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의 책들을 꼽아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미 여러 매체들에서 나름대로 선정한 책들과 부분적으론 중복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완독한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이다(이유가 없지도 않은 게 대부분이 두툼한 책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독서가'가 면책될 수는 없겠지만). 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 한번 더 군소리를 덧붙인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과거를 돌이켜보기엔 아직 일이 너무 많다. 차라리 2007년으로 발빠르게 넘어가는 게 더 나은 성싶다.

그래 책장을 뒤져 책상에 올려놓은 책이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나는 그해 여름에 나온 초판을 갖고 있는데, 기억에 내가 책을 완독한 건 96년 겨울이었다(정확하게는 97년 1월?). 그러니까 대략 10년전이다. 얼마전에 이 책을 2007년 1월에 (다시) 읽을 책으로 꼽아놓은 이유이다. 물론 이거 말고도 읽어야 할 책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들이 얼추 20여 권은 된다. '책읽는 로쟈'를 여럿 빌려와야 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식의 고고학>(1969) 국역본은 2000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지만 역자 서문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내용 자체에 수정이 가해진 것 같지는 않다. 해서, 아마도 몇 차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룰 페이퍼의 인용문 쪽수는 모두 1992년판에 근거한다. 잠시 서론을 읽어보다가 문득 캉길렘(캉기옘)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해보게 됐는데, '푸코와 캉길렘에 관한 메모'라고 제목을 달고 우선은 몇 자 적어놓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1990)이다(아직 국내에서 이 책을 넘어설 만한 연구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이유가 외부에만 있을까?).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십 년이 지났다."(17쪽) <지식의 고고학>의 첫문장이다. 여기서의 '역사가들'은 역주에서 밝혀진 대로 페르낭 브로델 등의 아날학파를 말한다. 국내에서 아날학파에 정통한 학자는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2001), <페르낭 브로델>(살림, 2006) 등을 쓴 김응종 교수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특이하게도 브로델과 아날학파가 과대평가됐다는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아날학파에 대한 프랑스 내의 신랄한 비판은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푸른역사, 1998)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날학파는 역사/시대를 지질학에서의 지층처럼 다루었는바(그래서 총체성의 결여로서의 '조각난 역사'다), 그럴 경우에 당연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한 물음이다. 그들의 관심은 변화/불연속보다는 (장기)지속/연속에만 두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프랑스에서 역사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지속이 아닌 단절에 더 관심이 두어졌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인 역사학과는) 반대로, 흔히 '시대'나 '세기'로 기술되는 방대한 단위들로부터 비약의 현상들로 관심이 옮겨졌던 것이다."(19쪽) 인용문에서 '비약의 현상'은 영역본의 경우 'phenomena of rupture, of discontinuity'로 풀어서 옮기고 있는데, '단절 현상' 혹은 '불연속 현상'이라고 하는 게 이해에 용이하다. '연속성'의 상대어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사/과학철학에서 이런 단절, 단면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가 바로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바슐라르가 사용하는 개념으론 '인식론적 활동과 문턱들(epistemological acts and thresholds)'이 있고, 캉길렘의 모델에 따르면 '개념들의 변위와 변환(displacements and transformations of concepts)'이 있다.

이에 대한 역자의 주석은 이렇다: "캉길렘(깡길렘)은 과학사를 '개념'의 수준에서 다룬다. 캉길렘은 개념과 이론을 구분한다. 바슐라르가 이미 지적했듯이, 순수한 자료 또는 해석되지 않은 자료는 없다. 그러나 캉길렘은 자료와 해석을 그들을 이론에 의해 읽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료를 최초로 해석하는 것은 개념이다. 그 뒤에 이론은 자료를 '설명'하는 것이다. 개념은 한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담지하며, 그 대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이룬다. 이 개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한 이론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캉길렘에 따르면, 오히려 한 개념이 여러 이론들의 변환과정을 담지할 수 있다. 즉 개념은 '이론적으로 다가(多價)'이다. 캉길렘에 있어서 과학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의 현성과 변환을 다루는 것이다."(20쪽)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캉길렘이 바로 미셸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1904-1995)이다.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등과 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이었던 캉길렘의 주된 관심분야는 과학철학이었고(그는 소르본대학의 과학사연구소 소장직을 바슐라르로부터 이어받는다), 주저는 <정상과 병리>, <생명의 인식>. 전자는 <정상과 병리>(한길사, 1996),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 1996) 2종이나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품절됐다.

