. 지젝에 관한 짦은 절만 하더라도 오역이 속출한다). 이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평용어' 시리즈의 한권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으로는 폴 해밀튼의 <역사주의>(동문선, 1998)와 앤터니 이스트호프의 <무의식>(한나래, 2000), 조셉 브리스토우의 <섹슈얼리티>(한나래, 2000)가 있다. 이 시리즈에서 번역되었으면 하는 책은 그레이엄 앨런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uality>(2000)이다.



 

 

 

존 롤즈의 <정의론>(이학사)의 개정판이 번역돼 나왔다. 윤리학 분야에서 지난 세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의 한권인데, 역자는 초판을 번역한 황경식 교수. 앞부분의 이론 파트가 주로 개정된 부분이라고 한다. 황교수의 다른 책들은 아마 오래 기억될 듯싶지 않지만, 이 번역만큼은 고전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롤즈의 이름이 기억되는 한.

 

 

 



19세기 러시아 비평의 대명사 비사리온 벨린스키(1811-1848)의 선집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1840년대의 벨린스키의 지명도는 비유하자면, 우리문학의 경우 1930년대의 임화에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요즘 다시 드는 생각은 1960년대 이후의 '리얼리즘론'의 대표자 백낙청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학술진흥재단의 번역지원총서의 하나인데, 러시아문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리얼리즘 비평에 관심을 둔 문학도들에겐 아주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궁정사회>도 역시 한길사에서 나왔다. 엘리아스는 이미 <문명화과정1.2>, <죽어가는 자의 고독>의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덧붙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소화)도 번역돼 나왔다. <문명론의 개략> <학문의 향기>(학문을 권함)와 더불어 그의 3대 저작이라고 한다. 최근 <문명론의 개략>이 자주 언급되고는 있지만, 일본 사상가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지식이랄 것도 없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소개를 기대한다.(*올 봄에 나온 유키치의 자서전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문명론의 개략>이 왜 (재)번역돼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도 별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자크 퐁타니유의 <기호학과 문학>(이대출판부)이 번역돼 나왔다(원저는 1999년작).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퐁타니유는 프랑스 기호학의 거두 그레마스(1917-1992)의 수제자로서 스승의 뒤를 이어 파리 기호학파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기호학자이다. 역자에 의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작가와 작품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방법론을 개발하고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담화'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어쨌든 그레마스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교양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레마스 계보의 기호학에 대한 배경 지식을 먼저 챙긴 다음에 읽어볼 만한 책이다(*아래는 노년의 그레마스).

참고로, 그레마스의 책은 <의미에 관하여>(인간사랑, 1997)이 김성도의 교수의 번역으로 나와 있고, 역시 김교수의 연구서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대출판부, 2002)가 해설로서 자세하다. 연구서의 제목에서도 잠깐 비치지만, 내가 정말 고대하는 책은 그레마스/퐁타니유 공저의 <정념의 기호학>이다(*나는 불어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이 또한 왜 번역되지 않는지 궁금한 책이다. 하긴 <구조의미론>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형편이니!).

참고로, 그레마스와 파리기호학파에 대한 입문서로는 안느 에노의 <기호학으로의 초대>(만남, 1997)와 <기호학사>(한길사, 2000)이 적당하다. 그레마스 학파의 담화분석에 대해서는 J. 꾸르떼의 <기호학 입문>(신아사, 1986)이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은 입문이라고 돼 있지만, 이 역시 교양서 수준은 아니다.

 

 

 



번역소설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1-5>(현대정보문화사)을 빼놓을 수 없겠다(*헉, 7월까지 완간된 걸 보니 10권이다!). SF매니아나 애독자들에겐 필독서. 러시아 태생의 다재다능한 작가 아시모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건 그의 자서전뿐인데, <아이작 아시모프 자서전1.2>(작가정신, 1995)는 재미로만 치자면 손에 꼽을 만한 자서전이다(입담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한가지 단점은 얘기가 중간에 끝난다는 것. 나는 그게 좀 수상해서 출판사에 문의까지 해봤는데, 원저가 그런 식으로 끝난다고 한다.

하여간에 이 자서전이 절판된 것은 좀 아쉽다. 그렇게 절판된 자서전들 가운데 또 기억나는 것은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인 동물학자 데즈몬드 모리스의 <옷을 입은 원숭이>(샘터사)이다.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됐지만(*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석희씨의 번역이고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모리스의 책들이 대부분 출간된 거에 견주면, 이미 번역돼 있는 그의 자서전이 '묵혀'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다른 번역소설로는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현대문학)에 눈길을 줄 만하다. 저자는 캐나다의 최대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교사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고전 번역으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성>(서울대출판부)이 이유선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솔출판사의 전집 번역 중 <성>에 대해서 불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번역은 그런 불만의 소리를 잠재워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중국작가 모옌의 <술의 나라1.2>가 책세상에서 번역돼 나왔다. 모옌은 장이모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 우리 고전소설 <구운몽>도 책세상과 민음사에서 나란히 다시 나왔다. 김병국 교수의 역주본(시인사, 1984)으로 읽은 지가 16년이나 되었는데, 다시 손에 들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어린이용 책으로 로만 카차노프의 러시아 그림책 <체브라시카>(엔북)가 출간됐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이 만화 캐릭터가 원숭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래서 고민하다가 악어 철학자 게나와 전직 KGB스파이였던 할머니 사포클란과 함께 자기발견의 여정을 떠나는 걸로 첫권은 마무리된다. 이 만화는 5월중에 극장에서 개봉될 예정이라고도 한다(*정말 개봉됐었나?).

