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흥미롭게 읽은 북리뷰는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 2007)에 관한 저자 인터뷰였다. 오늘 오다가 동네서점들에 들러봤지만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헛걸음했는데 사화와 반정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 때문으로라도 읽어볼 작정이다. 사실 한국사 관련서들을 손에 드는 일은 아주 드문데, 책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다툼이라는 조선정치사에 대한 나의 오랜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만든다(그 고정관념은 사실 고등학교때 국사선생님이 심어준 것으로 당시에는 '개안'이고 '발견'이었다). 저자는 거기에 '삼사'가 제3항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 최근 읽고 있는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과도 무관하지 않아서 독서 목록에 올려둔 김에 인터뷰기사도 챙겨두도록 한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9979.html).   

한겨레(07. 12. 29) "사화는 선비 대립 아닌 삼사 둘러싼 권력투쟁”

사극의 단골 메뉴로 곧잘 등장하는 조선시대 사화(士禍)는 흔히 폭군 연산의 출생비밀과 패륜이 오버랩되는 궁중 치정·암투극, 또는 고루한 훈구파와 개혁적 사림파간 싸움 쯤으로 상투화돼 있다. 김범(37)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자신의 첫 책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그리는 사화는 그런 모습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첫 사화인 무오사화를 폭군의 패륜으론 설명할 수 없다. “연산군은 그때까지만 해도 광포한 폭군적 면모를 보이지 않았고 방법상으로도 나름의 정합성을 갖고 있었다. 무오사화의 진정한 의도는 김종직 일파를 처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삼사(3司)의 언론활동을 경고하려는 데 있었다고 판단된다.”

고작 ‘삼사의 언론활동’을 규제하려고 그런 피바람을 일으켰단 말인가? ‘고작’이 아니다. 이 삼사의 언론활동 규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야말로 조선시대 500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키워드의 하나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의 핵심적 주제가 바로 “삼사라는 중요한 관서가 그 기능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과 결과를 살피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그럴려면 선대인 9대 성종(재위기간 1469~1494) 치세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고, 10대 연산군(1494~1506)과 그가 폭정 끝에 쫓겨난 반정 이후의 11대 중종조(1506~1544) 연간까지 살펴야 한다. 그 기간에 3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반정이 감행됐다.

“조선시대를 임진난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대신-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잡은 건국 1백여년 뒤의 이 3대 75년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 김씨는 바로 이 제도에 천착하는 제도사적 접근자세를 취한다. “제도의 골격을 일단 파악하고 나면 현실의 수많은 복잡한 모습들은 한결 체계있게 정리될 수 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19살 때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자산군. 세조비 정희왕후가 형 월산군을 제치고 13살 나이의 그를 보위에 앉힌 뒤 수렴청정을 했다. 장인 한명회로 상징되듯 그 시절은 세조대에 양산된 수많은 훈구공신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승정원(국왕 비서실)의 재상’들을 가리키는 ‘원상’ 지배체제이기도 했다. 성종이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한 것은 재위 7년(1476)부터였고, 그 이후 그는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꺾기 위한 장치로 대간, 곧 신하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언과 잘잘못을 논박하는 사간원을 키웠다.

대간은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성종시대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곧 비대해진 대간이 왕권을 제약하자 성종은 원래 학문을 담당한 홍문관의 언론기능을 강화해 대간들을 견제토록 했다. 삼사란 바로 대간에 홍문관이 가세한 언론·감찰기관이다. “조선은 절대왕정체제이긴 하나 왕이 마음대로 전횡할 수 있는 전제체제는 아니었다. 신권이 강했다. 삼사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중요한 견제장치였는데, 중국엔 삼사가 약했다. 조선에서 환관의 발호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삼사 덕이다. 삼사가 약했던 중국에선 환관의 힘이 셌다.”