 

 

 

 

이 책들과 함께 '바슐라르-캉길렘-푸코'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계보를 다룬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필독서이지만 역시 품절됐다(영역본의 제목은 <맑스주의와 인식론>이다). 아쉬운 대로 참조할 수 있는 책이 개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의 제1장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이정우의 <담론의 공간>(산해, 개정판 2000)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새삼 <정상과 병리>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독서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지체된다!)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사두지 못한 책이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없어서 영역본의 이미지를 대신 붙여놓았는데,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문은 제자인 푸코가 썼다. 곁에 국역본이 없어서 영역본에서 인용하면, 아래의 문단은 캉길렘의 위치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웅변해준다. 캉길렘을 제쳐놓으면, 알튀세르도 부르디외도, 라캉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

"Take away Canguilhem and you will no longer understand much about Althusser, Althusserism and a whole series of discussions which have taken place among French Marxists; you will no longer grasp what is specific to sociologists such as Bourdieu, Castel, Papperson and what marks them so strongly within sociology; you will miss an entire aspect of the theoretical work done by psychoanalysts, particularly by the followers of Lacan. Further, in the entire discussion of ideas which preceded or followed the movement of '68, it is easy to find the place of those who, from near or from afar, had been trained by Canguilhem." 

그 캉길렘은 제자인 푸코에 대해 뭐라고 적어놓았을까? 푸코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이지만(아직 절판은 아니라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참고할 수 없다. 대신에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캉길렘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이 지도한 푸코의 박사학위논문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에 대해서.

 

 

 

 

"(*스웨덴의) 웁살라에 머무는 것을 이용하여 많은 일을 한 뒤에, 다시 말해 그것도 하나의 탄생 방법인 책읽기를 우선 한 뒤에, 그때는 함부르크의 프랑스문화원에 있던 푸코가 고등사범학교 교장이던 이폴리트에게 934면의 두툼한 원고를 제출했을 때, 그는 그것에 감탄한 그의 독자(*이폴리트)에게서 그 작업을 내게 넘기라는 충고를 받았다. 내가 그 전에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코를 열광적으로 읽고 나니 내 한계도 보였다. 1960년 4월에, 이 작업이 우선 인쇄되면, 소르본에 학위논문으로 그것을 제출할 것을 나는 제안했다. 아주 호의적인 보고서에서 나는 심리학의 '과학적'지위의 기원들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이 연구가 촉발한 놀랄 만한 주제들 중의 하나를 이룰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었다... 이것은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1938년에 <역사철학 서설>이라는 레이몽 아롱의 학위논문이 불러일으킨 아연실색을 상기시킨다. 심리학에서의 과학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역사에서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22쪽) 

그러니까 푸코의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장 이폴리트였지만, 그는 본논문의 지도를 과학철학 전공자인 캉길렘에게 넘기도록 충고하며 푸코는 그에 따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기의 역사>였다...

06. 12. 31.

P.S. 이제 30여 분 후면 제야의 종이 울리겠군. 여기에 새해 인사를 적어놓기로 하자.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비록 서재를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나의 게으름은 축나고 지적 허영은 남아돌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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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 의학철학의 전통과 깡귀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12 18:52 
    국내에는 미셸 푸코의 스승으로 처음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철학자(혹은 의학철학자) 조르주 깡귀엠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아카넷, 2010)이 출간됐다. 타이틀은 책 제목이라기보다는 논문 제목에 더 어울릴 만한데('학술서'의 티를 팍팍낸다) 마침 교수신문에 책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는 역자의 글이 실렸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필자의 동의하에 옮긴이의 글을 재수록했다고 하니까
 
 
끼사스 2007-01-0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이 페이퍼는 (약간의) 읽고 싶었던 책과 (대부분의) 읽고 싶어지는 책들로 가득한 '환상적 비블리오그래피'입니다…. 로쟈님이 선사하는 새해 선물로 알고 퍼갑니다. 즐거운 일로 가득한 정해년 되시길!

로쟈 2007-01-0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관심이 맞아떨어졌던 모양이네요. 비슷한 관심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알라딘의 매력입니다.^^

테렌티우스 2007-01-26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작긴 하지만 한길사 정상과 병리 표지가 아래에 있네요...^^

http://www.hangilsa.co.kr/bookimage/106normal1.jpg

로쟈 2007-01-2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놓았습니다.^^
 

다니얼 챈들러의 온라인 기호학 입문서 <초보자를 위한 기호학(Semiotics for Beginners)>이 번역돼 나왔다. <미디어 기호학>(소명출판, 2006)이 그것이다. 책이 나온 건 좀 됐는데, 소개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리뷰가 그간에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북데일리에서 이 책을 다루고 있어서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웨일스대학 연극/영화/텔레비전학과 교수인 대니얼 챈들러가 1994년에 처음 인터넷에 공개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기호학 입문(Semiotics for Beginners)'이 교정을 거듭한 후 책으로 발행되었다." 이미지의 책이 그것인데, 나는 한때 문화기호학 강의를 준비하느라 온라인에 떠 있던 텍스트를 다 프린트했었고, 책으로 묶여 나온 것도 (교보에선가) 눈에 띄길래 구입했었다. 말 그대로 '초보자용'이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교재로서는 유용하지 않나 싶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표'니 '기의'니 하는 말만 들어도 멀미를 하는 게 강의실의 현실이기 때문에.

