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투르와 근대성의 문제

저녁에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가서 '한겨레21'을 사들고 왔다. 엊그제 퇴고도 못한 원고를 워낙에 황급하게 보낸 탓에 '오류'는 없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를 서평대상으로 삼았지만 코드를 잘 맞추지 못해서 독서에 애를 먹었다. 기사를 확인해보니 크게 '실수'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필자가 담당인 구둘래기자의 이름으로 돼 있다! 타이틀의 '착각'이 그대로 반영된 듯싶다.   

한겨레21(09. 07. 27)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

‘도발성’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면,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는 단연 돋보인다. 저자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과격할 수 있을까.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역사적 시기구분이 ‘근대인’으로서 우리의 ‘상식’이라면, 라투르의 책은 그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어떤 근거에서인가? 

먼저, 라투르가 정의하는 ‘근대’와 ‘근대인’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근대란 새로운 체제와 가속, 파열과 혁명을 가리킨다. 즉, 시간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어떤 시대, 혹은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이며, 이 기준에 미달하는 ‘전(前)근대’는 무엇인가 낡아빠지고 정적인 과거를 지칭한다. 여기에 전제되는 것은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단절과 비대칭성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간은 비가역적이어서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 이 시간의 승부에서 근대는 승자이자 정복자이며 전근대는 패자이자 피정복자이다. 라투르가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비대칭적 이분법이다.  

근대성이라는 문제틀은 전근대인(과거)과 근대인(현재)을 나누고, ‘그들’과 ‘우리’로 분할한다. 그리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즉 ‘전근대 사회’ 혹은 ‘전통사회’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는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신화와 민간과학, 정치형태와 기술, 종교, 예식 등을 모두 뭉뚱그려서 다루지만, ‘근대사회’는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인류학 대신에 자연과학과 사회학, 철학이 동원되며, 이들은 사실과 권력, 담론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라투르가 보기에 근대의 분과적 인식론이 가정하는 '자연/문화' '사실/가치' '문명/야만'의 이분법은 유지되기 어려우며 모든 현상은 혼종적이다. 가령 남극 오존층의 구멍은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적’이며 또 너무나도 ‘담론적’이다. 현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연결망’인 것이다. 저자의 비유를 들자면, 현실은 이란과 이라크, 터키라는 세 나라에 의해 찢겨진 쿠르드족의 처지와 같다. 인위적으로 분할돼 있지만 쿠르드족은 밤이 되면 국경을 넘어가 결혼도 하고 세 나라에서 벗어난 공동의 모국을 꿈꾼다. 이것이 하이브리드적 현실이다.  

라투르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접근법으로 문화와 관습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 곧 인류학적 연구를 주창한다. 소위 ‘근대세계에 관한 인류학’이다. 이때 인류학자는 자연계와 사회세계라는 근대적 분할을 폐기하고 실험실의 과학자와 정치가를 같은 차원에 놓고 조망한다. 지식과 권력과 풍습에 관한 책을 따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모두 연결된 단 한권의 책을 쓰고자 한다. 인식론에 대한 질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질문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철학과 사회학과 정치학과에 따로 배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근대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할 때, 대상으로서 전근대와 근대가 갖는 차이는 무의미하거나 사소해지게 된다.  

사실 근대 세계는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비가역적인 ‘발명품’이었고,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은 그 새로운 세계의 산파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미몽이었다. 라투르가 ‘기적의 해’라고 부른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몰락을 상징할뿐더러 동시에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정복과 완전한 지배에 대한 자본주의적 헛된 희망의 종말을 상징한다. 연결망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에서의 혁신은 급진적인 단절과 비가역적인 운명을 초래한 ‘영웅담’이 더 이상 아니다. 지식순환에서 약간의 가속과 행위자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정도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 라투르의 평가다. 그가 근대의 경기장 대신에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훨씬 더 넓은 비근대적 세계의 장이다. 이 장을 그는 어원적 의미에서의 ‘중국(中國, Middle Kingdom)’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09. 07. 19.  

P.S. 참고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염두에 둔 대목은 "반근대인들은 탈근대인들처럼 그들의 상대방의 경기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경기장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는 비근대적 세계들의 장이다. 그것은 중기 왕국(Middle Kingdom)이며 중국만큼이나 광활하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31쪽)이다. 사전에는 고대 이집트의 '중기 왕국'이라고도 나오지만, 나는 'Middle Kingdom'이 시간보다는 공간에 맞춰져 있는 듯해서, '中國'이 더 적합한 번역이지 않나 싶다. '중국'과 같은 '중앙왕국'. 

