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시 읽어주는 남자'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말의 용산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에 대한 절망을 오든의 시와 함께 적고 있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는 결미의 말은 오래 음미되어야 할 듯싶다. 불행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겨레21(09. 11. 20) 숨이 끊기기 전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10월28일, 그러니까 용산 재판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이 구형된 날에, 나는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문학동네 펴냄)를 읽고 있었다. 당대를 다루는 소설이었지만 김훈은 여전했다. 지상에서의 삶은 문명이나 이념 따위와 무관하게 약육강식의 원리로 이루어지고, 인간의 시간은 역사나 진보 따위와는 무관하게 자연사(自然史)로 흐른다는 특유의 생각이 페이지마다 단호하게 관철되고 있었다. 그 단호함은 ‘팩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주장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10월28일,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법부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관철한 그날에, 김훈의 말들은 내게 거의 진리로 보였다.  

10월28일의 선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올해 봄에 출간된 <오든 시선집>(봉준수 편역, 나남 펴냄)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소위 세상의 주인이라는 민중,/ 모두가 똑같이 존중받는다지만/ 그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손안에 있었다. 도움을 바라지도/ 받지도 못했던 약자들,/ 적들은 바라던 것을 이미 해버렸으니/ 못된 인간들이 원했던 것은 민중들의 수모, 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아킬레스의 방패’에서) 오든의 문장 중에서는 다소 투박한 편에 속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대목 때문에 옮겨 적었다.

10월28일에 일어난 일이 그와 같다. 피고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무죄 선고까지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최소한, 어째서 그런 참혹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약자의 입장에서 ‘이해’해주는 판결이기를,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인간’으로 복권해주는 판결이기를 기대했다. 부당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길 수밖에 없게 하고 다시 그 법으로 처벌하는 이 해괴한 악순환 속에서 재판부가 고뇌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뇌는커녕,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재판을 방해했다’며 도리어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화가 나기 이전에 뭔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현행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으로서는 달리 어찌할 여지가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법은 무정하나 법관은 무정하지 않을 테니, 최소한 고뇌는 했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저토록 무정한가. 그들은 그저 재판기계인가. “소녀들은 겁탈당하고, 두 소년이 다른 한 소년을 찌르는 것은/ 누더기 소년에겐 자명한 세상의 이치, 그는 약속이/ 지켜지거나 딴 사람이 운다고 따라 우는 세상은/ 들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라.”(같은 시) 오든의 말대로 이것이 ‘자명한 세상의 이치’인가. ‘소년’의 울음을 함께 울어주지도 못한다면 도대체 법은 왜 있어야 하나.

정의로운 법과 선량한 법관들을 모독할 생각은 없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가난한 자들의 저항을 쓰레기 분리수거나 해충 박멸 정도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도 분명 대한민국의 법이라면, 그 법에는 영혼이 없을 것이고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영혼은 없을 것이다. 오든의 유명한 시 ‘법은 사랑처럼’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처럼 어디에 왜 있는지 모르고/ 사랑처럼 강요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으며/ 사랑처럼 가끔 울게 되고/ 사랑처럼 대개는 못 지키는 것.”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법은 사랑의 논리화가 아니라 폭력의 합리화에 가깝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09. 11. 20.


댓글(8)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그들의 국격과 용산 묵시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2 18:28 
    이번주에 읽은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대표적 MB용어가 된 '국격'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라는 걸 알게 해준 칼럼과 '용산' 이후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질문하는 칼럼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
 
 
2009-11-20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2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na35 2009-11-20 17:06   좋아요 0 | URL
본문과 상관없는 댓글이라 죄송한데요. 이상수 기자님(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의 블로그 주소를 아시면 좀 달아주십사 합니다. 한겨레21에 글 쓰실때부터 팬이었는데 블로그가 있는지 미처 몰랐네요.(예전 글쓰신거 읽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가지 더. 저는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판)를 읽다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완전히 손을 떼고 도킨스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했었는데요. 로쟈님 글에 여러차례 소개는 되는데 번역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더라구요. 읽는데 문제 없으셨나요?