국역본의 제목은 특이하게도 '미디어 기호학'이라고 붙여졌다.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미디어'가 그렇게 어필하는 것인지?). 소개를 더 읽어보면, "기호학의 일반 이론을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으나 미디어 학자가 '미디어 교육' 수업으로 쓴 교재이기 때문에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의 미디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학자인 옮긴이가 원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진과 그림, 그리고 100여 개의 역자주를 추가해서 미디어기호학의 입체성을 충분히 살려 냈다." 즉, 저자와 역자가 모두 미디어학자인 탓에 <기호학 입문>이 <미디어 기호학>으로 탈바꿈한 것. '영화. 텔레비전, 광고'가 활용되는 것은 설명의 용이함 때문이기도 할 텐데, 그것이 '미디어 기호학'으로 특화될 만한 성질의 것인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드물게 눈에 띈 리뷰도 참조해보시길. 아래 사진은 저자 다니엘 챈들러.  

북데일리(06.12. 29) '분홍’은 남자, ‘파랑’은 여자의 색? 기호의 허구!

분홍색과 파란색, 이렇게 두 가지 색 곰 인형이 있다고 하자. 이를 여자와 남자 어린이에게 준다고 할 때, 어떤 색을 줄지 고민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분홍’이 ‘여성’을, ‘파랑’이 ‘남성’을 상징하는 자연스러운 기호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상황은 반대였다고 한다. <미디어기호학>(소명출판. 2006)의 저자 대니얼 챈들러는, 책 서문에서 1918년에 발행된 미국 잡지에 실린 글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일반적 상식에 따르면 분홍은 남자아이를 위한 것이고, 파랑이 여자아이를 위한 것이다. 분홍은 파랑보다 더 과감하고 강렬한 색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잘 어울린다. 반면에 파랑은 더 섬세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에게 잘 받는 색이다.”

현대인은 분홍색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스러움’을 연상하지만, 불과 80여 년 전에는 같은 색으로부터 강렬한 ‘남성성’을 발견했던 것. 저자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기호의 허구성을 깨닫는 것은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일깨운다”며 “바로 여기에 기호학의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즉 <미디어기호학>은 기호학의 일반 이론을 다루고 있는 책. 영국 웨일스대학의 연극.영화.텔레비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미디어학자답게 미디어에 초점을 맞춰 기호학을 풀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샷의 크기(카메라 거리)에는 ‘발화’의 기호가 숨어있다고 한다. 클로즈업(close-up)은 친밀하거나 개인적인 양식이고, 미디엄샷(medium shot)은 사회적 양식이며, 롱샷(long shot)은 비개인적인 양식이라고. 책은 이에 대해 “시각미디어가 재현하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관객의 감정적 개입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이와 반대로 무관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해설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미디엄샷’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흔히 유지하는 ‘사회적 거리’를 모방한다. 관객에게 부담 없이 접근하는 방법이다. 반면에 대상을 멀리서 잡은 ‘롱샷’은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방함으로써, 관객의 무관심을 유도한다.

<미디어기호학>은 이외에도 문학, 미학, 심리학, 예술이론, 신화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최대한 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 움베르토 에코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지도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편지를 저자에게 보냈을 정도다.

역자 강인규(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강사)가 추가한 사진과 그림, 100여 개의 역자주 역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06. 12. 31.

 

 

 

 

P.S. 기호학 입문서들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는 듯한데, 먼저 코블리의 만화책 <기호학>(김영사, 2002)과 존 피스크의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2005)를 챈들러의 책과 함께 추천한다. 피스크의 책은 훌륭한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기호학 입문서'이기도 하다(기호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의 차이는 전자가 '의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후자는 '의사소통'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거기에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책들이 보태질 수 있지만, '교재'로 적합한 것은 이 세 권이다(코블리의 책도 물론 수업용은 아니다). 절판된 책들 가운데는 테렌스 혹스의 <구조주의와 기호학>(을유문화사, 1987)이 조감도로서 뛰어나며, 이께가미의 <시학과 문화기호론>(한국문화사, 1994)도 훌륭하다.

