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칼럼은 중의 하나는 '아고라포비아'. 마침 엊그제인가 아고라를 주제로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 '최전선의 민주주의'를 읽은 터여서 같이 묶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세히 다룰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니(언제부턴가 서재에 글쓰기가 '차포 떼고 장기두기'처럼 돼버렸다. 시간이 부족하고 책이 옆에 없다. 일에 쪼들리는 탓이고 책은 여기저기 분산돼 있는 탓이다. 거기에 체력도 부실하니 기껏해야 '빅장'이나 부르는 것이 현재로선 나의 최선이다. 이러다 판이 끝날까 염려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모' 수준의 정리다. 먼저 칼럼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2 .12) [여적]아고라포비아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이란 독특한 문답법으로 폴리스 사람들과 토론을 벌여 진리 터득을 도왔다. 그 장소가 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이었다. 아테네 아고라의 경우 가로 700m, 세로 550m로 꽤 너른 공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민회, 재판, 사교, 상업 등 사회활동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린 곳도 아고라였다. 아고라는 여론형성과 의사소통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 나아가 소통 자체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아고라포비아(광장공포증)는 낯선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 등 공공장소에 혼자 있게 되면 심한 공포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증상이다. ‘포비아’에는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비행공포증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광장공포증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이유로 다중이 모인 상황에 노출되기를 두려워한다. 가령 지각을 자주 하는 신입 회사원이 모두 일에 열중한 사무실에 들어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때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것이다. 이게 심해지면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인터넷 토론방 ‘아고라’가 포털 다음의 초기화면에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 소식에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아고라포비아가 떠오른 건 공연한 연상작용 탓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고라는 지난해 광우병 촛불 정국에서 문자 그대로 인터넷 소통을 위한 광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족벌신문들에 대한 광고불매 운동에 공간을 제공했다. 이런 것들이 정권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게다가 현재 사이버모욕죄 입법 추진이 강행되고 있다. 미네르바 사건의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쯤되면 촛불 이후 경찰 조사로 이미 기가 꺾인 아고라가 ‘후퇴’를 결정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이 정권이 기존 법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모욕죄 신설에 매달리는 모습에는 아고라포비아의 증세가 역력하다. 그렇다면 이 증세를 치료할 방법은 없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언론 장악을 획책하는 정권에 제대로 된 아고라, 소통의 공간 조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병세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부터 일이 꼬였으니 아고라포비아의 치료는 애시당초 무망한 것이다.(김철웅 논설위원) 

09. 02. 12.  

P.S. 바우만의 글은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평사리, 2005)에 수록돼 있다. 책은 세계화 이후의 전망에 관한 저명한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의 글모음인데, 독어본을 옮긴 것이고 바우만의 글 또한 독어로 씌어진 것이어서 아쉽게도 원문과 대조해보진 못한다(따로 영어로도 발표했을 듯싶지만 출처를 알 길이 없다). 말미에 실린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담을 두어 달 전에 읽은 바로는 썩 좋은 번역은 아닌데 말이다('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였던 부르디외를 '프랑스 단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라고 소개한 대목은 역자의 상식을 의심하게 한다).    

 

참고로, 그라스와 부르디외의 대담 '자본주의를 길들이자!'는 1999년 12얼 5일에 독일 브레멘 라디오방송국에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대담의 독어판 요약은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에 실렸으며 영어판은 '더 네이션'(2000. 07. 03)지에 '아래로부터의 문학(A Literature From Below)'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2002년 3-4월호)지에는 '진보적인 복고(The 'Progressive' Restoration)'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두 판본이 서로 약간 다르며 국역본은 뉴레프트 리뷰 판본과 일치한다(영어, 불어, 독어본은 http://www.homme-moderne.org/societe/socio/bourdieu/entrevue/gras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럼 바우만의 글로 넘어가서, 그가 말하는 아고라란 무엇인가? 우선 바우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개념, 오이코스(oikos)와 에클레시아(ecclesia)를 소개한다. 각각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오는 말인데, 전자는 "온화하지만 때로는 드센 사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 즉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주 드물게 찾아가지만 우리의 모든 삶과 관계된 공공의 사안들이 규제되는 먼 곳에 놓인 영역"이다(번역이 좀 감질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하며 오이코스는 사적인 영역이고, 에클레시아는 공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세번째 영역이 바로 아고라다. "아고라는 완전히 사적인 것도 아니고 완적인 공적인 것도 아닌 공간이며, 동시에 일정한 정도로 양자의 일부를 포괄하고 있는 영역이다."(41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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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경찰 무죄, 철거민 유죄’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기대할 것 없는 수사였고, 예상되었던 결론이다.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소위 '억압적 국가장치'로서의 경찰/검찰 권력이란 한갓 권력과 지배계급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 "범죄수사를 통한 형벌권 행사 및 법원의 판단에 의하여 구체화된 형벌권의 내용실현을 지휘, 감독하는 국가권력작용"이란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더라도 검찰(권)과 사회정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서, 권력의 충복으로서 검찰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주권을 도둑맞은 국민이 못났을 뿐이다). 그것이 희생자 유족들이 주저앉아 있는 자리이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다(MB집단에게 국민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니그로'다!). 바로 계급이 나뉘는 자리이다...    

