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학서 독자라면 제목이 단박에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말로 비튼 것도 아니고, 원래 제목이 그렇다. 새로 나온 아이작 뉴턴의 전기를 언급한 김에(http://blog.aladin.co.kr/mramor/2311334) 파인만의 이 베스트셀러에 대한 서평도 챙겨두도록 한다. 나는 아주 오래전 두 권으로 나오기 전 판본으로 읽었다. 최근 이 자서전은 파인만 서거 2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와 <남이야 뭐라 하건!>을 합본한 <파인만!>(사이언스북스, 2008)으로 다시 출간됐다.   

경향신문(08. 09. 20) [자서전 읽기](6) 리처드 파인만의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파인만의 동료과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파인만이 모험과 우스개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지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축구로 치자면 개인기가 출중해 문지기마저 희롱하는 화려한 플레이를 자랑하는 골잡이로만 돋을새김된 면이 있다고 본 것이다. 프리먼 다이슨도 그런 점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파인만의 과학스타일은 빛나고 인상주의적이었던 바 “불투명한 미분 방정식이 아니라 투명한 그림으로 자연을 설명했고, 칠판을 가득 메운 비의적인 기호가 아니라 극적인 몸짓과 온갖 의성어를 동원해서 강연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과학정신은 보수성을 짙게 띠고 있었다고 프리먼 다이슨은 힘주어 말한다.

파인만은 물리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나타났을 적에 그것이 얼마나 멋지냐보다 얼마나 올바른 것이냐를 판단의 잣대로 내세웠다. 그 자신이 일순간의 놀라운 발명으로 과학의 새 지평을 열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세심하고 고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그가 만든 것 중에서 서둘러 구축한 것은 하나도 없고, 이 모든 것들은 세월의 시험을 견디고 서 있다.”



하지만 파인만의 진중함과 진정성, 그리고 끈기를 동경해서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사이언스북스, 이하 ‘파인만!’)를 읽을 리는 없다. 결코 과학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화, 그러니까 과학자와 군사 전문가들이 한 데 모여 있는 데서 남의 금고를 열어젖히고, 죽음이 예고된 여성과 결혼하는 순애보를 남기고, 밴드에서 드럼을 치며 삶을 즐길 줄 알고, 바에서 만난 여성을 꼬드기려고 애썼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행만 일삼았다면 무에 대단하겠느냐만, 그 와중에도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1986년에 일어난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원인을 밝혀내 성가를 올린 출중한 학자였기에 그의 자서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이리라.

나는 ‘파인만!’을 읽으면서 대뜸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의 일대기를 보노라면 과학자들이 겪었음직한 성장과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말이다. ‘이름 하여 천재과학자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관점으로 이 책을 읽노라면 새로운 것을 깨우치게 된다.

먼저 아버지의 역할. 그의 아버지는 제복장사를 했다. 아내에게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과학자가 될 거라 했다니,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파인만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백과사전을 읽어주곤 했다. 동화책이 아니라 백과사전을 읽어주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읽어주는 방식도 남달랐다. 공룡 항목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나오고, “이 공룡은 키가 7~8m이며 머리 둘레가 2m 정도”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이 구절을 읽고나서 아버지는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자 했다. 공룡이 만약 집앞 뜰에 서 있다면 책을 읽는 2층 창문에 닿을 만한 크기인데 머리가 커서 창문으로 들어올 수는 없겠다고 말해주었다. 딱딱한 내용을 실감나게 풀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흥미는 배가되었다. 아버지는 늘 예를 들어 설명하고 대화로 가르치려 했다. “강요나 억압은 전혀 없었고 단지 흥미롭고 사랑이 깃든 대화가 있을 뿐이었다.” 훗날 그가 명강의로 이름을 날리게 된 힘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아버지는 스승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법이다. 열세 살 적에 도서관에서 미적분학 책을 빌리려 하자 어린아이가 왜 이런 책을 보려 하느냐고 사서가 물었다. 아버지께서 보려 한다고 거짓말하고는 빌려와 혼자 공부했다. 아버지도 읽었는데, 복잡하다며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비교적 쉽고 간단하다고 느꼈는데 말이다. 늘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이제 가르쳐드릴 정도로 훌쩍 자라났다. ‘청출어람’은 이럴 때 쓰라고 사전에 있는 말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내용이 장회익의 자서전 ‘공부도둑’에도 나온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그럼에도 동료들이 ‘장 박사’라 부를 만큼 견실한 토목기술자로 살아갔다. 평소 수학과 물리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 데다 꾸준히 관련학문을 공부해 온 덕이다. 장회익이 일찌감치 이들 과목에 흥미를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아버지가 여러 차례 미적분학을 혼자 힘으로는 공부해낼 수 없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러브의 ‘미적분학’을 읽고나서 눈을 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미적분을 이해했다며, 가르쳐드리겠노라 선언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설익은 지식을 아랑곳하지 않고 흔쾌히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무릇 이 땅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물어보아야겠다. 다음 세대에게 지적 흥미와 자극을 주는 살아있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라고. 그리고 기억해야겠다. 모든 것은 아버지한테 배우는 법이라는 것을.