로쟈 2009-11-22 10:53   좋아요 0 | URL
지금은 기자를 안 하시죠. 블로그는 따로 알지 못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제가 90년대에 읽었는데, 두산동아에서 나온 걸로 읽고, 개정된 부분만 을유문화사본으로 읽어서 전체적인 번역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30주년 기념판을 이후에 사두긴 했지만요. 저보단 다른 전공자분들의 서평이 나오면 좋을 텐데, 다들 이런 일엔 관심이 없으신 듯해요...

nana35 2009-11-22 15:57   좋아요 0 | URL
네 기자 그만두신건 알고 있었습니다. 로쟈님이 올려주신 어유야담 번역관련 글에 이상수님이 직접 블로그 언급을 하셨길래 혹시 아시나 싶어서요. 찾아보긴 하는데 아직 발견을 못했거든요. 감사합니다.

로쟈 2009-11-22 16:22   좋아요 0 | URL
아, 그건 한겨레 기자시절의 블로그이므로 지금은 폐쇄됐을 거예요...

sophie 2009-11-21 04:06   좋아요 0 | URL
누군가 꼭 해야할 얘기를 하고 있네요. 오든의 시가 궁금해서 전문을 찾아봤어요. 사랑에 비유한 마지막 부분도 좋지만 나머지 부분도 좋더군요. Law like Love가 원제인 것 같아요.아킬레스의 방패.. 기억해 둬야겠네요. 비단 용산문제만이 아니겠지요. 충분히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9-11-22 10:55   좋아요 0 | URL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의 <법은 사랑처럼>이란 에세이집도 있습니다. 법조인들은 오든을 잘 읽질 않거나 읽어도 무덤덤한 듯해요...
 

다윈과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무슨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최근에 나온 <다윈 평전>(뿌리와이파리, 2009)과 <다락방의 미친 여자>(이후, 2009)의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같이 묶게 됐다. <다윈>이 1295쪽이고, <다락방>이 1076쪽이다. 액면가로는 각각 5만원과 4만8천원. 두 권 다 두 명의 저자가 썼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인데, <다윈 평전>을 쓴 에이드리언 데스먼드와 제임스 무어는 당연히 내겐 생소한 이름들이지만,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공저자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페미니즘 문학을 다루는 모든 이론서에서 언급되는 저명한 학자들이다(물론 더 유명한 건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저서명이다). 아무려나 같은 시기에 나온 두 묵직한 저작을 기념하여 간단한 책소개를 옮겨놓는다. <다윈 평전>의 경우엔 소개기사이고,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출판사의 소개글이다.  

경향신문(09. 11. 20) 다윈은 20년 동안 진화론을 숨겼다

“악마의 사제가 아니면 누가, 이런 꼴사납고 소모적이며 실수를 연발하는, 저속하고 끔찍할 정도로 잔혹한 자연의 소행들에 대한 책을 쓸 수 있겠는가.”(<종의 기원> 집필을 시작할 무렵인 1856년에 찰스 다윈이 쓴 글, <다윈 평전>에서 인용)

2009년은 진화론으로 인류의 생명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찰스 다윈(1809~82)의 탄생 200주년이다. 또 오는 22일은 자연선택설이라는 진화론의 핵심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이 첫 출간된 지 150주년 되는 날이다. 한국엔 24일이 출간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종의 기원>을 펴낸 출판업자 머레이는 판매를 시작한 22일 모든 책이 팔렸다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영국에선 22일이 <종의 기원> 출간일로 공인받고 있다.

국내 출판계는 ‘다윈의 해’를 맞아 다윈과 진화론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들을 쏟아냈다.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 YES24에 따르면 올해 다윈 혹은 진화론을 키워드로 발간된 신간들은 어린이·청소년 대상을 제외하고도 20종이 넘는다. 판매량도 과거에 비해 대폭 늘었다. 다윈과 진화론, 다윈 이론의 현대적 변용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개의 창이 마련된 셈이다.