‘용산 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9일 오전 희생자 유족들이 서울중앙지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들어가려다 경찰에 저지되자 영정을 들고 청사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다.

경향신문(09. 02. 10) [책읽는 경향]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통제수단이었음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배웠다. 인디언의 역사를 삭제한 채 구성된 아메리칸 드림, 승리자였던 조조 대신 유비를 중심으로 구성한 소설 삼국지 속에서도 배제의 정치적 혐의는 읽을 수 있다.  

최근 ‘용산 참사’를 보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반응이었다. 사건 초기 각종 언론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아내려는 떼쟁이 이익집단의 과격한 이해관계 관철 수단(점거농성과 화염병)의 지긋지긋함에 초점을 뒀다. 시위를 한 절박한 이유나 배경, 이들의 삶의 조건과 철거 이후 어떻게 추락할지에 대한 인도적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벨 훅스·모티브북)는 미국 사회가 엄존하는 계급간의 문제점을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고 탐욕·부·질시의 위험성을 공유하며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도록 배웠던 미국”이 쾌락적 소비주의의 만능 속에 빈자와 약자를 얼마나 당당하게, 그리고 죄책감 없이 무시하게 됐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렸을 때 늘 듣던 말이 있다. ‘부잣집 애들은 공부를 못하고 가난한 집 애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 계급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순환되고 있음이 반영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부자는 영원히 부자이며 가난은 영원히 대물림되는 ‘신 계급사회’에 와 있다. 문제는 점점 이런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됐으며 죄책감조차 없어져 간다는 점이다. 약자에 대한 무감각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알려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야말로 다시 계급에 대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권미혁|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09. 02. 09. 

 

P.S.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 이어서 지난해 말에 출간된 벨 훅스의 또다른 책은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모티브북, 2008)이다. "인종.성.계급의 ‘경계 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벨 훅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벨 훅스가 그러한 목표를 실행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결실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너네 공부 안 하면 철거민 된다'라고 주입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과연 그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F4 판타지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나는 기대를 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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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느낌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11 10:28 
    벨 훅스 읽기 : F4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사회가 우울하다.
 
 
Arch 2009-02-09 23:55   좋아요 0 | URL
기사의 한부분이 정정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부분. 논의의 여지는 많겠지만, 다들 자신의 위치는 중산층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의 교육이나 신분상승의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적극적이잖아요. 혹은 자신이 세워놓은 중산층의 위치가 너무 높아 그 정도면 되는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거나.
경계짓기를 유머 코드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개콘이고, 부자의 억울함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는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이나 눈이 즐거워지는 체험을 한다니 할말없죠.

로쟈 2009-02-10 11:10   좋아요 0 | URL
저는 그것이 인간이 본성인지,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말하듯이 자본주의하의 '이차적 본성'인지 헷갈립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처방도 달라질 듯싶은데요...

yoonakim 2009-02-10 12:20   좋아요 0 | URL
너네 공부안하면 철거민 된다.....밥 먹고 누우면 소된다...가 더 낫네요. 정말 끔찍한 가운데 살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감성구조의 변화와 그것이 고착화되는 속도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막막함과 황당함 무력감을 기본으로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어요.