두 번째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자 위인전에 물릴 정도로 나오는 내용이다. 왕성한 지적 흥미를 이겨내지 못해 실험을 하다 사고를 겪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개구쟁이에 익살꾼이었던 그가 남 보기에 아슬아슬한 일을 얼마나 자주 저질렀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기껏 말했는데 친구들이 믿지 않으면 실제로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오줌이 중력으로 떨어진다고 우기는 친구에게 물구나무 서서 오줌 눌 수 있다며 실연을 해보였다. 코카콜라와 아스피린을 같이 먹으면 기절한다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논쟁이 이상하게 발전해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하는지로 번졌다. 그래서 몸소 나섰다. 세 번 실험했는데, 아스피린 먼저 먹기, 둘 섞어먹기, 콜라 먼저 먹기. 결과는? 기절하는 것은 고사하고 잠이 안와 수학문제를 실컷 풀어보았단다. 동네 꼬마들을 대상으로 화학을 이용한 마술쇼를 한 적도 있다. 광대기질이 있는지라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벤젠을 이용해 손에 불을 붙이고는 불이 났다고 호들갑을 떨며 쇼를 마쳤다고 한다. 친구들이 믿지 않자 재연을 해보였다. 이번에는 손에 화상을 입는 큰 사고가 났다. 이유인즉슨, 어릴 때와 달리 손등에 난 털이 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서전의 백미라 할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도 실험에 얽힌 이야기가 여럿 나온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 하나. 형이 등산 가면서 실험실 열쇠를 맡겼다며 같이 가자고 친구가 찾아왔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다. 열 여섯살 때다. 둘 다 화학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친구는 그것으로 돈벌이와 안정된 삶을 꿈꿨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뜻했다. 두 사람은 실험실에서 화학교과서에 나와 있는 현상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 정도는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웃음가스로 알려진 아산화질소를 만들려 했다. 연기가 엄청 피워 올라 웃음은 고사하고 질식할 뻔했다. 결과가 확실한 실험에 도전하려고 물을 전기분해해보기로 했다. 양극 쪽의 병에 기체가 절반 정도 찼는데, 친구가 그것이 수소와 산소라는 증거가 없다 했다. 모욕감을 느낀 프리모 레비가 음극 쪽의 유리병 주둥이 근처로 성냥을 켰다. 폭발이 일어났다. 그때를 회고하며 적은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니까 그것은 수소였다. 태양과 별들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이고, 영원한 침묵 속에서 뭉치면서 온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집에도 실험실이 있었다(형 것이든 친구 것이든). 큰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을 실험으로 풀어가며 과학자로 성장해나갔다. 예전과 달리 학교에 실험실이 많이 늘었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입시에 치인 청소년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흥미롭게 실험에 매달릴지 모르겠다. 기반도 만들어주지 않고 노벨상 받자고 팔 걷어붙이는 것은 도둑놈 심보일 뿐이다.

계통발생의 과정을 거친 파인만이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파인만!’을 읽으면서 이 점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흥미를 돋워주는 대목도 여기에 있는 바, 권위에 대한 도전이 바로 그것이다.

