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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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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 나 자신에 대하여 -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 되는 피억압자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일체의 새로운 세계를 최후의 전투에서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뿐이다. 억압은 고통이요, 고통은 의식이다. 의식은 운동을 의미한다. 인간 그 자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려면 수백만이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혈과 죽음의 광경, 그리고 어리석음과 실패의 광경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나의 통찰력을 가로막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사람은 오로지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배우고 올바른 판단에 도달한다. 일정한 행동방침을 시험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침을 발견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시험 결과 그 특정한 방침이 잘못이라는 게 입증된다면 그 시험 자체는 올바른 것이요, 올바른 것을 탐구하는 실험인 것이며, 따라서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과학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는 통제된 조건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의 시험관을 던져 버리고 동일하게 주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험관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당신이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그 내용물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변화해 간다. 그대가 하는 일이나 실패하는 일이 모조리 그 혼합물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 다시는 원상복구 될 수 없는 것이다.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요,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이다. 내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맹목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것은 낭비인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억누르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는 비극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죽음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또한 죽음은 무익한 것도 아니요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인명의 낭비를 보아왔으며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쓸데없는 희생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늘 기억하고 있다. 혁명가들은 자기의 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것이요,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 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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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께서 편히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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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를 하면서 독일의 사상들을 꾸준히 찾게 된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별로 내가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 영국은 지나치게 간소하고 프랑스는 빈 수레만 요란하다 - 들뢰즈는 예외이다. 그런데 독일의 사상가들을 면면히 살펴보면서 느끼는 건, 그 저변에 독일적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각 사상가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고 시대에 따라 진보하기 때문에 결코 같은 외양을 띄지는 않지만, 그 속에는 항상 하나의 정신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때 나는 니체만은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난, 가장 비독일적인 독일 사상가라고 생각했었다. 많은 철학사가들이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들은 오히려 니체를 종종 영국 경험론과 결부시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니체를 영국 경험론과 결부시키는 것은 명백한 희화화이며 니체 철학의 정수를 지우는 결과만 낳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니체는 독일적 정신의 흐름 속에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초극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 다른 독일 사상가들도 달리 보였다. 초극하는 사상가와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성향으로 회귀하는 사상가, 이 두 가지 종류의 독일 사상가들을 구분해보았다.

니체는 자신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버린 미래의 사상가였다. 스스로도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읽을 수 있다. 자신이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어린아이를 예감했을 뿐 분명히 사자였다. 그것도 분노에 몸부림치는 아직 젊은 사자. 니체 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사상가는 짐멜이다. 아직도 인지도에서 짐멜이 베버보다 아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낮은 정신 수준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단언하건데, 베버는 짐멜보다 한 단계 아래의 사상가이며, 오늘날 짐멜은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반면 베버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특히나 짐멜은 니체도 하지 못했던 주관과 객관의 융합을 모색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 결과적으로는 실패라고 생각하지만. 칸트 또한 자신의 시대를 초극한 인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근대 학문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을 평가절하하기는 힘든 일이다. 다만 오늘날 칸트를 칸트의 저작으로 공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며, 철학 외에 여타 인문학들을 통해 그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초극'에 성공한 이들이다. 다음으로 성공과 실패 중간에 걸쳐있는 이로 마르크스를 들고 싶다. 그의 유물론이 단순히 헤겔의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실패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뚜렷한 무엇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공도 아니라고 본다. 그의 성공은 항상 파편적으로 희미하게만 나타나며, 이는 정신 분석에서의 증상을 연상시킨다.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마르크스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의 경우는 마치 정신의 단면이 잘려져 텍스트라는 평면 위에 펼쳐지는 드문 사건이기 때문에 항상 현상의 '이면'에만 천착하는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리라.

