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에서 러시아 관련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6). 최근 들어 부쩍 밀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 관계에 관한 기사이다.  

시사인 10호(07. 11. 20) 북극곰과 판다 사랑에 빠지다

‘북극곰과 판다가 밀월을 보내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최근 여러 경로로 친분을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다. 작년 중국이 베푼 ‘러시아의 해’ 행사에 대한 화답으로 올해 러시아가 주최한 ‘중국의 해’ 행사에서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임을 재차 확인했다. 요즘 러시아와 미국이 대립하는 터라 러시아와 중국의 밀착은 더욱 대비된다.

올해 중국의 해 행사는 여러모로 다채로웠다. 500여 개 중국 회사와 연인원 수십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장장 8개월에 걸쳐 200여 회 행사가 펼쳐졌다. 지난 3월 개막식에는 후진타오 중국 총서기가 수뇌부들을 대거 대동하고 참석한 데 이어, 11월6일 폐막식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참석해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양국은 경제 외교 군사 과학(우주)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을 약속했고 각종 협약과 계약을 체결했다. 행사 기간 중 체결한 계약 액수는 자그마치 77억 달러(7조400억 원)에 달한다.



11월5일 원자바오 총리의 예방을 받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양국 관계가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양국은 결과에 만족한다. 러시아는 중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이에 원 총리는 “외교 정책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 양국의 안정적 성장은 양국 발전은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양국 협력에서 일차적 걸쇠는 경제다. 지난 8년간 양국간 교역량은 매년 30%씩 증가했다. 최근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국은 러시아의 3위 교역국이고, 러시아는 중국의 8위 교역 상대다. 올해 9월까지 양국 간 교역량은 349억 달러를 기록해 전년에 비해 40% 증가하리라 예상된다. 폐막식 전 경제 포럼에서 알렉산드르 주코프 러시아 부총리는 “2010년에는 양국 간 교역량이 600억-8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러시아 에너지다. 이른바 원유 가스 전기 등에서의 협력이다. 빠른 성장세인 경제 버팀목인 에너지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중국은 에너지 수입 노선의 다변화 전략을 세우고 세계 각지의 산유국들과 발 빠르게 접촉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조건을 고려할 때, 러시아 원유가 가장 매력적이다. 풍부한 매장량에 지리적으로 가까워 송유관 건설이 가능할 뿐 아니라, 나아가 동반자 관계를 내세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국이 러시아에 밀착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양국 관계가 긴밀해지자 중국 석유회사 ‘시노펙’은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티’와 원유 수입 계약을 맺었고, 현재 원유가 몽고를 경유해 기차로 운송되고 있다. 국영 러시아철도회사(RZHD)로부터는 운송비 할인 혜택을 받았다. 작년 중국이 러시아에서 수입한 원유는 전체 수입량의 10%(1500만t)에도 채 못 미친다. 하지만 내년에 착공될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다칭) 송유관이 완공되면 3000만t의 원유를 추가로 공급받게 된다.

양국은 핵 분야에서도 협력한다. 러시아 국영 원자력회사인 테넥스(TNS)는 중국에 50만톤급 핵농축용 원심분리기 시설을 건립하기로 했고, 중국의 장쑤(江蘇)성 톈완(田灣) 발전소의 1/2호기 원자로를 건설한 러시아 원전공사 아톰 스트로이 엑스포트(ASE)는 3?4호기 수주 계약을 마쳤다. 러시아 관계자는 “톈완 발전소는 러시아와 중국 간 핵 협력에서 가장 혁혁한 성과물이다”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러시아 가스에도 눈독을 들였다. 11월11일 러시아 제1부총리이자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 회장인 드미트리 메드베제예프는 국제외교대학(MGIMO) 강연에서, “현재 가스프롬은 680억 큐빅(㎥)의 가스공급 문제를 놓고 중국과 협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중국의 투자가 주 관심사다. 중국은 2020년까지 120억 달러를 러시아에 투자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에너지 금융 통신 수송 등 30개 분야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여기에 우주 과학 분야에서 협력이 진행 중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화성 포보스(공포란 뜻으로, 화성 주위를 떠도는 형체가 불분명한 위성) 탐사에 관해서 논의했다. 일명 ‘포보스 프로그램’은 러시아 우주 기지에서 화성으로 우주선을 띄워보내 포보스 토양 표본을 채취한 뒤 지구로 운송하는 한편, 우주선 내에 화성 궤도를 순항할 중국 미니 위성을 탑재한다는 계획이다.