로쟈 2009-02-10 13:05   좋아요 0 | URL
인문학(혹은 책)이 뭘 바꿀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약간 지체시킬 수 있을 뿐인지, 그런 고민까지 하게 됩니다...--;

yoonakim 2009-02-10 12:22   좋아요 0 | URL
참, 이리 멘젤 영화는 비디오로 여러개 가지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전주영화제 세미나용으로 받았던 테잎이거든요.^^

로쟈 2009-02-10 13:04   좋아요 0 | URL
오호, 그럼 나중에 신세를 좀 질게요.^^

게슴츠레 2009-02-10 13:35   좋아요 0 | URL
"F4 판타지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나는 기대를 꺾게 된다..." 완전 공감입니다. 나름의 '도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공중파에서 <꽃남>이 방영되는 것도 신기하다만, 그걸 일체의 무리없이 완벽하게 즐기는 데 성공하는 이들의 존재는 정말이지 놀랍다고밖에 말 못하겠습니다. 단순히 '도'를 넘어섰다는 보수적 개탄을 넘어서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들이 쏟아져 나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로쟈 2009-02-12 22:34   좋아요 0 | URL
그게 딜레마입니다. 미디어비평을 위해서 '꽃남' 시청자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2009-02-1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2-12 10:51   좋아요 0 | URL
F4가 뭐죠??

로쟈 2009-02-12 22:33   좋아요 0 | URL
흠, 산책님도 '따'시겠는데요...

릴케 현상 2009-02-13 12:08   좋아요 0 | URL
앗 농담이었다고 해도 될까요!
 

용산 철거민 참사가 용역들의 폭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이 용역들이 조폭과 연루돼 있다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55). 경찰이 이 용역들과 철거민 공동진압에 나섰다면, 말 그대로 '조폭과 손잡은 경찰'이 되겠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더라도 이런 모르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권력의 아리까리한 토대'를 이렇듯 다 드러내놓아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그래도 공권력은 여전히 공권력인지?). 하긴 MB부터가 '대통령'이란 직위를 무슨 사조직의 보스인 양 알고있는 바에야(그걸 자랑스레 'CEO'라고 부른다. 조폭 두목도 요즘은 CEO다) 진작에 더 기대할 것도 없긴 했지만...   

용산 참사 사고 당일인 지난 1월20일 남일당 건물 3층에서 철거민과 대치하고 있는 호○건설 용역 직원들.

시사IN(09. 02. 07) “용산 철거 용역 목포 조폭과 관련”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나. 죽으려고? 아니다. 경찰에게 화염병 던지고 새총을 쏘려고? 그것도 아니다. 돈을 더 받으려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으로는 부족하다. 망루에 오른 이유를 철거민들은 용역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지난 1월20일 용산 참사 현장에서 만난 한 철거민은 “용역이 무서워 망루에 올라갔다. 그냥 있으면 일방적으로 맞으니 살려고 망루로 도망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철거민은 “용역들에게 한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와 분노를 짐작할 수 없다. 용역 깡패들에게 맞설 힘이 모자라니 요새를 만들고 화염병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용산 참사에서 희생된 고 윤용현씨(48)는 용역이 무서워 망루에 올라갔다가 용역이 무서워 망루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지난 1월21일 순천향병원에서 만난 윤씨의 한 친구는 “망루 쌓는 일을 도와주고만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래에 용역이 진을 치고 있어 끝내 내려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윤씨의 아들 윤현구씨(20)는 아버지가 울먹이며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용역이 쳐들어왔는데 네 또래 애한테 얼굴을 얻어맞았어….”

철거 용역회사에서 일하는 한 호남 출신 조직폭력배는 “철거민들이 망루를 만들어 올라가면 철거 작업이 복잡해진다. 망루에서 철거민들이 올라가려는 우리를 상대로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버티면 작업이 장기화한다”라고 말했다. 철거 회사의 다른 동료는 “망루를 정복하는 것은 원래 용역의 몫인데 이번에는 손에 피 안 묻히는 경찰이 직접 나섰다. 매우 특이한 경우다”라고 말했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지역은 폭력의 치외법권지대다. 철거가 추진 중인 용산 거리는 비열한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재개발 현장에서 용역들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다. 위는 지난해 6월 경기 수원의 재개발 현장.

주먹이 법인 재개발 현장

지난 여름부터 철거를 거부한 세입자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매일 아침 오물과 음식 쓰레기가 수북이 쌓였다. 벽에는 섬뜩한 낙서가 가득했다. 빈집에는 밤마다 불이 났다. 용역들의 소행이었다. 철거민이 떠나고 찾아오는 손님이 줄어들수록 폭력의 수위는 높아만 갔다. 어렵게 식당 문을 열면 험악한 용역들이 들이닥쳐 손님과 시비를 벌였다. 편의점에서 손님이 술을 마시면 술 먹는다고 때리고, 쳐다보면 쳐다본다고 때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는 일이 용산에서는 다반사였다.   

