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은 들떠 있지만, 실상 추석은 일년 동안 농사일로 고생한 농부들의 명절이어야 옳다. 내가 이 '가을저녁'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아직 갈길이 멀고 '겨울저녁'이라도 챙길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정산은 세밑에 가서 해봐야겠다). 연휴에 써야 할 원고를 때문에,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책 몇 권을 대출하고 자료도 몇 점 복사했다. 그러고 보면 들떠 있을 경황이 전혀 아니다. 명절이긴 하지만 '휴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다만 나대로의 명절 기분은 몇 권의 책 구경을 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일이다. 사실 엊저녁에 해놓았으면 편했을 텐데 인터넷접속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실행하질 못했다. 멀쩡한 상태에서 접속불량이다가 지금에서야 다시금 연결이 되는 이유는 따로 알지 못한다.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정찬의 소설집 <두 생애>(문학과지성사, 2009)이다. 7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는데, "이 소설들을 뚫고 지나가는 주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과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정찬에게 있어서 이 주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성실하고 꼼꼼하게 이 묵직한 문학적 주제로부터 떠나지 않았던 귀한 작가이다."라고 소개된다. 나는 <그림자 영혼>(세계사, 2000)과 그 이후의 단편 몇 편을 읽은 듯싶다. 안 그래도 '폭력'을 주제로 한 책을 한 권 구상중이던 차여서 이 새 소설집에도 눈길이 간다. 작가의 전작으론 <베니스에서 죽다>(문학과지성사, 2003)과 <희고 둥근 달>(현대문학사, 2006)이다. 3년 터울로 작품집을 내는 꾸준함도 높이 살 만하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역사분야의 책은 김효순의 <나는 일본인, 인민군, 국군이었다>(서해문집, 2009) 이다. 부제는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제목에서 이미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일제에 징용돼 끌려갔다가 소련의 포로가 되고, 다시 귀환하여 인민군이 되고 국군이 되어야 했던 이들의 삶을 추적한 책. 언론에서 리뷰기사를 읽었을 때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문학동네, 2007)을 자연스레 상기하게 해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조정래 선생의 자서전 <황홀한 글감옥>(시사IN북, 2009)도 파란만장에 있어서는 뒤처지지 않을 듯싶다. 그런 굴곡진 삶과 우리의 현대사를 평생 기록해온 작가의 글 역시 '파란만장한' 황홀이 아닐까?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황광우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생각들>(비아북, 2009). 추천자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의 장점은 첫째, 고전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입문서다. 둘째, 내용이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셋째,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되어 있다. 넷째, 동서양의 대비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쓰여졌다. 마지막으로 옥의 티라면, 저자가 자신의 좌편향적인 이념의 경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념에 대한 중립적 입문서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책속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자의 지적 양심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좌편향적인 이념의 경도"라고 했지만 내가 서점에서 잠깐 들춰본 대목에선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신랄하지만 온건하고 상식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경도'가 무얼 뜻하는지는 찬찬히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아울러 저자의 자전적인 기록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창비, 2007)도 바로 읽어봐야겠다. 안 그래도 요즘 필요 때문에 동시대인들의 자서전/평전들을 주목하고 있던 참이다. 참고로, 저자는 "인천지역노동자연맹 교육부장으로 활동하고, 군부독재 시절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아침을> 등을 출간했던 황광우 씨가 군사독재정권과 숨가쁘게 대결하던 격변기에, 학교와 감옥, 거리 등에서 민주화를 위해 보낸" 바 있다.  

덧붙여, 나대로 이달에 꼭 읽을 책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 서평까지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4. 정치/사회 

이달부터는 정치사회분야가 통합됐다.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주성수의 <직접 민주주의>(아르케, 2009).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제와 직접민주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hybrid)’ 형태로 규정한 후,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가 ‘아래로부터의’(또는 ‘풀뿌리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 개혁․보완되지 않으면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한다." 현단계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으로 김영수의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메이데이, 2009)와 김상준의 <미지의 민주주의>(아카넷, 2009)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물에 대한 책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물의 미래>(김영사 2009). 경제학 책 가운데 석유에 대한 것은 자주 봤지만, 웬 물인가? 한데, 물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귀중한 자원을 아껴 쓰려 하지 않는다. 너무나 흔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예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 일깨워 준다.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물의 위기는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그 동안 물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해 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물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도 함께 깨닫게 된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사실 '에릭 오르세나'는 소설가의 이름으로 더 낯익은데, 알고 보니 다양한 활동경력을 지닌 지식인이다. "1981년 국제협력부의 고문으로 사회당 정부와 인연을 맺은 뒤 미테랑 대통령의 문화 보좌관 겸 연설문 초안 대필자, 최고행정재판소 심의관, 국립 고등조경학교 학장, 국제해양센터 원장 등 주요 공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발표한 다수의 소설과 에세이들은 이러한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 집필되었다. 1998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으로 지명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다른 책으론 "목화의 주요 생산.유통지인 다섯 대륙 여섯 국가 탐방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화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코튼로드>(황금가지, 2007)와 함께 <문법은 아름다운 노래>(미디어2.0, 2006)라는 소설도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지식인-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6. 과학 

