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전혀 고맙지 않은 한주였다(*이 글은 2003년 3월 중순에 씌어졌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서점을 순례하는 것은 짧은 앞치마로 쏟아지는 선물들을 받아야 하는 일만큼이나 곤욕이다. 혹은 손바닥으로 물을 움켜쥐는 일만큼이나 신나면서도 허전한 일... 요즘은 로또에 대해서 차츰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하여간에 쏟아진 책들 가운데, 일간지 리뷰에서 크게 다루지 않은 책들을 중심으로, 그럼에도 나의 눈길을 끈 책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일종의 독전감(讀前感)이다.

 

 

 

 

가장 먼저 순위에 올려놓고 싶은 책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벨러(1928-1997)는 니체 전문가인데, 독일 관념론 철학에 대한 연구서들을 갖고 있고, 슐레겔 전집의 편집자 및 국제적 학술지 <니체 슈투디엔(니체 연구)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번 그의 책은 얇지만 독일학계에서 나온 데리다론 가운데 손꼽히는 저작이고, 영역본(Confrontations: Derrida, Heidegger, Nietzsche)도 나와 있다.

한국어/독어본 제목에는 빠져 있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니체와 데리다의 대결이 아니라 니체를 사이에 둔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대결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유명한 니체론에서(1/4이 <니체와 니힐리즘>(철학과현실사)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니체를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규정하는데 반해서, 데리다는 <에쁘롱>(동문선, 1998)을 비롯한 여러 니체 읽기를 통해 오히려 하이데거 자신의 니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독해를 비판하다. 여기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에 대해 맞장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 뜻밖의 번역서는 물론 나를 즐겁게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번역 수준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데리다를 다룬 책들 가운데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이후 나를 감동시킨 유일한 번역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부실한 번역에 대한 지적/비판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정작 좋은 버역에 대한 격려는 드물다는 지적도 없지 않은데, 이 자리에서 인심을 좀 쓰자면, '정말 좋은 번역'이다. 역자의 이름은 박민수인데, 연대 독문과를 나오고 현재는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같은 역자가 번역한 볼프강 벨쉬의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1,2>(책세상, 2001)도 거금을 주고 사버렸다...

 

 

 

 

이런 좋은 번역을 빛내주기 위해서 조야한 번역 두 가지도 적어둔다. 역시 독일 학자 H. 키멜레의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는 저자의 수준도 기대에 못미치지만 역자의 이해 수준은 한술 더뜬다. 그리고 또 만프레드 프랑크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문예마당, 1996). 연대 독문과 출신들의 공역인 이 책은 정말 '읽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아주 조야한 수준의 번역서인데,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1.2>(인간사랑)의 번역도 기대에 못 미치는 걸 보면, 한국어 프랑크는 좀 불운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책세상에서 나온 <현대의 조건>(2002) 정도가 체면을 지켜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 역사> 제3권(동문서). 4권짜리로 완갈될 이 책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바로 다음달인 4월에 제4권이 출간됐었다! 참고로 영역본은 2권짜리이다). 역자는 제2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웅권. 한때 신뢰했던 번역자에 대해서 지난 제2권 때문에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었는데, 이번에 만회가 될지 궁금하다. 68년을 전후로 한 프랑스 지성사의 현장을 역사학자 도스는 마치 CNN기자처럼 추적해 들어가는데, 읽은 소감은 나중에 다시 적기로 한다(*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부분적으로만 읽었다. 구입하는 건 '모험'으로 여겨졌기에).

동문선에서 나온 또다른 신간은 데이비드 혹스의 <이데올로기>이다(*이미지도 뜨지 않는 이 책은 번역이 미덥지 못하다. 지젝에 관한 짦은 절만 하더라도 오역이 속출한다). 이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평용어' 시리즈의 한권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으로는 폴 해밀튼의 <역사주의>(동문선, 1998)와 앤터니 이스트호프의 <무의식>(한나래, 2000), 조셉 브리스토우의 <섹슈얼리티>(한나래, 2000)가 있다. 이 시리즈에서 번역되었으면 하는 책은 그레이엄 앨런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uality>(2000)이다.



 

 

 

존 롤즈의 <정의론>(이학사)의 개정판이 번역돼 나왔다. 윤리학 분야에서 지난 세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의 한권인데, 역자는 초판을 번역한 황경식 교수. 앞부분의 이론 파트가 주로 개정된 부분이라고 한다. 황교수의 다른 책들은 아마 오래 기억될 듯싶지 않지만, 이 번역만큼은 고전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롤즈의 이름이 기억되는 한.