독서에 애를 먹은 건 라투르의 독특한 사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반부의 번역도 좀 낯설었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일간지에 실린 남극 오존층 파괴에 관한 기사를 읽어내려가면서 기상학과 화학, 경제, 정치가 뒤섞여 있는 하이브리드적 현실의 사례로 제시하는데, 초반부터 이런 번역문이 나온다.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나는 고층대기를 연구하는 화학자에서 아토켐과 몬산토의 최고경영자로 변신한다.(17쪽) 이 대목의 원문은 "Reading on, I turn from upper-atmosphere chemists to Chief Executive Officers of Atochem and Monsanto (...)"이다. 나는 'turn'이라는 동사가 '시선이 옮겨간다'는 뜻 정도이지 싶은데, 역자는 과격하게도 '변신한다'라고 옮겼다. 불어본에는 그런 뉘앙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읽기에 어색하다.   

일단 한번 '변신'하게 되면 이후의 변신은 좀더 쉬워진다. "몇 문단을 더 읽어 내려가면 나는 주요 선진산업국가의 수장으로서 화학, 냉장고, 에어로졸, 비활성 기체 문제에 휘말려든다."(18쪽)는 대목도 원문은 "A few paragraphs later, I come across heads of state of major industrialized countries who are getting involved with chemistry, refregerators, aerosol and inert gases."이다. 몇 문단 내려가다 보면 이런 환경 문제로 골치가 아픈 선진국 정상들에 관해 읽게 된다는 뜻인데, 여기서도 '수장으로서'라고 옮긴 건 지나친 감정이입이 아닐까. 독서과정 자체가 주체와 대상이 뒤섞이는 하이브리드적 과정이라는 주장을 함축한 게 아니라면 좀더 자연스럽게 옮기는 편이 좋았겠다.   

덧붙여, 67쪽 이하에서 'historian of ideas'는 '이념사가'로 옮겨졌는데, '사상사가'가 더 나을 듯하다(온갖 사상들의 역사를 다루기에). 69쪽 "근대의 비판적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지배적인 장소를 복원한다"에서 '근대의 비판적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지배적인 장소'는 '근대의 비판적 입장의 등장과 함께 상실한 지배적 장소(the dominant place it had lost with the modern critical stance)'이다.  

그리고 조금 의외의 오역. 연결망적 현실에 접근하는 데 '비판의 삼분법'(인식론, 사회학, 해체주의)이 갖는 한계 혹은 딜레마를 라투르는 지적한다. "이것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로서, 인류학은 내가 '자연-문화'라고 부를, 이음새 없이 이어진 직조를 통해서 우리가 차분하고 간단하게 이 딜레마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지 못했다."(32쪽). 번역문만으로도 난센스라서(라투르는 인류학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인류학이 이 딜레마를 다루지 못한다?) 원문을 찾아봤다. "This would be a hopeless dilemma had anthropology not accustomed us to dealing calmly and straightforwardly with the seamless fabric of what I shall call 'nature-culture' (...)"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보기엔 'if가 생략된 가정법' 문장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 인류학이 내가 '자연-문화'라고 부르는, 이음새 없는 직조물을 우리가 차분하고 익숙하게 정면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이것은 해결 가능성이 없는 딜레마일 것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투르는 '근대세계에 관한 인류학’, '대칭적 인류학'을 주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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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1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애쓰셨습니다. 읽어 봅니다.

로쟈 2009-07-19 23:01   좋아요 0 | URL
^^

2009-07-19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9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7-1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그렇군요... 자본은 국경을 넘나드는데 책과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네요.

로쟈 2009-07-20 09:16   좋아요 0 | URL
사실 책은 책값보다는 언어의 장벽이 더 높지요.^^;
 

'제국'과 '다중'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의 새 책이 출간됐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그린비, 2009). 지난달에 원서를 구한 책이어서 번역본은 뜻밖이다. 분량이 많지 않은 대담집이라 사회주의 이후의 좌파 운동의 현황과 향방을 훑어보는 데 유용할 듯싶다. 이 저명한 좌파 이론가를 가이드 삼아서(번역본의 표지는 너무 유순한 듯싶다. 마치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일보(09. 07. 18) "사회주의여, 또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라" 

백남준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이름을 떨쳤던 계기는 1984년 전세계에 동시 중계된 위성 라이브 프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탈리아의 좌파 사회학자 안토니오 네그리(76)는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Goodbye Mr. Socialism)라고 외친다.

