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내가 자주 들로는 카페에 들렀다가 나와 무관하지 않은 펌글을 읽었다.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책의 오피니언 리더'로 다음카페 '비평고원'과 알라딘서재를 소개하고 있는 기사인데, 쑥쓰럽게도 '로쟈'란 이름의 그 '리더'의 하나로 거명되고 있다. 물론 그 리더는 '책벌레'들의 리더이다.

한겨레(07. 01. 05) 책의 오피니언 리더 ‘인터넷 서평꾼’

밥을 먹듯 책을 파먹고 숨을 쉬듯 문자를 호흡하는 이들. 인터넷상을 어슬렁거리는 책벌레들이 있다. 새 책에 관한 정보를 재빨리 잡아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책의 내용을 평가하며 책의 허점을 일러준다. 열렬히 옹호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냉정히 외면하는 책도 있다. 책에 관한 한 이들은 인터넷상의 안내자이며 파수꾼이고 정보의 허브다. 책에도 여론주도층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익명의 바다에서 등대 노릇을 하는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합처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 포털 다음의 카페 ‘비평고원’이다. 책의 숲이라 할 이곳은 저마다 무림의 고수를 자처하며 갈고 닦은 내공으로 일합을 겨루는 공간이다. 일본의 최근 소설에서부터 프랑스 현대 철학까지 막 출간된 책들이 품평의 대상이 된다. 서슬 퍼런 칼날이 책의 허점을 찌르고 오래 쌓은 지식으로 책의 특장을 증명한다.

지난 2000년 문을 연 이 카페의 회원은 줄잡아 3천명에 이른다. 매일 500여명이 이곳에 들어와 책의 정보를 얻어간다. 이 무림에서 돋보이는 고수는 30~40명 정도다. 대다수가 문학·철학·정신분석학 등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박사과정이다. 이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매번 새로운 초식을 선보인다.

이들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사람이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 알려진 필명 ‘로쟈’다. 로쟈의 강점은 문학·역사·철학·사회서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나온 책은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개해준다는 점이다(*한때는 그랬다). 로쟈의 순발력은 전광석화급이다. 책이 나오면 즉각 해당 책의 내용과 배경을 설명해주고 저자의 다른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며 중요한 서평을 끌어다 덧붙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책과 관련이 있는 해당 분야의 다른 책들도 성격별로 정리해 소개해준다. 말하자면 로쟈는 최근에 나온 책의 지도를 그려주는 사람이다. 로쟈의 지도는 오차가 적을 뿐더러 군더더기가 없고 신속한 편이어서 책 정보 전달꾼으로서 그의 지위는 확고하다. ‘비평고원’의 초기화면에는 로쟈가 운영하는 코너 ‘책의 바다’가 떠 있다.

비평고원 회원인 최성희(37·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씨는 “로쟈처럼 책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올려주는 회원도 있지만, 회원들의 다수는 책 자체를 놓고 평가하고 토론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이 카페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글 쓰는 이들이 주로 대학 박사과정급 이상이기 때문에 전공 지식이 풍부하고 그러다 보니 논쟁이 일며 격렬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한번 싸움이 붙으면 몇 달씩 진행되기도 하고 논쟁에서 졌다 싶으면 아예 카페에서 탈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논쟁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평가가 많지만, 외서의 경우 번역의 질을 놓고 벌어지기도 한다. 잘못된 번역을 문제 삼아 품평이 오고가는데, 때때로 번역자가 직접 들어와 항의하다가 일대 격전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최성희씨는 “비평고원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좋은 번역서를 추천하고 질 나쁜 번역서를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 곳”이라며 “대학에서 강요하는 답답한 논문식 글쓰기의 대안을 찾아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상에서 필명으로 교류하지만 1년에 한두 번씩 오프라인 모임도 연다. 지난 연말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 10여명이 서울 종로 맥주집에서 모여 송년회를 열기도 했다. 이 카페를 만든 운영자 조영일(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씨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많다”며 “책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을 원하는 네티즌들이 물어물어 이곳으로 찾아들다보니 지금은 인문학 책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곳으로는 가장 다채로운 곳이 됐다”고 말했다.

비평고원이 인문학 연구자들의 자생적 모임이라면,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나의 서재’는 서점에서 북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준 방이다. 로쟈를 포함해 비평고원의 주요 필자 가운데 일부가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 글을 쓰는 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알라딘의 인문서 담당 김현주씨는 “‘나의 서재’는 서점을 찾는 독자들에게 책을 안내해줄 수 있는 필자들이 주로 사용한다”며 “2003년 8월에 문을 연 뒤 3만~4만명이 서재에 필자로 가입했고 그 가운데 40여명이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현직 일간신문 기자로 알려진 필명 ‘딸기’, 대학 3학년 때부터 3~4년째 활약하고 있는 ‘평범한 여대생’, 계간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서평을 쓰는 ‘바람구두’,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마태우스’ 등이 알라딘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대표급 필진이다. 김현주씨는 “이분들은 책이 서점에 깔린 직후에 번역이나 내용을 꼼꼼히 따져 품평하기 때문에 일종의 검증장치로서 기능한다”며 “특히 인문서의 경우엔 이들의 평가가 초반 판매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고 말했다.

알라딘은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책을 구입할 경우 책값의 1%를 적립해주는 인센티브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필진은 한달이면 1만원 이상의 적립금을 받기도 한다고 김현주씨는 말했다. 적어도 100명의 독자가 필자의 글을 읽고 책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의견이 책을 선택하는 데 기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데, 말 그대로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셈이다.