로스엘러모스에서 파인만은 위대한 과학자들을 만난다. 막 박사학위를 마친 그에게 눈길을 돌릴 거물은 없다. 단, 한스 베터는 예외였다고 한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와 건방진 젊은이를 붙들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면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요, 아니요, 그건 미친 생각이에요. 이건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러자 한스 베터는 ‘잠깐만’이라 하고는 왜 자신이 미치지 않고 젊은이가 미쳤는지 설명한다. 무례한 젊은이가 파인만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닐스 보어가 만나자고 했다. 효율적으로 폭탄을 만들 아이디어가 있다며 설명하자 파인만은 그렇게는 잘 안될 거라고 대꾸했다. 닐스 보어의 반론이 있자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여전히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비판했다. 두 시간 남짓 공방이 벌어졌다. 그때야 닐스 보어가 말했다. “이제 거물들을 불러모을 수 있겠군.”

창조와 혁신은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창의의 영역에 영원한 법칙은 없다. 지금까지 유효한 것만 있을 뿐이다. 의심하고 비틀어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질문해 나갈 때 새 지평이 열리는 법이다. “남이야 뭐라 하건!”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펼치는 정신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그리고 그 도전을 높이 쳐주는 너그러움 또한 간절하다.

파인만에게도 아킬레스 건은 있다. 과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는 무심했다. 원자폭탄 실험이 끝났을 때 로스엘러모스는 잔치분위기였다. 그런데 밥 윌슨은 울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것은 흉악한 거야”라는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대해 파인만은 “우리는 충분히 이유가 있어서 시작했고, 열심히 한 덕분에 성공했고, 이것은 즐거운 일이고, 짜릿한 일이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하려면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승산)를 보아야 한다.

이 강연집에서 그는 “이것은 ‘과학자의 책임과 윤리의식’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난 여기에 대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것을 ‘과학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인도주의적인 문제에 훨씬 더 가깝다. 과학을 통해 어떻게 그 힘을 얻는지는 분명하지만 그걸 어떻게 규제할지는 분명치 않은데, 그것은 이 문제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과학자가 여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황우석 사태를 겪으며 과학과 사회, 그리고 윤리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오로지 발견의 가치 때문에 과학자가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인만!’은 일반적인 자서전과 달리 대필한 책이다. 동료였던 로버트 레이턴의 아들 랠프 레이턴이 파인만과 어울리면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파인만이 원고를 검토하고 가필하고 출판을 승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래서 이 책의 지은이는 리처드 파인만이고 엮은이는 랠프 레이턴이다. 저작권도 유족과 엮은이가 공유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쓰는 글이 자서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돈 벌고 힘 있는 사람들이 문필가를 고용해 자신의 삶을 미화하는 것이 자서전인양 여긴다. 당연히 자신이 직접 쓴 듯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구술하고 이를 대신 써줄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썼는지를 밝히느냐 아니냐는 분명히 다른 문제다. ‘파인만!’은 우리의 천박한 자서전 문화를 되돌아보게 한다.



파인만을 과학자로 만든 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을 실험으로 풀어냈던 태도였다. 그리고 파인만이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세울 수 있었던 절대적인 힘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창조와 혁신은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창의의 영역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의심해보고, 비틀어 보고, 다시 생각해 보고, 질문할 때 새 지평이 열리는 법이다. 남이 뭐라 하든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펼쳤던 파인만이기에 그는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이권우 | 도서평론가)

08. 09. 21.

P.S. 알다시피 파인만의 삶과 과학을 다룬 자세한 전기에는 제임스 글릭의 <천재>(승산, 2005)가 있다. <파인만!>과 함께 세트로 갖춰둘 만하다(파인만의 아버지에 대해서 관심이 간다). 아래는 세 권의 표지이다. <천재>의 원서와 사이언스북스판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 그리고 내가 읽은 <파인만씨, 농담도 정말 잘하시네요!>(도솔,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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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08   좋아요 0 | URL
멀리 갈 것 없이 일본만 해도 전기나 평전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꽤 많아요.구미에선 현역정치인이나 관료가 자서전을 쓴다면 미리 출판사가 경쟁을 할 정도인데 우리나라엔 이런 모습 보기가 힘들죠.