베버와 헤겔은 초극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는 사상가들이다. 때문에 나는 이들을 싫어한다. 특히 헤겔이 그렇다. 내 눈에 헤겔의 사상은 인간 정신이 퇴화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다. 헤겔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젝이 오늘날 세계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은 그 동안 수많은 선각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얼마나 무지몽매한지 보여주는 실례이다. 베버의 경우, 그가 철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이며 그가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가는데 얼마나 일관되게 노력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심하게 비판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항상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는 노력이 천재성을 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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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파이터 2010-02-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는 베르그송과 부르디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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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농업에서 암소의 활용성 대 서양 농업의 비교
암소는 땅을 경작하는데 쓰이면서, 배설물 또한 토질 유지에 유용하게 쓰임.
반면 트랙터는 땅을 경작하는 대신 땅을 오염시키고, 이에 따라 새롭게 화학비료의 필요성을 불러옴    

기존 농업에서는 각 요소들의 효율성은 떨어졌지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만큼은 되고, 관계론적 균형이 확립되어있음 

현대 농업에서는 각 요소들의 효율성이 훨씬 발전했지만 관계론적 균형이 깨져있음
관계론을 살필 때 두 가지 요소: 자연과 산업

산업 내적 균형이 깨졌다는 것은 암소의 전천후 활용에 비해 현대 농업에서는 트랙터에 대한 비용 따로 화학비료에 대한 비용 따로 지불해야 하는 점에서 드러남
자본주의에서는 이를 가치창출이라고 포장. 실제로는 물 흐르듯 하나의 통일성을 유지했던 농업을 망가뜨려 단계별로 분리시킴으로써 부가가치(수익)을 뽑아냄. 즉, 가치창출이라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만 그러한 것이며 농민의 입장에서는 가치파괴
관계론적 관점에서 농업이 더욱 고비용 산업으로 퇴화 

결국 토지는 트랙터에 이어 화학비료에 의해 점차적으로 오염되므로써 불모의 땅이 될 운명에 처함.
기존 농업은 자연적 비료를 공급함으로 토지의 지속성을 담보했으나, 현대 농업 방식으로는 자연적 균형이 붕괴 

일시적인 수확량은 현대 농업이 많지만 이는 자연의 파괴를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결국 멈출 수밖에 없음.

구조는 적응의 결과
의식은 구조의 반영인 동시에, 적응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종교적인 숭배가 근거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 덕분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자식일 뿐이다. 반면 암소를 숭배하는 인도인들은 실제로는 암소를 잡아먹는다.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식과 행동이 통합되어있지 못하다는 단점.

왜 보다 객관적인 인식으로 발전하지 않는가
인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며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의미하기에 '거대한 전환'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의존성 - 개인으로서의 의식은 암소를 잡아먹는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를 공동체에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상호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 머무르며, 이를 하나로 통합할 의지는 없다.

같은 환경에서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음 - 야노마모족의 호전성
객관성은 관계론적으로, 주관성은 요소론적으로

야노마모족 여성들은 왜 구타를 당연시하는가
생존의 수단으로서의 인식
자연 속에서 공동체를 이뤄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조건
따라서 인식은 생존에 복무한다.  

페미니즘은 어떻게 시작하나
여성이라는 공동체와 남성이라는 적
현실에서 여성만의 공동체는 없다
개인 대 공동체라는 상호배타성 발현의 한 종류 - 한 집단을 위한 다른 집단의 희생 합리화. 반면에 한 개인으로서의 의식 성장이 일어남. 의식적으로 공동체를 보지 못하지만, 그럼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생.

호혜성과 재분배 제도
공동체의 정치경제 유지에 필수
환경적 요인들 - 둘간의 차이는 규모와 밀집화
많이 줄수록 뛰어나다.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
많이 갖는 것만이 장땡인 유럽인들은 이해불가

화물신앙 - 약탈하는 것이 균형의 회복임을 원주민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의 미개함을 비웃지만, 오히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믿음 '열심히 일하는 자가 부자된다'이 거짓된 것임을 꿰뚫어본다. 부자는 일하지 않으며, 일하는 자는 부자가 아니다.

과학이 얻는 것과 잃는 것들
사물 속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낸다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
동형적인 것들의 공명이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의 변화

관찰하는 자신은 고정되어 있는 존재로 간주할 경우
나 자신이 올바른 관찰의 가장 큰 장애물
관계론적 균형을 발견할 수 없는 무능력
과학이 진행될수록 요소론적으로만 나아가며 관계론적 측면은 점차적으로 소멸
과학이 발전하여 현실에 적용되면 될수록 우리의 생존기반은 파괴된다는 역설이 성립  