또다른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알라딘과 유사한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리뷰를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을 위해 독자칼럼란을 두고 있는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한동안 인기를 끈 난이었고, 요즘 가장 조회수가 많은 칼럼난은 ‘정군의 책 대 책’이다(*이 분은 우리의 '정군' 아닌가? 양다리를 걸치시다니). 이 칼럼의 필자인 ‘정군’은 1주일에 한두 번씩 두 권의 책을 선정해 비교 분석해준다. 예스24에서 블로그 관리를 담당하는 심현숙씨는 “40명 정도가 개인 블로그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적으면 1주일에 한두 편, 많으면 하루에 한 편 정도 책 리뷰를 올린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 필자들 가운데 특히 인기가 있는 필자에게 따로 코너를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정군의 코너가 바로 이 경우다. 심현숙씨는 “주목도 높은 필자들의 글에는 적어도 열 건 정도의 댓글이 달린다”며 “대다수 댓글이 좋은 정보를 고맙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교보문고도 알라딘·예스24처럼 서평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책 오피니언 리더의 시대다.(고명섭 기자)

07.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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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01-0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멋져요.^^

마냐 2007-01-05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아침에 기사 보고...인사 드리려 했슴다. ^^

비연 2007-01-0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지심!

조선인 2007-01-0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물만두 2007-01-05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경!!!

다락방 2007-01-0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지잖아욧!

저 이 페이퍼 퍼갔어요. :)

드팀전 2007-01-0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신문에 이름을 올리신 고수 분들과 함께 있다는 자부심까지 ..^^ ㅋㅋ.
딸기님은 기자셨구나..그리고 평범한 여대생님은 이름 바꾸었는데 .히히..

파란여우 2007-01-0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제가 아는 분들에욧!^^

멜기세덱 2007-01-0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한 방 딱~~ 찍어서 내보내면 좀 좋아...ㅋㅋ '로쟈' 그 이름만 들어도 떨려요..;;'' 대단하세요..!!

비로그인 2007-01-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의 책들이 많이 팔리는데 일조하고자 몸을 바치렵니다=3=3=3

수유 2007-01-0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본명과 직업은 공개되질 않는군요^^ 물론 많은 분들이 알고 있겠지만.

가을산 2007-01-0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정군님, 딸기님..... 그리고 파란여우님! (/^-^)/

yoonta 2007-01-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활발하게 글을 쓰는" 서평꾼?이 적군요. 4000만명이 넘는 인구중에서 40여명이라니..-_-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안읽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지...

마노아 2007-01-0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이름들이 많이 나와서 반가워요. ^^

마립간 2007-01-0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맑음 2007-01-05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지도를 그려준다는 말에 100% 공감, 그래서 다들 로쟈님의 서재를 방문하는 게 아닐까요.^ㅅ^

딸기 2007-01-05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아흐아... 미치겠당

로쟈 2007-01-0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다가 제 최다 댓글을 갱신하겠군요. 댓글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답글을 달지는 못하지만(저는 마태님이 아니랍니다.^^), 여하튼 찾아주신 분들께 두루두루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동료 '벌레'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올해는... 부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염원과... 우리 책벌레들의... 무사안일과...

마늘빵 2007-01-0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쟈님. ㅎㅎ 저도 퍼갑니다. 추천 꾹이에요.

Mephistopheles 2007-01-0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싸인이라도 받아놔야 겠습니다...^^

구름의무게 2007-01-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무심코 신문읽다가 보고는 안면도 없으면서 혼자 반가워했답니다. ^^

뽀송이 2007-01-05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지군요!!
님의 유명세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처음 인사 드려요~^^*
저도 기사보고 반가웠어요!!

비로그인 2007-01-0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켁;; 이름을 괜히 바꿨나 라는 생각을 잠시;;; 근데 제 실력에 이 기사에 들어가도 되나 민망합니다-_-

로쟈 2007-01-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갓 책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인데, 덕분에 책을 구입하거나 읽으시는 분들에게 유익하다면 보람이 없진 않겠습니다.
평범한 여대생님/ '평범하지 않게 된' 닉네임 대신에 고르신 '괄츠'는 좀 특이하네요.^^
 

방학중인 아이에게 과제도서를 읽히기 위해서 동네도서관에 갔다가 문학잡지들을 훑어보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짐작에 한국은 전세계에서 (전국단위) 문학잡지가 가장 많이 출간되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그 잡지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인-필자들의 수에 있어서도 단연 세계 수위권이 아닐까 싶고.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양적인 팽창의 이면에서 문학/비평의 영향력을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행물 열람실에 스무 명 넘게 앉아들 있었지만 문학잡지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아이 때문에 오래 버티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고, 다만 겨울호 시잡지들에 지젝과 정신분석에 관련한 글들이 게재된 걸 보았다. 많이들 읽기는 하는가 보다.   

집에 돌아와 아이가 피아노학원에 간 틈에 나는 미루어두었던 책 주문을 넣었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거 같은데, 노튼(W. W. Norton)출판사에서 내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시리즈의 <라캉> 편이 이번 달에 출간됐다(작년에 나는 <데리다>를 구했었다).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 작년까지는 선주문을 넣을 수 있었을 뿐인데, 이젠 온전하게 주문을 넣을 수 있다. 아마존의 소개를 빌면 이렇다.

"The How to Read series provides a context and an explanation that will facilitate and enrich your understanding of texts vital to the canon. These books use excerpts from the major texts to explain essential topics, such as Jacques Lacan's core ideas about enjoyment, which re-created our concept of psychoanalysis."

그러니까 자크 라캉 입문서로서 더없이 유익하고 요긴해 보이는 책이다. 분량도 128쪽이니까 전혀 부담이 없다. 이 달안으로 책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참고로, 주문을 하진 않았지만 지젝이 편집하고 서문을 쓰는 버소출판사의 새 시리즈 '혁명(Revolution)'도 눈길을 끈다. 이달부터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마오쩌둥의 <모순론/실천론>과 로베스피에르의 <미덕과 테러>가 일착으로 나왔다. 마오쩌둥의 책은 우리의 경우 두레와 범우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는데 현재는 모두 품절됐다. 이 참에 이 새 시리즈를 번역해내는 건 어떨까?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함께 덩달아 주문한 책은 작년에 출간된 전기 <자크 데리다>이다. 컨티뉴엄(Continuum)출판사에 나왔고, 분량은 250쪽. 내가 알기엔 최초의 전기이며 평도 나쁘지 않다. 한데, 작년에 왜 주문하지 않았을까? 짐작에는 내가 검색해볼 당시에 아직 미간이었던 듯하다. 혹은 예정보다 출간이 늦어졌든가. 아마존의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At the time of his death in 2004, Jacques Derrida was arguably the most influential and the most controversial thinker in contemporary philosophy. Deconstruction, the movement that he founded, has received as much criticism as admiration and provoked one of the most contentious philosophical debates of the twentieth century. Jacques Derrida: A Biography offers for the first time a complete biographical overview of this important philosopher, drawing on Derrida's own accounts of his life as well as the narratives of friends and colleagues. Powell explores Derrida's early life in Algeria, his higher education in Paris and his development as a thinker. Jacques Derrida: A Biography provides an essential and engaging account of this major philosopher's remarkable life and work."(강조는 나의 것)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shkin