 

 

 



아마도 지난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번역서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아랍, 이슬람, 문명>(까치글방)일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에서 크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이름만을 적어둔다. 이븐 할둔의 책으론 <이슬람사상>(삼성출판사, 1990)이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중앙아시아사 전공자로서 계속해서 무게 있는 저작과 번역서를 내고 있는 김호동 교수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제몫을 하고 있는 학자/교수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과 격려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때 관심과 격려란 다른 게 아니라 책을 사는 것이다. "나는 꼭 읽을 책만 산다"는 건 야만인들의 신조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동 교수의 책을 장서용으로 사두기를 권한다(10-11권 정도 되는 듯하다). 아울러 여유가 있으면 정수일 교수의 책들도(7-8권 정도 된다). 돈이 없는 나는 두고두고 사겠다...

얘기가 너무 길어진 듯하다(*이맘때만 해도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5권 정도를 꼽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난주에 나온 국내 저작에 대해서는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덧붙임: 역시 AS이다. 지난번에 언급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에 대한 가장 좋은 서평은 고병권의 것(한겨레, 3월 15일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신은 실존하는 모든 것들과 표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만물은 신의 표현이며, 신은 만물을 통해 구성된다. 표현된 것은 신의 능력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 즉 신의 무능력을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되지 않은 세계, 표현되지 않은 관념을 추방하는 것. 모든 초월성을 거부하고, 내재성을 '이 세계'의 원리로 받아들이며, '이 세계'의 모든 생성을 축복하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원고지 한장의 요약으로서 탁월하다. 아울러 왜 이 내재성이 알튀세르의 마음을 끌었을까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초월성에 대한 거부로서의 유물론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그런 초월성의 거부자들이 아니라 열렬한 옹호자들이다. 매일 아침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한다는 부시 같은. 더불어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2003. 0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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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10 23:2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들리세요? 로쟈님 페이퍼 볼때마다 보관함에 책 들어가는 소리가.

로쟈 2006-05-10 23:38   좋아요 0 | URL
이건 다 '지나간' 책들인데요. 보관함에 얼마간 넣어두셨다가 삭제하시면 됩니다.^^

瑚璉 2006-05-11 12:30   좋아요 0 | URL
정의론이 또 나왔습니까? 또 사야 하나(-.-;).

로쟈 2006-05-11 12:48   좋아요 0 | URL
재재작년 얘기인데요...

瑚璉 2006-05-11 15:13   좋아요 0 | URL
"존 롤즈의 <정의론>(이학사)의 개정판이 번역돼 나왔다." 를 "표지는 그대로 두고 새로 번역을 개정하여 나왔다"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런지.

열매 2006-05-11 17:38   좋아요 0 | URL
이번주에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선집과도 관련된 것인데요. 왜 저작권까지 새로 산 새 번역판(또는 개역판)을 낼 때 기존의 역자들을 고집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의론> 역시 구입할 때 대여섯군데 비교해보니 구판본과의 차이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번역의 질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런 책을 사려니 옛구판본의 싼 가격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같은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전문가들이 번역한다면 새로운 판본을 하나더 가질 수 있을텐데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위의 후쿠자와의 책 중 <학문의 권장>과 <학문의 향기>는 같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만 바꿔 출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率路 2006-05-11 22:46   좋아요 0 | URL
아아악~ 키멜레의 데리다 읽다말았는데 이젠 환불도 안되고 언제 읽을지 기약도 엄꼬...ㅠㅠ 초보자가 읽을만한 데리다는 뭐가 있을까나요??ㅠㅠ(이렇게 유령독자 신고합니다ㅋㅋㅋ)

로쟈 2006-05-12 09:06   좋아요 0 | URL
iami7725님/ <정의론>의 역자는 전공자인데다가 번역에 큰 흠이 없다면 따로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겠죠(가격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후쿠자와의 책들은 그냥 나와 있는 번역본들의 이미지를 모두 올려놓은 겁니다...

분신사바스님/ 만화책 <데리다가>가 물론 가장 쉬운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 국내 필자들의 <데리다 읽기> 정도가 어떨까 싶네요. '생초보'라면 어느 책이든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분량이 얇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봄인 듯하더니 여름날씨로 직행하는 듯하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기엔 좀 후덥지근한 날에 별다른 즐거움이 있을 리 없어 틈틈이 책이나 몇 권 꼽아보기로 한다.  

 

 

 

 

주저없이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다.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표지에는 박혀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웬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우리에겐 그런 도서상이 있는가?). 한데, 분야가 흥미롭다.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단 하나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화두로 한 인물평전인 것이다. 감으로는 프래그머티즘 입문서로서뿐만 아니라 아예 미국학 입문서로서도 적격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짐작에, 루이스 메넌드는 <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 2001)의 저자 루이스 매난드와 동일인이지 싶다(박스보관 도서라 바로 확인은 안되지만). 아무려나 나란히 '길잡이' 삼아 읽으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원서의 표지.