경제 협력 다음은 양국 간 군사 외교 협력이다. 이념 논쟁과 국경 분쟁은 잊은 지 오래다. 양국은 상하이 협력기구의 결성과 무기/기술 협력은 물론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정도로 군사 협력이 긴밀해졌고,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군사 협력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상하이 협력기구(SCO)다. 이 기구는 러시아와 중국이 주축이 되어 중앙아시아 4개국과 함께 만든 일종의 집단 안보기구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을 원용한다면, 냉전 종식 이후 유일한 초강국으로 군림하는 미국의 유라시아 공략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체제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중앙아시아 방어전략인 셈. 처음 느슨한 체제로 출발한 이 기구는 유가의 고공비행 덕분에 부국(富國)이 된 러시아와 높은 경제성장세를 탄 중국의 주도하에 점차 영향력을 불리면서 인근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등을 옵저버로 참가시키는 등 도미노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중국의 해 폐막식 참석에 앞서, 원 총리는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수도)에서 열린 상하이 협력기구 총리 회담에 참석했다. 러시아는 MD(미사일 방어체제) 문제로 미국과 불협화음이 커지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경계 지역인 사마라 주(州)에서 상하이 협력기구 합동 군사작전 시위를 벌였다. 한편 지난 8월 러시아와 중국은 우랄산맥에 위치한 첼랴빈스크에서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첼랴빈스크 인근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지하 저장고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군사 강국이다. 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중국은 군수 분야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이 절실하다. 중국은 전투기/탱크/지대공미사일/잠수함 등을 수입함은 물론 수호이-27 전투기를 합작/생산하고 있고, 최근에는 수송용 헬기(Mi-171) 부품을 전량 납품받아 청두(成都) 헬기 수리공장에서 조립/생산한다.

경제/군사 협력은 외교 공조로 통한다. 얼마 전 중국은 이란 핵 프로그램 문제에서 러시아 방침을 옹호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각을 세웠다. 양국 간 밀월에서 동병상련도 한몫한다. 푸틴의 최대 약점은 체첸 분리주의다. 중국도 타이완과 티베트 독립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를 의식한 듯, 원 총리는 ‘지역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 테러 분리주의 극단주의라는 3대 악(惡)의 세력과 싸우는 데 양국이 공동전선을 펼칠 것’이라 언급했다.

최근 푸틴은 이란 핵 문제 등과 관련해 부시와 다른 행보를 보였고, 러시아·미국 외교 관계는 악화했다(<시사IN> 제6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9 참조). 미국과 맞서고 중국과 협력하는 러시아의 행보에 워싱턴이 긴장하고 있다.(모스크바= 정다원 통신원)

07. 11. 26.

P.S. 기사의 말미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절친하게 지내며 신세도 많이 진 터줏대감 '동기'이다(나이가 한참 많아서 내가 '형'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한 대학의 기숙사로 찾아갔을 때 형은 당시 '시사저널'에 보낼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다. 지금은 시사인의 모스크바 통신원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기사에서 근황을 알 수 있어 개인적으로 반갑다. 둘이 몇 차례 '장시간' 산책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볼쇼이극장의 분수대 앞에서 나눈 긴 대화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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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읽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서 한 대목을 다시 뜯어 읽는다(지난번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1715228 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계기는 아렌트에 관한 서평기사를 찾아 읽다가 문득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의 상당부분은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읽었기에 상기된 면도 있을 것이다.

책의 2장은 지식인과 철학자의 (가상)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과학은 재정이 튼튼한 국가가 공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는 소수가 다수를 더욱 교묘하고 덜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입니다."라는 '지식인'의 비판에 "정말로 그러했다고 믿는다면, 왜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지요?"라고 '철학자'가 반문하자 '지식인'은 다시 이렇게 답한다(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글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전문 지식인인 저는 기존의 모든 연구 방식에 대해 한결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월급을 받는 철학자의 사치를 누릴 처지가 못됩니다. 학생들은 순수한 형태의 회의주의를 알기 위해 철학강좌를 들을 수도 있지만, 지식인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좀더 화해로운 입장에서 나온 해답을 통해 회의주의를 희석시켜서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활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는 일부러 연출한 상황일 수 있는데, 사회과학자들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 주인이란 그들에게 보수를 지불하는 특정한 고객과 그들의 작업을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입니다."(114쪽)

간단히 말하면 용역을 받은 것보다 많은 지식이 생산되며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고, 이러한 과잉/잉여를 통해서 사회과학자들은 '특정고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 지식인은 물론 이러한 '떡고물 지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을 관심대상으로 한다. '지식인'은 이렇게 부연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20년 전에 시카고 대학교의 도서관학 학자 돈 스완슨이 발견한 현상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현상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undiscovered public knowledge)'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완슨은 단지 연구문헌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의학 연구의 고질적인 문제를 의미있게 제시할 수 있었고 어쩌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114-5쪽)

무슨 얘기냐면 새로 연구비를 투자하지 않고 기존의 연구문헌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르도 어떤 과제들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과학연구가 지나치게 전문화된 나머지 '진짜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분리되고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연구결과들간의 소통과 연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 "연구를 더 많이 의뢰하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해답의 대부분이, 어쩌면 해답의 전부가 다양한 과학 저널에 이미 나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문헌들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지요."란 결론은 그래서 나온다(덧붙이자면, 지난번 페이퍼에서 역자가 오역했다고 한 'across'의 용법은 여기서도 나온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across specialities').  