지젝과 데리다 관련서와 함께 전공 관련서들도 두어 권 주문했는데, 가장 반가웠던 책은 캠브리지대학의 컴패니언 시리즈로 나온 <푸슈킨>. 이 또한 이달에 첫선을 보인 책이다. 한 인터넷서점의 소개는 이렇다.

Alexander Pushkin stands in a unique position as the founding father of modern Russian literature. In this Companion, leading scholars discuss Pushkin’s work in its political, literary, social and intellectual contexts. In the first part of the book, individual chapters analyse his poetry, his theatrical works, his narrative poetry and historical writings. The second section explains and samples Pushkin’s impact on broader Russian culture by looking at his enduring legacy in music and film from his own day to the present. Special attention is given to the reinvention of Pushkin as a cultural icon during the Soviet period. No other volume available brings together such a range of material and such comprehensive coverage of all Pushkin’s major and minor writings. The contributions represent state-of-the-art scholarship that is innovative and accessible, and are complemented by a chronology and a guide to further reading.

편자는 앤드류 칸이라는 비교적 젊은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옥스포드대학의 조교수이다. 책은 그다지 두껍지 않지만, 아래의 목차를 보면 (적어도 러시아문학 전공자라면) 가벼운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List of illustrations Page.ix
  List of contributors viii
  Acknowledgements ix
  Note on the text x
  Chronology xi
  Map xv
 
  Introduction 1
  Andrew Kahn
 
  part I Texts and Contexts
1   Pushkin’s life 11
  DAVID BETHEA AND SERGEI DAVYDOV
 
2   Pushkin’s lyric identities 26
  ANDREW KAHN
 
3   Evgenii Onegin 41
  MARCUS LEVITT

 

 

4   Pushkin’s drama 57
  CARYL EMERSON
 
5   Pushkin’s long poems and the epic impulse 75
  MICHAEL WACHTEL

 

 

6   Prose fiction 90
  IRINA REYFMAN
 
7   Pushkin and politics 105
  OLEG PROSKURIN
 
8   Pushkin and history 118
  SIMON DIXON

 

 

9   Pushkin and the art of the letter 130
  MIKHAIL GRONAS
 
10   Pushkin and literary criticism 143
  WILLIAM MILLS TODD III
 

 

part II The Pushkinian tradition

 
11   Pushkin in music 159
  BORIS GASPAROV

 

 

12   Pushkin and Russia Abroad 174
 
  ROBERT P. HUGHES

 

 

13   Pushkin filmed: life stories, literary works and variations on the myth 188
  STEPHANIE SANDLER
 
14   Pushkin in Soviet and post-Soviet culture 202
  EVGENY DOBRENKO
 
  Appendix on verse-forms 221
  Guide to further reading 224
  Index 228

아무튼 조만간 몇 권의 책들이 장서 목록에 오르게 되겠다. 애서가들에게 새해를 맞는 '보람'은 다른 데 있지 않다...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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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05 11:15   좋아요 0 | URL
저로선 좋은 번역서를 기다려봐야겠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이나 '라캉'이라면 곧 나올수도 있겠지만.. 좋은 번역서를 기다려봅니다.
 

연초부터 각 매체마다 책읽기에 유난한 관심들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의 '사회적 독서' 운동에 이어서 한국일보에서는 '우리시대의 명저 50' 시리즈를 연재한다고 한다. '명저'라고는 돼 있지만 목록을 보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들도 많이 망라돼 있다. '명저'라는 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책이란 뜻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 듯싶다. 아무튼 이 50권에 대한 해제가 다 게재되면 올 한해도 다 가는 게 아닌가 싶다(하냥 섭섭할까?). 50권의 면면들을 구경해볼까라는 '무모한' 욕심도 품어봄 직하지만, 이미 펌글에 도서(상품) 이미지를 집어넣지 말도록 재차 당부를 받은 터라 자제하기로 한다(이러한 펌글도 가급적 자제할 예정이다). 맨숭맨숭하긴 하지만, 목록만을 한번 일람해보는 것으로 '책구경'을 대신해야겠다(시간이 남아서 좋긴 하군).  

한국일보(07. 01. 04) 우리시대의 명저 50

우리 저술의 숲은 건강하고 우람했다. 지성의 숲을 거니는 일은, 굳이 한 그루 한 그루의 결을 더듬고 껴안아보지 않고서도, 황홀하고 뿌듯했다. 책의 전문가들이 전해온 목록의 갈피에서 밀려오던 희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또 저자와 책이 갖는 이름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기획팀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고통마저도 행복했다.

추천ㆍ자문단과 기획팀은 선행 연구로 불모의 땅을 일군 선구적 저서와 학문적으로 고전의 무게를 지닌 책, 지식 대중화를 선도한 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또 특정 저서의 가치 못지않게 해당 저자가 우리 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높이 산 경우도 있다. 시대적 담론과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식민지 사관과 실증 사학을 넘어 지배집단의 교체라는 독자적 사관으로 한국사를 정립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고난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양 신학과 전통 종교사상을 대비하며 우리 문화의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한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재야 학자로서 학문적 엄밀성과 함께 역사의 빈틈을 성실히 메워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서양고대철학 연구의 수원지로 여전히 마를 기미 없이 푸르게 출렁이는 박홍규의 <희랍철학논고>, 우리 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학술적 근거를 실증해 그 문제 의식을 지금까지 이어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해당 분야에서 아직도 이들의 업적을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두종, 전상운, 김용준, 유민영 등의 노작들이 그렇게 선정됐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지성의 균형점을 잡아준 리영희, 1980년대의 질곡에 <민중신학>이라는 독보적인 신학적 응답을 제시했던 안병무, <전태일 평전>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변혁운동의 맥을 이어준 조영래,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희의 현대적ㆍ변혁적 연구와 실천으로 당대 문화의 큰 정신을 구축했던 채희완, 억압의 시절을 몸으로 살았고 몸의 고백으로 시대를 움직인 서준식 정수일 홍세화의 저작들도 놓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혔다.