 

 

 

 

물론 국내 저작들도 다수 출간돼 있다. 김경용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 김운찬의 <현대 기호학과 문화분석>(열린책들, 2005) 등이 '교재'로 활용될 만하다. 거기에 기호학연대의 책들은 기호학의 유용한 쓰임들을 보여준다. 한국기호학회에서 출간하는 논문집들은 보다 전문적인 수준이다. 입문서 몇 권을 읽어보고 흥미를 갖게 된다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책들을 더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만한 기호학자들의 이름은 소쉬르(스위스)와 퍼스(미국), 그리고 롤랑 바르트와 그레마스(프랑스),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와 유리 로트만(러시아), 토마스 시벅(미국)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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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 송년회 자리에 가면서 읽은 건 '씨네21' 신년호(07. 01. 02)의 전영객잔 코너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랑페르> 읽기인데,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키에슬롭스키)의 유작 프로젝트를 보스니아의 젊은 감독 다니스 나토비치가 완성한 <랑페르>(=지옥)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먼저 떠난 거장에 대한 애도를 두루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핫'한 글이었다. '지옥은 천국에 다가갈수록 가까워진다'가 그 타이틀인데, 너무 긴 분량에다 아직 온라인에서 서비스되지 않는 글이라 대신에 이달 중순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작년과 비교하더라도 아주 '조용한' 세밑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지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옥 같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천국'이라고 착각하는 지옥에서부터...   

씨네21(06. 12. 13) 키에슬로프스키보다 호사스러운 지옥 <랑페르>

1996년 3월13일의 비극. 이날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심장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으로 키에슬로프스키가 친우 크지슈토프 피시비츠와 계획하고 있던 ‘천국-지옥-연옥’ 3부작은 완전히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가의 유산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난 2002년에 <천국>(Heaven)을 연출한 <롤라 런>의 톰 티크베어에 이어 두 번째로 거장의 봉인된 원고를 풀어젖힌 것은 <노맨스 랜드>의 의기양양한 보스니아 감독 다니스 타노비치다.

‘랑페르’(L’Enfer: 지옥)로 떨어진 주인공들은 세명의 자매다. 그들은 유년기에 겪은 무시무시한 사건 이후 교류도 없이 각자의 상처를 속으로 곰기며 살아간다. 잘나가는 사진작가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맏딸 소피(에마뉘엘 베아르)는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고 있으며, 남편의 뒤를 몰래 밟아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배신감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대학생인 막내 안느(마리 질랭)는 친구의 아빠이자 교수인 프레데릭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프레데릭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느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에 이성을 잃어버린 안느는 금지된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둘째 셀린느의 삶은 가장 적막하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요양원에 있는 엄마(캐롤 부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그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상처를 되짚어내는 이는 세바스티앙(기욤 카네)이라는 미스터리한 젊은이로, 그는 셀린느에게 접근해 자신이야말로 지옥의 근원이었다고 폭로한다.

유년기의 기억은 여전히 자매들을 맴돈다. <랑페르>의 지옥은 영원히 반복되는 인류의 형벌이다. 주인공들은 그 속에서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무시무시한 다람쥐 쳇바퀴에서 떨어져 살아가는 타인에게까지 똑같은 지옥을 안겨준다. 간통과 간음과 불신과 속임수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랑페르>는 세 자매의 지옥을 좀더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종종 그리스 신화의 여인 메데아를 인용한다. 동생까지 희생하며 남편인 이아손을 따랐던 메데아는 남편의 배신으로 분노한 나머지 복수를 위해 자식들을 죽였다.