소개를 잠시 옮겨온다: "미국을 지금까지 유지시켜온 철학적 근간은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즉 실용주의 철학이다. 이 책은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 네 명의 학자를 추적한다. 법률가 올리버 웬들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논리학자이자 과학자이며 기호학의 창시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도 지명도 순으로 재배열한다면, 듀이-제임스-퍼스-홈스 순이 될 듯하다. 국내에 번역/소개된 책들도 그러한 순서를 따르는데, 이번에 출간된 퍼스의 선집을 제외하면 퍼스와 홈스의 책은 아예 소개된 바 없다. 듀이의 경우에도 교육학 관련서 몇 권과 <경험으로서의 예술> 발췌본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는 정도. 친미니 반미니 해서 논란이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미국에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 거 같다. 이번에 나온 <메타피지컬 클럽>이 그러한 무관심을 얼마간 만회해줄 것인지?

조금 더 옮겨온다: "제목인 '메타피지컬 클럽'은 1872년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이 네 사람이 서로 교류하면서 주축이 되어 만든 토론 모임의 이름. 이 책은 미국 지성사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네 학자의 삶을 다룬 전기이자, 이들이 활동한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100여년 간을 담은 지성사이다. 또한 이들 학자들이 형성한 미국 정신의 근간인 프래그머티즘의 기원에 대한 입문서로 읽을 수도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전체적으로는 네 주인공의 삶을 순차적으로 묘사하면서 전쟁과 정치, 과학과 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종교와 교육, 실재의 법 재판, 인종문제와 노동운동 등 개별적인 주제들을 정교하게 짜맞췄다. 또한 오랜 기간 수집한 1차 사료를 통해 이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주고, 챈시 라이트, 루이 아가시를 비롯한 이들 주변의 19세기 후반 미국의 대표적인 지성들과 유명인사들을 충실히 묘사했다." 이만한 수준의 현대 한국지성사나 러시아지성사도 읽어보는 게 나의 희망사항이다. 과문한 탓에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메타피지컬 클럽>의 한 꼭지인 찰스 샌더스 퍼스 선집 <퍼스의 기호사상>(민음사, 2006).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스위스의 기호학자 소쉬르와 함께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퍼스는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로 자리매김되는 인물이다(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또한 퍼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칼 오토-아펠이나 하버마스 같은 독일 철학자들도). 하지만, 그 지명도나 위상에 비하면 그간에 기이할 정도로 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물론 관련 논문들은 드물지 않다), 이번에 체면 치레할 정도의 책이 출간된 것. 소개를 읽어본다.  

"한국 인문학계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찰스 샌더스 퍼스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이자, 기호학자이다. 이 책은 소쉬르와 함께 기호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의 수학, 화학, 심리학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사상 가운데서 기호론과 현상론과 관련된 글들을 뽑아 한국 기호학의 권위자 김성도 교수의 손으로 편역한 것."

편제는 "총 4개의 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현상론과 관련된 단락으로 그의 유명한 삼범주론을 주로 다룬다. 2장은 세미오시스 및 해석체 개념, 기호의 삼분법 등을 다루는 퍼스의 기호이론을 소개했으며, 3장에서는 감각론과 지각 이론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4장에서는 웰비 여사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서 기호 이론과 관련된 부분들을 모았다. 부록으로는 퍼스의 초기 논문 가운데 기호학 및 인식론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논문이라고 파악된 두 편의 논문을 실었다. 또한 60여 쪽에 달하는 편역자의 해제를 덧붙여, 퍼스 연구의 불모지와 같은 한국에서 퍼스 사상의 핵심과 중요성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단, 훑어보면서 느낀 아쉬움은 원전의 출처가 대략적으로만 기재돼 있는 것. 그러니까 원문과 대조해서 읽으려고 할 경우엔 손품을 좀 팔아야 하게 생겼다. '고전'의 경우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기된 대역본 체제를 나는 선호하는데, 현재의 출판여건은 그러한 체제를 아직 기피하는 듯하다.  

 

 

 

 

세번째 책은 새롭게 기획된 비트겐슈타인 선집으로 나온 책 두 권이다. 일단은 기존에 번역됐던 주저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가 책세상에서 출간됐다. 이미 이 책들이 절판된 시점인지라 새로운 선집판은 반가움을 던져둔다. 기존의 번역은 손질한 듯한데, 표지가 통일돼 있는 것이 우선은 마음에 든다.

중복을 피해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로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를 꼽아보자면, 초급자에겐 <30분에 읽은 비트겐슈타인>(랜덤하우스중앙, 2004)가 가장 적합하겠고, 중급자는 박병철 교수의 <비트겐슈타인>(이룸, 2003)부터 시작하시면 되겠다. 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책으로는 남경희 교수의 <비트겐슈타인과 현대철학의 언어적 전회>(이대출판부, 2005)가 있다.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스티븐 툴민 등이 쓴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2005)이다.  

 
 
 
 
 
 
 

네번째 책은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신간 <신화, 꿈, 신비>(도서출판 숲, 2006)이다. 이미 <세계종교사상사>(이학사)까지 출간된 마당이기에 엘리아데는 '마무리' 모드로 진입한 게 아닌가랑 생각이 든다. 새롭게 출간되는 책들이 모두 '부록'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없다. 소개에 따르면, "엘리아데의 주요 저작 중 하나"로서, "지은이가 1948년에서 1955년 사이에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12편을 9편의 글로 간추려 엮은 것으로, 엘리아데 종교학의 진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연초에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문학동네, 2006)이 출간된 바 있는데, 이론적인 성격을 많이 탈색하고 있어서 일반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영원회귀의 신화>(이학사, 2003),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문학동네, 1999), <이미지와 상징>(까치글방, 1998) 등이 그런 범주에 드는 책들이 아닐까 싶고. 물론 엘리아데와 초면인 분이라면, (여러 번 언급한 듯한데) 정진홍 교수의 (살림, 2003)를 먼저 읽는 게 좋겠다. 