경제학이 강단을 벗어나 어떻게 현실과 만날 수 있는지를 가슴으로 보여준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고도의 과학 전문 연구분야를 대중적 글쓰기로 선도한 최재천의 <개미 제국의 발견>, 20세기 신화 열풍을 주도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동양미술의 오주석, 서양미술의 이주헌, 한시의 정민, 미학의 진중권 등은 인문학 대중화의 전범으로 꼽혔다. 또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학의 오랜 딜레마였던 ‘근대’의 숙제를 성실히 풀고자 한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 등도 목록에 들었다.

기획팀의 어두운 눈과 선택의 편의로 막판에 누락된 소중한 책들도 수두룩하다. 이들 책에 대한 응당한 예우는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 우리는 저자들이 먼저 닦은 저 편한 길을 최대한 힘들여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자 한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지성의 독자들과 함께.

● 추천 위원 기고: 무엇이 책을 숨쉬게 하는가

광복 이후 '나라 세우기'와 상응하는 '학문의 토대 쌓기'는 광복 직후의 혼란상과 한국전쟁의 상흔 탓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김원룡의 <한국미술사>,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등이 대표적이다. 수용자, 즉 독자 측면에서 보면 60년대는 전집 출판의 전성기였다. 외판원에게 구입한 문학이나 사상 전집을 거실에 꽂아두는 허영심이 팽배했으나, 그 허영심이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지적 허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60년대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다.

특기할 만 한 것은 1970, 71년에 나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내발적(內發的) 근대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도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크게 자극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개발 독재와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출판과 책도 그러한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시대로도 불리는 1980년대에는 좌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많은 지식인들이 정당성 없는 권력의 폭압적 전횡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되찾은 우리 글과 말로 토대를 쌓고 틀을 짓는 시기, 어떤 의미에서는 각 분야에서 개척자적 노력이 요구되었던 시기가 1950, 60년대라면 1970, 80년대는 학문과 출판과 책이 시대와 현실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하려 했던 시기다. 무너뜨려야 할 우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이뤄야 할 목표도 분명했던 시대, 그래서 일종의 전선(戰線) 시대라 칭해도 좋을 그런 시대였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전선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잃은 것은 전선이었고 얻은 것은 다양성이었다. 우리 출판과 책의 지형도는 매우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 훨씬 더 독자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개성 넘치는 문장 스타일,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 엄숙한 강의가 아니라 정겨운 수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자들이 부각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미학 오디세이>의 진중권이 그러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윤기가 그러했다.

최근 들어와 많은 이들이 책을 걱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더 이상 책의 존엄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의 얼개와 뜻을 깊이 파고드는 책은 좀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 책의 위기, 책의 죽음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출판과 책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책은 위기였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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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04 09:41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강만길 등'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네요. ㅎ 사실 '외'라는 표현은 참여한 학자들의 이름을 생각해봐도 너무 '소외'시키는 것 같아요. 앞으로 공저는 '등'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 같아요.
ㅋ 근데 고미숙 선생의 책이라니! 재미는 물론 있지만, 결국 연암의 글은 '우리시대'가 될 수 없다는 걸까요.
'우리시대'라는 것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항상 '우리'라는 게 누구일까 궁금하게 합니다.

로쟈 2007-01-04 10:28   좋아요 0 | URL
이건, 말 그대로 우리시대(동시대) 저자들이 산출해낸 책들을 가리키는데요. 해방이후 현재까지...

biosculp 2007-01-04 18:23   좋아요 0 | URL
죽 보니 읽거나 가지고 있는 책이 21권이군요.
개인적으로는 김용옥, 정운영, 최장집 책이 제일 애착이 가는데

로쟈 2007-01-04 18:57   좋아요 0 | URL
저도 절반 조금 못 미치는 정도군요. 90년대 이후의 책들이 목록의 절반 가량인데, 좀 과대평가된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보다 직접적인 의미의 '우리시대'이긴 하나 선자들의 연령대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작년인가 한 일간지에서 '제3의 문화'의 주창자 브록맨이 이끌고 있는 엣지(Edge) 재단의 저널 '디 엣지'의 신년 설문을 크게 다룬 적이 있다. 작년의 물음은 "당신의 위험한 생각은 무엇인가?"였는데,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니까 올해의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낙관하는가? 왜?"이다. 기사의 타이틀은 "25년 안에 종교-미신 힘 못 쓴다"라고 돼 있는데, 역시나 과학자들이 현실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좀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듯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보이고(친숙한 이름들 중에 누락된 것도 여럿 된다), 일부의 주장은 서로 상충되기에 흥미롭다. 연초부터 잿빛 전망들에 다소 우울한 독자들이라면 이 '올해의 질문'에 답해보면서 기운을 좀 내보는 것도 좋겠다.