돈 스완슨의 경우엔 "젊은 여성의 손가락을 마비시키는 병인 레이노드 증후군의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고,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의학이라는 전문분야에서조차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많은 연구비를 요구하는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참조해서 자신들의 통찰을 얻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스완슨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스완슨은 소위 '정보학자'이지 '생명과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가 되겠지만 최근 BBK 이면계약서의 '진실'을 들춰낸 네티즌들의 경우에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한 일은 단지 몇 년전 신문기사들을 찾아낸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현재 보수언론들이나 유권자들이 모른 체하고 있는 'e-bank 사업자 이명박'의 진실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스티브 풀러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역할이 지식인의 역할이다(혹은 대중지성으로서의 네티즌의 역할이겠고). 그렇다면, 이러한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은 지식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지식인들에게 학자들이 가끔 신문이나 서평에서 내세우는 극단적인 주장에 더욱 대담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참신한 발견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가 훌륭한 선구자를 잊었던 것에 불과한지를 묻게 합니다.(...) 두번째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좀더 긍정적입니다. 즉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식인의 잡식성 독서 습관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독창적인 연구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지식인들이 너무 많이 양보하는 셈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연구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16쪽)

이러한 주장이 '대중지성'(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81826481&code=210000)의 일원으로서 내게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1)잡식성 독서 습관은 정당하다, (2)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해도 좋다. 이 두 가지는 사실 이제껏 해온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걸 격려삼아 '인터넷 서평꾼'으로서, 그리고 '대중지성'으로서 (내게 보수를 주는 '특정한 고객'은 아직 따로 없지만)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과 대면하는 일을 앞으로도(적어도 당분간은) 계속해나갈 것이다(짝짝짝!).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한다면 혹 우리가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이 약간 나아질지 모른다는 '실현되지 않은 기대'를 걸고서...

0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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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짝짝짝.

로쟈 2007-11-26 09:28   좋아요 0 | URL
혼자 멋쩍어하던 차였습니다.^^;

GoNgo 2007-11-26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들르던 저도, 로쟈님의 일이 계속 되길 바라면서) 짝짝짝!

로쟈 2007-11-26 13:02   좋아요 0 | URL
감사. 좀 시끄럽게 들르셔도 됩니다.^^

qualia 2007-11-2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 같은 사기꾼/거짓말쟁이/위선자/졸장부/범죄자/무식꾼(으로 명백히 판명나기 직전에 있는 사람) 같은 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국민의 40~50 퍼센트에 이르는 지지를 받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 수준으로 떨어졌기에, 저 사람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도 지지자의 60 퍼센트 이상이 계속 지지하겠다는 것인지, 썩어빠진 대한민국 국민의 양심과 정의에 대해 좌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다수 국민들이 정의와 양심과 진리와 윤리도덕 따위가 마비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 나라 지식인들은 지금, 거짓말과 비양심이 역병처럼 국민들 사이에 횡행하고, 나라의 운명이 불의의 도당의 손아귀로 떨어지려는 찰라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양심과 정의와 진리의 외침이 가장 절실한 지금 2007년 막판의 한국에서, 우리의 지식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로쟈 2007-11-26 21:56   좋아요 0 | URL
'도덕성'이 아니라 '능력'이 기준이라는군요. 이탈리아의 선례를 미리 공부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7-11-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군요. 그 능력이란 도덕불감증의 능력이겠지요?^^ 우리 국민들의 경제제일주의선호 능력에 맞는...그놈의 돈만 걸리면 사람들의 판단능력과 일처리는 왜 그리 단순해지는지 놀랍습니다. 게다가 평소 독서를 하지 않는 국민을 상대하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정확히 제 위치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로쟈 2007-11-29 01:07   좋아요 0 | URL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편으론 정말 사람이 없구나, 란 생각도 듭니다...
 

, 스캔들몇 달전(이라고 적다가 다시 확인해보니 지난봄이다)에 지라르의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문학과지성사, 2007)이 출간됐다(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4858). 책은 바로 구입해서 꽂아두었는데(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중앙일보의 '테마읽기'를 보고 다시 떠올리게 됐다. 게다가 최근에 <희생양>(민음사, 2007)이 재출간되기도 해서 잠시 지라르 읽기 목록도 다시 챙겨두었다. 바로 이전에 소개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와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한 바가 있기에(http://blog.aladin.co.kr/mramor/909949, http://blog.aladin.co.kr/mramor/920680 참조) 이번엔 <스캔들>과 <희생양>을 읽어볼까 한다(<희생양> 혹은 <속죄양>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르레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서 지라르의 가장 좋은 책이라고 평한 바 있다). 지라르가 생소한 독자라면 아래 기사를 참고해서 '인문학의 다윈' 혹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나는 그렇게 부른다)와 한번쯤 만나보시길...

중앙일보(07. 11. 24) [테마읽기] 르네 지라르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흔히 다윈에 비교된다. 한 주제를 두고 평생에 걸쳐 끈질기게 탐구하고 있어서다. 그의 지적 화두는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룬 그의 대표적인 책은 여럿 나와 있으나, 대담집은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문학과지성사)의 2부는 정치학자와 나눈 대담이다. 『문화의 기원』(기파랑)은 두 명의 문학 전공자와 벌인 논쟁적인 토론을 기록한 본격적인 대담집이다.