<랑페르>의 어머니 역시 아비의 목숨을 끊었으나 그 고통을 이어가는 것은 자식인 세명의 자매들이다. 타노비치(그리고 두명의 크지슈토프)는 현세의 메데아들을 통해 인간의 오해와 복수심과 불신이 빚어낸 인간 마음속의 지옥을 들여다보며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메데아의 자식들이며, 그 비극의 핏줄은 인간이 실존하는 한 영원히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제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는 이의 심장에 서리를 내린다. 형식적으로 <랑페르>는 조각조각 다른 색깔로 만들어진 퀼트와도 같다. 각각의 캐릭터를 넓은 보폭으로 뛰어넘으며 진행되던 이야기는 서서히 자매들의 관계를 가까이 가까이 이어붙이고, 발화점이 높은 인간들의 드라마와 관객의 숨을 죽이는 미스터리 구조는 농밀하게 짜여져 결말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물론 영화의 형식은 두명의 크지슈토프가 창조해낸 시나리오 속에 이미 완결되어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유산을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면 거장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유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스 타노비치는 <랑페르>가 자신의 창조물이기보다는 키에슬로프스키를 향한 오마주임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는 주인공들에게 각각 레드, 블루, 그린의 색채를 입히고, (세 가지 색 3부작에 공히 등장하는) 병을 분리수거하는 할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대가를 향한 존경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타노비치가 자신만의 지장을 찍으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젊고 감각적인 붓터치다. <랑페르>의 스타일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만들었음직한 지옥보다 훨씬 호사스럽다. 촬영감독 로랑 다리양(<타인의 취향> <아스테릭스2 :미션 클레오파트라>)은 현실보다 화려한 빛과 색채를 이용해 바로크 음악처럼 휘몰아치는 스토리를 시각화하는 재주를 보인다. 가끔은 시각적 과시가 지나친 나머지 노골적인 미장센으로 주제를 과시하는 프랑스 멜로영화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는데, 이를 내밀한 은유의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은 네 주연배우의 공이다. 언제나처럼 지옥에 빠져 바스락거리는 영혼을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비추어내는 에마뉘엘 베아르는 상처입은 메데아의 모습 그대로이며, 마리 질랭, 카랭 비야, 특수분장에 힘입어 단호하고 냉정한 공기를 발산하는 캐롤 부케의 연기는 각각의 호연을 따라가기 힘에 부칠 지경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프랑스 여배우들의 화음을 듣고자 하는 관객에게는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 이후 가장 기가 막힌 관현악이다.

<랑페르>는 언젠가 만들어질 <연옥>(Purgatory)을 위한 징검다리로도, 69년생 젊은 작가의 야심만만한 행보로도, 프랑스 여배우들의 내공을 발산하는 무대로서도, 충분한 값을 치를 만한 예술품이다. 물론 키에슬로프스키 팬들은 젊은 유럽 작가들의 ‘신곡 3부작’을 향한 오마주 난도질에 마뜩잖아 할 테지만, <랑페르>는 (티크베어의 <천국>이 그랬듯이) 키에슬로프스키의 무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태초에 지고 태어난 영화다. “분명히 큐브릭 팬들은 싫어할 거야. 어쩌겠어.” 큐브릭의 오랜 지기였던 프로듀서 잔 할란이 스필버그에게 던진 충고는 타노비치에게도 유효할 것이다.(김도훈 기자) 

06. 12. 31.

 

 

 

 

P.S. 그러니까 이 '호사스러운' 지옥은 키에슬로프스키의 관객들에게라면 (정성일의 경우처럼) '충분한' 지옥일 수 있겠다("나는 <랑페르>라는 영화보다 원래의 시놉시스, 원래의 토픽, 내가 미처 볼 수 없었던 메모들, 만들지 않은 키에슬로프스키의 판본이 훨씬 흥미롭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한 지지는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와 겹친다(거기에 약간의 틈새를 이루는 건 임권택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이다).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해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데, 아직도 갈길은 멀다. 올해 그에 관한 책들만 해도 서너 권을 더 구한 이유이다. 내년엔 보다 근사한 말들을 덧붙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욕심을 내자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 '씌어지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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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가 보여서 정신없이 클릭했어요! 랑페르 봐야겠네요.. 정성일도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키에슬롭스키 십계 보셨어요? 예전에 조금 봤고 또 보고픈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로쟈 2006-12-3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계>는 오래전에 봤습니다. 저도 소장하고 있진 않은데, 방법이야 구입하시거나 어디서(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운받으시는 거겠지요...

수유 2007-01-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랑페르를 못봣네요.. 이래저래 연말연시는 분주하기만 할뿐 실속은 없습니다. 이제 방학이고 하니 여유롭게 영화관 순례를 해야겠는데 날 기다려주질 않을 영화들일까봐 다소 걱정.

로쟈 2007-01-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이시다니 부럽습니다.^^ 더불어, 새해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분주하지만 실속도 챙기는 한해가 되시길!..

수유 2007-01-0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쟈님도 만족스런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건필!!

도톰 2007-01-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영상 재생툴중의 하나인 곰플레이어의 무료영화 코너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시리즈를 한 편씩 보여주더군요. 지금까지 3개가 걸렸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시리즈를 다 보여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료영화는 유료 영화로 바뀝니다.
http://searchgom.ipop.co.kr/cgi-bin/search_gom_movie.cgi?sub=1&whr=6100&key=%BD%CA%B0%E8

로쟈 2007-01-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다 걸렸으면 좋겠네요...
 