로쟈 2008-09-22 16:41   좋아요 0 | URL
그쪽은 글쓰기 문화가 있는 것이죠. 우리에겐 없는...

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25   좋아요 0 | URL
잘못 쓰면 압력이 엄청나게 오는 우리나라에 비해 그 쪽 나라는 그런 게 비교적 덜한가봐요.

로쟈 2008-09-23 00:07   좋아요 0 | URL
그보다는 '지식인=저자'라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웅변가들만 더러 있었구요...

yoonta 2008-09-23 12:12   좋아요 0 | URL
과학을 "인도주의의 문제"라고 봤다면 파인만은 정말로 순진하거나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사람이네요. 과학(기술)은 인도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과학도 결국 정치의 문제일 수밖에 없죠. 머레이 겔만이 말했듯이 지나치게 자신의 인기관리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인문학적 소양도 좀 별로인듯 하고요.

로쟈 2008-09-23 14:08   좋아요 0 | URL
'과학 천재'와 세상사는 대체로 무관하기 때문이겠죠(여성이라면 다르겠지만). 파인만이 특별히 생각없는 사람은 아니고, 사실 현장의 과학자들 대부분이 파인만 이상의 정치의식은 갖고 있지 않을 듯싶은데요('과학철학'이라는 말 자체도 대개는 싫어한다고 하니까요). 아,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은 예외겠네요...
 

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한권만 읽어야 한다면 개인적으론 제임스 글릭의 <아이작 뉴턴>(승산, 2008)을 고르고 싶다. 과학자 평전이야 요즘 흔하게 나오는 것이지만 일단 베스트셀러 <카오스>의 저자이자 리처드 파인만의 전기 <천재>(승산, 2005)를 쓴 과학 저널리스트 제임스 글릭의 책이란 점, 그리고 물론 뉴턴의 전기를 한권쯤은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거기에 보태진다. 이미 소개된 뉴턴의 전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글릭의 책은 짧으면서도 정확하다는 강점을 갖는다고. 저명한 과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턴의 삶과 업적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글릭의 이 전기를 그 훌륭한 출발점으로 추천한다. 이 책에는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다. 정확하고 읽기 쉬우며 짧다. 글릭은 원전으로 돌아가서 뉴턴을 되살려냈다.”

디지털타임즈(08. 09. 17) 고뇌하는 `인간 뉴턴`의 삶 엿보기

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험기간 땀을 뻘뻘 흘리며 벼락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갈릴레오와 뉴턴만 없었으면 이 고생을 안 해도 될 텐데."

대다수 사람들에게 뉴턴은 플라톤, 테레사 수녀, 에디슨처럼 바다 건너 온 하나의 위인에 불과하지만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뉴턴은 애증의 대상이다. 우리 모두가 뉴턴이 밝혀낸 세상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는 까닭에 그는 세상에 빛을 전달함과 동시에 지독한 공부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뉴턴주의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힘과 질량에 대해 말할 때, 하늘로 폴짝 뛰어올랐다가 이내 주저앉은 순간 중력의 법칙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그 생각 속에 바로 뉴턴의 업적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법칙은 곧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인 셈이다. 따라서 뉴턴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을 구축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책은 뉴턴의 과학적 성과와 그 의의를 짚어보는 작업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뉴턴의 삶을 조명한다. 진위 논쟁을 부르기도 했던 뉴턴의 여자 문제에서부터(뉴턴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자와 관계하지 않은 동성애자라는 통설이 있다) 그가 평생 가장 멀리 이동한 거리는 고작 150마일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하나의 개인으로서 특이함을 보였던 뉴턴의 면모도 소개한다.

결국 뉴턴도 하나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뉴턴이 너무 오래된 위인이어서 거리감을 느끼거나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많은 사실을 밝혀낸 천재 과학자라는 데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고뇌하는 `인간 뉴턴`을 만나볼 수 있다.(이지성기자)

08. 09. 20.