두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대담집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론서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자전적 기록을 볼 수 있어서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건만, 지라르는 인디애나대학에 재직할 적에 논문을 발표하지 않아 교수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고 한다. 대담집에는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질문도 제법 들어 있다. 학계의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그 유명한 레비스트로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에 대해 지라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충실히 설명한다.



그의 모방 메커니즘을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모방적 욕망에서 시작하여 모방적 경쟁을 거쳐 모방위기 또는 희생위기로 격화되었다가 마침내 희생양의 해결로 끝나는 모든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지라르의 이론이 놀라운 것은, 욕망이 모방적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델 되는 사람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이 관계는 끝내 두 사람을 경쟁으로 몰아가게 된다. 욕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는 셈이다. 이 상황은 전염된다. 두 사람이 경쟁하며 욕망하는 것은 제3자도 탐낼 만한 법이다. 마침내 경쟁자들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 위기를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을까. 공동체 구성원이 만장일치로 지목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었다고 지라르는 분석한다. “집단적 폭력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게 집중적으로 향하는 것”이다. 신화나 고대종교는 희생양을 보는 관점이 동일했다. 위기의 원인을 희생양에게 두고 있었고, 공동체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이유로 희생양을 신적인 존재로 추켜세웠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공동체의 만장일치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바로 희생양이 무고하다는,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비밀을 폭로한다. “성서의 희생양은 무고한 존재여서, 비난 받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죽어줌으로써 희생양 메커니즘의 종식을 불러왔다. 지라르는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진정으로 개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종이란, 자신이 박해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우리 욕망의 모델로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리스도가 욕망한 것을 욕망하라!).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세대로는 청년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으며, 민족으로는 제3세계 출신을 차별하고 있고, 노동현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다. 이들은 무고하며 외려 우리들이 박해자라 고백할 때 더 이상의 희생양이 생겨나지 않을 터다.(이권우_도서평론가)

07. 11. 25.

P.S. 지라르의 오이디푸스론과 도스토에프스키론이 정식으로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는 얘기는 예전에 적은 바 있는데, 최근에 나의 관심을 자극하는 책은 그의 셰익스피어론이다. <질투의 극장>(1991/2004)이 그것인데 영역본으로 366쪽 분량이니까 오이디푸스론과 도스토예프스키론을 합한 것보다도 더 분량이 많다. 그럼에도 이 책 또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최근에 500쪽이 넘는 인문 번역서들도 드물지 않게 출간되고 있으므로 무망한 기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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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26 08:25   좋아요 0 | URL
반가운 소식이군요.^^

람혼 2007-11-26 15:07   좋아요 0 | URL
<희생양>은 예전에 이데아 총서를 통해 출간되었던 판본을 갖고 있는데, '쌔끈한' 새 표지를 보니 '견물생심'이라는 사자성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설마' 개역판은 아니겠죠? ^^

로쟈 2007-11-26 18:42   좋아요 0 | URL
개역판일 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소경 2007-11-26 18:39   좋아요 0 | URL
얼른 관심 가지고 읽을 돈을 마련해야겠네요. 전 여태 청동기시대 토기를 가지고 단지 형식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것 같으니. 주위엔 형식과 문양을 가지고 문화권이나 시기만 다루는 지루한 고고학만 어울리는 것 같으니깐요. 그쪽도 부족한 것 많지만 우선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

로쟈 2007-11-26 18:43   좋아요 0 | URL
고고학은 왠지 땅 파는 것만 연상이 돼서요.^^;
 

문학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신예작가 김태용의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문학과지성사, 2007)에 대한 소개기사이다. “문학의 핵심은 언어인데, 정작 소설에서 언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도가 작가의 출사표라면 좀 '식상한' 편이지만 “독자가 내 소설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도중에 내팽개친다면 작가로서 실패라고 생각한다”는 패기 정도는 기대를 걸 만하다.

한국일보(07. 11. 26) 기괴한 서사가 빚는 '낯선 풍경' … 언어 통념 뒤엎는 '날선 실험'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 도시에서 ‘나’는 만삭인 친구 아내의 배를 터뜨리고픈 욕구에 우산 촉을 뾰족히 갈고(‘검은 태양 아래’), 노부부는 서로의 발 옆에 머리를 두고 풀밭에 누워 ‘???’ 돼지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눈다(‘풀밭 위의 돼지’). 떼지어 행동하고 섹스하는 ‘우리’는 각자 경멸하는 물건을 실은 쇼핑카트를 끌고 고층 건물에서 투신한다(‘차라리, 사랑’).

소설가 김태용(33)씨가 등단 2년만에 낸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문학과지성사 발행)는 이런 기괴한 서사들로 그득하다. 일상적 어휘로 이뤄진 수식 없는 단문들은 읽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그 문장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낯설고 때론 불편하다. 익숙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당도한 듯한, 기묘한 인식의 부조화가 김씨를 동세대 작가들과 구별짓는다.