최영주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가 추천한 과학책은 가스가 마사히토의 <100년의 난제, 푸앵카레 추측은 어떻게 풀렸을까?>(살림Math, 2009)이다. 책은 본래 일본 NHK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저자 가스가 마사히토는 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푸앵카레의 난제를 푼 사람은 러시아의 수학자 페렐만이었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푸앵카레 추측 해결의 궤적을 찾아 푸앵카레의 고향인 프랑스 낭시와 페렐만 박사가 은둔하고 있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와 UC버클리 등을 일주하며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괴물에 도전한 수학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고통이 만들어 낸 장대한 드라마를 추적하였다" 한다. 한편, 살림Math는 이름이 말해주듯 수학서 전문 출판사인데, 가장 최근에는 <에바리스트 갈루아, 한 수학 천재를 위한 레퀴엠>(사림Math, 2009)도 펴냈다. '대칭'의 의미와 함께 갈루아의 삶을 엮어넣었다고 한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나도 며칠 전에 구입한 안애경의 <핀란드 디자인 산책>(나무수, 2009)이다. 추천의 변을 보니 "언제부터인가 핀란드가 디자인의 메카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찍이 추구해왔던 자연친화적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인류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서울시도 핀란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이미 교육쪽으로는 핀란드식 모델이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겨레21에서도 특집으로 다룬 바 있고. <핀란드 공부법>(문학동네, 2009)에 대한 반응도 좋은 편이다. 이런 서울시 말고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좀 챙겨봐야 할 책들인데...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서는 이재호, 김원중 두 영문학자의 <서양문화 지식사전>(현암사, 2009)이다. 작고한 이재호 교수는 '문화의 오역'을 많이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 애썼던 분인데, 이번 책도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싶다. 가령, "‘Zeus's Brother’를 제우스의 동생이라고 번역한 책들이 많은데 제우스의 형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제우스는 막내이기 때문이다. 즉 개념이나 관용구의 맥락을 풀이해냄으로써 그 정확한 의미를 읽어내는데 두 저자의 작업은 크게 기여했다." 그런 기여에 있어서 고전 전문 번역가 천병희 교수의 업적도 간과할 수 없는데, 과거 <신통기>라고 번역되던 책을 <신들의 계보>(도서출판숲, 2009)로 새롭게 펴냈다. 제우스 집안을 비롯한 신들의 족보는 이제 확실히 챙겨두게 됐다.    

9. 실용 

이달부터는 실용서가 새 카테고리로 추가됐는데, 손수호 국민일보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자폐증 아이를 둔 가족의 실상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 <혼자 있는 아이>(홍익출판사, 2009)이다. 덕분에 자폐아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임상관련 쪽과 사례담 쪽 책들이 눈에 띈다. <자폐아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들녘, 2004)는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수영선수 진호 군의 어머니가 쓴 책이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0>(자음과모음, 2007)은 "자폐아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과 교사, 의사, 재활센터 직원들을 작가가 직접 만나 취재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한 만화".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도 나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10. 편집자

'나대로 고르는 책'은 편집자들을 위한 책을 골랐다. 최근에 트렌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련서들이 나오고 있는데, 교과서적인 책은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잇인가>(휴머니스트, 2009)이고, 주간지 편집의 달인이라 할 만한 고경태 씨네21 편집장의 <유혹하는 에디터>(한겨레출판, 2009)도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를 전수하고자 한다.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부키, 2009)는 현장 편집자들의 실전 체험담을 담고 있다. 사실 편집자를 위한 책들을 일반 독자가 읽어야 할 이유는 드물 것이다. 한데, 내가 놀란 건 국내에 편집자가 1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 인문서 독자의 상당수도 이들 편집자들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편집자는 책의 생산자이면서 주요 소비자이다. 하니, 일반 독자들이 분발해야 할 일일 뿐더러, 저자들도 편집자들의 맘에 들도록 애쓸 이유가 충분하다...  