 

 

 

 

다섯번째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자서전 <영혼의 일기>(거송미디어, 2006)이다. 사실 <영혼의 자서전>(고려원, 1981)이 이미 출간됐었지만, 절판된 상태인지라 부득이 (분량상으론) 다소 부실해 보이지만 이 책을 꼽는다. 하긴 내가 읽었던 <영혼으로 서리라>(청하, 1989)도 두꺼운 분량은 아니었지만,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현재 읽어볼 수 있는 카잔차키스의 책으론 <그리스인 조르바> 정도인 듯하며, 중국과 일본 여행기 <천상의 두 나라>(예담, 2002)가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의 원작자가 카잔차키스란 것도 상식으로 알아두어야겠다.

그리스가 낳은 최고의 작가(혹은 철학자)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카잔차키스는 적어도 크레타 섬이 낳은 최고의 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책은 그의 영혼의 편력/투쟁을 기록한다. 사전에 알아둘 만한 내용을 옮겨온다.

-1885년 크레타 섬 이라클레이온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터키의 지배 아래 어린시절을 보내며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그는 자유와 자기 해방을 얻기 위한 3단계 투쟁을 계획하였다. 1단계 투쟁은 압제자 터키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는 크레타가 해방을 맞는 순간 2단계 투쟁으로 발전했다. 즉, 인간 내부의 무지, 악의, 공포 같은 모든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3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다.

-이처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영향을 고루 받았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 호메로스에 뿌리를 둔 그는 1902년 아테네의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났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업적은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는다.

-1908년 파리로 건너간 카잔차키스는, 경화된 메카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려 한 앙리 베르그송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초인'으로서 완성될 것을 주장한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자는 불교의 사상은 그의 3단계 투쟁 중 마지막 단계를 성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아래 스틸사진은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의 한 장면. 앤소니 퀸이 조르바로 열연했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다른 작품들로는 <오뒷세이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성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동족 상잔> 등이 있다.(*아래 사진은 그의 묘지.)

 

해서, 카잔차키스와 한 계절을 나보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가지 방법으로 나쁘지 않을 듯하다...

06. 05. 09-10.

P.S. 참고로, <메타피지컬 클럽>에 대한 한겨레신문(06. 05. 12)의 리뷰를 일부 옮겨온다. 작성자는 한승동 기자이다.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펴냄)은 이 윌리엄 제임스와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논리학자이자 과학자이며 기호학 창시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 철학자요 교육학자인 존 듀이 등 남북전쟁 이후 반세기의 미국 지성사를 지배한 네 거인 얘기를 중심으로 미국현대사를 재구성한다. 다양한 이력과 철학의 소유자인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는 그들이 실용주의로도 번역되는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들이라는 점이다. 부제도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단 하나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의 철학적 논의를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해석작업’이다. 따라서 딱딱하지 않다. 그들 4명에 관한 전기적 서술형식을 취하면서도 그들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 등 풍성한 가족 얘기,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에머슨, 다윈, 아가시 등 당대의 숱한 유·무명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 사람얘기를 중심으로 전쟁과 정치, 과학과 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종교와 교육, 법, 인종문제, 노동운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매우 구체적인 실증자료들을 토대로 정교하게 엮어 흥미진진하게 당대사정을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

-‘메타피지컬 클럽’이란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윌리엄 제임스 서재에 모이곤 했던 젊은 지식인들, 말하자면 이 책의 주인공들이 자신들 모임에 “반은 비꼬는 의미로, 또 반은 반항적인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1872년 1월에 결성됐고 퍼스, 홈스 외에 세인트 존 그린, 존 피스크, 첸시 라이트, 프랜시스 엘링우드 애벗 등이 멤버였다. (물론 인종차별주의자 애거시 등 기성 가치의 대변자들은 이 클럽 멤버가 아니었으며, 제임스는 애거시의 과학학교 제자였으나 그의 사상적 후예는 아니었다.) 9개월 정도밖에 존속하지 않았지만 미국사를 바꿔놓은 프래그머티즘의 산실이었다.

-모든 것은 남북전쟁(1861~65년)에서 시작됐다. 신무기와 전술 교체기에 일어나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던 그 전쟁 뒤 연방체제는 살아남았으나 미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나라가 됐다.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흔을 남기는 전쟁들이 그렇듯 남북전쟁도 그 시대의 신념과 가설들을 의심하게 했다. 신념들은 미국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들은 전후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 남북전쟁은 남부에서 노예제 문명을 쓸어버렸지만 그와 함께 북부의 지적 문화 거의 전부가 쓸려나갔다. 미국이 그 문명을 대체할 문화를 계발하고, 사상들을 찾아내고, 사고방식을 확립하는 데에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그 발버둥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듀이 등 네 사람은 그 발버둥의 중심에 있었고 그들이 새로 짜낸 사상은 교육, 민주주의, 자유, 정의, 관용에 관한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다. 그들의 프래그머티즘은 관념적 진리 추구에 매달려온 유럽철학 전통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인간 이성의 상대성·우연성·오류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우리가 전적으로 어떤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진리들이 사실일 가능성은 항상 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 사실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보여주었던 관용에서 기인한다. 양자택일은 폭력이다, 프래그머티즘은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2차대전 뒤 양자택일식 냉전 이데올로기가 판치면서 빛을 잃었던 프래그머티즘은 냉전 붕괴와 함께 적어도 반대입장을 경청하는 관용과 다양성 측면에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네오콘 등장, 테러와의 전쟁이 상징하는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우리 편 아니면 적’식의 패권전략추구와 더불어 빛은 다시 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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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0 09:15   좋아요 0 | URL
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서광사 판에서 손질된 게 있을까요? 서광사 판을 가지고 있는데 수정된 게 있다면 또 사야하는지...쩝...역자는 같은데 말이죠.