김태용 소설의 낯섦은 그가 지닌 사전(辭典)에서 연유한다. 그 사전의 단어 옆엔 우리가 알던 의미가 지워져 있다. 등단작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에 나오는 애완 고양이 이름은 ‘돼지’다. 고양이 출입을 금지하는 동물원 직원에게 가족들은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돼지”라고 항의하고, ‘돼지’는 개 사료를 게걸스레 먹으며 이름에 값한다. 돼지 아닌 존재를 ‘돼지’라 부르자 돼지가 되는, 존재(의미)는 이름(언어)에 선행한다고 믿었던 통념이 무화되는 상황이다. 표제작의 인물들은 아예 인간의 언어를 버리고, 돼지의 말로 의사소통한다.

김씨는 “문학의 핵심은 언어인데, 정작 소설에서 언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말한다. 윤대녕씨의 단편 ‘편백나무숲 쪽으로’를 전복적으로 패러디했다는 ‘의심’을 받는 ‘편백나무 숲 밖으로’는 의미를 품은 언어로 구축된 세계의 표상인 편백나무 숲에서 도망쳐 나온 ‘나’의 독백을 담은 작품으로, 언어의 통념과 대결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오롯하다. 표제작이나 ‘잠’의 화자들은 같은 단어를 거듭 반복하며 긴 혼잣말을 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중얼거려서라도 존재를 확인하려는, 언어에 대한 강박적 의존을 드러낸다.

김씨는 “언어를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단어들이 만날 때 발생하는 충격과 아우라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서 “언어 실험으로 포착한 이미지들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그 주제란 소통 불가능성, 세계와의 불협화음에 관한 것으로, 문학적 주제로서 그리 낯설지 않다.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타인과의 소통에 곤란을 겪거나, 세상에 대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일에 실패한다.

지레 벙어리를 자처하거나(‘벙어리’) 좌절감을 감추고 위악적 태도로 일관(‘검은 태양 아래’)하기도 한다. 익숙한 테마를 첨단의 언어 실험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김씨는 ‘낯설게하기’란 문학의 고전적 본령에 충실한 작가다. 김씨는 “글쓰기나 독서는 본래 오독의 과정”이라며 “독자가 내 소설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도중에 내팽개친다면 작가로서 실패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작품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을 드러냈다.(이훈성기자)

07. 11. 25.

P.S. 작가의 문제의식은 정확하게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시인/작가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이다. 때문에 <풀발 위의 돼지>는 '전위적인' 소설이라기보다는 '후위적인' 소설이라고 해야겠다(사실 12간지에서도 돼지가 맨끄트머리에 오지 않는가). "21세기가 조금만 더 간절히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그러한 '때늦음'은 누설되고 있는 것 아닌가. 맛보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그의 '차라리, 사랑'(http://webzine.munjang.or.kr/article/content.asp?pCate=27&pVol=27&pID=416)을 미리 읽어볼 수도 있겠다. 작년 11월 문장웹진에 실렸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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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책 제목에 '-에서 -까지'형이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그런 타이틀의 책은 좀처럼 손에 들지 않는다. 이것도 취향이라면 취향이니까 무슨 이유(논리)가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그런 취향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들춰보지 않은 책에(취향에 덧붙여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별로 주목하지 못한 점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서양철학사 개론서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 2004)가 있다(물론 이 취향 때문에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같은 양서들까지 '피해'를 보기도 한다). 다행스럽다고 한 것은 이 두툼한(789쪽) 고가(27000원)의 입문서가 오역의 범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extraneus/1598429, http://blog.aladin.co.kr/ironpen/1719353 참조).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한국 출판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개념없는 번역과 무성의한 편집의 '합작'이 두드러진 성과를 낳은 경우라 할 만한데, 재미있는 건 이 책이 지난 2004년 10월 출간과 함께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는 점('이달의 읽을 수 없는 책'이 아니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 들어가 선정의 변을 읽어봤다.

다른 역사책과 마찬가지로 서양철학사에도 하나의 뚜렷한 사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관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닐 때 비로소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다. 이 책이 다른 철학사와 구별되는 점은 서양철학의 생성과 발전, 진행을 명료하고 간략하게 다루었으면서도 그 전개의 방식에 있어서 매우 독자적인 입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발생의 동기와 전개의 필연적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과거의 흐름을 쉽게 이해시킬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여러 주요학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부각시키지만 어느 입장에 편중하지 않고 비판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철학적 문제와 부딪히도록 유도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최근의 사조를 철학사적 맥락에서 다룬 것은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이다.

보통 이달의 책 선정위원들의 추천을 받아 목록이 작성되는 것으로 아는데, 이 책을 (무책임하게) 추천한 선정위원은(필시 철학교수이겠다) 번역서를 들춰보지도 않았겠다. 덕분에 전국의 도서관에서 애꿎은 독자들이 '서양철학사'의 장벽 앞에서 걸음을 돌리며 좌절하지 않았을까. '철, 계', 철학은 유혹적이지만 한편으로 경계해 마땅하다. 더구나 오역서들이 난무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라면. '화제의 책'을 다룬 기사와 함께, '역자의 서재' 탐방기사까지 참고해본다. 많은 저역서를 갖고 있는 역자의 '학문' 자체에 회의를 갖게 하는 이런 번역서를 왜 굳이/버젓이 출간하는 것인지 미스터리하다(하긴 가장 최근에 나온 <해체주의와 그 이후>의 경우에도 별반 신뢰할 수 없다는 평을 나는 쓴 바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585043 참조).