 

 

 



19세기 러시아 비평의 대명사 비사리온 벨린스키(1811-1848)의 선집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1840년대의 벨린스키의 지명도는 비유하자면, 우리문학의 경우 1930년대의 임화에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요즘 다시 드는 생각은 1960년대 이후의 '리얼리즘론'의 대표자 백낙청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학술진흥재단의 번역지원총서의 하나인데, 러시아문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리얼리즘 비평에 관심을 둔 문학도들에겐 아주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궁정사회>도 역시 한길사에서 나왔다. 엘리아스는 이미 <문명화과정1.2>, <죽어가는 자의 고독>의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덧붙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소화)도 번역돼 나왔다. <문명론의 개략> <학문의 향기>(학문을 권함)와 더불어 그의 3대 저작이라고 한다. 최근 <문명론의 개략>이 자주 언급되고는 있지만, 일본 사상가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지식이랄 것도 없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소개를 기대한다.(*올 봄에 나온 유키치의 자서전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문명론의 개략>이 왜 (재)번역돼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도 별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자크 퐁타니유의 <기호학과 문학>(이대출판부)이 번역돼 나왔다(원저는 1999년작).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퐁타니유는 프랑스 기호학의 거두 그레마스(1917-1992)의 수제자로서 스승의 뒤를 이어 파리 기호학파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기호학자이다. 역자에 의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작가와 작품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방법론을 개발하고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담화'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어쨌든 그레마스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교양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레마스 계보의 기호학에 대한 배경 지식을 먼저 챙긴 다음에 읽어볼 만한 책이다(*아래는 노년의 그레마스).

참고로, 그레마스의 책은 <의미에 관하여>(인간사랑, 1997)이 김성도의 교수의 번역으로 나와 있고, 역시 김교수의 연구서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대출판부, 2002)가 해설로서 자세하다. 연구서의 제목에서도 잠깐 비치지만, 내가 정말 고대하는 책은 그레마스/퐁타니유 공저의 <정념의 기호학>이다(*나는 불어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이 또한 왜 번역되지 않는지 궁금한 책이다. 하긴 <구조의미론>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형편이니!).

참고로, 그레마스와 파리기호학파에 대한 입문서로는 안느 에노의 <기호학으로의 초대>(만남, 1997)와 <기호학사>(한길사, 2000)이 적당하다. 그레마스 학파의 담화분석에 대해서는 J. 꾸르떼의 <기호학 입문>(신아사, 1986)이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은 입문이라고 돼 있지만, 이 역시 교양서 수준은 아니다.

 

 

 



번역소설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1-5>(현대정보문화사)을 빼놓을 수 없겠다(*헉, 7월까지 완간된 걸 보니 10권이다!). SF매니아나 애독자들에겐 필독서. 러시아 태생의 다재다능한 작가 아시모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건 그의 자서전뿐인데, <아이작 아시모프 자서전1.2>(작가정신, 1995)는 재미로만 치자면 손에 꼽을 만한 자서전이다(입담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한가지 단점은 얘기가 중간에 끝난다는 것. 나는 그게 좀 수상해서 출판사에 문의까지 해봤는데, 원저가 그런 식으로 끝난다고 한다.

하여간에 이 자서전이 절판된 것은 좀 아쉽다. 그렇게 절판된 자서전들 가운데 또 기억나는 것은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인 동물학자 데즈몬드 모리스의 <옷을 입은 원숭이>(샘터사)이다.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됐지만(*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석희씨의 번역이고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모리스의 책들이 대부분 출간된 거에 견주면, 이미 번역돼 있는 그의 자서전이 '묵혀'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다른 번역소설로는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현대문학)에 눈길을 줄 만하다. 저자는 캐나다의 최대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교사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고전 번역으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성>(서울대출판부)이 이유선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솔출판사의 전집 번역 중 <성>에 대해서 불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번역은 그런 불만의 소리를 잠재워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중국작가 모옌의 <술의 나라1.2>가 책세상에서 번역돼 나왔다. 모옌은 장이모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 우리 고전소설 <구운몽>도 책세상과 민음사에서 나란히 다시 나왔다. 김병국 교수의 역주본(시인사, 1984)으로 읽은 지가 16년이나 되었는데, 다시 손에 들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어린이용 책으로 로만 카차노프의 러시아 그림책 <체브라시카>(엔북)가 출간됐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이 만화 캐릭터가 원숭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래서 고민하다가 악어 철학자 게나와 전직 KGB스파이였던 할머니 사포클란과 함께 자기발견의 여정을 떠나는 걸로 첫권은 마무리된다. 이 만화는 5월중에 극장에서 개봉될 예정이라고도 한다(*정말 개봉됐었나?).