 

시류에 흔들리는 '대중'도, 혁명적인 '민중'도 아닌 '다중'이라는 탄력적인 개념을 제시했던 그가 이탈리아의 진보적 지식인 라프 발볼라 셀시(52)와 머리를 맞댔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위축된 좌파 운동 혹은 민주주의가 지금 어떤 모색과 변환을 겪고 있는지가 두 지성의 대화 속에 드러난다.

"스페인에는 현재 노동력을 구성하는 35%가 비정규직 형태의 노동에 종사합니다. 프랑스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인턴십이 조직되고 있어요."(131쪽) 유럽이 겪고 있는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한 네그리의 말이다. 노동시장의 국제화에 따른 이주노동자 문제를 두고 네그리가 "노동 발전과 기술 혁신의 진행에서 기업은 이민자를 선호하기"(117쪽) 때문이라고 원인을 짚는 대목은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네트워크의 변혁에 대한 네그리의 강조는 한층 심화됐다. 네그리는 그 같은 경향을 "새로운 관계들과 지식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83쪽)이라며 강하게 긍정한다. 그의 통찰, 예를 들어 "좌파는 쇠락의 형국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40쪽) 또는 "인터넷은 복잡성이 증가할수록 쓰레기로 더 뒤덮인다"(101쪽) 등은 문명비판적이다. 나아가 "1995년 이래로 지구를 장악해 온,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쓰레기"(83쪽), "미국에 대항해서 대안적 세계화의 문을 열어라!"(190쪽)는 등의 표현은 격문이 제격일지 모른다.

그가 기대는 가치는 자유와 민주다. 그는 "자유는 사람들의 두뇌 안에 있는 고정자본"이라며 "상상하고 소통하고 언어를 발전시키는 자유"를 강조한다.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오직 자유뿐"(201쪽)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네트워크에 기반한 혁명적 민주주의"는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인 셈이다. 계급 이익에 골몰하기 일쑤인 유럽 좌파의 행태와 관련, 그가 노동계급의 이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시사적이다.

책을 옮긴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어학과 교수는 "사회주의에 안녕을 고하며 새로운 이성을 꿈꾸는 네그리는 이성의 가능성에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근대주의자"라며 "현실 사회주의와의 결별은 또 다른 가능성의 추구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향한 충동"이라고 말했다.(장병욱 기자) 

09.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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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7-19 22:41   좋아요 0 | URL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드뎌 나왔군요ㅋ 기대됩니다.

로쟈 2009-07-19 23:03   좋아요 0 | URL
네, 책들은 계속 나오는데, 누가 다 읽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러시아 여기자의 죽음

러시아의 여성 인권운동가가 또 피살됐다. 2006년 피살된 여기자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친구이기도 하다고. 러시아 인권과 법치주의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사건이어서 음울하고도 씁쓸한 소식이다. 어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7. 17) 체첸 비판 러시아 인권운동가 또 피살

체첸의 인권 실태를 비판해온 러시아의 여성 인권운동가가 또다시 피살됐다. 영국 BBC방송 등은 15일 체첸 인권단체 ‘메모리얼’에서 활동해온 나탈랴 에스테미로바(50)가 납치·피살됐다고 보도했다. 에스테미로바는 이날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됐으며, 몇시간 뒤 인접한 잉구셰티야 공화국의 나즈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에스테미로바는 그로즈니 대학을 졸업하고 역사 교사로 일하다 2000년 인권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2006년 살해된 여성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친구이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체첸 실태를 외부에 알려 2007년 여성노벨상 수상자들이 선정한 ‘폴리트코프스카야 인권상’을 받은 그는 유럽의회의 로버트 슈만 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은 외국 취재진이 그로즈니를 방문하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에스테미로바는 지난달 체첸 당국이 분리주의 반군의 집을 모두 불태우며 탄압하고 있다는 조사 보고서를 냈다. 또 지난 7일 그로즈니 도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보안군의 무력 남용을 맹비난했다. 