 

강원일보(04. 10. 16) [화재의책]'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의 역사는 관념의 모험이다. 위대한 철학자는 위대한 관념을 창조하고 그 관념이 인간을 지배하고 세계를 지배하게 만든다. 철학의 역사는 관념의 싸움터이다. 여러 관념이 등장해 치열한 지적 경쟁을 벌리다가 승리한 관념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관념도 새로운 관념의 도전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의 방향을 선도하고 있는 이성 정의 평등 인권 자유와 같은 거대한 관념도 철학적 사유의 소산이다.

우리는 철학사를 공부함으로써 이러한 관념 모험에 쉽게 동참할 수 있다. 하지만 마땅한 철학사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 서양철학이 소개 된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말로 된 좋은 철학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가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2600년에 이른다. 이 책은 기원전 624년에서 546년까지 활동한 철학의 원조인 탈레스에서 시작, 아직도 살아있는 미국의 철학자 로티, 대륙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 철학 교수였던 새무얼 스텀프가 1966년에 출간한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를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 제임스 피저가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몇 장을 보완해 최근 새롭게 내놓은 것을 강원대 이광래(철학과)교수가 번역, 출간했다.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의 우리말 번역본이 절판돼 아쉽던 차에 새로운 모습으로 번역돼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더욱이 이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www.kpec.or.kr)가 선정한 10월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 철학사를 공부함으로써 서양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 인간 지식의 본성, 우주에 본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고, 철학자들의 생각이 서양 문화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물 중심의 서양철학사이다. 인물 중심의 서양철학사는 문제중심의 서양 철학사와 비교해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철학자 개인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로크 칸트 헤겔 밀 마르크스 니체 현대 철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로티가 전개한 지적 향연을 누릴 수 있다.

이광래교수는 이 책을 번역, 출간하며 “이 책은 20세기 철학과 그 후 현재 논의중인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다룸으로써 시간이 생명일 수 있는 철학사의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철학사를 현재 논의의 장으로까지 끌어들였다”고 적고 있다.(張奇永기자)

강원일보(05. 01. 31) [서재탐방]강원대 철학과 이광래교수

1980년대 세계 지식인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식인 세계에서도 사상적 화두는 프랑스 철학이었다. 프랑스 철학을 선도적으로 한국에 소개하고 연구해 온 강원대 철학과 이광래 교수(60)의 학문적 관심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변하고 있다. 그는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열정적으로 연구하면서 저서와 번역서를 여러권 출간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그의 지적 관심은 프랑스 철학에서 동·서비교철학 특히 한·중·일의 동아시아 철학으로 이동했다.

요즘 그는 `습합사(習合史)로 본 일본사상사 연구'에 학문적 열정을 집중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이 지적 생산의 세계에서 모험적인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그의 연구실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오는 5월말 출간 예정인 `습합사로 본 일본 사상사 연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이 교수는 일본사상과 문화의 특성을 한마디로 외래문화·사상과의 습합문화(習合文化), 습합사상(習合思想)으로 요약한다. “습합이란 외국문화와 사상을 자기 고유의 사상과 융합시켜 제3의 것을 창조적으로 생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일본 사상의 핵심은 자신의 사상과 한국, 중국 사상과의 습합의 결과이기 때문에, 습합의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까지 일본 사상의 유형·방법·내용을 정리하면, 일본 사상의 전모가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프랑스 철학 전문가에서 동아시아 사상의 교류와 발전으로 학문적 관심과 연구를 전환한 것은 21세기에 대한 그의 전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장차 도래할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인에 의한 동아시아사상 연구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습합사로 본 일본사상사 연구'의 선행 연구 결과 이미 `우리사상 100년'(2002년), `한국의 서양사상 수용사'(2003년)를 출간했다. 2004년 대한민국 학술원은 `한국의 서양사상 수용사'를 우수도서로 선정했으며 미국 중국 일본에서 이 책이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1981년 이후 매년 저서 또는 역서를 1권 이상 출간해 왔다. 저서가 13권, 역서가 18권에 달한다. 1989년에 출간된 `미셀 푸코'와 1986년에 번역 출간된 `말과 사물'은 프랑스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교과서 역할을 했다. 2004년 출간한 서양철학사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는 정기간행물위원회가 선정한 우수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003년부터 강원대 중앙도서관장을 맡아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4개국의 7개 대학이 참가한 `동아시아 대학도서관 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오는 3월이 되면 강원대의 지적 보고인 중앙도서관이 100만 도서를 소장하게 된다. 그는 외국대학과의 자매결연에도 힘써왔다. 오는 5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대학 개교35주년 기념식에서는 지난 1988년 강원대와 자매결연 이후 대학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잊지 않는다. “철학은 생각의 디자인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인생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세계가 보입니다. 미국 월가를 움직이는 CEO의 70% 이상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張奇永기자)

07. 11. 24.

P.S.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 대한 마지막 대목의 충고는 인상적이다. “철학은 생각의 디자인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인생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세계가 보입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철학은 '오역의 디자인'이 아니며 이런 철학사를 읽으며 볼 수 있는 세계란 암담한 세계일 따름이다. "미국 월가를 움직이는 CEO의 70% 이상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읽은 책이 이런 오역서가 아님도 분명하다.