철거 회사 용역들은 노인·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욕을 해댔다. 팬티만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손에는 쇠몽둥이와 목검을 들고 있었다. 이곳 주민 박선영씨(여)는 “동네 어른이 맞고 있는 걸 보고 나서기라도 하면 용역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주민들에게 주먹질을 했다. 몸무게가 100kg 정도 나가는 용역이 뺨을 때려서 나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용산 참사에서 숨진 이상림씨(72)의 며느리 정연신씨의 증언이다. “2008년 7월1일 아버님이 현수막을 달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는데 용역 깡패들이 사다리를 흔들고 급소를 잡아서 땅에 내동댕이쳤다. 아버님은 바닥에 쓰러져 맞고 옷도 다 찢겼다. 신고했지만 경찰이 오지 않아 도망가야 했다. 고소장을 냈더니 용역 깡패도 다음 날 맞고소를 했다. 그런데 아버님은 전치 3주가 나오고 그 용역은 4주가 나왔다. 70대 노인이 30대 깡패들에게 밟히고 맞았는데 아버님한테 사전 구속영장이 떨어져 수배자가 됐다. 형사들이 잡으러 왔다.”

하지만 무법천지, 어디에도 경찰은 없었다. 용산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한 세입자는 “신고를 해도 이 동네에는 경찰이 잘 오지 않았다. 와서도 용역이 합법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라고 말했다. 구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세입자들은 거의 매일 용역에게 폭행당했다. 지켜보는 구청 직원과 경찰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용역 폭력과 관련해 철거 회사 호○건설의 관계자는 “편파적인 사건과 사진만 가지고 철거민들이 일방적으로 피해자라 주장한다. 우리가 당한 자료도 많다”라고 말했다. 용산 4구역 철거 용역을 맡은 회사는 호○건설과 현○건설산업. 사고가 난 남일당 건물과 그 주변을 관리하는 회사는 호○건설이다. 하지만 경찰 물대포를 쏜 용역 직원이 현○ 직원임을 보더라도 두 회사가 공조 철거에 나섰다는 철거민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높다.

철거업체는 재개발 조합이나 시공사에서 선정하는데, 두 업체는 삼성물산·포스코·대림 등 시공사를 통해 철거업체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현○건설의 고위 관계자는 “2008년 4·5월께 삼성물산·포스코 등 대기업 시공사가 주관한 입찰에서 최저가를 써내 수주를 따냈다. 계약은 조합과 하고 2008년 7월1일부터 호○과 구역을 나눠서 이주 관리를 했다”라고 말했다. 호○건설의 한 고위 관계자도 “주관사인 삼성을 통해 공정하게 입찰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용산 지역 재개발 주관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이를 부인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조합에서 우리도 일을 따냈다. 시공사는 공사만 할 뿐 철거업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호○건설은 2006년 2월 본격적으로 철거업에 뛰어들었다. 철거업을 하던 입△산업과 참△△건설 출신 직원들이 주축을 이뤘다. 공동 대표이사 ㅇ아무개씨·ㅁ아무개씨도 모두 입△산업과 참△△를 거쳤다. 설립 첫해인 2006년 호○ 건설은 46억8200만원, 2007년에는 75억62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물산이 재개발 사업을 하는 서울 종암동·석관동·길음동·마포·아현동, 그리고 사고가 난 용산의 철거를 맡은 회사가 호○건설이다.