격물을 통해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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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독해는 퇴행적이다. 비록 간결하고 세련된 텍스트를 갖추고 몇 가지 논점에서 기발한 통찰을 보여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마르크스를 '넘어서기'는 커녕 그의 담론 안에 머물며 사소한 부분들에 착목함으로써 중요한 부분들을 사문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는 논의를 진행하면 할수록 마르크스의 본래 함의를 점차적으로 왜곡하며, 이는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교환 양식을 주장하는데서 그 정점에 달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공황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고 주장한다. 공황은 자본주의의 능동적인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능동적인 측면이란 화폐에 대한 욕망이다. 고전경제학자들은 부의 본질이 금, 은 등의 화폐에 있다는 중상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화폐는 교환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는 화폐의 축적이 자본의 운동에 있어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며,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공황이다. 공황 시 모든 사람들이 화폐를 획득하는데 집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이 봤을 때, 본질적으로 종이에 불과한 화폐에 대한 욕망이 현실 사회를 추동한다는 점은 경제라는 하부 구조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으며 어떤 신앙적인 문제, 종교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자본제 이전의 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본제 고유의 특징이며, 이러한 능동적 측면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따라서 기존의 생산 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로는 이를 해소하기 어렵고, 새롭게 교환 양식을 고찰함으로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공황을 해명하려 했을 뿐, 공황 자체의 중요성을 고진이 주장하는 것처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고진이 공황에 착목하는 이유는 그가 공황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오류다. 공황은 자본의 욕망 운동의 결과이지, 사람들의 욕망 운동의 결과가 아니다. 공황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화폐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공황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중상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공황에 착목한 이유는 공황이 초래하는 생존의 위협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자본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과 일치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때는 자본주의가 평온한 시기, 곧 호황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자본의 운동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에 별다른 마찰없이 참여하며 심지어 능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사람들의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도 비례해서 생긴다.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분명히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에 반하여 자본의 운동에 맞춰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커지기 마련이며, 종국에는 폭발한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의 폭발이 자본의 운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 체제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데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과 자본을 혼동하지 않았다. 자본의 욕망과 사람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이 둘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일 때에도 이를 명료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고진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욕망'이라는 일반 명사만을 보고 '누구의 욕망'인지 질문하지 못함에 따라 자본의 욕망에 사람의 욕망이 묻어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했다. 욕망을 올바로 인지하는 것은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주춧돌이 되기 때문에 그의 분석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썩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욕망이라는 단어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실제로 욕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렇다고 자본가의 욕망으로 대체할 수도 없다. 실제 개별 자본가가 이를 욕망한다고 한들 이것이 자본의 운동이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모든 자본가들이 능동적으로 이 욕망을 갖는다고 볼 수도 없다. 욕망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은유로써, 자본의 운동 구조가 지향하는 정점을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결코 생기적인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사람들에게 귀속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지배하는 구조, 이것이 하부구조이다.  

고진이 주장하는 종교적인 구조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구조의 욕망과 동일시할 때 생기는 심리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구조는 하부구조의 심리적 반영일 뿐이며, 이러한 구조가 자본제만의 특징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실례로 봉건제에서의 욕망은 지배의 욕망, 곧 영토확장의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이 국가와 군대라는 폭력 기구를 창출하고 전쟁을 항상적인 상태로 만든다. 다만 이것이 자본제에 비해 뚜렷하지 못한 것은, 구조의 지향점을 선취할 수 있는 기회가 자본제 안에서 이론적으로 모두에게 열려있는 데에 반해 봉건제 안에서는 특정 소수에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의 동일시가 자본제 내에서 훨씬 더 수월하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라는 틀 안에서만 봤을 때 그러하지, 세계라는 틀로 관점을 확장시키면 얘기는 달라진다. 따라서 고진의 얘기는 하부구조가 그 성원들에게 갖는 심리적인 효과를 적시한 것일 뿐, 하부구조와 다른 근본적인 무엇을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실(하부구조)이기 때문이지, 스스로 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보지 못하는 고진은 하부구조의 심리적인 효과을 과대평가하여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을 내면화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생산 형식이 아닌 교환 형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에 대한 해법이 바로 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주장에 비추어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교환 형식이든 뭐든 지금의 현실을 바꿔야 하는데, 그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이 이미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윤리이다. 그러나 윤리로 욕망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적이다. 계몽주의는 고진 스스로 화폐에 대한 논의에서 기각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모순에 빠지며, 그의 논의 어디에도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구는 없다.  

고진의 문제는 하부구조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하부구조의 효과에 대해서 스스로 실컷 말해놓고도 이를 하부구조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로 독해할 위치에 있지 못하며 마르크스보다 한참 뒤떨어져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부구조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새로운 체제의 전망을 없애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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