다윈 관련 책의 결정판은 최근 출간된 <다윈 평전>(뿌리와이파리·사진)이다. 1350여쪽에 이르는 이 책은 영국의 과학사가 에이드리언 데스먼드와 제임스 무어가 공동 집필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윈의 삶을 시간 순서로 조명한 평전은 ‘고뇌하는 진화론자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젊은 시절 성직자가 되려 했으나 유물론자가 돼버린 다윈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윈은 서른살 무렵 창조설을 깡그리 뒤엎는 진화의 비밀을 깨우쳤지만 비밀 공책에 적어뒀을 뿐 20년 동안 묻어뒀다. 실제로 다윈은 과학계의 주류가 활동하는 런던을 피해 시골에 칩거했음에도, 자신이 발견한 진화론의 함의들을 고심한 탓에 평생을 편두통과 구토에 시달려야 했고 두려움 때문에 몸져 눕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윈은 ‘종이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지인에게 털어놓으면서 “이것은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데스먼드·무어의 <다윈 평전>과 함께 다윈 전기의 쌍벽을 이루는 것이 자넷 브라운의 책이다. 브라운은 비글호를 타고 다윈이 세계일주를 하는 시기를 앞뒤로 나눠 2권으로 다윈 전기를 묶었는데,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하고 사회에 발표하는 후반부 책이 김영사에서 12월 중 나올 예정이다. 브라운의 다윈 전기는 천재적인 자연사학자로서의 면모보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산물로써의 다윈, 즉 혁명을 바라던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윈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데스먼드·무어의 <다윈 평전>과 차별성을 보인다. 최근 출간된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피터 매시니스|부키) 역시 다윈 자체보다는 <종의 기원>이 발간되던 1859년 언저리의 사회상과 과학·기술적 발견들을 조명하고 있어 다윈을 이해하기 위한 간접 자료로 가치가 있다. 



지난 1월 출간된 <다윈 이후: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말하다>(사이언스 북스)는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다윈주의의 쌍벽을 이루며 논쟁을 벌인 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으로 주목받는다. 굴드는 77년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다윈의 사상이 어떻게 왜곡·확산됐으며,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고 진화론을 남용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불러온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19명의 연구자가 철학·법학·심리학·정치학·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다윈 사상이 끼친 영향을 고찰한 <21세기 다윈 혁명>(사이언스 북스)이 호평을 받고 있다. 최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다윈포럼’을 만들어 활동 중인데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등 다윈의 대표 저서도 새롭게 번역하고 있다.

생물학자이자 과학도서 평론가인 김명남씨는 “일반인들은 진화론을 이미 완성된 이론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유전학 발전에 따라 진화론도 생동감 있게 발전하면서 경제학·심리학 등 영향력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김재중기자) 

  

|페미니즘 비평의 기념비적 연구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인디애나 대학에서 우연히 만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초안이 될 여성 문학에 대한 강의를 구상할 때까지만 해도 여성 작가들을 다루는 문학 수업은 대학 내에서 완전히 낯선 주제였다. 청교도적이면서 남성적인 학풍이 지배하던 대학에서 두 저자는 제인 오스틴, 살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조지 엘리엇 등 19세기를 수놓았던 여성 작가들을 강의실로 불러낸다. 그리고 이들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금과 탈출의 이미지, 거식증이나 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같은 질병의 은유들에 주목한다.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이러한 분열적인 이미지들이 남성 문학과는 매우 다르게 형성돼 온 여성 문학 전통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여성 작가들이 직면했던 당대의 현실과 문학적 풍토를 두루 고찰하는 가운데 문학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다. 그 연구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 인식의 지평을 영문학, 더 나아가 인문학에 성공적으로 주입시킨 페미니즘 비평사의 산증인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넘어서|
두 사람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출간할 무렵, 페미니즘 비평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산드라 길버트가 서문에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반짝였다."고 표현한 그 순간, 즉 문학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수전 구바와 함께 흥분했던 그 순간은 페미니즘 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9세기 여성 문학가들이 남긴 광범위한 유산을 여성 작가들의 미학적 반항성이라는 주제로 훌륭하게 갈무리하고 있는 이 책은 케이트 밀렛의 『성性 정치학』과 함께 페미니즘의 정치적 열망을 문학 비평으로까지 성공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영미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넘어서야 할 거대한 산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작이다. 또한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환상적인 어조로 밀도 있게 다루는 두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원서로 700쪽, 번역서로 1,000쪽에 이르는 이 책이 결코 두껍게 느껴지지 않는다. 번역 과정에서 옮긴이의 꼼꼼한 주석을 추가했으며, 2000년 개정판 서문을 통해 두 저자가 자신들의 작업 과정을 흥미롭게 펼쳐 보이고 있다.  