로쟈 2006-05-10 09:56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의 실물은 보지 못한지라 당여히 대조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완전 개역본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전 판본들이 절판된 상태이기 때문에 반갑다는 것이고, 제가 기대하는 건 이전에 출간되지 않았던 책들입니다...

비로그인 2006-05-10 22:58   좋아요 0 | URL
근데 비트겐슈타인 입문서 박병철 교수 것 원츄입니다.=.= =b
제가 처음으로 읽은 철학책인데. 2번 읽고서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얇으면서도 아주 좋아요.

근데 루이스 메넌드는 토마스 쿤과 관련이 있는 그 하버드대 총장 역임한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요?

로쟈 2006-05-10 23:20   좋아요 0 | URL
이력에서 '하버드 총장' 얘기는 안 보이던데요... 2003년부터 하바드에서 재직중이긴 합니다. 책갈피와 알라딘에서 '뉴욕시립대학교' 교수라는 소개는 한물간 정보네요. 인터넷 검색에 10초만 투자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인데...

yoonta 2006-05-10 23:32   좋아요 0 | URL
철학적 탐구 서점에서 얼핏 봤는데 잘못된 곳 바로잡았다고 하더군요. 껍데기만 바꾼 책은 아닌듯 합니다.

yoonta 2006-05-11 02:53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 관련책 중에서는..

 

 

 

 

요 책이 아주 좋은 것 같더군요..평전이기도 하면서 그의 철학과 그 변화과정을 잘 살펴볼수있는 책입니다..

 초,중,고급 독자 모두에게 유용할듯 합니다.


로쟈 2006-05-11 09:0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중에 저도 자주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생략했습니다.^^

루들 2006-05-11 16:00   좋아요 0 | URL
쿤과 관련 있는 하버드대 총장은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최근에 눈길을 끈 외신 기사 두 건을 옮겨놓는다. 나중에 글감이 될 만하겠기에 일단은 '자료'로서 보관해놓고자 하는 것인데, 주제는 '남성'이다. 두 기사 모두 한국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첫번째 기사는 '남성 피임약 세계 첫 개발'이란 제목이고, '슈퍼 정자'를 다룬 두번째 기사는 "아빠는 큰 키…푸른 눈…만능 스포츠맨…박사"란 제목이다.

 

 

 

 

한국일보(06. 05. 01) 정자 생산을 중단 시키는 남성 피임약이 세계 최초로 개발된다. 세계적인 의학전문지 란셋(Lancet)은 최신호(28일자)에서 호주와 유럽 14개 지역 등에서 1990~2005년 18~51세 남성 1,500명을 대상으로 30차례 실시한 임상시험 결과,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트로겐을 함유한 남성 피임약이 100%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독일 쉐링과 네덜란드 오가논 제약사가 개발한 이 피임약은 향후 3~5년 내에 세계 최초로 시판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호르몬제 남성 피임약은 여성용 피임약이 배란을 중지시키는 것처럼 정자 생산을 중단시켜 피임효과를 거둔다. 제약사들은 몸에 심는 임플란트와 먹는 약 등 2가지 형태로 만들어 시험해 왔다. 이 남성 피임약은 성욕감퇴 체중증가 우울증 등의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일부 임상시험자는 오히려 성욕이 증가했다. 남성 피임약 사용을 중단하면 3~4개월 뒤에는 정자 생산 능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연구 책임자인 호주 시드니대 피터 리우 박사는 “이 남성 피임약은 신뢰성이 높고 복원이 용이하기 때문에 콘돔이나 정관수술 등 기존 남성 피임법보다 더 우수하다”고 말했다.

(*)여성 피임약의 개발이 원하지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프리섹스'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여성의 자기결정권 향상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피임의 책임은 상당 부분 여성에게만 전가해온 것도 사실이다(더불어 '구멍난 콘돔'의 공포도 여전히 연인들을 부자유스럽게 했었다). 이제, 번거로운 수술 대신에 사용이 간편한 먹는 피임약이 상용화된다면, '피임'에 대한 책임은 남녀가 공평하게 나누어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남성 피임약은 남녀평등이라는 '의식'의 한 가지 물적 토대가 되어주는 것. 상상임신은 가능하지만, 상상피임은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피임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이 바뀌어야 '관념'도 바뀌게 된다(혹은 현실은 관념의 변화를 강제한다).   