메모리얼은 이번 살해의 배후에 람잔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대통령(32)이 있다고 밝혔다. 카디로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이었을 때부터 그의 지원을 받아왔다. 체첸 독립운동 세력의 공격에 숨진 아흐마드 카디로프 전 대통령의 아들로 체첸의 분리운동을 강경 탄압해왔다. 그는 푸틴이 1999년 ‘2차 체첸전쟁’을 일으키자 사병 조직 ‘카디로비츠’를 이끌고 러시아군에 합세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체첸 정보국장을 맡아 푸틴의 신임을 굳혔다. 2004년 아버지가 숨진 뒤 부총리를 거쳐 총리로 초고속 승진했고, 2007년 3월에는 푸틴에 의해 체첸 대통령으로 임명됐다. 그가 체첸 석유를 빼돌려 재산을 불리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폴리트코프스카야 사건에 개입한 의혹도 있다.

그의 집권 뒤 체첸에서는 독립운동가 납치·고문·살해가 계속되고 있다. 메모리얼 측에 따르면 카디로프는 이를 비판하는 에스테미로바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카디로프는 “살인범은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배후설을 부인하고 있으나, 인권단체들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카디로프가 저지른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으로 유럽과 러시아 간에는 인권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즉시 살인 배후세력을 맹비난하고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의 조사와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연방기구를 통해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성명을 냈지만 제대로 될지는 회의적이다. 올초 체첸 문제를 비판한 인권변호사 등이 피살됐을 때에도 메드베데프는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취임 때 ‘법치 확립’을 강조했던 메드베데프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고 보도했다.(구정은기자) 

09. 07. 18.  

Наталья Эстимирова в Грозном, 1 сентября 2004 года

P.S. 에스테미로바의 인터뷰 동영상이다(http://www.youtube.com/watch?v=3oZsJzXKqI0). 고인의 명복을 빈다. 비록 러시아/체젠의 수치스런 인권상황이 개선될 때까지는 그녀 또한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겠지만... 

 

P.S.2. 체첸이나 체첸분쟁에 관한 단행본 저작이 국내엔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 몇 권만 찾아보았다. 체첸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다룬 <야만의 시대>(황소자리, 2005)는 생소한데, 역시나 2004년에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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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무개 2009-07-19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초인가에 리벨리온이라는 리트비넨코에 관한 다큐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안나 폴리코브스카야의 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정부의 비리를 폭로해도 그에 대한 반응조차 볼 수 없는 상황에도 끈임없이 진실을 알리기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그런데 또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네요... 끔찍합니다...

로쟈 2009-07-19 18:40   좋아요 0 | URL
끔찍한 일이야 지구촌 곳곳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데, 저는 더 끔찍한 게 이런 일에 차츰 '면역'이 돼간다는 거예요...

목동 2009-07-20 09:36   좋아요 0 | URL
죽고, 죽이고, 대중의 이름으로, 민족으로 이름으로,,,
그리보면 살리려는 마음은 얼마나 값진 마음인가요!

람혼 2009-07-19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를 읽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곧 로쟈님의 멘트가 있겠구나 생각도 했습니다). "지난해 취임 때 '법치 확립'을 강조했던 메드베데프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는 기사의 문장이 남의 나라 일 같지만은 않은 게 또 다른 문제겠지요...

로쟈 2009-07-19 18:39   좋아요 0 | URL
메드베네프는 이미 지난번에 무능력을 과시한 바 있지요. 푸틴을 넘어설 수 있느냐의 시험대이기도 한데, 별로 기대해볼 수 없지 않을까 싶어요...

목동 2009-07-19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반도 역시 분쟁지역에 포함된다. 우리의 경우는 타민족간의
분쟁이 아니라, 자민족간에 분쟁으로 세계대전과 이념적 산물로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이다.

체첸과 러시아는 민족도 다르며, 종교도 다른(리시아:정교,체첸:이슬람)
타민족으로부터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탈랴 에스테미로바(50)"가 납치·피살되었다.
기구한 운명이다. 용감하고 의로운 세계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딸 역시 깊은 상처속에 자국의 현실에 재인식하겠지만,,,

우리의 경우도 남과 북의 통일문제가 해결되다면, 새로운 국면의
중국과 러시아연방과의 문제가 새롭게 부상 될 것이다.

우리의 임시정부 시절, 일본에 의해 희생되었던 독립투사들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한다. 시대마다 고군분투했던 조상들 있다.

코샤크족(고용한 돈강)에 비해 체첸는 러시아 문학작품에 거이
등장하지 않지만, 1940년대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체첸이 비극을 그린 "황금색 구름은 비쳤다(1987)"가
있다고 한다.

로쟈 2009-07-19 18:38   좋아요 0 | URL
야만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Sati 2009-07-20 22:20   좋아요 0 | URL
펠렉스/ 톨스토이의 '하지무라트'가 체첸사람일걸요^^.
 