|차 례|

1부 페미니스트 시학을 향하여
1장 여왕의 거울-여성의 창조성, 남성이 갖는 여성의 이미지와 문화적 부권의 메타포
2장 전염된 문장-여성 작가가 된다는 것의 불안
3장 동굴의 우화

2부 허구의 집안에서-제인 오스틴의 가능성의 거주인들
4장 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오스틴의 초기 작품에 나타난 젠더와 장르
5장 제인 오스틴 뒤에 숨겨진 이야기-그리고 그것의 내밀한 중개인들

3부 우리는 어떻게 타락했는가?-밀턴의 딸들
6장 밀턴의 악령-가부장적인 시와 여성 독자들
7장 공포의 쌍둥이-메리 셸리의 괴물 같은 이브
8장 반대로 바라보기-에밀리 브론테의 지옥의 바이블

4부 샬롯 브론테의 기괴한 자아
9장 내밀한 내면의 상처-『교수』의 학생
10장 자아와 영혼의 대화-평범한 제인의 여정
11장 굶주림의 기원
12장 루시 스노우의 매장된 삶

5부 조지 엘리엇의 소설에 나타난 감금과 의식
13장 상실감이 빚은 예민함-조지 엘리엇의 숨겨진 비전
14장 파괴의 천사, 조지 엘리엇

6부 고통의 힘
15장 체념의 미학
16장 하얀 여자-에밀리 디킨슨의 진주 실  

09. 11. 19.


댓글(7) 먼댓글(1)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찰스 다윈을 만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4 10:35 
    이번주 출간도서 가운데 분량으로 가장 압도적인 책은 재닌 브라운의 <찰스 다윈 평전>(김영사, 2010)이다. 탄생 200주년이었던 작년에 이미 예고된 책인데, 출간이 약간 늦어졌다(하긴 <종의 기원> 새 번역본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등이 쓴 <다윈 평전>(뿌리와이파리, 2009)과 다윈에 관한 전기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라 한다(사실 2000쪽이 넘는 분량 자체가 독자를 압
 
 
목동 2009-11-20 06:27   좋아요 0 | URL
'종의 기원'에서의 '선택'(and'변이')과 '소크라테스'의 '선택(참,거짓)'은 육체와 정신 진화(다양화)의 원동력같지만 '다윈'이 진화의 실례로 왜 동물만 예로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20 09:27   좋아요 0 | URL
<인간의 유래>는 따로 쓰니까요...

목동 2009-11-20 13:42   좋아요 0 | URL
예,,'종의 기원'발표 12년후에 썼군요. 그리고 보면 '다윈'은
대단한 확신과 용기있는 학자군요. '소크라테스'도 그렇구요.
현대의 일부 지식인들은 권력의 지짓대를 역할을 하는데요.

수유 2009-11-20 08:49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미친여자 1076쪽.. 그래도 사야겠죠. 읽어야 띄엄띄엄.

로쟈 2009-11-20 09:26   좋아요 0 | URL
각 부별로 따로 읽으면 되니까요...

무해한모리군 2009-11-20 09:21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미친여자의 쪽수는 저를 좌절시키지만..
도전!!!

로쟈 2009-11-20 09:27   좋아요 0 | URL
좌절까지는 아니고, 들고 다니기 불편한 거죠.^^
 

교양과학서로 분류될 책들이 약진하고 있다. 마이클 가자니가의 <왜 인간인가?>(추수밭, 2009)에 이어서 스티븐 핑커의 <단어와 규칙>(사이언스북스, 2009)까지 매주 필독할 만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핑커의 책도 이젠 리스트로 묶을 정도는 된 듯하여 따로 꼽아놓도록 한다(아직 나올 책들이 더 많긴 하지만). 이번에 나온 <단어와 규칙>은 <언어본능>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을 텐데, 간단히 말하면 '인지언어학'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촘스키 이후의 언어학 패러다임이다). 국내에도 이 분야의 학술서는 드물지 않지만, 대중적이진 않다(핑커는 '대중적' 저자로 분류되는 것인가?). 간단히 올라온 소개는 이렇다.    