09. 10. 01.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개신, 2009)이다. 이 걸출한 러시아 아나키스트를 통해서 '원조' 아나키즘 사상이란 어떤 것인지 음미해보면 좋겠다. 다시 나온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우물이있는집, 2009)도 곁들이면 좋겠고, 아나키즘에  대한 개관으로는 하승우의 <아나키즘>(책세상, 2008)을 참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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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9-10-0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정치적 입장은 어떻게 될까요. 한국 프랑스 철학에서는 권위자라 할 분인데.

로쟈 2009-10-01 19:43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은 그냥 사회경제적 위치/지위라고 생각합니다. '말'로서의 정치적 입장은 장식인 경우가 많고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목동 2009-10-0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밑에는 한 철학자가 있고, 내 머리위에 책을 미행(尾行)합니다.

로쟈 2009-10-01 19:44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 말씀인가요?^^

목동 2009-10-02 10: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들을 미행한 기분입니다.
- '희고 둥근 달 : 스피드한 단문의 흡입
- '오, 하느님 : 다큐적인 회상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 위대한 실패에 대한 재고찰
- '미지의 민주주의 : 신자유주의의 대안
- '물의 미래 : '공기의 미래'에 대해서도
- '푸앵카레의 추측 : 수학자에 대한 궁금증
- '필란드 디자인 : 핀란드인의 일상 속 디자인
- '신들의 계보 : 비유와 상상력으로 우주 생성의 원리
- '혼자 있는 아이 : 집안에 돌연 비극적인 일(자폐아)
- '유혹하는 에디터 : 매체를 편집한 실무 경험
- '아나키즘 : 권위와 규제에 반대하는 아나키즘

로쟈 2009-10-01 23:28   좋아요 0 | URL
벌써 다 정리하셨네요.^^

philocinema 2009-10-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키즘' 관련서들이 가장 눈에 띄는군요.

로쟈 2009-10-03 10:27   좋아요 0 | URL
페이퍼를 쓴 한 가지 목적이죠.^^
 

'오늘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 책은 단연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시스테마, 2009)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개정판)를 읽어본 독자라면 저자가 누구이고 또 어떤 책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1984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 추천사는 또 도킨스가 쓰고. 어떤 추천사냐면, 이런 식이다.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해 흥분에 휩싸여 읽었으며, 이 책의 전도사라도 된 듯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읽으라고 권하였다. 수년간 내가 가르친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액설로드의 책을 읽고 에세이를 써내야 했다. (...) 나는 지구 위 모든 사람이 이 책을 공부하고 이해한다면 이 행성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고 굳게 믿는다. 세계의 지도자들을 모두 가두어 놓고 이 책을 준 다음 다 읽을 때 까지 풀어주지 말아햐 한다. 그것은 그들 개인에게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구원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수의 딜레마와 게임이론의 아이디어는 여러 분야에서 원용되고 있다. 책은 바로 손에 넣으려고 했으나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아직 판매하지 않고 알라딘에서는 내주에나 배송이 가능하다. 관련서평이 있나 찾아보니 국방일보의 칼럼이 하나 있어서 옮겨놓는다. 국방일보를 읽는 건 제대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국방일보(05. 03. 17) 액슬로드의 협력의 진화 

눈앞의 이득을 먼저 챙길 것인가, 아니면 맛을 아껴 두었다가 장래의 이득을 도모할 것이냐가 바둑의 딜레마다. 미국의 로버트 액슬로드(Robert Axelrod)는 이런 논리를 국제 정치에 응용, 배반의 전략으로 당장의 이익을 취하기보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협력의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협력의 진화론을 제시했다. 기원전 5세기에 있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 좋은 예다. 아테네가 배반의 전략을 선택, 먼저 도발한 전쟁이었지만 결과는 스파르타가 승리했다. 그러나 두 도시 국가는 함께 멸망했다. 원인은 서로 배반의 전략을 악순환시켰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도 예외가 아니다. 사연인 즉 두 죄수가 경범죄에 대한 증거만 있는 수사관과 벌이는 격리된 수사에서 하루라도 먼저 석방되고 싶은 나머지 서로 배반의 전략을 선택한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상대방 죄수를 만나 확인해 본 결과 배반의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에 더 복역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곧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교통이 복잡한 병목 지역에서 운전자가 서로 먼저 가겠다고 진입하면 정체 현상이 길어지고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배반의 악순환을 예방하기 위해 액슬로드는 협력의 진화에서 ‘보상과 보복의 전략’을 소개했다. 이 전략의 핵심 내용은 협상 과정에서 상대와 협조하는 것이 우선 바람직하고, 상대가 배반하면 반드시 응징하며, 상대가 배반하더라도 뉘우치고 화해를 구해 오면 용서하고 보상한다는 내용이다. 이유는 미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준수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월요일에 하는 말과 수요일에 하는 말이 다르면 상대방도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사적이어야 한다. 특히 초기 단계의 협상은 협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줘 장차 협력의 가능성을 더 크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대방이 협상 도중에 배반의 전략을 선택하면 그에 상응한 보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배신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론적으로는 관대해야 한다. 미래의 충분한 보상을 위해서는 협력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 이론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액슬로드의 협력의 전략을 실천한 미국은 소련을 공중 분해시키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됐다. 병영생활하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것은 바로 액슬로드의 협력의 전략이 정보화 시대의 인간관계에 아주 유익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전우 상호 간에 불신의 벽을 깨고 협력의 전략을 생활화하면 성공과 행복이 균형을 이루는 보람차고 유익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김창주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 