이번주의 '서프라이즈'는 어니스트 존스의 <햄릿과 오이디푸스>(황금사자, 2009)이다. 원저는 1949년에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60년만에 번역돼 나온 셈. 저자는 프로이트의 영국인 제자로 정신분석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정신분석학자다. 그의 책은 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살해'란 에세이 등에서 제시한 정신분석적 독법을 더 자세하게 발전시킨 것.   

개인적으로는 재작년인가 '아버지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강의를 하면서 <햄릿>과 <오이디푸스왕>,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두루 읽은 적이 있다. 여건이 되면 나대로 프로이트의 독해를 업그레이드한 책을 써보고도 싶다. 존스의 책은 <햄릿>을 읽을 때마다 참조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려웠는데, 번역서도 나왔으니 이젠 단박에 읽을 수 있겠다. 따로 리뷰들이 뜨지 않아서, 그리고 자세한 출판사 책소개가 이미 나와 있기에, 나는 같이 읽을 리스트만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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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과 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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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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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7-18 17:01   좋아요 0 | URL
어니스트 존스... 프로이트와 관련된 책들에서 이름만 읽어본 사람이군요^^ 리스트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도 넣으면 더 완결적이지 않을까요?^^

로쟈 2009-07-18 17:48   좋아요 0 | URL
네, 햄릿 읽기와 관련되는 것만 꼽았습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읽기에 넣어야 할 듯해요.^^;

수유 2009-07-20 20:09   좋아요 0 | URL
읽고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더 즐거운것은 역자가 1990년생이라는 것, 스무살의 역자입니다.. 옮긴이의 소개를 먼저 읽게되네요..

2009-07-20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1 1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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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무거운 책이 드물다. <열렬한 책읽기>(청어람미디어, 2008)의 저자 한샤오궁의 <산남수북>(이레, 2009)도 두꺼운 책이긴 하나 에세이집인 만큼 무거운 책은 아니다. 도시에 살다가 오지의 산골마을로 낙향한 저자의 경험담을 묶었다고 한다. 그런 경험도 쉽게 가질 수 없는 독자로선 책으로나마 '산남수북'의 경지를 따라가볼 따름이다.  

한국일보(09. 07. 18) 중국 전통정신 잃어가는 '문화 고아들'이여…  

"우리집 창문을 열면 맑고 환한 산수가 순식간에 나를 덮쳐오고, 그 찰나 나는 현기증을 일으키며 경치에 도취되어 오장육부가 녹아드는 느낌을 갖게 된다. 청묵은 가장 멀리 있는 산이다. 옅은 먹색은 그 다음으로 멀리 떨어진 산을 그리고, 가벼운 먹색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산이다. 먹물의 농담과 초점으로 멀고 가까운 산이 표현된다. 산은 층층이 겹쳐 있기도 하고 굽이굽이 구부러져 있기도 한다."(99쪽)

개혁개방 이후 3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중요 국가로 편입된 중국에서는 요즘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전통의 뿌리를 찾아가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중국의 황순원'으로 불리는 선총원(1902~1988)의 문학정신을 계승, 향토색 짙은 고향 이야기, 전래의 옛이야기 등을 재현하는 소설양식을 가리키는 '심근(尋根)문학'은 중국문학의 당대적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하방 경험이 있는 지식청년 출신으로 농촌에서 중국문화의 원천을 흡수, 창작의 영감으로 삼고 있는 한샤오궁(56)은 심근문학의 대표주자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작가다. 

<산남수북(山南水北)>은 중국 벽지의 전통적 삶을 통해 자본주의화돼 가고 있는 중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샤오궁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 모음이다. 30년 간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1999년 중국 남부 후난성의 작은 산골마을 바시로 낙향한 그의 농촌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99편의 에세이를 묶었다.

농촌의 삶 속으로 섞여 들어간 그는 전통과 문명의 관계를 정관(靜觀)하고, 노동을 예찬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통찰한다. '문화고아'는 경제광풍에 밀려 전통정신을 상실해가는 중국인들의 삶을 아쉬워하며, 전통마저도 모두 상품화ㆍ소비화시켜 버리는 시장주의를 비판하는 에세이.