러시아 관련 해외칼럼을 읽고 옮겨놓는다. 한 러시아 언론인의 기명칼럼이 특약으로 게재된 것인데, 러시아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인 2008년 대선에 대한 우려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는 중산층의 정치적 무관심이 그 우려의 근거이다. 하긴 푸틴이 대통령에 재선되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2004년부터어 이미 2008년 대선 전망이 러시아에서는 심심찮은 화제거리였다. 2007년에는 그 윤곽이 가려질 수 있을까? 이 칼럼이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러시아 이야기'가 될 듯하다. 기사의 원문도 아래에 옮겨놓았다. 아래는 지난 푸틴의 재선 직후부터 3선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前세계 체스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

   

경향신문(06. 12. 30) 러시아 중산층의 '정치 무관심'

보통 이맘때면 다가올 한 해를 설계하느라 분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2007년이 아닌 2008년에 더 관심이 쏠려 있다. 과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공언하는 것처럼 2008년 대통령 임기 만료 이후 권좌에서 물러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만일 정말 물러난다면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그 후계자는 크렘린 내부에서 발탁될 것인가, 아니면 외부 인사일까?

푸틴이 (퇴임 이후) 최종 조정자 및 의사결정자의 지위를 버리지 않는 한, 격렬한 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권력과 부가 분리되지 않고, 모든 정부 기관들이 독립성을 잃어버린 환경에서 최상층부의 권력이동은 폭력적인 재분배로 귀결된다. 따라서 기득권의 유지나 확대를 원하는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 변화에 사활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반면 대중은 리더십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다. 국민의 45%는 푸틴이 후계자를 지명하고, 그가 새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가하면 25%는 푸틴이 헌법을 개정해 세번째 임기를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권력이동이 최상층부에 의해 결정되고 투표로 추인될 것이라는 걸 대중은 알고 있다.

입법부내 정파 간 균형도 크렘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동안 집권 세력은 의원 선거 등을 지속적으로 통제했다. 이에 따라 집권층이 원하지 않는 세력이 내년 12월 의회에 진출할 기회는 없다. 러시아의 보통사람들은 정치에서 배제돼 있으며,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언론인 암살 등에 대해서도 ‘사업상의 파트너들’에 의해 살해됐을 것으로 믿으면서도 도통 무심하기만 하다.

러시아에서 국가와 국민 간 괴리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최근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은 더 강해지고 있다. 러시아 국민의 삶은 석유와 가스를 팔아 번 돈으로 공산주의 몰락 이후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 정부가 독재로 치닫고 있지만 더 순응적으로 변하고 있다. 반정부 세력은 정부의 핍박보다도 대중의 무관심에 당황해 한다. 선거 결과가 사전 각본대로 나타날 것이기에 대중은 투표하지 않으려 한다. 대중의 정치참여는 자리를 보전하고 재산을 늘리려는 러시아 관료들에게 장애가 될 뿐이다.

누군가 최근 러시아의 모순된 경향을 중산층의 형성과 함께 급속한 관료제의 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정부의 강화로 설명한 적이 있다. 새로 싹을 틔우는 러시아 중산층은 크렘린의 경제 정책을 개탄하지만 만연한 부패, 사법부 조정, 법치 및 민주주의의 실종 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들은 정부에 해명이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당분간 삶은 현재의 모습대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2008년의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대중으로부터가 아니라 권력층 내부에서 생겨날 것이다. 만약 러시아의 중산층이 호시절에 안주해 정치적 무관심을 계속해서 키워간다면은 장차 권력이 관료제에서 포퓰리스트 세력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게 될 것이다.(마샤 리프먼/ 러시아 언론인)

The moscow mystery of 2008

Usually at this time of year, people are obsessed with what the coming year will bring. But in Russia, the real uncertainty concerns 2008, not 2007. Indeed, one can boil Russian politics down to one issue nowadays: Will President Vladimir Putin stay on as president after 2008, despite repeatedly stating that he won’t? And if he indeed steps down, whom will he groom as his replacement? Will his chosen successor belong to one of the Kremlin’s feuding factions? Or will he pick an “outsider”?

Unless Putin maintains his stature as the country’s ultimate arbiter and decision-taker, there is a high risk of fierce infighting. In an environment where power and property are inseparable and all government institutions are emasculated, a major transfer of authority at the top may lead to violent redistribution. Thus, resolving these questions is vital for Russia’s political elites who are anxious to preserve the current perks and gain more.