09. 09. 29.  

P.S. 오래전 기억이긴 하지만, 절판된 책 가운데 <딜레마 게임: 진화론으로 본 인간과 사회>(고려의학, 1991)에 '협동의 진화'란 글이 실려 있었다. 액설로드가 공저자의 한 명이었던 듯하다. 당장 확인은 되지 않지만, 지금 보니 'How Humans Adapt: A Biocultural Odyssey'란 책의 일부 논문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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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9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30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30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ilocinema 2009-09-30 09:22   좋아요 0 | URL
"액슬로드의 협력의 전략을 실천한 미국은 소련을 공중 분해 시키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다는 글쓴이의 주장을 보니 '글 쓰는 사람의 position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견강부회'라는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군요!

로쟈 2009-09-30 21:39   좋아요 0 | URL
그게 팃포탯 전략 덕분이라고 보나 봐요...

멧돌 2009-10-13 13:39   좋아요 0 | URL
저 지나가는 사람인데요,
결국 분자 수준, 세포 수준, 유기체 수준, 사회 수준, 국가 수준 어떤 규모에서건 두 이기적 개체가 상호작용할 때 벌어지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이므로 팃포탯 협력의 전략이 적용되고, 따라서 미소관계에도 적용하는 것이 견강부회는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매일 겪는 상황들은 다 죄수의 딜레마라고 봐도 되겠지요.

2009-09-30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30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9-30 12:13   좋아요 0 | URL
저도 리처드 도킨스처럼 흥분해서 1년내내 협력의 전략에 대해서만 파고 있던 지난날이 생각나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젠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한때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넘쳐나던, 이기적인 인간이 이기적이면서도 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가슴 설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는군요.

로쟈 2009-09-30 21:42   좋아요 0 | URL
<이타적 인간의 진화> 같은 책은 여전히 그런 '흥분'을 기록하고 있는 듯싶은데요...

멧돌 2009-10-13 13:26   좋아요 0 | URL
이 책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는 중인데요, 왜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하네요??

목동 2009-09-30 19:26   좋아요 0 | URL
이론에 심취하면 '~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문학적인 살을 붙이지 않았나 싶구요. 유전자는 DNA라는 화학물질로 자기복제기능이 있어 생물의 형질을 자손에게 전합니다. 그 원본세포(줄기세포)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세포가 개체화되었을 때, 유전자의 본래의 기능을 발휘함으로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말은 선급한 표현같습니다.오히려 '기능화'된 단위 세포체(줄기세포이용)을 논하는(협력의 진화)것이 좋겠는데요. 인문학적 사고가 생물의 최초 단위(DNA)까지 개체화시킨다면 무리입니다.

로쟈 2009-09-30 21:47   좋아요 0 | URL
도킨스도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했어요. 한편으로 세포 내 협력관계를 밝혀낸 린 마굴리스도 '협력의 진화' 원조인데요. 경쟁이 아닌 협력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본 <새로운 생물학>이란 책도 있었습니다...

멧돌 2009-10-13 13: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 가지고 있고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었는데요, 그런 연구들을 뒤잇는 연구들은 없는지 무척 궁궁합니다. 있다면 왜 대중은 물론 생물학자들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알고 싶네요.

로쟈 2009-10-13 21:06   좋아요 0 | URL
도킨스를 비롯해서 열혈 지지자들이 적극 활용하고 있지 않나요? 게임이론은 국제정치학과 경제학 등에서도 쓰고 있는 걸로 아는데, 더 진전된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멧돌 2009-10-15 14:19   좋아요 0 | URL
아, 예, 저는 <새로운 생물학> 책 말하는 거였어요. 그 책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진화론에 반대하는 책이잖아요. 진화론의 논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진화론의 전제에 문제가 있다고 책 하나 가득 지적하는 내용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재미있죠.