P.S. 아이작 뉴턴의 평전으로 가장 정평 있는 것은 리처드 웨스트폴의 <결코 쉬지 않는(Never at rest : A Biography of Issac Newton)>(1983)이다. 무려 930쪽에 이르는 책이니까 방대함에 있어서도 견줄 만한 책이 없겠다(결코 쉬지 않고 읽어도 꼬박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다행히도 저자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축약본을 따로 냈고(1994년) 이 축약본의 우리말 번역이 <프린키피아의 천재>(사이언스북스, 2001)이다(그래도 580쪽이다!). 여유가 있다면 글릭의 책과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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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 칼럼을 뒤늦게 읽고서 옮겨놓는다. '번역의 힘'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지난봄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란 책으로 화제를 모았던 노문학자 석영중 교수이다.

서울신문(08. 07. 14) [문화마당] 글로벌시대 번역의 힘

19세기 러시아 시인 중에 주코프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시도 잘 썼지만 유럽 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에서 더욱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공들여 번역한 ‘오디세이’는 러시아 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배 작가 고골은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이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라고 환호하면서 미사여구로 가득 찬 아주 긴 에세이를 썼다. 한마디로 주코프스키의 번역은 기적이며 번역자는 원저자보다 더 생생하고 아름답게 고대 그리스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코프스키가 평생 동안 썼던 창작 시는 이 번역을 위한 습작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의 ‘오디세이’ 번역을 읽어 보지 못했으므로 고골의 평가가 어느 정도 공정한지 가늠할 수 없다.‘이거야 원 꿈보다 해몽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고골의 글을 읽으면 어쨌든 무척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학 풍토가 부럽고, 번역가에 대한 지극한 예우가 부럽고, 번역을 창작보다 더 높이 둘 수 있는 독자의 열린 마음이 부럽다.

러시아는 옛날부터 번역을 중시했다.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다. 러시아는 17세기까지 유럽 문화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서구 따라잡기였다. 번역은 서구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지식인들은 서구 문화의 전통을 차용하고 번역하고 수용했다. 그러는 사이에 번역은 창작이 되고 수용은 서구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되면서 찬란한 러시아 문학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푸시킨에서 파스테르나크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유명한 문인들 대부분이 창작과 번역을 같이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의 번역문화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물론 러시아가 서구화를 향해 줄달음치던 시절과 오늘의 글로벌 시대를 같은 틀 안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히려 글로벌 시대이기에 그리스 로마 문화도 르네상스도 모르던 러시아를 한 세기 만에 문학강대국으로 만들어준 번역의 힘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번역은 대화다. 원저자와 번역자 간의 대화이고 언어와 언어 간의 대화이며 문화와 문화 간의 대화이다. 우리가 세계를 향해 말을 하고 싶다면 세계가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해의 양과 질과 속도는 결국 우리 문화의 성장을 좌우한다. 글로벌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화로서의 번역을 요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학부에 번역학과가 창설되기 시작했고 번역학회와 번역가들의 활동이 다원화되고 있으며 명저 번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지속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문 번역인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언어적 소양과 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전문가적인 양심을 갖춘 번역인 양성을 위해 지금이라도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더불어 번역 서평을 활성화하고 번역 윤리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무성의한 번역, 엉터리 번역, 기존 번역의 표절 같은 것들이 설 자리가 없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번역에 대한 사회 통념의 전격적인 변화이다. 번역은 문화 발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굳건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우수한 번역가도 필요하고 명민한 번역비평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번역에 대한 국민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글로벌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번역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08. 09. 20.

Гомер Одиссея: Поэма (пер. с греч. Жуковского В.А.; предисл. Нейхардт А.; прим. Ошерова С.)