 

 

 



아마도 지난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번역서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아랍, 이슬람, 문명>(까치글방)일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에서 크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이름만을 적어둔다. 이븐 할둔의 책으론 <이슬람사상>(삼성출판사, 1990)이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중앙아시아사 전공자로서 계속해서 무게 있는 저작과 번역서를 내고 있는 김호동 교수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제몫을 하고 있는 학자/교수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과 격려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때 관심과 격려란 다른 게 아니라 책을 사는 것이다. "나는 꼭 읽을 책만 산다"는 건 야만인들의 신조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동 교수의 책을 장서용으로 사두기를 권한다(10-11권 정도 되는 듯하다). 아울러 여유가 있으면 정수일 교수의 책들도(7-8권 정도 된다). 돈이 없는 나는 두고두고 사겠다...

얘기가 너무 길어진 듯하다(*이맘때만 해도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5권 정도를 꼽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난주에 나온 국내 저작에 대해서는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덧붙임: 역시 AS이다. 지난번에 언급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에 대한 가장 좋은 서평은 고병권의 것(한겨레, 3월 15일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신은 실존하는 모든 것들과 표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만물은 신의 표현이며, 신은 만물을 통해 구성된다. 표현된 것은 신의 능력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 즉 신의 무능력을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되지 않은 세계, 표현되지 않은 관념을 추방하는 것. 모든 초월성을 거부하고, 내재성을 '이 세계'의 원리로 받아들이며, '이 세계'의 모든 생성을 축복하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원고지 한장의 요약으로서 탁월하다. 아울러 왜 이 내재성이 알튀세르의 마음을 끌었을까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초월성에 대한 거부로서의 유물론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그런 초월성의 거부자들이 아니라 열렬한 옹호자들이다. 매일 아침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한다는 부시 같은. 더불어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2003. 03. 18.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6-05-10 23:2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들리세요? 로쟈님 페이퍼 볼때마다 보관함에 책 들어가는 소리가.

로쟈 2006-05-10 23:38   좋아요 0 | URL
이건 다 '지나간' 책들인데요. 보관함에 얼마간 넣어두셨다가 삭제하시면 됩니다.^^

瑚璉 2006-05-11 12:30   좋아요 0 | URL
정의론이 또 나왔습니까? 또 사야 하나(-.-;).

로쟈 2006-05-11 12:48   좋아요 0 | URL
재재작년 얘기인데요...

瑚璉 2006-05-11 15:13   좋아요 0 | URL
"존 롤즈의 <정의론>(이학사)의 개정판이 번역돼 나왔다." 를 "표지는 그대로 두고 새로 번역을 개정하여 나왔다"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런지.

열매 2006-05-11 17:38   좋아요 0 | URL
이번주에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선집과도 관련된 것인데요. 왜 저작권까지 새로 산 새 번역판(또는 개역판)을 낼 때 기존의 역자들을 고집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의론> 역시 구입할 때 대여섯군데 비교해보니 구판본과의 차이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번역의 질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런 책을 사려니 옛구판본의 싼 가격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같은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전문가들이 번역한다면 새로운 판본을 하나더 가질 수 있을텐데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위의 후쿠자와의 책 중 <학문의 권장>과 <학문의 향기>는 같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만 바꿔 출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率路 2006-05-11 22:46   좋아요 0 | URL
아아악~ 키멜레의 데리다 읽다말았는데 이젠 환불도 안되고 언제 읽을지 기약도 엄꼬...ㅠㅠ 초보자가 읽을만한 데리다는 뭐가 있을까나요??ㅠㅠ(이렇게 유령독자 신고합니다ㅋㅋㅋ)

로쟈 2006-05-12 09:06   좋아요 0 | URL
iami7725님/ <정의론>의 역자는 전공자인데다가 번역에 큰 흠이 없다면 따로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겠죠(가격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후쿠자와의 책들은 그냥 나와 있는 번역본들의 이미지를 모두 올려놓은 겁니다...

분신사바스님/ 만화책 <데리다가>가 물론 가장 쉬운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 국내 필자들의 <데리다 읽기> 정도가 어떨까 싶네요. '생초보'라면 어느 책이든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분량이 얇다는 장점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