로쟈 2009-10-15 14:25   좋아요 0 | URL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로 저는 읽었습니다. 저는 양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낙소리 2009-10-30 15:45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네요 퍼갈게요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주체'란 말의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학문 주체성'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 글이다.    

교수신문(09. 09. 28) ‘학문의 주체성’ 수립 이전에 던져야 할 질문들

‘학문의 주체성’ 혹은 ‘주체적 학문’의 정립이란 과제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한번쯤 부닥치게 되는 요구이다. 하지만 무엇이 주체적 학문이고, 학문적 주체성은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학문 사대주의’를 극복하자는 구호와 함께 우리 고유어나 고유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되살려 써야 한다거나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에 맞는 우리 이론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주장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 학문’과 ‘주체적 학문’을 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마음에 걸리는 말은 ‘주체’이다. 알다시피 이 ‘主體’는 ‘객체’에 대응하는 (철학)용어로서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로, 사전에는 ‘북한어’로서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인민 대중을 이르는 말”이란 정의도 첨가돼 있다. 어떤 행동의 ‘主가 된다’는 말 자체가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대략 ‘주도하는 자’ 정도로 ‘주체’의 뜻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주인이냐 하인이냐, 상전이냐 머슴이냐는 구도에서 주인노릇하고, 상전노릇하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한데, 학문용어로서 이 ‘주체’가 영어 subject(프랑스어 sujet, 독어 Subjekt 등)의 번역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정은 좀 복잡해진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juche ideology’라고 옮기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주체’는 대부분 ‘subject’로 옮겨지는데, 그렇다고 이 ‘subject’가 항상 ‘주체’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간추려도 ‘subject’는 주제, 주어, 신민, 주체 등의 뜻을 갖는다. 곧 주체와 subject는 서로 비대칭적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subject’가 주체(주인)이면서 동시에 신하나 국민 같은 피지배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subject’가 갖는 의미의 이중성이고 모호성이다.   



이 ‘주체’의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를 따라서 니체의 한 문단을 읽어봐도 좋겠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지하는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복종하거나 복종한다고 믿는 그 무엇에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명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복종하는 자이다.” 니체에게서 주체는 ‘명령하는 주체’와 ‘복종하는 주체’로 분열된다. 사실 ‘명령하는 주체’가 동어반복이라면, ‘복종하는 주체’는 모순형용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돼 보이는 이 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 

니체는 원문에서 마지막 문장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를 독어가 아닌 불어 “L'effet, c'est moi.”로 썼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유명한 말 “국가, 그것이 바로 나이다”(L'´Etat, c'est Moi.)를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다. “지배계급은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성취를 동일시하는 것이다”라고 니체는 덧붙였다. 이러한 정치적 비유는 ‘주체’란 말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절대군주는 법과 행정이라는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립하고 행사하는 권력이고, 그의 신민들은 그러한 ‘권리 속의 주체’라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장 보댕의 이런 말도 음미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든 시민이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는 그가 복종하는 주권권력에 의해 제한받기 때문이다.”

원래적 의미에서건 통용되는 의미에서건 주체(subject)의 자유와 강제, 의지와 복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러한 사실이 ‘주체적 학문’이란 요구에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주체적’이란 말로는 온전한 의미의 자유나 독립이란 뜻을 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서양학문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을 지향하면서 그것을 ‘주체적 학문’이라고 지칭한다면, 그때의 ‘주체적’이란 말은 ‘subjective’라고 번역될 수 없을 것이다.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자면 ‘주체적 학문’은 자기 정립적인 자유와 예속이 교차하는 양다리 걸치기식 학문이다.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권력에 다시금 예속되는 시민의 처지에 견주어볼 수 있겠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주체’나 ‘주체적’이란 말은 기만적이다. 이 말들이 갖는 의미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다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문 사대주의는 아니더라도 서양학문에 대한 우리의 예속성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가를 잠시 잊게 만든다. 사실 ‘주체적 학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우리의 자발적인 문제의식인가도 의문이다. 우리의 의지가 복종에 근거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말이다. 따라서 ‘학문의 주체성’과 ‘주체적 학문’ 정립에 매진하기 전에 ‘학문의 예속성’과 ‘객체적 학문’이란 현실에 대해서 더욱 깊이 성찰해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민 대중’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우리에겐 ‘자유’라는 이념보다 ‘복종’이라는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09.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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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2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젝과 탁석산 저서, 두 권을 주문했거든요, 딱 맞았네,,

로쟈 2009-09-29 19:40   좋아요 0 | URL
많이 보시네요.^^

2009-09-2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9-09-2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주체' 번역관련해서는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과 주체"라는 책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나옵니다. :) 특히 한국어 번역본에 실린 일본어판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네요. ㅎ