P.S.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은 http://az.lib.ru/z/zhukowskij_w_a/text_0180.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작가들의 번역도 '전집'에 포함하는 것이 '러시아의 번역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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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중시하는 나라가 문화대국입니다.우리나라도 대학원생들에게 공짜로 번역시키는 교수들이 사라질 때 문화대국이 될 것입니다.대학원을 안 다녀봐서 경험은 안 해봤지만 이런 일이 많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9-20 20:20   좋아요 0 | URL
우리의 '번역문화'죠.^^;

노이에자이트 2008-09-2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보다 더 뻔뻔한 종자가 모든 것을 맨입으로 해결하려는 놈들이죠.특히 위계질서 내세워서...

로쟈 2008-09-21 09:41   좋아요 0 | URL
덧붙여 현재와 같은 강사시스템도 세계적으로 희귀할 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 전 주한외국인이 불법체류하다가 철창생활하면서 겪은 책이 소개되었는데 한국인은 감옥에서도 쉰살이 넘은 남자들이 누가 형이냐 동생이냐 따지더라는 일화가 나오더라구요.그 외국인 남자는 "한국엔 평등한 인간관계가 없다.모두 위아래를 따진다.아랫사람은 철저히 윗사람의 횡포를 감수해야 한다"고 결론냈는데 정확한 진단이라고 봅니다.

로쟈 2008-09-22 16:41   좋아요 0 | URL
네, 소개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Sati 2008-11-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대그리스어를 모르던 주코프스키가 오디세이를 번역할 수 있도록 독일인 작가가 독일어로 축역을 해주었다니, 주코프스키의 명역도 팔자가 좋아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

로쟈 2008-11-13 06:56   좋아요 0 | URL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귀가길 전철에서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번 죽이기>(필맥, 2005)를 읽기 시작했다. 최근에 나온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 때문에 관심이 이어진 것이기도 하고, '너 자신을 알라'란 주제에 대해서 정리해야 할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겸사겸사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관련한 책들에 눈길을 주어본다. 소크라테스 읽기 혹은 소크라테스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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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네 대화 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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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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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
안광복 풀어씀 / 사계절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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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철학, 소크라테스의 변론
플라톤 원저, 나종석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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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늘 아침 전철에서 읽은 책의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도정일 교수의 '드문' 신간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생각의나무, 2008)이 그 책이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잡지에 발표했던 글 6편을 묶은 것인데, 그나마 책으로 묶인 건 출판사측의 노고 덕분이다. "나는 내가 썼던 글들을 내 손으로 모으고 묶어서 출판을 시도한 적이 없다. 이 책도 내가 내자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게 저자의 변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비유대로 이만한 '냉동고래'도 드물다. 여하튼 그래서 귀하고 드문 책이 나온 셈이니 아껴 읽을 만하다... 

한겨레(08. 09. 20) 시장의 독재에서자유를 선언하라

문학평론가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가 새 저서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내놓았다. 지은이는 여러 매체에 왕성한 필력으로 글을 써왔지만, 그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데는 극도로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대담집이나 공저서는 여러 권 있었지만, 단독 저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번에 나온 책은 문학비평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1994년) 이후 무려 14년 만에 펴낸 두 번째 단독 저작이다. 생각의나무 출판사가 기획한 ‘문(問)라이브러리’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이 저서에는 1990년대 후반에 쓴 에세이 다섯 편이 묶였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다시 읽어보니, 이건 꼭 내가 21세기에 부친 영혼의 안부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썼는데, 그 고백 그대로 이 책은 10년 세월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생기를 발한다. 아니, 세월이 지나 오히려 더 생생한 문제의식으로 빛나는 글이 됐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어휘를 하나만 고르라면, 이 책의 제목으로 채택된 ‘시장전체주의’라는 말일 것이다. 지은이는 문화·교육·대학·문학,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인문의 풍경을 통해 우리 시대를 관찰하고 거기서 시장전체주의의 암울한 징후를 적발해 분석한다. 인문학자의 시선이 미리 포착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살풍경이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말하는 시장전체주의란 “시장 논리의 지배가 확립된 사회”다. 시장이 유일 가치가 된 시장 유일체제가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시장에서 팔리는 것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효용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그 사회다. 시장은, 바꿔 말하면, 돈이다. 돈이 모든 것의 주인, 모든 것의 척도, 한마디로 줄여 절대이념이 된 사회가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그 사회가 ‘전체주의’인 이유를 지은이는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이 사회가 시장 논리, 시장 원리, 시장 가치를 향해 사회 전체를 훈육하고 재조직하며 채찍질하는 ‘동원 체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전체주의의 사회 동원 방법이 강제적·강압적인 것이라면, 시장전체주의의 사회 동원은 자율성과 자발성의 외피를 입고 있다.” 사회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 같은 겉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체제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임을 설득하고 납득시킴으로써 모든 구성원을 체제에 복속시킨다.