As for the public, the vast majority appears resigned to accepting whatever is arranged by the leadership. Fully 45% of Russians believe that Putin will name a successor, and that this person will become the new president. Almost a quarter believe that the constitution will be changed so that Putin can have a third term. Either way, it is almost universally understood that the transfer of presidential authority is masterminded at the top and endorsed at the ballot box. The balance of forces in the legislature, too, will be determined by the Kremlin. Over the past years the configuration of the political parties and the election legislation have been repeatedly modified so as to suit the interests of the ruling elite. As a result unwanted forces have no chance in next December’s parliamentary election.

Alienated from politics, ordinary Russians are indifferent to everything that does not immediately affect them, and do not seek to hold anyone accountable. They were not bothered by the journalist Anna Politkovskaya’s recent murder or the assassination of Andrey Kozlov, first deputy chairman of the central bank, or the implications of Alexander Litvinenko’s poisoning (a majority in a recent poll said he was killed by his “business partners”).

The alienation between the state and the people has a long tradition in Russia, and so does public apathy. But these days the apathy is reinforced by improved living standards. Thanks to windfall revenues from oil and gas, Russians live better than ever in the postcommunist times. Moreover, it may be argued that never in Russian history has the proportion of those who enjoy reasonably decent lifestyles been as high as it is today. As a result, people have become even more compliant in the face of increasingly autocratic governance.

Of course, there are plenty of reasons to complain, and people may grumble, but they won’t come together to oppose the status quo. Marginal political groups and figures who stage protests increasingly find themselves confronting official pressure and even harassment ? all the more reason for the broad public to turn away from them.

Since the election results are preordained, many may simply not vote. In fact, today’s Russian state barely has a reason to muster active support. On the contrary, public participation is seen as an obstacle to the goals pursued by the bureaucracy: self-perpetuation and expanding control over lucrative assets. If any among the Russian elite ever nursed modernizing ambitions, they have abandoned them, for without public participation, modernization is a fallacy.

Instead, the Kremlin increasingly draws on the conservative, Soviet-style electorate as its power base, while alienating the advanced, the entrepreneurial, and the best educated. Stephen Jennings, the chairman of the board of Renaissance Capital, an investment group with a decade of experience in Russia, recently noted the country’s “contradictory trends”: the emergence of a “burgeoning middle class” alongside a “highly centralized government, breeding a new class of state oligarchs and a mushrooming bureaucracy.”

The problem is that Russia’s best and brightest, which Jennings praised for “high management skills, professionalism, productivity, and social and economic ambition,” don’t seem to mind their alienation from policy-making. They may resent the Kremlin’s economic policies, but they put up with Russia’s rampant corruption and its disgraceful ratings in competitiveness indices, just as they put up with the general erosion of democracy, manipulation of the judiciary, and weak law enforcement. Like their less advanced compatriots, they don’t seek to hold the government accountable or call for change. For the time being, life is good enough as it is.

Thus, if there is any threat to a smooth transition in 2008, or a risk of subsequent destabilization, it may stem from infighting at the top, not from the public. Optimists hope that at some point Russia’s burgeoning middle class will assume responsibility for Russia’s future and demand a radical improvement in governance. But what would trigger a shift from passive compliance to active public participation?

If good times breed political apathy, and bad policies lead to a socioeconomic decline, Russia’s best and brightest may find themselves outstripped by populist forces.

06. 12. 31.

 

 

 

 

P.S. 러시아의 정치사상사와 현정치에 관한 책들 역시 기대만큼 풍족하지 않다(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들에 한정하면 더더욱). 저널적인 차원에서라도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는 책들이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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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1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3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감사합니다. 내년에 허리가 좀 펴질 만한 책들을 골라보겠습니다.^^ 혹은 앞으로는 책을 누워서 보심이...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시 한편을 떠올리게 됐다. 바스코 포파(1922-1991)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문학동네, 2006)이 이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인데, 내게 포파는 무엇보다도 '작은 상자'의 시인으로 기억돼 있다. 그가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세르비아)의 시인이라는 건 이 참에 알게 됐다(동유럽쪽이란 기억만 갖고 있었다). 마치 오 헨리 단편에서처럼 한 20년만에 절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삐 시인과 그의 시에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몇 가지를 옮겨놓는다. 일단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작은 상자'를 다시 읽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래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바스코 포파). 영역시도 연이어 붙여놓으면서.  

 

작은 상자

작은 상자는 이제 젖니가 나고
키가 작고
면적도 부피도 작다.
그게 작은 상자가 갖고 있는 전부다.