로쟈 2009-09-29 19:39   좋아요 0 | URL
네, 사카이의 책도 읽어봤는데, '환승중인 주체' 외에 제가 딱히 써먹을 수 있는 말이 잘 눈에 안 띄더군요.^^;

람혼 2009-09-2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이 글이 '우리말로 철학하기'라고 하는 어떤 경향, 곧 [순수]언어와 [순]민족주의를 향한 [순]진한 경도와 열정을 지닌 어떤 경향에 대해 우회적인 우려와 불만을 냉철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체'의 이중적 의미에 바탕하여 전개되고 있는 논의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경향에 대해 더욱 설득력 있는 공격과 반박이 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나 그러한 단순한 언어환원주의가 어떤 '주체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무척이나 회의적이기에, 이 글을 다른 글보다 더욱 가깝고 주의깊게 읽게 되었네요.
'주체성'을 '언어적 주체성' 혹은 '순수 민족언어'라는 가상과 동일시하면서 소위 '오염된' 용어들과 용법들을 기계적으로 '순수하게' 환원하려는 경향은, 말씀하신 대로 저 "지난한 과제"를 너무 쉬운 것으로 치부하거나 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를 [세계]구조적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민족]감정적으로 보려는 경향도 분명 있고요.
이를 두고 '우리말로 철학하기 혹은 학문하기' 자체의 '주체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9-09-29 19:38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주체'를 'juche'라고 표기하면 주체적 학문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목동 2009-09-2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론적 환원주의에 준해 '우리학문'과 '주체적학문' 다르다고 규정한다면,
탁석산 박사의 '조선문화'와 '한국문화'와의 단절만이 현재의 '한국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로쟈 2009-09-29 19:36   좋아요 0 | URL
일리 있지만, 그게 '단절'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9-09-2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석산 선생님 덕분에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었는데, 그분의 첫 작품인 <한국의 주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은 당시에 많이 논란이 됐었죠. 티비에도 나와서 고종석으로부터 '순진한 우파'라는 이야기도 듣고. 이건 둘 중 어느 책 때문에 받은 '칭호'인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위 책들 말고도 <우리말로 철학하기>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하고, <우리말 철학사전>이 만들어진 취지도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급 구석에 놔두었던 이 주제에 관해 또 파고들고싶은.

로쟈 2009-09-29 19:35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말' 철학에 대해 좀 회의적입니다. '존재'로 옮기던 'Sein'을 '있음'이라고 옮긴다고 해서 무엇인 개시될 성싶지 않아서요. <우리말 철학사전>에 실린 표제어들도 사실 대부분 '우리말'은 아닙니다. '이성'이니 '존재'니 '상징'이니 하는 식이니까요. 번역이 아니란 의미 정도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09-09-29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쩍 지나가다가 한 가지 궁금해서요...^^ '주체적 학문'이 기만적이라면, '학문의 예속성'-인문 사회학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은 그렇지 않은가요? 예속적인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을 구분하는건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글의 요지와는 큰 관계가 없지만,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로쟈 2009-09-29 19:31   좋아요 0 | URL
'주체적'이란 말의 환상을 지적하고 싶었어요. 마치 그런 것이 있는 듯한 환상. '주체성'과 '예속성'은 분리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라는 게 제 요지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에서도 SCI급 논문을 요구받는 세태에선 '주체적 학문'이란 말 자체가 사치스럽기도 하구요...

빵가게재습격 2009-09-30 00:53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 <회상>(한길사, 2009)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 책에 대한 유일한 언론리뷰일 듯싶다.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나온 것이긴 하나,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회고록의 하나로 널리 읽히면 좋겠다.    

한겨레21(09. 10. 12) 스탈린의 '사냥개 같은 시대'에 대한 증언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가 내 어깨 위로 달려들지만,/ 내게는 늑대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차라리 털모자처럼 나를/ 시베리아 벌판의 따뜻한 털외투 소매에 끼워넣으라.”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1891-1938)의 시 '늑대'(1931)의 한 대목이다. 시의 원제목은 '다가오는 시대의 울려 퍼지는 위업을 위해'이지만, 그냥 '늑대'라고 불렸다. ‘다가오는 시대’를 시인이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934년 5월의 어느 날 밤 시인의 집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만델슈탐은 스탈린을 풍자한 시를 써서 사람들 앞에서 낭송한 일이 있었고, 그 한 달 전에는 공개석상에서 아내를 모욕한 한 작가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급하게 가장 절친한 동료 시인 아흐마토바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아래는 만델슈탐 가족과 아흐마토바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나데쥬다이고, 맨 오른쪽이 아흐마토바, 그 옆이 오십 만델슈탐이다.)   