인지 언어학의 세계를 다룬 책. 언어와 마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규칙 동사와 불규칙 동사라는 특수한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언어를 발명했던 선사 시대의 부족들로부터, 뇌를 촬영하고 유전자 염기 배열을 판독하는 새천년의 과학 기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를 살펴본다. 저자는 이 사례 연구가 수학적 아름다움과 언어라는 인간의 기이한 능력의 결합을 보여 줄 것이라고 말한다.  

오래전 핑커의 책을 몇 권 주문할 때 포함돼 있었던 듯한데, 박스보관도서라 나로선 '박스의 책'이다. 다시금 대출하는 수밖에.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전공자라면 피터 스톡웰의 <인지시학개론>(한국문화사, 2009)도 두달 전에 출간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나는 지난주에야 구입했는데, 나온 지는 좀 된 책이군...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The Stuff of Thought: Language as a Window Into Human Nature (Paperback)
Pinker, Steven / Penguin Group USA / 2008년 9월
36,500원 → 29,930원(18%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1년 02월 03일에 저장

단어와 규칙- 스티븐 핑커가 들려주는 언어와 마음의 비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9년 11월 16일에 저장
품절

언어의 진화- 최초의 언어를 찾아서
크리스틴 케닐리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09년 8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2009년 11월 16일에 저장
구판절판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2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9년 11월 16일에 저장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유 2009-11-18 12:11   좋아요 0 | URL
사실 언어의 진화가 학교도서실에서 3번째 반복 대여하고 있는중입니다
2주단위로 대여가 되는데 읽어내질 못하고 있다는 그래도 촘스키와 핑거,굴드의 이야기들이 재미나요..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서평위원 칼럼을 옮겨놓는다. 칼럼을 읽고서, 니체의 초인을 '나눔에의 의지를 가진 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자'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빈번한 오해의 대상이 된 '힘에의 의지'보다 '나눔에의 의지'는 훨씬 더 명쾌하며 의미심장하지 않은지?.. 

 

교수신문(09. 11. 16) ‘자발적 가난’의 지혜

자신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낙타에서 사자로 변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낙타는 수동적인 인간,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상징한다. 기존의 공동체가 부여한 규범이나 가치를 하나의 숙명이나 본성인 것처럼 등에 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낙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는 사자가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사자 등에 올라탈 수 있겠는가. 사자의 등에 타려면 우리는 사자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자의 시신 위에 우리는 걸터앉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자는 부정의 전사이자 동시에 자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자는 최종적으로 어린아이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어린아이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위베먼쉬(ubermensch), 즉 초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자가 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의 등에는 많은 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얹혀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짐들을 지다보니, 이제 우리는 그것이 짐인지 아니면 나의 몸의 일부인지 헛갈릴 정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짐들로는 니체는 국가, 종교, 자본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사자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의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 용기’가, 내세를 약속하는 종교의 유혹에 대해서는 ‘삶을 긍정하는 유쾌함’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재산축적을 명령하는 자본에 대해서는 ‘자발적 가난의 행복’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많은 독자들은 ‘자발적 가난’이 ‘행복’일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가난을 뜻하는 한자, ‘貧’이란 글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 빈이란 글자는 나눔을 상징하는 ‘分’이란 글자와 조개 화폐를 상징하는 ‘貝’라는 글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져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도래하는 상태가 바로 가난이라는 것이다. 淸貧, 즉 맑은 가난이란 말이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바로 여기에 행복의 비밀이 있다. 자신이 애써 수확한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을 때, 우리는 축적의 행복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재산을 가지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체제를 말한다. 항상 자본주의는 자본의 양이 자유의 양이라고 사탕발림하며 우리를 미혹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빈주머니에 손을 찔러보며 우리는 무엇인지 모를 부자유와 우울함을 느끼곤 한다.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결국 자본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소비의 자유, 소비할 때 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덧없는 자유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의 자유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달콤한 쾌락은 주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우리에게 심한 금단증상을 제공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인 가난은 가장 자본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의지이자, 동시에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사 이래 동서양의 많은 철인들은 한결같이 ‘자발적 가난’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통찰하고 있었다. 슈마허(E. F. Schumacher)는 『자발적 가난』이란 책으로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노래했던 많은 철인들의 이야기를 수록하려고 한다. 원제가 더 의미심장하다. ‘작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가 원제이기 때문이다.