한국일보(06. 05. 08) 몇 차례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실패한 미국 여성 멜리사 와이스(39)는 며칠 전 인터넷에 ‘물건’을 내놓았다. 6년 전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정자은행에서 3,000달러를 주고 산 ‘401호 정자’ 세트였다. 인공 수정이 실패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내놓았는데 순식간에 팔렸다. 뒤늦게 ‘돈을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남은 것이 없느냐’는 간청도 쏟아졌다. 와이스가 내놓은 401호 정자는 ‘슈퍼 정자’라 불리는 최고품이었다. 수요가 너무 많아 이미 2년 전 동난 것이었다.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거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정자로 수정하는 ‘맞춤형 수정’이 늘면서 이처럼 일부 품질 좋은 정자는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401호 정자를 제공한 주인공에 대한 관심도 가히 폭발적이다. 정확한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계로 193cm의 큰 키에 푸른 눈과 갈색 곱슬머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 학위에다 만능 스포츠맨이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제공받아 태어난 아이가 매년 3만명이 넘었고 특히 같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갈수록 늘고 있다. 401호 정자로 25명이 태어났고 한 보디빌더의 정자로도 같은 수가 탄생했다. 언론은 401호 정자 제공자를 추적하는 한편 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401호 정자로 태어난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 이들을 비교하는 기사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401호 정자를 통해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받은 여성과 제공받은 정자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사이트에서 육아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 직접 만나 휴일이나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이들 역시 정자 제공자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사생활을 보호 받고 싶다’는 정자 제공자의 바람대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근친상간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영국은 법으로 같은 정자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여성 수를 10명으로 제한했지만 미국은 개별 정자은행 자율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고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린 것은 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1995)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안토니아는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찾아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을에 정착해 어머니의 오래된 농장을 운영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독립적인 여성,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모녀 4대가 엮어가는 삶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나가는 가족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인 이 영화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구하러(실상은 '정자를 구하러') 다니던 모녀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 것.

 

 

 

 

정자은행은 이제 그런 '수고'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만들어놓았다. 더불어, 일부일처제의 근간도 미래에는 위협받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자로 25명의 아이들을 낳는다면, 유전자적 관점에서는 이미 '일부다처제'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큰 키…푸른 눈…만능 스포츠맨…박사"의 정자(유전자)가 선호된다면, 그보다 열등한 남성의 정자는 피임은커녕 갈수록 짝을 찾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슈퍼 정자의 시대', 그건 역설적으로 남성이 '제2의 성'으로 확실하게 전락하는 시대를 뜻하게 될는지?..

06.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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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5-0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공공연한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난자 불법거래가 있잖아요. 공부 잘 하는 이쁜 여대생 난자가 극히 선호되죠. 쩝.

2006-05-09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5-0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끌리는 제목이군요. 저도 한국일보서 그 기사 봤어요. ^^

로쟈 2006-05-0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관련 분야에 계신가요?^^
아프락사스님/ 뭔가 쓰고 싶도록 만드는 기사였습니다. 한데, 이 페이퍼는 (당장에는) '쓰지 않기 위해서' 올려놓은 것이긴 합니다.^^

조선인 2006-05-1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관련 분야가 아니라요, 여대 나왔거든요. 사례를 좀 알죠.-.-;;
 

뜻밖의 신간을 만나는 반가움의 반대편에는 없는 돈을 축내지 않아도 좋은 고마움이 있다(*이 글은 2003년 3월초에 씌어졌다).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바로 반가움이거나 고마움이다. 지난 두주 동안에도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요즘 출판계를 불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행히도 눈길을 끄는 책은 많지 않았다. 반가움보다는 고마움이 더 앞섰던 두주였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책들 몇 권을 적어본다.

 

  

 



맨처음에 소개하고 싶은 책은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이다. 영화잡지 <프리미어>팀이 옮겼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에버트는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평론가이다. 나는 인터넷상에서 러시아 영화에 관한 그의 기사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의 글들은 모아놓으면 더 힘을 발휘하는 거 같다(이와 반대되는 저자들도 많다). 추천사를 쓴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말을 빌면, "젠체하지 않고 냉소적이지 않으며 무한한 애정으로 영화를 껴안으면서 정확하게 분석적 거리를 유지하는 평문"들을 그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들뢰즈, 라캉을 들먹여야지만 영화평론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특집도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이었다. 그중 기자들이 비교적 길게 리뷰를 쓴 책들은 10권인데, 참고로 그 목록을 적어둔다. <채플린-거장의 생애와 예술>(한길아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길>(민음사),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시공사), <데즈카 오사무- 만화가의 길>(황금가지),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시공사),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올리버 스톤1,2>(컬쳐라인), <로저코먼-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열린책들), <펠리니>(한길사), <마틴 스코시즈- 비열한 거리>(한나래) 등이다.

나는 이 열권 중에 <감독의 길>(구로자와 아키라)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펠리니>는 그냥 갖고 있으며, <히치콕과의 대화>는 분실했다(조감독하는 동생 친구가 가져가버렸다, 필시). 해서 한때 영화평론에도 생각이 없지 않았던 자신이 다소 부끄러워졌다. 물론 영화관련서들을 몇십 권 갖고 있지만, 그래봐야 최소한 읽을 책의 3할이 못되는 책인 것. 하물며, 봐야할 영화들은 또 얼마나 봤을까?.. 참고로, 아주 최근에 영어로 된 러시아 영화 소개서 한권이 나왔다. 저자는 D. Gillespie이고 책제목은 'Russian Cinema'이다. 200쪽이 안되는 비교적 얇은 분량이다.