 

 

 

 

경향신문(06. 01. 03) "25년 안에 종교·미신 힘 못쓴다”

'앞으로 25년 안에 종교와 미신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쟁과 자폐증은 사라지고 100살이 넘어서도 활동적으로 사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닌 날이 도래할 것이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인터넷 잡지 ‘디 엣지(The Edge)’가 과학자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낙관하는 것은?’이라고 물은 데 대한 답변들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같은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 대해 “TV나 인터넷을 통한 정보획득이 더 손쉽게 이뤄지고 과학자들이 모든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최종이론 발견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엣지는 사회·자연과학자 집단인 제3의문화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올해의 질문’을 던진 뒤 1월1일 홈페이지(www.edge.org)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올해의 경우 157명의 사계의 권위자들이 답변했다(*답변자는 더 늘어나서 최종적으론 160명이다). 이들이 쏟아낸 주제는 물리학의 초끈이론, 정보, 인구증가, 암, 기후, 22세기, 과학의 미래, 고등교육의 세계화, 우정 등 다양했다. 엣지는 과학자나 과학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진다는 전통적인 생각과 달리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쟁이 종식되고 폭력이 감소할 것이라는 데에 일부 학자들은 공감을 표시했다. 반면 모든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최종이론에 대해서는 과학들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최상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한 심리학자의 진단은 곱씹을 만하다. 대표적인 답변들을 요약해 소개한다.

◇“종교에 대한 경외심 증발”(다니엘 데니트/철학자)=앞으로 25년 안에 종교는 현재와 같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한 정보의 확산은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과 편견을 낳는 사고방식들을 서서히, 그리고 저항할 수 없게 허물어버릴 것이다.

◇“폭력의 감소”(스티븐 핀커/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20세기의 피로 얼룩진 역사로 고통받은 많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를 보면 조직적인 폭력사태는 하향국면에 접어들었다.

◇“자폐증과 디지털 시대의 부상”(사이먼 바론 코언/케임브리지대 심리학 교수)=자폐증이 증가추세이긴 하지만 미래는 낙관적이다. 상당 비율의 자폐증은 역대 최상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으로 컴퓨터가 등장한 것은 1953년이다. 많은 아이들이 컴퓨터를 갖게 된 것은 불과 54년이 지난 후이다. 디지털시대는 자폐 심리와도 놀라울 정도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다른 어린이들이 사람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키워가는 것처럼 많은 자폐아동들도 컴퓨터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키워나갈 것이다.

◇“100살이 넘도록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 것”(리오 차루파/UC데이비스대 신경생물학 교수)=21세기 중반에는 100살이 넘는 사람들이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선진국의 수명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 둘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세포 기능을 통제할 수 있고, 손상된 뇌 부위를 재생할 수 있는 생명의학 분야의 발전에 따른 것이다.

◇“에너지 도전”(마틴 리즈/영국왕립연구소 소장)=몇년 전 쓴 ‘우리의 마지막 세기’라는 책에서 파괴적인 퇴보없이 2100년을 버틸 수 있는 문명은 50%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비관적이었으며 그후 나는 낙관주의자가 됐다. 사실 기술적 낙관주의자의 근거는 많다. 하지만 개도국이든 선진국이든 청정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과학의 최우선 과제이다.

◇“올바른 선택이 지배할 것”(자레드 다이아몬드/UCLA 생물학자)=현 상황에 대해 낙관적인 데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대기업이 장기적으로 인류의 미래에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이 결국 이익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민주주의 하에서 유권자들은 나쁜 선택보다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진보”(샘 해리스/신경과학 연구자)=끊이지 않는 모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덕성 부분에 있어서는 명백한 진보를 이뤄왔다. 우리의 감정이입 능력은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인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할 상황에 있다.

◇“우정은 생존한다”(주디스 리치 해리스/이론가)=우정에 대해 일부는 비관적이지만 우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정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할 뿐이다. 사람들은 서로 사귀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볼링을 같이 할 친구는 찾기 힘들어도 대화할 상대는 찾기 쉽다. 대화하는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최상은 아직 아니다”(니컬러스 험프리/런던정경대 심리학자)=나는 1007년에 살았다 하더라도 모차르트 음악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예술적 재능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2007년인 지금 나는 최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어느 시대도 경험하지 못한 예술의 위대한 작품은 항상 우리 미래에 오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낙관주의”(리처드 도킨스/옥스포드대 진화생물학자)=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이 꿈꿔온 물리학의 근본이론을 하나로 통합하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최종이론을 발견할 것으로 낙관한다. 또 과학을 통한 각성은 기존의 종교와 새로 생겨나고 있는 종교에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이이다.

◇“최종이론은 성취 못할 것”(프랭크 윌첵/MIT 물리학교수·200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물리학은 모든 현상을 하나로 설명하는 최종이론을 규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라면 최종이론은 매력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놀라게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이 우리를 계속 환상적이고도 근본적인 방법으로 놀라게 만들 것으로 여긴다.(조찬제 기자)

The Edge Annual Question — 2007

WHAT ARE YOU OPTIMISTIC ABOUT? WHY?

As an activity, as a state of mind, science is fundamentally optimistic. Science figures out how things work and thus can make them work better. Much of the news is either good news or news that can be made good, thanks to ever deepening knowledge and ever more efficient and powerful tools and techniques. Science, on its frontiers, poses more and ever better questions, ever better put. What are you optimistic about? Why? Surprise us!

몇몇 학자들의 답변을 전문 인용한다.

Daniel C. Dennett

The Evaporation of the Powerful Mystique of Religion

I’m so optimistic that I expect to live to see the evaporation of the powerful mystique of religion. I think that in about twenty-five years almost all religions will have evolved into very different phenomena, so much so that in most quarters religion will no longer command the awe it does today. Of course many people–perhaps a majority of people in the world–will still cling to their religion with the sort of passion that can fuel violence and other intolerant and reprehensible behavior.  But the rest of the world will see this behavior for what it is, and learn to work around it until it subsides, as it surely will.  That’s the good news. The bad news is that we will need every morsel of this reasonable attitude to deal with such complex global problems as climate change, fresh water, and economic inequality in an effective way. It will be touch and go, and in my pessimistic moods I think Sir Martin Rees may be right: some disaffected religious (or political) group may unleash a biological or nuclear catastrophe that forecloses all our good efforts. But I do think we have the resources and the knowledge to forestall such calamities if we are vigilant.