청빈한 삶을 영위하던 서양의 은둔자들,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던 동양의 선사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했던 현대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정신들은 직접 노동하며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 그래서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삶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혹시라도 자본이란 마약에 아직도 취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은 진정한 행복을 약속하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친구에게 나누어주는 어린아이의 미소, 니체가 그렇게도 요구했던 초인의 미소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셈이다.(강신주 서평위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09. 11. 16.


댓글(7)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5:46 
    나눔의 의지와 자발적 가난 — via 로쟈
 
 
목동 2009-11-16 20:12   좋아요 0 | URL
'빈농(貧農)'의 나눔은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없는듯 합니다. 가난뒤에 어떤 부(富)를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16 21:04   좋아요 0 | URL
타의에 의한, 타율에 의한 가난은 짐이고 구속이죠. 그건 부정적인 것이구요, 다만 뒤집어서 부에 대한 강박을 짐처럼 이고 다닌다면 그 또한 낙타의 삶이라고 해야겠어요...

2009-11-16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11-17 09:30   좋아요 0 | URL
오호 로쟈님 글을 읽으니 갑자기 폴리네시아 원주민이 생각나네요.자발적 가난(청빈)과는 좀 다른 개념인데... 이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온가족이 정말 밤잠 안자고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합니다.그래서 대규모의 부를 축적하면 갑자기 온 마을 사람들한테 그 부를 정말 무상으로 배분한다고 하는군요.그 뒤에 남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민들이 바치는 대인이라는 칭송뿐이라고 하더군요.일종의 명예인데 사람들은 그 명예를 부러워하며 너도 나도 부를 축적하고,대인이라고 명예를 받은이도 그 명예를 지키기위해 또 부를 축적하며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워 준다고 합니다.
뭐 사회적 부의 재분배 시스템인데,결국 나눔은 이타적 생각이지만 마음속에 이런 명예욕에 관한 이기적 생각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로쟈 2009-11-17 12:22   좋아요 0 | URL
그런 '이기심'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번역 교정작업을 하다가 잠시 산책나가는 기분으로 <들뢰즈의 니체>(철학과현실사, 2007)에 소개된 참고문헌에 대해 몇 자 적는다. 흔히 <니체와 철학>이 들뢰즈의 대표적인 니체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책을 한국어로 완독한 이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니체>의 역자인 박찬국 교수가 '옮긴이의 글'에서 적어놓은 대로 <니체와 철학>은 "니체의 사상을 어느 정도 숙지하지 않고서는 읽어 나가기 쉽지 않다." 두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번역 또한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들뢰즈의 니체>(원제는 그냥 <니체>)는 들뢰즈가 쓴 니체 해설서로 "니체의 생애부터 짚어 나가면서 니체 사상의 핵심을 간략하면서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역자의 기대에 따르면, "짤막한 책이지만 독자들은 들뢰즈가 보는 니체 사상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엔 이조차도 과도한 기대이고, 니체 책 몇 권 정도와는 씨름해본 경험이 있어야 이 '해설서'에서 뭔가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가령 니체에 관한 몇몇 평전 정도는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프란스키의 평전 외에 다케다 세이지나 미시마 겐이치 같은 일본 연구자의 책들이 요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보다 연륜이 깊은 일본의 니체 연구를 슬쩍 참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니체>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들뢰즈가 제시한 '독일어 참고문헌'이다. 1960년대 중반에 그가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했던 만큼 니체 연구사에 대한 안목이 드러나기 때문. 그래봐야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달랑 네 권의 책을 그는 '참고문헌'에 올려놓았다. 칼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1935), 칼 야스퍼스의 <니체>(1936),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1960),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1961)가 그 네 권의 책이다. 이 중 국내에 어떤 책이 소개돼 있을까?  

