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교정작업을 하다가 잠시 산책나가는 기분으로 <들뢰즈의 니체>(철학과현실사, 2007)에 소개된 참고문헌에 대해 몇 자 적는다. 흔히 <니체와 철학>이 들뢰즈의 대표적인 니체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책을 한국어로 완독한 이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니체>의 역자인 박찬국 교수가 '옮긴이의 글'에서 적어놓은 대로 <니체와 철학>은 "니체의 사상을 어느 정도 숙지하지 않고서는 읽어 나가기 쉽지 않다." 두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번역 또한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들뢰즈의 니체>(원제는 그냥 <니체>)는 들뢰즈가 쓴 니체 해설서로 "니체의 생애부터 짚어 나가면서 니체 사상의 핵심을 간략하면서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역자의 기대에 따르면, "짤막한 책이지만 독자들은 들뢰즈가 보는 니체 사상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엔 이조차도 과도한 기대이고, 니체 책 몇 권 정도와는 씨름해본 경험이 있어야 이 '해설서'에서 뭔가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가령 니체에 관한 몇몇 평전 정도는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프란스키의 평전 외에 다케다 세이지나 미시마 겐이치 같은 일본 연구자의 책들이 요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보다 연륜이 깊은 일본의 니체 연구를 슬쩍 참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니체>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들뢰즈가 제시한 '독일어 참고문헌'이다. 1960년대 중반에 그가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했던 만큼 니체 연구사에 대한 안목이 드러나기 때문. 그래봐야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달랑 네 권의 책을 그는 '참고문헌'에 올려놓았다. 칼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1935), 칼 야스퍼스의 <니체>(1936),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1960),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1961)가 그 네 권의 책이다. 이 중 국내에 어떤 책이 소개돼 있을까?
강의록을 묶은 하이데거의 <니체>는 네 권 분량이며(영어본은 두 권짜리로도 나와 있다), 국내에는 두 차례 그 일부가 번역됐다. 박찬국 교수가 옮긴 <니체와 니힐리즘>은 이 중 4권을 옮긴 것으로 나머지 세 권은 1권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 2권 '영원회귀' 3권 '지식과 형이상학으로서의 힘에의 의지'이다(1권이 이성과현실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니체론은 많이 회자되지만 정작 그 전모가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데, 하이데거 전집이 번역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후설의 제자이자 하이데거의 제자인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 절판됐지만 국내에는 오래 전에 <니이체 철학>(형설출판사, 1984)으로 소개된 바 있다(책의 소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지난달에야 입수했다). 하지만 전공자들에게서도 잊혀진 책인지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책세상, 2006)에 수록된 '니체 관련 국내 출판 목록'에도 빠져 있다. 발터 니그의 <예언자적 사상가>(분도, 1973)가 첫번째 연구서로 올라와 있는데, 절판된 건 마찬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무관심한 처사로 보인다. <니이체 철학>을 옮긴 하기락 선생의 니체 연구서 <니체>(1959)와 <니이체론>(1971)이 더 의미가 있을 뿐더러 출간된 것도 그보다는 빠르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는 추천도서 목록에 핑크의 책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다.
핑크 책은 절판되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학술 서적 읽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추천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책들이 니체의 저서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부조가 아닌 환조로서 니체의 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조각된 얼굴이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핑크는 원래 하이데거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존재와 생성이 유희로서 파악될 때, 니체는 이미 형이상학에 붙들려 있지 않다.” 유희하는 어린아이를 형이상학자로 볼 수 있는가.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니체는 최후의 형이상학자이자 형이상학의 완성자다”라는 평가와 상반된다. 핑크는 니체의 세계관이 그 스승의 우려대로 ‘세계와의 대결과 투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핑크가 그리는 위버멘쉬의 이미지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위버멘쉬의 얼굴은 온화한 놀이꾼이지, 폭력을 휘두르거나 기술을 남용하는 거인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유희 속에서 니체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때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로 포착된다. 이때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의욕함으로써 무언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시켜 주는 개별화 원리이자, 사물을 유한하게 만들어 주는 원리가 된다.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반면 영원회귀는 이 모든 개별적 형식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모든 유한한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무한성이고, 개별적 존재자들을 관통하는 세계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사이의 긴장을 더 높은 원리인 디오니소스의 유희 속에서 해소한다. 인간이 그 자신의 개별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고, 자신을 세계를 향해 개방할 때, 비로소 그는 자신도 우주적인 유희를 공연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니체론으론 <니체 생애>(까치, 1984)와 <니체와 기독교>(철학과현실사, 2006)가 번역돼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한 <니체>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일반 정신병리학> 같은 주저도 번역되지 않은 형편인 만큼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다.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도 가벼운 분량이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대신에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같은 책을 통해서 대략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뢰비트의 책으론 <베버와 마르크스>(문예출판사), 오랜만에 재출간된 <지식과 신앙, 그리고 회의>(다산글방) 등이 더 번역돼 있는데, 절판된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아무튼 들뢰즈의 <니체>나 <니체와 철학>을 읽기 위해서도 이런 정도의 책들은 '배경'으로 소개됨직하다. 과욕일까?..
09.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