작은 상자는 점점 커져서
이제 작은 벽장도 갖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작은 상자가 그 작은 벽장 속에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는 날마다 조금씩 크고 쉬지 않고 커졌다.
이젠 그 속에 방과
집과 마을과 땅과
그리고 전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던 세계까지 갖게 되었다.

작은 상자가 제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너무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작은 상자는 작은 상자로 되돌아갔다.

작은 상자 속에는
아주 작은 세계만 있다.
당신은 작은 상자를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그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작은 상자를 조심해야 한다.

The Little Box by Vasko Popa

The little box gets her first teeth
And her little length
Little width little emptiness
And all the rest she has

The little box continues growing
The cupboard that she was inside
Is now inside her

And she grows bigger bigger bigger
Now the room is inside her
And the house and the city and the earth
And the world she was in before

The little box remembers her childhood
And by a great longing
She becomes a little box again

Now in the little box
You have the whole world in miniature
You can easily put in a pocket
Easily steal it lose it

Take care of the little box  

다시 읽어보니까 초현실주의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 시집에 주목하고 있는 리뷰는 드문데, 서울신문의 소개기사를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6. 12. 29) 은유·환상의 유고 詩세계

전쟁의 포성으로만 기억되는 유고슬라비아. 그들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만큼 유고슬라비아 문학은 우리에게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유고슬라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오민석 옮김)은 호기심의 한 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포파는 현대 유고슬라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작은 상자’를 비롯, 그의 대표시 몇편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시집의 형태로 전모를 선보이기는 처음이다.

Self-portrait as a wolf, by Anthony Weir

“…암늑대가 살아 있는 한, 할머니는/ 리넨 천 같은 왈라키아 발음으로/ 나를 작은 늑대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는 나에게 비밀스레/ 날고기를 먹였고 나는 성장하여/ 언젠가 무리를 이끌 것이었다// 나는 내 눈이/어둠 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할 것을/믿었다…”

포파의 ‘늑대의 눈’이란 시의 한 대목이다. 포파는 세르비아 전통에서 문학의 전범을 찾는다. 이 시집에 실린 ‘늑대 시편’이 그 한 예다.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늑대는 숭배와 경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세르비아인들은 늑대의 전사적 기질을 동경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늑대로 부활한다고 믿는 그들은 코소보 평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늑대를 자신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늑대는 시적 화자의 먼 조상이며 한편으론 시인의 자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 늑대는 죽음이라는 절대 폭력과 싸우는 절름발이 늑대다. 시인은 이 실존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애국성인 성(聖) 사바의 존재를 새삼 일깨운다. “별들이 그의 머리 주위를 돌며/ 그에게 살아 있는 후광을 만들어준다// 천둥과 번개가/ 보리수 꽃 흩뿌려진/ 그의 붉은 턱수염 안에서 숨바꼭질을 한다…”(‘성 사바’ 중에서)



세르비아 국민이 그토록 추앙하는 성 사바가 보여준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포파가 초현실주의 언어를 통해 닿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닐까. 이 시집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국 시인 찰스 시믹이 번역한 영역본 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 그가 비록 포파 시의 가장 이상적인 번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중 번역의 아쉬움은 남는다.(김종면 기자)

06. 12. 30.

P.S. 아쉬움을 덜어줄 만큼 더 소개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유고(세르비아) 문학. 작년에 원전 번역으로 출간된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2005)와 바스코 포파의 시집. 그리고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초현실주의적(!) 영화들. 그 쿠스투리차가 2006년에 찍은 영화는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 <마라도나>이다. 하긴, 유고와 아르헨티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공유하는 나라들이므로 이 둘의 조합이 어색하지만은 않겠다. 작은 '축구신동' 마라도나, 축구장에선 그를 조심해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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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30 10:38   좋아요 0 | URL
오..저 시가 오늘 아침 마음에 들어오네요.바스락 바스락...

로쟈 2006-12-30 12:19   좋아요 0 | URL
우리는 각자의 작은 상자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죠...

Joule 2006-12-30 21:42   좋아요 0 | URL

작은 상자, 저 시를 꽤 오래 찾아다녔더랬어요. 한 번 첫눈에 반한 사람은 시간이 흘러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대도 또다시 눈길이 가는 것처럼 시도 그래요.


nada 2006-12-30 21:45   좋아요 0 | URL
쿠스트리차와 마라도나라니. 마라도나의 짧은 목에 걸린 은 목걸이마냥 생경하군요. 마이클 만의 알리 꼴 나는 거 아닐까요.

로쟈 2006-12-31 00:18   좋아요 0 | URL
joule님/ 맞습니다.^^
꽃양배추님/ 좀 의외이긴 하지만 생경하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극영화가 아니라 그냥 다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