그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동경과 지향은 한이 없지만 추억이 너무 적기 때문에 모두가 어머니를 잃어버린 문화고아들이 되어버렸다"며 "시장경제에서 실패한 낙오자들은 오직 가격의 차폐선 밖에 서 있어야만 할 뿐, 가격이 폭등한 어머니에게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개탄한다.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유머러스하게 소묘한 글들도 슬그머니 웃음을 짓게 한다. 닭장 속의 유일한 수컷이 고양이를 만나면 가장 앞장서서 맞서고 벌레를 보면 얼른 잡아 암탉들에게 양보하는 '이타적' 행동을 지켜보면서, 금수에게도 언어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아니라 '수면인심(獸面人心)'이라고 떠들어댈 것 같다는 풍자를 날리기도 한다.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에세이들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마지막 수록작 '도살되기를 기다리는 말 때문에 나는 눈물을 흘리다'는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33초'처럼 제목 말고는 공백으로 남겨뒀다. 2007년 루쉰문학상(에세이 부문)을 수상했다.(이왕구기자)   

세계일보(09. 07. 18) [편집장과 한권의 책]도시에서, 행복하신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1902년 여름, 북부 독일의 한적한 마을 보릅스베데를 떠나 파리로 향했던 릴케는 심약한 영혼을 압도하는 ‘대도시’의 위용 앞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스물여덟 살의 덴마크 시인을 페르소나 삼아 써내려간 ‘말테의 수기’에 그려진 파리는 ‘죽음’과 ‘불안’,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대치된다.

‘10년 뒤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막연한 기대와 궁금증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대학 동기들은 어느새 펀드 손실과 영어유치원비와 부장의 인사고과에 안테나를 세우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견디는’ 가련한 생활인들이 되었다. 아직은 차마 버리지 못한 ‘바닷가 민박집의 꿈’이 그나마 가끔씩 미소를 떠오르게도 하지만, 그 역시 ‘꿈’이라는 것이 의당 그래야 할 의무방어의 위로에 그칠 뿐, 과연 도시의 규격을 떠나기만 하면 행복을 만나게 될까라는 물음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이 도시든 전원이든, 삶의 공간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입체적(ambivalent)’인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시골 사람들은 익명을 사용하여 숨거나 도피하거나 탈출할 방법이 없다. 각자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짊어져야 한다. 홀로 밭을 갈거나 아무도 없는 들판에 앉아 있을지라도 공공장소에 놓여 있는 조각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언제나 대중의 시선을 받고 있어 좀 피곤하다.”

“도시 생활이 매혹적으로 비쳐지는 까닭은 은자(隱者)처럼 지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 ‘심근문학(尋根文學)’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한샤오궁(韓少功)의 말이다. 30년 가까이 도시생활자로 살았던 한샤오궁은 어느 날 홀연히 산골 마을로 떠난다. 고즈넉한 산수화 속에나 있을 법한, 자연에 녹아드는 삶을 살겠다며, 후난성 북부 동정호 부근의 마을 ‘팔계’로 용감하게 가족들을 이끌고 들어간 것이다. ‘산남수북’은 그렇게 시작된 산골에서의 7년여 생활을 특유의 기개와 해학이 묻어나는 문체로 그려낸 이야기 모음으로, 2007년 루쉰문학상 에세이 부문을 수상한 빼어난 산문이다.

무봉산 자락에 앉아 도시와 시골을 함께 아우르는 한샤오궁의 시선은 한순간에 ‘도시’와 ‘시골’의 경계 자체를 무력화시키며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그는 시골에서 ‘대중의 시선’을 느끼고 도시를 오히려 ‘은자의 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경계를 허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은 왜 도시로 가는 걸까?”라는 물음은 다시 “사람들은 왜 시골로 가는 걸까?”로 뒤집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도시로 가는 것은, 또는 사람들이 시골로 가는 것은, “도대체 이웃을 갈구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일까?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무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함일까?” 납작코 한의사, 미소 걸인, 낭만 고양이 미미, 청풍언월도 이발사 허씨 등 산골 마을의 다이내믹한 인간 군상과 오감을 자극하는 이야기보따리를 따라가노라면, 21세기의 도연명을 자처한 한샤오궁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결국 데일 듯한 소란스러움에 물든 도시인들의 ‘시선 교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이현정 도서출판 이레 편집장) 

09. 07. 18.   

 

P.S. '낙향한 작가의 에세이집'이라고 하니까 연상되는 책은 소설가이면서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최성각의 산문집 두 권이다. <날아라 새들아>(산책자, 2009)와 <달려라 냇물아>(녹색평론, 2007). '운동가'의 시각이 많이 녹아들어간 만큼 한샤오궁의 에세이와는 초점이 좀 다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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