마침내 그날 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아파트를 수색하고서 시인을 체포해갔다. 시인의 아내 나데쥬다와 아흐마토바만을 덩그러니 남겨놓고서. 그렇게 체포되어 3년간의 유형생활을 한 만델슈탐은 1938년에 아무런 이유 없이 두 번째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만델슈탐의 주검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죽음이 1940년 5월 사망인 명부에 기록되었다. 그것이 가족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의 전부였다.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에서의 더딘 죽음보다는 그래도 덜 끔찍한 일이었다고 그의 아내는 자위했다.   

‘사냥개 같은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서 <회상>(한길사 펴냄)은 시인의 미망인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이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란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다.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나데쥬다는 자신이 겪은 삶과 고통을 면밀하게 기록한다. 그녀의 생존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편의 출판되지 않은 시들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녀가 겪은 부조리한 시대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위해 증언하는 일이 다른 하나였다. 오직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 그녀는, 다시 모스크바에 정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을 때까지 소련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공장 노동자와 학교 교사, 번역가로서의 삶을 전전해야 했다.(*아래는 나데쥬다의 회고록 세 권과 아흐마토바에 대한 회상록.)   

  



만델슈탐은 자신의 원고에 대해 평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서 아무것도 보존하지 않았다. 아내 나데쥬다는 그런 남편의 원고를 보존하여 나중에 미국에서 전집이 출간될 수 있도록 했으니 첫 번째 목표는 이룬 셈이고, <회상> 이후에도 두 권의 회고록을 더 집필함으로써 20세기를 통틀어서도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겨놓았으니 두 번째 목표도 달성했다. 문제는 그녀가 겪은 시대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가 애쓰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동구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주민 1천만 명이 사는 구동독에 사람들을 통제할 상근 비밀경찰요원이 10만 명이나 있었지만, 나치의 게슈타포는 독일 전체를 1만 명의 상근요원들로 관리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가 더 억압적이었느냐 하면 정반대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고발 네트워크에 의지할 수 있었기에 게슈타포는 굳이 많은 수의 요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료를 고발하는 데 저항했다. 따라서 훨씬 더 많은 요원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도덕적 감각은 정확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의해 유지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에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 못지않게 그러한 도덕으로 무장한 이들도 자주 등장한다. ‘나데쥬다’는 러시아어로 ‘희망’을 뜻한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삶의 기록이 전해주는 역설적인 ‘희망’이기도 하다. 

09. 09. 28.  

P.S. 아래 그림은 책의 표지로 쓰인 바실리 수리코프의 <친위대 처형의 아침>(1881). 아흐마토바는 트레티야코프(트레챠코프)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을 보고 "짐 썰매에 실려 간 뒤, 땅거미가 질 무렵 거름더미 같은 눈 속에 파묻히고, 어떤 정신 나간 수리코프가 내 마지막 길을 그리게 될까?"란 시를 썼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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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2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수리코프'도 '레핀'과 함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미술 구룹인 '이동파'의 수장인 '이반 크람스코이'의 제자군요. 우리나라의 '역사회화(이순신, 강감찬 등)'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만델슈탐'에 대한 '회고'들을 독일의 '표현주의'로 담아냈더라면 더 리얼했을 것이라는 억지 생각에 서경석 선생의 '고뇌의원근법(돌배개,2009)'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문제를 상품화(미술품)하는 것에 못마땅한 사람도 있지만요.

로쟈 2009-09-29 19:28   좋아요 0 | URL
나데쥬다의 회고록은 담담하면서 기품이 있습니다. 표현주의는 '인위적'이란 인상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목동 2009-09-29 19:59   좋아요 0 | URL
그렇겠네요. 아내가 남편을 회고하는데 부드러움과 내재된 힘과 의지 등을 표현하려 할 것 같아요. 추한 모습보다,,,
 

손가락으로 따 꼽을 수 없는 할일들 가운데 두 가지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전자는 이번주 강의를 위해서이고, 후자는 다음달 연재를 위해서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강의도 한 적이 있어서 기억만 되새기면 되지 않겠나 싶지만, 그래도 읽어야 할 자료들이 아주 적지는 않다(주로 논문들이다). 마침 극단 산울림에서 이번 가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린다. 1969년에 초연을 올렸다고 하니까 40주년 기념공연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보면 좋겠다. 그 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정독해보고. 공연리뷰와 함께 이번에 참고할 책 몇 권의 리스트를 꼽아놓는다(정말 몇 권 되지 않는다).   