기사중 "이 책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 철학 교수였던 새무얼 스텀프가 1966년에 출간한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를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 제임스 피저가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몇 장을 보완해 최근 새롭게 내놓은 것을 강원대 이광래(철학과)교수가 번역, 출간했다.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의 우리말 번역본이 절판돼 아쉽던 차에 새로운 모습으로 번역돼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란 대목에 대해 두 가지 '주석'을 덧붙인다(강조한 대목은 어이없다. '학, 계', 공부깨나 한다는 이들도 믿지 말지어다!).

먼저, 새무얼 스텀프의 책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Socrates to Sartre: a history of philosophy)>는 이광래 교수의 번역으로 <서양철학사>(종로서적, 1983)라고 소개되었다. 기자가 절판돼 아쉽다고 한 번역본이다. 제자인 제임스 피저가 몇 장을 추가해서 내놓은 개정판이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Socrates to Sartre and beyond : a history of philosophy)>이고,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7판이다. 그렇다면, 스텀프의 책은 국내에서 20년간 읽혀왔다는 것인데, 2004년에 나온 개정판이 그런 수준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건 놀랍고 기이한 일이다(철학사 교재로도 사용되었다니까 더더욱).

실상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란 제목을 가진 철학사 입문서는 하나가 더 있다. T. Z. 래빈 여사의 방송강의를 책으로 묶은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동녘, 1993)가 그것인데, 스텀프의 책처럼 통사는 아니고 플라톤, 데카르트, 흄, 헤겔, 마르크스, 사르트르 등 6명의 철학자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에서 -까지'란 타이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런 타이틀이 한때 유행이긴 했다) 구입해서 읽어봤을 만큼 잘 씌어지고 잘 읽히는 책이었다(나는 페이퍼백 원서도 구입했다). 이 책은 <방송강의철학사>(현대지성사, 1997)라고 다른 번역본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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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11-2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큰맘 먹고 사서 사전처럼 이용하고 있는 책인데요-_-

로쟈 2007-11-24 22:15   좋아요 0 | URL
돈이 아까울 만한 책입니다.--;

루루 2007-11-2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무슨"위원회"가 양서로 선정한 책은 저 같은 독자는 그냥 무턱대고 좋은 책인가보다 하고 믿는 편이지요..그런데 이런 사례를 보니깐 왠지 허탈하네요. 책을 쓰고 번역하고 하는 학자들이 과연 그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오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요..) 그러고보면, 고등학생들에게 가다머와 하버마스, 푸코를 필독이라고 추천하면서 들이미는 대학들도 한숨을 나오게 하기는 마찬가지네요.

로쟈 2007-11-25 00:08   좋아요 0 | URL
가다머와 하버마스, 푸코는 교수들도 안 읽는 책입니다(해당 전공자가 아니라면). <계몽의 변증법> 같은 책이 논술문제에서 언급될 때마다 저는 놀랍니다. 출제자는 읽은 것인가, 하고...

마늘빵 2007-11-25 00:37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하버마스, 푸코, 가다머 저는 대학 학부에서 거의 못들어봤습니다. 하버마스는 아렌트와 연관해서 살짝 언급하는 정도였고, 푸코는 성의 역사만 훑어 읽어봤고. 가다머는 대학원 와서 교수님 전공이 그쪽이라해서 이름만 알고 있습니다. -_- 교수들도 자기 전공과 관련해서나 읽지 안 읽을 겁니다. 푸코는 많이 대중화되서 좀 다르겠지만.

마늘빵 2007-11-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스텀프의 서양철학사가 대학 학부 시절 발제지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었지요. 선배들도 교수님도 그 책을 참고하라고 하셨었어요. 객관적이라고. 반면 기독교 학교였던지라 그랬는지 러셀의 철학사를 참고하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다른 대표적 철학사 책은 다 소장하고 있는데 - 다 읽은건 아니고 - 스텀프 것만 없어요. 한번 철학사 책들을 몽땅 구입할 때 그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모습이 바뀌었군요. 저 밑에 말은 참 인상적입니다.

로쟈 2007-11-25 00:0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로 지명도 있는 책인지는 몰랐는데요(예전 종로서적판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개정판의 번역이 더 나빠졌을리는 없을 텐데, 다들 읽을 만은 했다는 건가요? 흠...

마늘빵 2007-11-25 00:45   좋아요 0 | URL
네 종로서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검색해봤더니 맞네요. 최명관 선생님 번역한거. :)

스텀프의 책과 코플스톤의 철학사가 많이 도움이 됐었죠. 번역상의 문제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보면 보일지 모르겠는데 학부 시절엔 그런거 하나도 안보이고 따라가기 급급하니까요.

살청님은 어떤 점에서 러셀의 철학사가 안좋다고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안좋다는 이야기는 꽤 들었는데 왜 안좋은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제가 러셀의 철학사를 가지고는 있지만 필요할 때만 발췌해서 읽어본게 다 인지라 전체적으로 판단하긴 어렵고.

