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소개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데,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4)에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음악비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이 또한 옮겨온다. 그의 생일은 9월에 있으므로 가을에야 보다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개최될 듯하지만, 미리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가끔씩 읽어보기로 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대개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옮여오는 식이 될 것이다. 이번 기사는 허영한 한예종 교수가 기고한 것으로 '冷戰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가 그 타이틀이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드미트리히(*'드미트리'가 맞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격변하는 20세기의 세계사와 소련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흥미로운 주인공이다. 조연급이면 피할 수 있었던 비난의 초점이 됐고 그를 사이에 둔 소련과 서방세계의 지속적인 갈등은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쇼스타코비치가 진정으로 소련 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행세를 한 것인지의 문제다. 절묘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작곡가 자신은 아무런 답을 남기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국지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한 수많은 암시를 흘리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5)으로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소련이 최고로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긴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오기 시작한 건 그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 때문이었다(*얼마전 이 오페라의 원작인 레스코프의 <므첸스크군의 멕베스 부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934년에 초연됐던 이 오페라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다시 무대에 오른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러 온 스탈린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사랑받던 오페라가 순식간에 비판의 초점이 됐다. 1936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위기를 넘기게 한 작품이 바로 지금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 제5번이다. 이 교향곡이 1937년에 초연된 그 날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교향곡이 감격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복권된 그는 1938년 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향곡 5번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라고들 하니 매우 기쁘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잘못을 반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치 못한 답변이었다.

 

 

 

-교향곡 5번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악장 피날레는 다소 급격하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급전되면서 활발하고 밝은 분위기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의 급변과 체제 순응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연결지으려한다. 긍정주의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피날레를 만들어 넣어 정부의 비난을 피하려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인위적인 미학적 잣대를 내세워 서방세계의 음악계가 추구하던 모더니즘을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바로 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보다 다소 쉬운 음악적 내용을 지닌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작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음악은 소리라는 추상적 매체를 사용하는 장르여서 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사가 없는 순수 기악음악의 경우 아무리 구체적 내용이 명시된 표제음악이라 하더라도 그 제목과 달리 감상되고 해석되어질 여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작곡가의 직접 언급이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서 작곡가가 직접 이 곡은 강이다, 또는 이 선율은 나무다, 라고 말하지 않는 한 작곡가가 진정으로 담으려고 한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 곡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과 자신의 의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당신들이 이 곡이 이러하다고 하니 나는 기쁘다” 정도에서 멈춘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내용으로만 이해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이러한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은 천박하기까지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의 선율이 등장하는가하면 엄숙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된 ‘운명’ 모티브까지 나온다. 사람들은 이 희한한 조합에서 의미를 찾느라 부산했지만 정작 작곡가는 이 곡의 특별한 내용의 존재를 부인했고 단순히 ‘장난감 가게’와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만 제공했다. 또 한번 그의 알다가도 모를 작품 해설(?)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이번에는 다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전쟁 교향곡인 교향곡 7번은 흥미있는 일화와 함께 순수 기악음악으로도 일정한 구체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나치군이 소련을 침략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군에 지원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지붕을 지키는 소방부대에 편입된다. 소방 모자를 쓰고 지붕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소련의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고 서방 언론에서도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신한 작곡가의 모습을 흥미롭게 다뤘다. 같은 해 8월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남아서 그의 교향곡 7번의 일부를 완성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접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당 지도부는 레닌그라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교향곡 7번에 대해서 작곡자는 긴 내용의 줄거리를 직접 밝히고 있어 그 내용의 해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받는 레닌그라드 도시와 소련 동포를 묘사하는 1악장으로 시작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4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작곡자의 변이었다. 비록 가사는 없지만 작곡자의 설명이 수긍이 가는 음악적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말년에 이 교향곡이 레닌그라드가 포위되기 전에 이미 구상됐고 성경의 94번 시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교향곡에서 전쟁 분위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행진곡 풍의 리듬과 북소리는 전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작곡가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그처럼 극적으로 작곡된 교향곡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 쇼스타코비치가 선보인 첫 작품이 프로그램이 없는 교향곡 10번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24살의 피아노연주자 엘미라 나지로바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 ‘엘미라’로부터 이끌어낸 선율 동기(미-라-미-레-라)와 작곡자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선율 동기(D-Es-C-H/우리말 음이름으로 옮기면 레-미b-도-시)를 서로 얽혀 놓고 있다. 교향곡 10번은 다시 한번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 상황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한 쇼스타코비치는 평소와는 달리 강력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결국 1954년 4월 초에 열린 작곡가 연맹 대회에서 이 불필요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듯이 작곡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며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끝맺는다. 이 교향곡은 어떤 정치적 해석도 어려워 보인다. 극히 사적인 쇼스타코비치만이 존재하며 이 점을 그는 반성해야만 했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체제 순응 작곡가였다면 그의 교향곡은 철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해석되고 그렇지 않다면 부당한 정부의 압력에 대항한 서구식으로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서방세계의 음악관은 철저하게 미학적 자율성을 중시했기에 미학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의 배경은 쇼스타코비치의 진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당시로서는, 또 어쩌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냉전 시대적 대결 구조다. 쇼스타코비치를 소련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과 그를 서방 세계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암투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양면성 중 한 면을 강조하며 자기편으로 유도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 양면을 모두 진정한 쇼스타코비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6. 05. 08.

 

 

 

 

P.S.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게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인데, 국내에는 아직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 2001)밖에 나와 있는 책이 없다(진의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책이다). 유력한 평전(들)이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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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5-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퍼감다^^

로쟈 2006-05-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옮겨오기만 했습니다.^^ 이미지 몇 개 찾아온 것 말고는 수고한 것도 없구요. 한데, 쇼스타코비치의 경우,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모호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는 것과 음악이란 장르 자체가 정치적 매체로서는 좀 비효율적이고 모호하다는 점, 두 가지가 모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자신이 그런 걸 얼마간 의식하면서 줄타기를 했을 수도 있구요. 전공자에 따르면 그는 매우 소심했던 사람으로 자기 의견을 남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