삼사가 겨냥하는 주표적은 대신들. 대신은 최고관서로 영의정 등이 포진한 의정부와 이·호·예·병·형·공의 판서와 참판들이 포진한 육조(6曹), 즉 집행기관 고관들을 가리킨다. 성종은 대신과 삼사를 상호견제케 했고 삼사가 비대해지자 홍문관을 강화해 내부견제토록 했다. 이는 국왕-대신-삼사라는 조선조 특유의 정치정립구도의 토대가 됐으나 항상 제대로 작동한 건 아니었다. 말년에 성종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19살 나이에 왕이 된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삼사의 약진에 눌려 있던 대신들과 공모해 삼사를 친 게 무오사화였다. 훨씬 더 처참했던 갑자사화는 무오사화 이후 강화된 왕권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연산군에게 대신과 삼사가 합세해 견제에 나서자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 못한 채 자제력을 잃은 연산군이 훈구, 사림 구분없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결과다. 결국 조야 모두로부터 원한을 산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쫓겨나는데 그게 중종반정이다.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 등을 숙청한 기묘사화 역시 반정공신들이 주축이 된 대신의 전횡을 삼사 강화로 견제했다가 그 삼사가 왕권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중종이 이번엔 대신들과 짜고 삼사를 친 사건이라는 게 김범씨가 내린 결론이다.

“사화를 출신배경이 다른 훈구파-사람파 단순 선악대립구도의 이분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조선사회는 혈통과 가문 등이 공고하게 짜여진,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사회였다. 사림파 거두로 알려진 조광조나 김종직도 명문거족 출신이었고 훈구파 거두 양성지와 후손들은 사림파로 분류될 수도 있다. 훈구와 사림은 서로 얽혀 있었다.”

김씨는 국사편찬위에서 <승정원 일기>(실록보다 몇배나 더 방대한 기록이나 임진란 때 불타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다) 디지털화 작업을 하면서 지난해 타계한 미국의 한국학 연구분야 거두 제임스 팔레의 반계 유형원론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다. 해외 한국연구는 내부시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수준높은 일급의 연구들에 대해서는 시각이 다르더라도 “감정적 대응보다는 공부에는 공부로 대응하는 실체적 접근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 사화란= 사화(士禍)는 말 그대로 선비(사대부)들이 입은 참화다. 조선시대 4대 사화라면 연산군 4년(1498년) 때의 무오사화, 10년 때의 갑자사화, 중종조의 기묘사화, 13대 명종(재위 1545~1567)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무오사화는 사림(‘사대부의 숲’이라는 뜻)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훈구대신 이극돈 등의 비행을 사초에 넣고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삽입한 게 발단이 됐다. 김종직 일파와 대립했던 이극돈,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 편찬 때 조의제문이 단종한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에 고하고 처벌을 부추겼다.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한 연산군의 무차별 보복극, 기묘사화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한 조광조 등이 남발된 훈구대신들의 공훈 삭제를 감행한 데 대한 대신과 국왕의 반격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을사사화는 대윤, 소윤으로 갈라진 문정왕후 외척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피화자들은 다수가 사사, 주살 등의 형태로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고 유배됐으며, 무덤에서 주검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도 드물지 않았고 가족, 친척, 친구, 제자들도 연루돼 맞아죽거나 노비가 되고, 유배당하는 참혹한 화를 당했다.

반정(反正)은 정통이나 정도를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을 쫓아낸 16대 인조(1623~1649)반정이다.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구실로 삼은 인조반정은 나름대로 치적을 쌓은 광해군의 치세와도 관련해 명분없는 궁정쿠데타였다는 지적이 많다.(한승동 선임기자)

07.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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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화의 역사적 성격
    from 看書痴齋 2007-12-31 22:50 
       조선왕조 정치사에서 사화(士禍)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개국 후 약 한 세기가 가까와지는 시점이었다. 사화는 한 차례로 끝나지 않고 약 70년간에 걸쳐서 큰 것만 해도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중종14년, 1519),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 등 네 차례나 되었다. 동일한 형태의 정치현상이 이렇게 연속적으로 거듭된 것은 그 자체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