로쟈 2007-11-25 00:58   좋아요 0 | URL
서지에 혼동이 있는 거 같습니다. 종로서적판은 도서관 검색에서 모두 이광래 역으로 나오는데요. 최명관 등의 <서양철학사>는 렘프레히트의 것(을유문화사)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알라딘에는 세 사람 공역의 <서양철학사>가 스텀프와 렘프레히트 공저로 떠서 더 헷갈리는군요)...

마늘빵 2007-11-25 09:43   좋아요 0 | URL
아 이런. 램브레이트가 있었죠. -_- 헷갈리는군요. 램브레이트 것이 최명관 선생님 번역 맞는거 같습니다. 근데 스텀프의 번역본이 애초 문제가 많았는데 왜 그 책을 보라고 했었던건지 의문이... 아마도 교수님은 원서를 염두에 두고 그리 말씀하신게 아닌건가 생각됩니다. -_-

yoonta 2007-11-2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런건 있습니다. 철학책은 원래..영어로 봐야 더 잘 이해된다는. 한글로는 애매하고 불분명했던 구절이 영어나 원어로 보았을 때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있더라구요. 제가 한국어를 못해서 그런건지..어쨋든 그렇더군요. 특히 어려운 철학책일수록..

로쟈 2007-11-25 00:59   좋아요 0 | URL
분명 그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서..>의 경우엔 오타와 단순 오역이 다수 포함돼 있어서 그냥 그 자체로 무성의한 번역이란 인상을 주네요...

yoonta 2007-11-2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주에선가 문제의 책으로 공부한것도 책의 오역을 찾는게 목적이라기보다는 영어로 철학사를 공부하려는것이 주 목적이었겠죠. 그러다가보니 오역들이 보였던것일게고..한문장이해하는데도 한참 걸리는 철학책은(저같은 경우 특히 데리다^^;;) 필히 원어와 대조해서 봐야할겁니다. 데리다의 <입장들>을 얼마전 영어로 대조해서 다시 읽어봤는데..그제야 조금 감이 잡히더군요. 오역들도 조금 눈에 띄는것 같고..

로쟈 2007-11-25 01:08   좋아요 0 | URL
<입장들>도 재번역되어야 할 책이죠(영어본도 개정판이 나왔고). 저도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yoonta 2007-11-2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책으로 읽어내기도 힘든 표현을 데리다는 대담으로 즉 말로서 그자리에서 줄줄 쏟아 낸다는 건데..저런 내공은 어떻게 길러지는것인지..대략 난감-_- 데리다 자신도 그랬다더군요. 자신의 독자는 전세계적으로 대략 1000여명쯤이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다는데..뭐 그리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11-25 01:21   좋아요 0 | URL
상대적인 건 같은데요, <이론 이후 삶>을 읽어봐도 질문자들의 말이 데리다보다 더 어렵습니다. 제 경우엔 데리다보다 안 읽히는 철학자들이 너무 많은지라.^^;

yoonta 2007-11-25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이후의 삶>의 대담자들도 그렇군요..(털석;;) 이게 다 데리다나 들뢰즈같은 분들이 조장해 놓은 분위기라는..에혀..하긴 지젝도 한페이지 읽기도 힘들죠. 저로서는.

로쟈 2007-11-25 01:35   좋아요 0 | URL
개인차겠지만, 제 경우엔 들뢰즈가 데리다나 지젝보다 두 배는 읽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헤겔이나 라캉보다는 읽기 편한 게 아닐까요?^^

yoonta 2007-11-25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상기시키지 마세요. 로쟈님..ㅜ.ㅜ

로쟈 2007-11-25 09:18   좋아요 0 | URL
괴로운 기억이?^^;

자꾸때리다 2007-11-2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읽을 수 없는 책'이 아니라!

ㅋㅋ

그냥 차라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이달의 읽을 수 없는 책>을 선정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ㅋㅋㅋ

(그게 더 힘든 것?)

로쟈 2007-11-25 22:02   좋아요 0 | URL
더 의미있겠지만 고양의 목에 방울달기 같습니다...

살라흐앗딘 2007-11-2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휠쉬베르거의 책을 주로 읽다가 약간 버거워서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산게 스텀프의 책인데(둘 다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이런 기사를 보니 좀 심란하군요;; 원문 볼 능력은 안되고 ㅎㅎ 변명의 여지도 없다,라..-_-;;

로쟈 2007-11-25 22:04   좋아요 0 | URL
(본문에 링크해놓은) 오역을 지적하는 리뷰들을 검토해보신 다음에 판단하시길...

히드라 2007-11-2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에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오역/오자' 정오표를 보내고, 새로이 재번역을 할 것과 개정 후 공개적인 리콜을 요구하였습니다. 출판사측 이소영 인문 분야 팀장이 답변하길, "거래 서점에서 그 책들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하고, 새로이 개정판을 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리콜 부분에서는 명확히 언급을 하지 않았구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로쟈님, 좋은 글로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로쟈 2007-11-27 13:41   좋아요 0 | URL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서 다행입니다. 이런 선례가 쌓이면 좀더 다듬어진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수고야 열심히 읽고 지적해주신 분들이 하신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