둘째로, 시장전체주의는 주민들을 겁주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감시 체제’다. 시장에 적응하고 순응한 자만이 이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 체제는 그런 이데올로기의 반복을 통해 구성원의 의식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시장 원리를 수락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가 되고 거기 적응하는 것은 시민의 ‘미덕’이, 그리고 그 적응력은 시민의 ‘능력’이 된다.” 여기서 ‘자기 감시’가 발동하게 된다. ‘시장의 신’이 내리는 명령을 ‘자기 자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명령에 따른 의무·미덕·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를 자기 스스로 점검하고 감시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시자·통제자·검열자가 된다.” 시장전체주의는 이렇게 작동하는 ‘자발적 감시 체제’다.

지은이가 시장전체주의의 세 번째 특징으로 꼽는 것이 ‘사회적 이성의 마비’다. 시장의 효율·효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모든 이성적·비판적 담론들을 ‘헛소리’로 밀어내 버리고, 도구적·기능적 이성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사회가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과거 정치전체주의가 사회적 이성의 학살을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삼았던 것과 유사하게 시장전체주의에서도 공적 이성은 학살 대상이 되고 그 사용 능력은 마비된다.” 지은이는 우리 시대가 그 ‘광기’의 사회를 향해 반성 없이 맹목적으로 내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인문정신과 인문가치이고, 그 정신과 가치의 담지자인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그 본질적 속성상 인간의 인간다움 실현을 주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인문학은 시장의 효율·경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시장의 신은 인문학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다. 시장의 제국에는 인문학을 위한 자리가 없다. 여기서 지은이는 인문학이 시장과 돈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인문학은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돈밖에 모르는 사회를 경멸한다. 인문학은 시장을 과소평가하거나 시장 논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다. 인문학이 문제 삼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전체주의’이고 시장 논리가 아니라 ‘시장 논리의 유일 논리화’이다. 인문학은 돈 버는 사회를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미친 사회를 우려한다.”

교육이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돈 버는 인간’의 생산을 목표로 할 때, 대학이 학문을 닦는 곳이 아니라 오직 ‘지식 인력’만을 공급하는 훈련소가 될 때, 문학이 시대의 비인간성과 맞서지 않고 시장 논리에 함몰돼 한낱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문화가 인간성의 풍요로운 성찰이 아니라 ‘문화자본’의 상품으로 그칠 때, 그때가 바로 시장전체주의가 도래하는 때다. 시장전체주의는 그 맹목성과 야수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잡아먹게 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문민정부 시절 날이면 날마다 ‘세계화’를 외치다가 결국 외환위기를 맞아 정권이 파산하고 국가가 부도났던 것이 시장의 자기파멸성을 증거한다. 지은이는 이 시장의 광기를 제어할 것은 비판적 이성이며, 비판이성을 가동할 주체는 시민사회라고 강조한다. “21세기를 통틀어 한국인에게 부과되는 중요한 사회적 과제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것은 민주사회의 유지·발전·계승이다.” 그 사회를 감당할 민주시민을 길러내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시대에 대한 6가지 질문과 대답 ‘문라이브러리’

생각의나무 출판사의 ‘문라이브러리’ 시리즈는 도정일 교수의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포함해 모두 여섯 권을 1차분으로 내놓았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정의와 정의의 조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강수돌 고려대 교수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그리고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가 1차분에 포함됐다.