강의록을 묶은 하이데거의 <니체>는 네 권 분량이며(영어본은 두 권짜리로도 나와 있다), 국내에는 두 차례 그 일부가 번역됐다. 박찬국 교수가 옮긴 <니체와 니힐리즘>은 이 중 4권을 옮긴 것으로 나머지 세 권은 1권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 2권 '영원회귀' 3권 '지식과 형이상학으로서의 힘에의 의지'이다(1권이 이성과현실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니체론은 많이 회자되지만 정작 그 전모가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데, 하이데거 전집이 번역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후설의 제자이자 하이데거의 제자인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 절판됐지만 국내에는 오래 전에 <니이체 철학>(형설출판사, 1984)으로 소개된 바 있다(책의 소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지난달에야 입수했다). 하지만 전공자들에게서도 잊혀진 책인지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책세상, 2006)에 수록된 '니체 관련 국내 출판 목록'에도 빠져 있다. 발터 니그의 <예언자적 사상가>(분도, 1973)가 첫번째 연구서로 올라와 있는데, 절판된 건 마찬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무관심한 처사로 보인다. <니이체 철학>을 옮긴 하기락 선생의 니체 연구서 <니체>(1959)와 <니이체론>(1971)이 더 의미가 있을 뿐더러 출간된 것도 그보다는 빠르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는 추천도서 목록에 핑크의 책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다.  

핑크 책은 절판되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학술 서적 읽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추천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책들이 니체의 저서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부조가 아닌 환조로서 니체의 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조각된 얼굴이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핑크는 원래 하이데거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존재와 생성이 유희로서 파악될 때, 니체는 이미 형이상학에 붙들려 있지 않다.” 유희하는 어린아이를 형이상학자로 볼 수 있는가.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니체는 최후의 형이상학자이자 형이상학의 완성자다”라는 평가와 상반된다. 핑크는 니체의 세계관이 그 스승의 우려대로 ‘세계와의 대결과 투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핑크가 그리는 위버멘쉬의 이미지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위버멘쉬의 얼굴은 온화한 놀이꾼이지, 폭력을 휘두르거나 기술을 남용하는 거인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유희 속에서 니체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때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로 포착된다. 이때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의욕함으로써 무언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시켜 주는 개별화 원리이자, 사물을 유한하게 만들어 주는 원리가 된다.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반면 영원회귀는 이 모든 개별적 형식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모든 유한한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무한성이고, 개별적 존재자들을 관통하는 세계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사이의 긴장을 더 높은 원리인 디오니소스의 유희 속에서 해소한다. 인간이 그 자신의 개별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고, 자신을 세계를 향해 개방할 때, 비로소 그는 자신도 우주적인 유희를 공연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니체론으론 <니체 생애>(까치, 1984)와 <니체와 기독교>(철학과현실사, 2006)가 번역돼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한 <니체>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일반 정신병리학> 같은 주저도 번역되지 않은 형편인 만큼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다.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도 가벼운 분량이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대신에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같은 책을 통해서 대략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뢰비트의 책으론 <베버와 마르크스>(문예출판사), 오랜만에 재출간된 <지식과 신앙, 그리고 회의>(다산글방) 등이 더 번역돼 있는데, 절판된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아무튼 들뢰즈의 <니체>나 <니체와 철학>을 읽기 위해서도 이런 정도의 책들은 '배경'으로 소개됨직하다. 과욕일까?.. 

09. 11. 15.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1-15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5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ror 2009-11-15 18:28   좋아요 0 | URL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있군요. 하이데거가 쓴 '니체'라는 책이 영어로만 2권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하이데거 생전에 독일어로 2권으로 '니체'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하이데거 사후 전집판으로 4권으로 나온 것이죠. 지금도 하이데거 생전에 나온 2권짜리 '니체'도 여전히 독일어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 전집에는 니체 대한 책이 몇권 더 있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니체'를 읽기 위해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죠. 니체의 이해를 위해서 다른 연구서들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지나치게 들뢰즈가 슨 '니체'라는 책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요.

로쟈 2009-11-15 18:47   좋아요 0 | URL
책과 권(Volume)은 다른 개념입니다. 영어본으로는 2권짜리, 4권짜리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독어본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2권짜리라고 해봐야 합본 형태이므로. 의미있는 차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온 것이 하이데거의 니체론과 들뢰즈 등 프랑스 철학자들의 니체론이라는 건 사실일 뿐이고, 국내에서 들뢰즈의 니체론이 갖는 인지도를 빌미로 독어권의 주요 니체 연구서가 번역되길 기대한다는 바람을 적은 겁니다. 평가야 각자가 하는 것 아닐까요?..

mirror 2009-11-15 19:05   좋아요 0 | URL
2권짜리와 전집판의 목차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내용까지 전혀 차이가 없는 지는 제가 모르겠군요. 두 판을 대조한 분들이 말씀해주셔야 할 듯 합니다.
평가야 각자 해야겠죠. 저의 관점에서는 니체가 들뢰즈에 종속되는 듯한 한국의 상황이 부적절한 듯해서 한 말입니다.