 

 

 

 

노마디스트들에겐 반가운 소식으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이 번역돼 나왔다(*내가 아직까지 번역서를 안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들뢰즈 책이 아닌가 싶다. 번역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평을 얻고 있지 못한 책이다).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 책은 두 권인데, <표현의 문제>는 그 중 두꺼운 책이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몇 차례 청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부교재의 한권이었고, 나는 그 영역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도중하차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나 비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의 철학사상>(갈무리) 정도를 참고해봐야겠다(*하트의 책은 <들뢰즈 사상의 진화>로 재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또 한권의 철학책. '이달의 철학자' 헤겔의 <믿음과 지식>(아카넷)이 번역돼 나왔다. 서점에 아직 진열되지도 않은 채 쌓여 있는 걸 봤는데, 분량이 그리 두껍지 않다. 헤겔 책을 그래도 남들만큼은 갖고 있는 편이지만, 신간은 전혀 생소하다. 야코비 등의 신학/철학에 대한 비판서인가 싶다. 하지만, 내가 더 바라는 것은 <정신현상학>이 좀더 읽을 만한 수준으로 재번역되는 것이다(*알다시피 이후에 <정신현상학>은 임석진 교수의 번역으로 개정본이 출간됐다. 그것이 '좀더 읽을 만한 수준'인가는 모르겠다. 몇 안되는 서평을 읽어봐도 가늠할 길이 없다).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도 소리소문없이 번역돼 나왔다(원제는 'Bodies that matter'). 쥬디스 버틀러는 낸시 프레이저와 함께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영미권 여성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이다. 페미니즘적 라캉 독해로 우리에겐 알려져 있는 듯한데, 신간은 최초로 번역된 그녀의 단행본 저작이다. <라캉의 재탄생>(창작과비평사, 2002)에 실린 라캉과 버틀러에 관한 장을 참조할 수 있다.



 

 

 

국내 저작으로는 주은우의 <시각과 현대성>(한나래)이 출간됐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손본 것인데,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묵직한 국내 저작이다. 아직 통독하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순 없지만, 학위논문으론 김종엽의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의 현대성 비판 연구>(창작과비평사, 1998)과 함께 가장 궁금했던 책이었다.

 

 

 

 

묵직하기론 <리오리엔트>(이산)도 만만찮다. 종속이론가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신작인데, 나로선 저자의 이름만 얼핏 들어본 적이 있다. 나로선 당분간 읽을 겨를이 없는 이 책에 대해선 중앙일보에 실린 최갑수 교수의 서평을 참조하시길.

 

 

 



영미문학연구회의 고전문학 번역평가 사업이 샘플이 공개됐다. 그 결과는 오늘자 한겨레에 실려 있다. 샘플 작품은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인데, 검토대상이 된 21종 가운데, 14종이 표절번역이었고, 나머지 7종도 거의 읽을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사태는 상당히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영미문학학회지인 <안과 밖>에도 매호 고전 번역을 검토하는 글이 실리는데, 지난호의 경우 도 결론은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을 우리말로는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평가사업의 보고서가 내년초쯤 책으로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봐야겠지만(*2005년에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로 출간됐다), 총체적인 문제의 점검에 이어서 새로운 재번역서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사실 이런 평가사업은 다른 분야의 고전들에도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학진(학술진흥재단)이 제대로 돈을 써야 하는 사업분야는 바로 이런쪽이다.

최근 일간지 북리뷰들에서 비판적인 읽기 코너들이 생겨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지난번에 소개한바 있던 중앙일보의 죽비소리가 그 스타트를 끊은 것인데, 출판계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오역이 많은 걸로 지적된 <루시의 유산>과 <붉은 여왕>의 출판사측에서는 해당책들을 환불조치하거나 개정판과 교환해줄 방침이라고 한다. 언론의 파워가 이런 거구나 싶은데, 하여간에 좀 뻔뻔한 (부실한 지젝 번역서들을 양산하고 있는) 인간사랑을 비롯하여 몇몇 출판사들도 이 참에 각성했으면 싶다. 그리고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고 있으므로 책값의 거품도 좀 빠졌으면 싶고.

가만히 입다물고 있으면 좋은 책들이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악착같은 관심과 비판이 더욱 요긴한 계절인 듯싶다...

2003.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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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h1999 2006-05-09 02:30   좋아요 0 | URL
제 글에 리플 남겨주신 분 맞지요? 글이 굉장히 많네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로쟈 2006-05-09 10:32   좋아요 0 | URL
예, 한 2-3년 되다 보니 많은 축에는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자주 오실 정도는 아니고 가끔 들러주십시오.^^
 

언젠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소개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데,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4)에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음악비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이 또한 옮겨온다. 그의 생일은 9월에 있으므로 가을에야 보다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개최될 듯하지만, 미리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가끔씩 읽어보기로 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대개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옮여오는 식이 될 것이다. 이번 기사는 허영한 한예종 교수가 기고한 것으로 '冷戰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가 그 타이틀이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드미트리히(*'드미트리'가 맞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격변하는 20세기의 세계사와 소련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흥미로운 주인공이다. 조연급이면 피할 수 있었던 비난의 초점이 됐고 그를 사이에 둔 소련과 서방세계의 지속적인 갈등은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쇼스타코비치가 진정으로 소련 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행세를 한 것인지의 문제다. 절묘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작곡가 자신은 아무런 답을 남기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국지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한 수많은 암시를 흘리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5)으로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소련이 최고로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긴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오기 시작한 건 그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 때문이었다(*얼마전 이 오페라의 원작인 레스코프의 <므첸스크군의 멕베스 부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934년에 초연됐던 이 오페라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다시 무대에 오른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러 온 스탈린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사랑받던 오페라가 순식간에 비판의 초점이 됐다. 1936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위기를 넘기게 한 작품이 바로 지금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 제5번이다. 이 교향곡이 1937년에 초연된 그 날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교향곡이 감격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복권된 그는 1938년 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향곡 5번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라고들 하니 매우 기쁘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잘못을 반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치 못한 답변이었다.