Recall that only fifty years ago smoking was a high status activity and it was considered rude to ask somebody to stop smoking in one’s presence. Today  we’ve learned that we  shouldn’t make the mistake of trying to prohibit smoking altogether, and so we still have plenty of cigarettes and smokers, but we have certainly contained the noxious aspects within quite acceptable boundaries.  Smoking is no longer cool, and the day will come when religion is, first, a take-it-or-leave-it choice, and later: no longer cool–except in its socially valuable forms, where it will be one type of allegiance among many. Will those descendant institutions still be religions?  Or will religions have thereby morphed themselves into extinction?  It all depends on what you think the key or defining elements of religion are. Are dinosaurs extinct, or do their lineages live on as birds?

Why am I confident that this will happen?  Mainly because of the asymmetry in the information explosion.  With the worldwide spread of information technology (not just the internet, but cell phones and portable radios and television), it is no longer feasible for guardians of religious traditions to protect their young from exposure to the kinds of facts (and, yes, of course, misinformation and junk of every genre) that gently, irresistibly undermine the mindsets requisite for religious fanaticism and intolerance. The religious fervor of today is a last, desperate attempt by our generation to block the eyes and ears of the coming generations, and it isn’t working. For every well-publicized victory–the inundation of the Bush administration with evangelicals, the growing number of home schoolers in the USA, the rise of radical Islam, the much exaggerated “rebound” of religion in Russia following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to take the most obvious cases–there are many less dramatic defeats, as young people quietly walk away from the faith of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That trend will continue, especially when young people come to know how many of their peers are making this low-profile choice.  Around the world, the category of “not religious” is growing faster than the Mormons, faster than the evangelicals, faster even than Islam, whose growth is due almost entirely to fecundity, not conversion, and is bound to level off soon.

Those who are secular can encourage their own children to drink from the well of knowledge wherever it leads them, confident that only a small percentage will rebel against their secular upbringing and turn to one religion or another.  Cults will rise and fall, as they do today and have done for millennia, but only those that can metamorphose into socially benign organizations will be able to flourish.  Many religions have already made the transition, quietly de-emphasizing the irrational elements in their heritages, abandoning the xenophobic and sexist prohibitions of their quite recent past, and turning their attention from doctrinal purity to moral effectiveness.  The fact that these adapting religions are scorned as former religions by the diehard purists shows how brittle the objects of their desperate allegiance have become.  As the world informs itself about these transitions, those who are devout in the old-fashioned way will have to work around the clock to provide attractions, distractions—and guilt trips—to hold the attention and allegiance of their children.  They will not succeed, and it will not be a painless transition. Families will be torn apart, and generations will accuse each other of disloyalty and worse: the young will be appalled by their discovery of the deliberate misrepresentations of their elders, and their elders will feel abandoned and betrayed by their descendants.  We must not underestimate the anguish that these cultural transformations will engender, and we should try to anticipate the main effects and be ready to provide relief and hope for those who are afflicted.

I think the main problem we face today is overreaction, making martyrs out of people who desperately want to become martyrs.  What it will take is patience, good information, and a steady demand for universal education about the world’s religions.  This will favor the evolution of avirulent forms of religion, which we can all welcome as continuing parts of our planet’s cultural heritage. Eventually the truth will set us free.

Steven Pinker

The Decline of Violence

In 16th century Paris, a popular form of entertainment was cat-burning, in which a cat was hoisted on a stage and was slowly lowered into a fire. According to the historian Norman Davies, "the spectators, including kings and queens, shrieked with laughter as the animals, howling with pain, were singed, roasted, and finally carbonized."

As horrific as present-day events are, such sadism would be unthinkable today in most of the world. This is just one example of the most important and under appreciated trend in the history of our species: the decline of violence. Cruelty as popular entertainment, human sacrifice to indulge superstition, slavery as a labor-saving device, genocide for convenience, torture and mutilation as routine forms of punishment, execution for trivial crimes and misdemeanors, assassination as a means of political succession, pogroms as an outlet for frustration, and homicide as the major means of conflict resolution—all were unexceptionable features of life for most of human history. Yet today they are statistically rare in the West, less common elsewhere than they used to be, and widely condemned when they do occur.

Most people, sickened by the headlines and the bloody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find this claim incredible. Yet as far as I know, every systematic attempt to document the prevalence of violence over centuries and millennia (and, for that matter, the past fifty years), particularly in the West, has shown that the overall trend is downward (though of course with many zigzags). The most thorough is James Payne’s The History of Force; other studies include Lawrence Keeley’s War Before Civilization, Martin Daly & Margo Wilson’s Homicide, Donald Horowitz’s The Deadly Ethnic Riot, Robert Wright’s Nonzero, Peter Singer’s The Expanding Circle, Stephen Leblanc’s Constant Battles, and surveys of the ethnographic and archeological record by Bruce Knauft and Philip Walker.

Anyone who doubts this by pointing to residues of force in America (capital punishment in Texas, Abu Ghraib, sex slavery in immigrant groups, and so on) misses two key points. One is that statistically, the prevalence of these practices is almost certainly a tiny fraction of what it was in centuries past. The other is that these practices are, to varying degrees, hidden, illegal, condemned, or at the very least (as in the case of capital punishment) intensely controversial. In the past, they were no big deal. Even the mass murders of the twentieth century in Europe, China, and the Soviet Union probably killed a smaller proportion of the population than a typical hunter-gatherer feud or biblical conquest. The world’s population has exploded, and wars and killings are scrutinized and documented, so we are more aware of violence, even when it may be statistically less extensive.

What went right? No one knows, possibly because we have been asking the wrong question—"Why is there war?" instead of “Why is there peace?" There have been some suggestions, all unproven. Perhaps the gradual perfecting of a democratic Leviathan—"a common power to keep [men] in awe"—has removed the incentive to do it to them before they do it to us. Payne suggests that it’s because for many people, life has become longer and less awful—when pain, tragedy, and early death are expected features of one’s own life, one feels fewer compunctions about inflicting them on others. Wright points to technologies that enhance networks of reciprocity and trade, which make other people more valuable alive than dead. Singer attributes it to the inexorable logic of the golden rule: the more one knows and thinks, the harder it is to privilege one’s own interests over those of other sentient beings. Perhaps this is amplified by cosmopolitanism, in which history, journalism, memoir, and realistic fiction make the inner lives of other people, and the contingent nature of one’s own station, more palpable—the feeling that "there but for fortune go I."