뉴스컬쳐(09. 09. 20)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연출 임영웅)는 지루한 기다림으로 가득하다. 블라디미르(애칭 디디/한명구 분)와 에스트라공(애칭 고고/박상종 분)은 하염없이 오매불망 ‘고도’만을 기다린다. 언제부터 그를 기다려왔고, 왜 기다려야만 하는지. 두 방랑자는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오로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남과 동시에 바라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뿐이다.

무대는 둔덕과 쇠꼬챙이를 휘어 만든 듯한 나무 한 그루가 전부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황량하고 적막한 공간은 마치 감옥 같으며, 두 방랑자가 겪는 지루함을 더 부각시킨다. “우리 이제 뭘 한다?”, “기다려야지”, “만약 안 온다면 어떻게 하지?” “끊임없이 지껄여야 생각을 안 하지” 디디와 고고에게 ‘말(言)’은 지리멸렬한 기다림을 참는 이유이자,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들의 장난과 춤추기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고도가 언제 올지 모를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초조와 낭패감을 극복하려는 온갖 노력들이 눈물겹다.

권력가를 상징하는 포조(전국환 분)와 운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하인 럭키(박윤석 분)가 가끔씩 등장한다. 부랑자들에게 아주 잠깐 재밋거리를 제공하지만, 역시 무의미한 언어와 행동들로 상황을 애매하게 만든 후 퇴장한다. 끝없는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한 소년(윤준호 분)이 등장해 고도가 오늘밤은 못 오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전갈을 남기면서 1막이 끝난다. 그러나 2막의 다음날이 되어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우울함 속에서 잠시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기다림은 계속 된다. 다시 와야 할 이곳을 멀리 떠나지 못한 채. 



이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e)의 희곡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주인공들의 연결 없는 대사들이 낯선 무대를 채우는 대표적인 부조리극이기도 하다. 다수의 부조리극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해답 없는 줄거리가 관객들을 당황하게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는 주인공 못지않게 관객들 역시 허무하게 만든다.

그러나 베케트는 전한다.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인도 모르고,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말이다. 뿌연 안개에 쌓인 듯 시간도, 장소도 희미한 현실. 애타게 바라고 있는 ‘고도’는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웃고 울면서,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영원히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이주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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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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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임성희 옮김 / 청목(청목사) / 1989년 10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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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슬린 지음, 김미혜 옮김 / 한길사 / 2005년 5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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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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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27 23:51   좋아요 0 | URL
'고도'는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수만큼의 텍스트입니다.
저마다 기다리는 '고도'는 대를 이여, 시대를 넘어 기다려야 할
운명 같습니다.

로쟈 2009-09-28 01:40   좋아요 0 | URL
열린 텍스트이면서 채워넣는 텍스트도 되지요. 한데, 해석은 의미를 좁히는 작업이기도 하구요...

2009-09-28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9-09-28 02:10   좋아요 0 | URL
민음사 책을 읽고 연극을 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보는 내내 묘하게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고도'를 기다리는 저를 발견했었구요. 저마다의 '고도'가 무엇인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건지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잠시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로쟈 2009-09-28 09:50   좋아요 0 | URL
영화에 보면 교도소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연극이기도 하죠...

드팀전 2009-09-28 09:00   좋아요 0 | URL
지젝이 베케트의 '고도'에서 모더니즘의 전형을 찾으며 만약 포스트모던하게 '고도'를 다시쓴다면 '고도'가 육화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쾌락의 주체로 다닐거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 읽다가 오에겐자부로와 하루키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이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더불어 지젝과 고진을 읽어주신 로쟈님두..^^ 잘 지내시죠.

로쟈 2009-09-28 09:52   좋아요 0 | URL
네, 일이 많아서 게으르게 지내는 것 말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연휴가 짧아서 잘 쉬시란 말씀도 못드리겠네요.^^;

2009-09-28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9-28 11:07   좋아요 0 | URL
고도를 기다라며라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직 읽어 보진 않은 책이네요.고도는 어렸을적 비밀 일기라는 영국의 청소년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소설속 주인공이 에스트라공의 이름은 무슨 피임약 이름 같다고 했다는....^^;;;;;

로쟈 2009-09-29 19:22   좋아요 0 | URL
'에스트라공'이 피임약이라... '에스트라'면 그럴 듯한데요...

목동 2009-09-29 20:53   좋아요 0 | URL
'에스트라'는 난포호르몬(estrogen) 대사물질을 관리합니다.
'estrogen'은 빈성(牝性) 발정을 유발시키며 부족하면 남성화(갱년기)됩니다.

봄날 2009-10-14 11:0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정말 몇권 안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