 

 

 

-교향곡 5번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악장 피날레는 다소 급격하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급전되면서 활발하고 밝은 분위기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의 급변과 체제 순응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연결지으려한다. 긍정주의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피날레를 만들어 넣어 정부의 비난을 피하려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인위적인 미학적 잣대를 내세워 서방세계의 음악계가 추구하던 모더니즘을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바로 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보다 다소 쉬운 음악적 내용을 지닌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작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음악은 소리라는 추상적 매체를 사용하는 장르여서 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사가 없는 순수 기악음악의 경우 아무리 구체적 내용이 명시된 표제음악이라 하더라도 그 제목과 달리 감상되고 해석되어질 여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작곡가의 직접 언급이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서 작곡가가 직접 이 곡은 강이다, 또는 이 선율은 나무다, 라고 말하지 않는 한 작곡가가 진정으로 담으려고 한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 곡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과 자신의 의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당신들이 이 곡이 이러하다고 하니 나는 기쁘다” 정도에서 멈춘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내용으로만 이해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이러한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은 천박하기까지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의 선율이 등장하는가하면 엄숙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된 ‘운명’ 모티브까지 나온다. 사람들은 이 희한한 조합에서 의미를 찾느라 부산했지만 정작 작곡가는 이 곡의 특별한 내용의 존재를 부인했고 단순히 ‘장난감 가게’와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만 제공했다. 또 한번 그의 알다가도 모를 작품 해설(?)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이번에는 다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전쟁 교향곡인 교향곡 7번은 흥미있는 일화와 함께 순수 기악음악으로도 일정한 구체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나치군이 소련을 침략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군에 지원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지붕을 지키는 소방부대에 편입된다. 소방 모자를 쓰고 지붕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소련의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고 서방 언론에서도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신한 작곡가의 모습을 흥미롭게 다뤘다. 같은 해 8월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남아서 그의 교향곡 7번의 일부를 완성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접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당 지도부는 레닌그라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교향곡 7번에 대해서 작곡자는 긴 내용의 줄거리를 직접 밝히고 있어 그 내용의 해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받는 레닌그라드 도시와 소련 동포를 묘사하는 1악장으로 시작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4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작곡자의 변이었다. 비록 가사는 없지만 작곡자의 설명이 수긍이 가는 음악적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말년에 이 교향곡이 레닌그라드가 포위되기 전에 이미 구상됐고 성경의 94번 시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교향곡에서 전쟁 분위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행진곡 풍의 리듬과 북소리는 전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작곡가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그처럼 극적으로 작곡된 교향곡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 쇼스타코비치가 선보인 첫 작품이 프로그램이 없는 교향곡 10번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24살의 피아노연주자 엘미라 나지로바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 ‘엘미라’로부터 이끌어낸 선율 동기(미-라-미-레-라)와 작곡자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선율 동기(D-Es-C-H/우리말 음이름으로 옮기면 레-미b-도-시)를 서로 얽혀 놓고 있다. 교향곡 10번은 다시 한번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 상황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한 쇼스타코비치는 평소와는 달리 강력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결국 1954년 4월 초에 열린 작곡가 연맹 대회에서 이 불필요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듯이 작곡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며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끝맺는다. 이 교향곡은 어떤 정치적 해석도 어려워 보인다. 극히 사적인 쇼스타코비치만이 존재하며 이 점을 그는 반성해야만 했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체제 순응 작곡가였다면 그의 교향곡은 철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해석되고 그렇지 않다면 부당한 정부의 압력에 대항한 서구식으로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서방세계의 음악관은 철저하게 미학적 자율성을 중시했기에 미학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의 배경은 쇼스타코비치의 진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당시로서는, 또 어쩌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냉전 시대적 대결 구조다. 쇼스타코비치를 소련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과 그를 서방 세계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암투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양면성 중 한 면을 강조하며 자기편으로 유도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 양면을 모두 진정한 쇼스타코비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6. 05. 08.

 

 

 

 

P.S.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게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인데, 국내에는 아직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 2001)밖에 나와 있는 책이 없다(진의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책이다). 유력한 평전(들)이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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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5-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퍼감다^^

로쟈 2006-05-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옮겨오기만 했습니다.^^ 이미지 몇 개 찾아온 것 말고는 수고한 것도 없구요. 한데, 쇼스타코비치의 경우,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모호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는 것과 음악이란 장르 자체가 정치적 매체로서는 좀 비효율적이고 모호하다는 점, 두 가지가 모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자신이 그런 걸 얼마간 의식하면서 줄타기를 했을 수도 있구요. 전공자에 따르면 그는 매우 소심했던 사람으로 자기 의견을 남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