My optimism lies in the hope that the decline of force over the centuries is a real phenomenon, that is the product of systematic forces that will continue to operate, and that we can identify those forces and perhaps concentrate and bottle them.

Jared Diamond

Good Choices Sometimes Prevail

I am cautiously optimistic about the state of the world, because: 1. Big businesses sometimes conclude that what is good for the long-term future of humanity is also good for their bottom line (cf. Wal-Mart's recent decision to shift their seafood purchases entirely to certified sustainable fisheries within the next three to five years). 2. Voters in democracy sometimes make good choices and avoid bad choices (cf. some recent elections in a major First World country).

Richard Dawkins

The Final Scientific Enlightenment

I am optimistic that the physicists of our species will complete Einstein's dream and discover the final theory of everything before superior creatures, evolved on another world, make contact and tell us the answer. I am optimistic that, although the theory of everything will bring fundamental physics to a convincing closure, the enterprise of physics itself will continue to flourish, just as biology went on growing after Darwin solved its deep problem. I am optimistic that the two theories together will furnish a totally satisfying naturalistic explanation for the existence of the universe and everything that's in it including ourselves. And I am optimistic that this final scientific enlightenment will deal an overdue deathblow to religion and other juvenile superstitions.

07.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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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1-03 09:19   좋아요 0 | URL
음냐 뭐랄까. 저는 데넷은 철학자로서, 사회 철학의 지점에서는 데리다나 지젝이 보다 급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물론 개설서 정도 읽어본 수준이지만...

하이데거의 66년 슈피겔 지와의 대담과 입장이 전혀 딴판이군요.

로쟈 2007-01-03 09:23   좋아요 0 | URL
데닛은 소위 '강한' 인지주의를 대표하고,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종교-미신 종언론'은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라고 봅니다(마르크스의 예언은 어떤가요?). 그리고 물론 그는 '사회철학자'가 아니죠.^^

자꾸때리다 2007-01-03 10:05   좋아요 0 | URL
아. 리플을 지우려고 했는데 그새 다셨네요..ㅡㅡ; 데넷은 사회철학자가 아니죠. 다만 제 생각에는 데넷의 입장들 중에 사회적 함축을 띄고 있는 것들이 그렇다는 것이죠... 특히 'Darwin's dangerous idea'에 담긴 주장 중에는 사회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주장들이 있지 않나요? 부분 부분 읽어보기만 했지만...


전 별로 데넷에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인지라...
 

책장에서 그냥 눈에 띄길래 랭보의 시집 한권을 꺼내들었다. 랭보의 시집들과 관련서들은 대개 박스에 들어가 있고 달랑 남아있는 건 함유선 번역의 <나쁜 혈통>(밝은세상, 2005)과 펭귄판의 불역 대역본 시선집뿐이다. 거기에 러시아어로 된 프랑스 상징주의 시선집이 어딘가 꽂혀 있을 것이다. 짐작에 랭보의 시집은 최소한 대여섯 종류의 번역본이 출간돼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세 종 정도인 듯한데, 당장 곁에 있는 건 함유선본뿐이다. 거기에 피에르 프티필의 전기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홍익출판사, 2001)를 손가락으로만 꼽아두고 있다. 사실 말라르메와 함께 가장 난해하고 손꼽히는 이 '천재 시인'을 간혹 읽어보려고 하는 것은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동문선, 2000)을 읽기 위함이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한 이유는 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서시를 읽다가 문득 자료라도 모아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리뷰를 일단 옮겨놓는다. 전기 <랭보>에 관한 것이다.

 

 

 

 

북데일리(06. 06. 16) 무서운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던 시인?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참을 수 없는 게 없다는 것이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날 생각하는 것이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미소년적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 나오는 대사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호연을 통해 천재시인이라 불렸던 랭보(1854~1891)의 여러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랭보의 삶과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성장배경을 다룬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홍익출판사. 2001)에 의하면 랭보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문학성을 보였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기하학정리 몇 개를 증명하는 동안, 랭보는 라틴시 몇 편을 순식간에 해치우곤 했어요. 그것들 모두 재기 넘치는 것이었죠. 제목은 똑같았어요. 하지만 시구의 표현양식과 사상 논지의 전개가 아주 달랐기 때문에 선생님은 한사람의 손으로 씌어진 것인 줄 몰랐지요. 그가 거기에 바친 시간에 비하면 정말 곡예와 같은 솜씨였어요. 이런 일이 꽤 자꾸 있었지요. 이건 보증할 수 있어요”

랭보와 함께 학습했던 학우의 고백은 그의 천재적 문학성을 드러낸다. 그는 실제로, 수학과 기하학에 매우 둔했으며 (거의 보통사람의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였다) 관심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러나 문장을 만들 때만큼은 독창적인 어휘들로 채우기 위해 집요한 노력과 발상을 아끼지 않았다.

랭보의 어머니는 난폭할 정도의 자기주장과 독선과 아집을 가진 여성이었다. 지독한 보수주의자로 이웃들과의 싸움을 쉬지 않고 자행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시인 베를렌느앞에서도 자신의 아들 랭보의 따귀를 때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를 뒤쫓고 감시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의 훈육방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고 엄격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랭보의 어머니는 남편의 부재가 주는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랭보를 더욱 비뚤어 나가게 만든 요인이 될 뿐이었다.

“일이라는 게 대체 뭐야,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 파괴하고, 다 지워버려야 해, 아! 담벼락 구석에 버려져서 아무렇게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나 선생들이나 가족이 주입한 관념이라곤 전혀 없는 아이는 행복하겠어! 새롭고, 순수하고, 원칙도 관념도 없으니까. 사람들이 우리한테 가르친 것은 모두다 거짓이니까 말이야! 자유로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아이 말이야!”