‘문라이브러리’는 1980년대 사회과학출판사들의 ‘신서’ 시리즈와 200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고본을 통합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리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단출한 문고본 틀에 담아냄으로써, 가독성과 진지함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문라이브러리는 크게 세 가지 하위그룹으로 나뉜다. 1차분으로 나온 것이 인문적 담론의 마당을 펼치는 ‘휴머니티’ 시리즈이고, 예술 분야의 저술을 펴내는 ‘아트’ 시리즈, 문학적 에세이를 펴내는 ‘리터러처’ 시리즈가 따로 나올 예정이다. 문라이브러리는 ‘문’(問), 곧 ‘시대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름의 물음을 품고서 시대와 대화하는 가운데 얻은 답변이 책의 본문을 이룬다면, 그 답변 자체가 또다른 물음을 잉태하고 출산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출판사는 밝혔다.


1차분으로 나온 책들은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의 1급 학자와 논객을 불러내 이 물음과 답변을 들려준다. 시리즈 첫 권인 김우창 교수의 <정의와 정의의 조건>은 이 시리즈의 성격에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화두’인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좋은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극단의 정의가 극단의 손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경우의 수를 찬찬히 따져보는 그의 사유 방식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최장집 교수의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는 지은이가 정년퇴임 후 펴낸 첫 책이다. 최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촛불집회 같은 최근의 사례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신의 지론인 정당 민주주의 강화론을 펼친다. 그는 촛불집회를 민주주의 제도 실패의 결과로 보면서,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와 그 한계를 함께 살핀다.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에서 그의 고유한 생태사상인 ‘온생명 사상’을 풀어놓는다.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낱생명 속에서가 아니라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생명 이해에 도달할 때, 인간 중심의 관념에서 형성된 국가관의 제약을 좀더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장 교수는 생태계 파괴의 문명을 극복할 실천방안으로 대안공동체 운동을 제시한다.

강수돌 교수는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에서 상품경쟁·생존경쟁·시장경쟁은 결국 우리를 합리적으로 분열시키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며, 경쟁에서 누가 일등을 하는지와는 무관하게 모두가 권력과 자본의 지배 아래 종속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윤평중 교수의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편향적 사유의 중심잡기’를 시도한다.(고명섭 기자)

08. 09. 19.

P.S. 세기말에 씌어진 첫번째 글 '밀레니엄, 오, 밀레니엄!'(1999)에는 주요 미래소설들, 혹은 반(反)유토피아 소설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첫 타자는 러시아작가 예브게니 자미아친의 <우리들>(1923)이다. '자미아친'은 'Zamyatin'을 읽어준 것으로 보통은 '자먀친'이나 '자먀찐'이라고 읽는다('자먀틴'이라고 읽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1920년에 씌어진 소설이어서 '1923'이란 연도의 출처는 모르겠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자미아친이 그린 이 26세기의 세계에는 단 하나의 국가(이름도 '단일국'이다)만 있고, '대시혜자(大施惠者)'라 불리는 단 한 사람의 통치자가 그 거대 단일국을 다스린다."(15쪽)  

이 원조 반유토피아 소설의 국역본을 따르자면, '단일국'은 '단일제국'이고 '대시혜자'는 '은혜로운 분'이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26세기'가 아니라 '29세기'이다. 어차피 미래소설이니 그게 그거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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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9 22:10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면서 결국은 연구비를 더 달라고 국가에 요구하는 것도 시장전체주의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로쟈 2008-09-20 20:21   좋아요 0 | URL
인문학자뿐 아니라 지식인 일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에 이런 지적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학술진흥재단과 같은 국가기관이 많은 학술사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은 거대한 국가기구의 하나의 관료적 고리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시민사회의 자율성, 시민운동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예전에 운동을 실제로 했던 지식인들이 과연 국가로부터 얼마나 자율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도 회의적입니다." 저 또한 회의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0 15:32   좋아요 0 | URL
하기야 이공계를 살리자면서 그 분야도 똑같은 요구를 하더군요.결국은 이런 식으로 하면 국가에 포섭된다는 말씀이지요?

로쟈 2008-09-20 20:24   좋아요 0 | URL
소위 지식인의 국가비판이 한낱 '행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국가체제 바깥에서 일상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대안이 있을 성싶진 않고, 다만 그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