로쟈 2009-11-16 20:53   좋아요 0 | URL
적어도 영어본으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푸파이터 2009-11-15 19:04   좋아요 0 | URL
제가 지난 30년 생을 돌아봤을 때, 저에게 가장 깊은 충격과 변화를 주었던 책이 바로 '니체와 철학'입니다. 이 책을 읽었을 당시 저는 군대에 있었는데요. 쉽게 이책저책 고르면서 독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니체에 대한 입문서는 전혀 읽지 않은 채 바로 이 책으로 뛰어들었지요(들뢰즈 관련 서적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탈근대철학 입문서 정도 읽었습니다) 철학을 좋아해서 나름 열심히 찾아보지만 내공은 일천한 공대생이었는데, 그래도 이 책은 정말 열심히 팠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과 희열을 얻었고요.

제 솔직한 생각으로는 다소 힘들더라도 다른 입문서를 접하지 말고 바로 이 책으로 뛰어드는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니체에 대한 입문서를 먼저 접해보는게 독자들에게 심적 부담은 덜어주는 반면, 그만큼 '니체와 철학'의 정수에서 이르는 길을 막는 보이지 않은 장벽이 될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요. 입문서를 읽고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해버리는 순간, 니체(들뢰즈)는 그만큼 더 멀어져버릴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세상을 구성하는 무한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내용이고, 결코 쉬운 길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거든요.

이상 로쟈님의 서재를 눈팅하는 허접한 한 독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로쟈 2009-11-16 20:53   좋아요 0 | URL
<니체와 철학>으로 니체 읽기를 시작하는 건 특출하지만 좀 예외적인 경우 같습니다. 보통의 독자들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듯싶어요. 이심전심의 세계가 아니라면요...

mirror 2009-11-15 20:27   좋아요 0 | URL
제가 친분이 있는 니체 전문가 한분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두 개의 한국어 번역본(하나는 영어에서 번역되었고, 하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재학중이던 유학생이 번역했죠.) 모두 신뢰하기가 힘들다는 거였습니다. (이 발언이 근거 없는 명예훼손이 된다면, 곧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니체와 철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자의 이해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 책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다른 외국어 본으로 독서를 시도하시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1-16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영어본과 러시아본을 대조해보지 않으면 한국어본을 읽기 어렵습니다. 비단 이 책에만 한정된 건 아니지만요...

sophie 2009-11-16 10:5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라는 말에 혹해서 한 번 읽고 나니 산책을 한 번 더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니체>라는 제목은 같지만 저자가 달라서 <들뢰즈의 니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냥 니체라고 해도 좋을 뻔 했습니다. 저자를 확인하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용하신 고병권님이 번역하신 내용은 대명사 '그'를 줄이고 핑크나 하이데거로 대체하면 이해가 한결 쉬울 것 같은데요? 특히 둘째 문단에서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 '는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가 ".."라고 평가한 것과 상반된다'라고 하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전염병인가요? 사실 데리다, 들뢰즈.. 이런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제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네요. 인용문 마지막에 디오니소스 적 유희는 공감이 갑니다. 두루뭉실 하지요?

로쟈 2009-11-16 20:50   좋아요 0 | URL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긴장관계에 놓이며 그것의 해결(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과제가 되는데(승계호 교수의 해석이 자세합니다), 이 대립이 영원회귀에 대한 해설들에서 너무 쉽게 처리되는 감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이데거나 뢰비트의 책이 번역되면 좋겠어요...

목동 2009-11-16 20:23   좋아요 0 | URL
채칙을 맞는 말을 보고 감싸 안은 니체, 자신을 극복해가는 초인은 '그리스인 조르바' 같습니다. 조금 위험도 하지만,,,

로쟈 2009-11-16 20:47   좋아요 0 | URL
키잔차키스가 니체에 심취하기도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