랭보의 항변은 성장기에 겪었던 혼란과 고통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 삐에르 쁘띠피스(쁘띠필?)는 랭보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 내리려 하지 않는다. 시대와 사랑, 가족과 철학과 세상 앞에서 느꼈던 랭보의 고통을 열어 보일 뿐이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랭보의 조부, 부모세대의 이야기, 형제, 그가 만났던 예술가들의 삶이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김민영 기자)

07. 01. 02.

P.S. 때로 아이를 시인으로 만드는 비결은 단순해보이기도 한다. "난폭할 정도의 자기주장과 독선과 아집을 갖고서 이웃들과 싸움을 쉬지 않고, 친구 앞에서도 아들의 따귀를 때리는 일을 서슴지 않기" 말이다. 물론 절반의 리스크는 감수해야 한다. 천재시인이 되거나 반항적인 패륜아가 되거나. 그 '지옥'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서두는 이렇다(따로 '서시'라 표기돼 있지는 않은 듯하지만, 서시의 역할을 하는 시이다). 원시와 영역시인데, 영역은 펭귄북에서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얻어왔다(대동소이하다).   

Jadis, si je me souviens bien, ma vie était un festin où s'ouvraient tous les coeurs, où tous les vins coulaient.
  Un soir, j'ai assis la Beauté sur mes genoux. - Et je l'ai trouvée amère. - Et je l'ai injuriée. 

  Je me suis armé contre la justice.
  Je me suis enfui. O sorcières, ô misère, ô haine, c'est à vous que mon trésor a été confié !
  Je parvins à faire s'évanouir dans mon esprit toute l'espérance humaine. Sur toute joie pour l'étrangler j'ai fait le bond sourd de la bête féroce.
  J'ai appelé les bourreaux pour, en périssant, mordre la crosse de leurs fusils. J'ai appelé les fléaux, pour m'étouffer avec le sable, avec le sang. Le malheur a été mon dieu. Je me suis allongé dans la boue. Je me suis séché à l'air du crime. Et j'ai joué de bons tours à la folie.
  Et le printemps m'a apporté l'affreux rire de l'idiot.
  Or, tout dernièrement, m'étant trouvé sur le point de faire le dernier
couac ! j'ai songé à rechercher la clef du festin ancien, où je reprendrais peut-être appétit.
  La charité est cette clef. - Cette inspiration prouve que j'ai rêvé !
  "Tu resteras hyène, etc..." se récrie le démon qui me couronna de si aimables pavots. "Gagne la mort avec tous tes appétits, et ton égoïsme et tous les péchés capitaux."
  Ah ! j'en ai trop pris : - Mais, cher Satan, je vous en conjure, une prunelle moins irritée ! et en attendant les quelques petites lâchetés en retard, vous qui aimez dans l'écrivain l'absence des facultés descriptives ou instructives, je vous détache des quelques hideux feuillets de mon carnet de damné.

  Once, if I remember well, my life was a feast where all hearts opened, where all wines flowed. 
  One night, I sat Beauty on my knees.—And I found her bitter.—And I reviled her. 
  I armed myself against justice. 
  I fled. O witches, o misery, o hate, to you my treasure was entrusted!
  I managed to vanquish all human hope from my spirit. So as to strangle every joy, I made the silent leap of a wild beast. 
  I called the executioners as I died in order to bite their rifle butts.I called on plagues to choke me with sand, blood. Misfortune was my god. I lay spread in the mud. I dried myself with the air of crime. And I played fine tricks on madness. 
  And spring brought me the appalling laugh of the idiot. 
  However, only lately, on the point of making my final squawk, I thought of seeking the key to the ancient feast, where I might take up my old appetite. 
  Charity is that key.—This inspiration proves I was dreaming! 
  “You’ll remain a hyena…” etc., cries the demon who crowned me with such pleasant poppies. 
  “Win death with all your appetites, and your selfishness, and all the deadly sins.” 
  Ah! I took too much:—But, dear Satan, I entreat you, an eye less inflamed! and while we wait on some little, late cowardice, you who love the absence of descriptive or instructive faculties in a writer, let me tear out some hideous pages from this notebook of a damned soul.

 

  오래전, 기억해보면, 내 삶은 축제였다, 누구나 마음 열었고 온갖 술 흘러넘쳤다.

  어느날 저녁 난 아름다운 여인을 무릎에 앉혔다. 그녀가 고약한 것을 깨달았다. 욕을 퍼부어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비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여, 오 불행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을 너희에게 맡겼노라!

  나는 마침내 정신 속에서 인간의 희망 몽땅 사라지게 했다. 그 목을 비트는 데 즐거움을 느껴,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껑충껑충 뛰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사형 집행인을 불러 그들의 총 자루 물어뜯으려고 했다. 나는 재앙을 불러 피와 모래에 질식했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흙 속에 누웠다. 나는 범죄의 바람에

  몸을 말렸다. 나는 광기를 잘 속여넘겼다.

  봄은 내게 백치의 웃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엉뚱한 소리 내려는 순간에! 난 옛 축제의 열쇠를 찾으려 했다. 어쩜 욕망도 되찾을지 모른다.

  자비가 그 열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전에 꿈을 꾸었나보다.

  “저는 하이에나로 남으리...” 아주 멋진 양귀비꽃 관을 나에게 씌어준 악마가 외친다.

  “네 욕망과 이기주의와 죄악 모조리 짊어지고 죽어라.”

  아! 난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탄이여, 정말 간청하니, 화를 좀 내지 마시라! 뒤늦게 몇 가지 비겁한 짓을 기다리며, 작가에게 묘사하고 훈계하는 능력이 부족한 점을 사랑하는 당신, 나 그대에게 내 저주받은 자의 수첩에서 보기 흉한 몇 장을 떼어내준다.(함유선 옮김)  

 

07. 01. 02 - 07.

 

P.S. 번역문을 옮겨놓은 다음에 몇 자 적어볼까해서 쁘띠피스의 전기를 구입했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이 두툼한 전기에 색인이 붙어 있지 않아서 인용시나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일일이 뒤적거려 보아야 하게끔 돼 있다. 그럴 여유가 없는지라 랭보에 대해서 몇 자 적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본문 인용기사에서도 암시되고 있지만, 나의 관심은 랭보와 그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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