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독해는 퇴행적이다. 비록 간결하고 세련된 텍스트를 갖추고 몇 가지 논점에서 기발한 통찰을 보여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마르크스를 '넘어서기'는 커녕 그의 담론 안에 머물며 사소한 부분들에 착목함으로써 중요한 부분들을 사문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는 논의를 진행하면 할수록 마르크스의 본래 함의를 점차적으로 왜곡하며, 이는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교환 양식을 주장하는데서 그 정점에 달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공황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고 주장한다. 공황은 자본주의의 능동적인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능동적인 측면이란 화폐에 대한 욕망이다. 고전경제학자들은 부의 본질이 금, 은 등의 화폐에 있다는 중상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화폐는 교환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는 화폐의 축적이 자본의 운동에 있어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며,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공황이다. 공황 시 모든 사람들이 화폐를 획득하는데 집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이 봤을 때, 본질적으로 종이에 불과한 화폐에 대한 욕망이 현실 사회를 추동한다는 점은 경제라는 하부 구조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으며 어떤 신앙적인 문제, 종교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자본제 이전의 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본제 고유의 특징이며, 이러한 능동적 측면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따라서 기존의 생산 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로는 이를 해소하기 어렵고, 새롭게 교환 양식을 고찰함으로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공황을 해명하려 했을 뿐, 공황 자체의 중요성을 고진이 주장하는 것처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고진이 공황에 착목하는 이유는 그가 공황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오류다. 공황은 자본의 욕망 운동의 결과이지, 사람들의 욕망 운동의 결과가 아니다. 공황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화폐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공황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중상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공황에 착목한 이유는 공황이 초래하는 생존의 위협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자본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과 일치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때는 자본주의가 평온한 시기, 곧 호황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자본의 운동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에 별다른 마찰없이 참여하며 심지어 능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사람들의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도 비례해서 생긴다.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분명히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에 반하여 자본의 운동에 맞춰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커지기 마련이며, 종국에는 폭발한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의 폭발이 자본의 운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 체제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데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과 자본을 혼동하지 않았다. 자본의 욕망과 사람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이 둘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일 때에도 이를 명료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고진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욕망'이라는 일반 명사만을 보고 '누구의 욕망'인지 질문하지 못함에 따라 자본의 욕망에 사람의 욕망이 묻어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했다. 욕망을 올바로 인지하는 것은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주춧돌이 되기 때문에 그의 분석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썩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욕망이라는 단어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실제로 욕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렇다고 자본가의 욕망으로 대체할 수도 없다. 실제 개별 자본가가 이를 욕망한다고 한들 이것이 자본의 운동이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모든 자본가들이 능동적으로 이 욕망을 갖는다고 볼 수도 없다. 욕망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은유로써, 자본의 운동 구조가 지향하는 정점을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결코 생기적인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사람들에게 귀속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지배하는 구조, 이것이 하부구조이다.
고진이 주장하는 종교적인 구조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구조의 욕망과 동일시할 때 생기는 심리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구조는 하부구조의 심리적 반영일 뿐이며, 이러한 구조가 자본제만의 특징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실례로 봉건제에서의 욕망은 지배의 욕망, 곧 영토확장의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이 국가와 군대라는 폭력 기구를 창출하고 전쟁을 항상적인 상태로 만든다. 다만 이것이 자본제에 비해 뚜렷하지 못한 것은, 구조의 지향점을 선취할 수 있는 기회가 자본제 안에서 이론적으로 모두에게 열려있는 데에 반해 봉건제 안에서는 특정 소수에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의 동일시가 자본제 내에서 훨씬 더 수월하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라는 틀 안에서만 봤을 때 그러하지, 세계라는 틀로 관점을 확장시키면 얘기는 달라진다. 따라서 고진의 얘기는 하부구조가 그 성원들에게 갖는 심리적인 효과를 적시한 것일 뿐, 하부구조와 다른 근본적인 무엇을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실(하부구조)이기 때문이지, 스스로 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보지 못하는 고진은 하부구조의 심리적인 효과을 과대평가하여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을 내면화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생산 형식이 아닌 교환 형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에 대한 해법이 바로 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주장에 비추어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교환 형식이든 뭐든 지금의 현실을 바꿔야 하는데, 그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이 이미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윤리이다. 그러나 윤리로 욕망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적이다. 계몽주의는 고진 스스로 화폐에 대한 논의에서 기각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모순에 빠지며, 그의 논의 어디에도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구는 없다.
고진의 문제는 하부구조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하부구조의 효과에 대해서 스스로 실컷 말해놓고도 이를 하부구조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로 독해할 위치에 있지 못하며 마르크스보다 한참 뒤떨어져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부구조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새로운 체제의 전망을 없애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