한 철거회사의 고위 관계자는 “조합에서 특별히 철거업체를 지정하지 않으면 삼성 일은 호○이 거의 도맡아 한다. 업계에는 삼성 임원이 호○의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호○의 고위 관계자는 “3년 정도밖에 안 된 회사지만 이쪽에 일을 오래 한 분이 많아서 삼성 일을 많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호○건설이 전남 목포의 폭력조직 ㅅ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건설업계와 조직폭력배 사이에서 파다한 소문이다. 철거회사를 운영하는 한 조직폭력배는 “입△·호○의 ㅁ과 ㅇ은 (조폭)생활하는 ㅅ파 식구들이다. 철거라는 것이 전형적인 건달 사업인데, 입△·호○은 조폭 바닥에서 가장 성공한 조직이 하는 회사다”라고 말했다. 광주 출신 한 조직폭력배는 “호○은 어찌 보면 돈과 주먹이 결합한 국내 최대 조직이다. 거의 모든 조직이 와해되고 이름만 남았는데, ㅅ파는 철거로 떼돈을 벌어서 실질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조직원이 가장 많다”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 폭력조직의 한 두목은 “ㅅ파는 철거해서 돈을 많이 번 애들이다. 이번 사고로 괜찮으냐 했더니 문제없다더라”고 말했다.  

복도가 시커멓게 탔다. 호○건설 용역들은 “추워서 불을 피웠다”라고 말했다.

ㅅ파는 목포 3대 조폭 중 하나
호○과 조폭 관련설에 대해서는 일부 시공사에서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한 시공사 간부는 “철거회사 직원들은 하는 일이 본래 터프할 수밖에 없다. 노인정에서 데려다 쓸 수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목포의 ㅅ카페를 근거지로 만들어진 ㅅ파는 서산동·오거리파와 함께 전남 목포 3대 조직폭력 단체다. 전남경찰청의 한 조폭 담당 경찰관은 “ㅅ파는 검찰과 경찰이 관리할 정도로 이름난 범죄 단체로 재범을 염려해 경찰이 특별 관리하는 조직폭력배만도 33명에 이른다. 1996년 조직원이 살해당하자 오거리파 조직원을 잔인하게 보복 살해한 이후 ㅅ파 조직원은 유흥업소와 건설회사에 진출해 사업가로 변신한 것처럼 생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경찰의 조직폭력배 관리 대상에 따르면 목포 지역 ㅅ파의 두목은 ㄱ아무개씨. 그 밑에 부두목과 행동대장 3명이 받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의 관리가 서울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광주의 한 베테랑 조폭 담당 형사는 “서울로 간 조폭 중 경찰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 조폭이 훨씬 많다. 용역회사에서 ㅅ파 애들을 쓰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한 조직폭력배의 증언에 따르면 상경한 목포 ㅅ파의 실질적 두목은 ㅈ아무개씨와 ㅅ아무개씨. 철거회사를 하는 한 조직폭력배는 “ㅈ 아래 ㅁ아무개·ㅇ아무개 또 다른 ㅇ아무개 등 수십명이 ㅅ파 식구로 호○건설에서 일한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ㅅ파 관련에 대해 묻자, 호○건설의 한 고위 관계자는 “마음대로 생각해라. 직업이 철거여서 몇 년 전에도 ㅅ파로 수사받았지만 명확하게 해명됐다”라고 말했다. 

광주 출신의 한 조폭은 “3년 전 ㅅ파를 광역수사대 쪽에서 범죄 단체로 엮으려 했는데 ㅈ의 로비로 살아남았다. ㅈ은 인맥이 좋고, 한 번에 2000~3000명을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돈과 능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전남 지역의 한 조직폭력배는 “ㅅ파가 경찰 관리 대상에서 이름을 뺄 정도의 능력은 된다”라고 말했다. 호남의 한 조폭을 통해 ㅅ파 조직원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용산 사고가 커서 복잡하겠다”라고 물었다. ㅅ파의 한 행동대원이라는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다. “경찰 즈그들이 알아서 허겄지요. 그 정도는 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주진우기자) 

09. 02. 08.  

P.S. 무리한 철거시한을 담은 철거공사 계약서에 관한 기사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08174637 참조. 한편 드물게 철거촌을 다룬 영화로 김수현 감독의 데뷔작 <귀여워>(2004)가 있었다. 소재로만 다루고 삼천포로 빠진 영화인데, 아직도 한국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다룬 영화가 드물다는 점은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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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02-08 18:28   좋아요 0 | URL
공권력과 조폭, 잘 어울리네요..

로쟈 2009-02-08 22:21   좋아요 0 | URL
사실이 그렇더라도 너무 노골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21:57   좋아요 0 | URL
특정 지역을 명시하여 제목으로 뽑은 것이 염려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의 이 기사 댓글에 전라도 놈들은 죽어야 된다는 글들이 엄청나게 올라오더군요.

로쟈 2009-02-08 22:20   좋아요 0 | URL
경찰 수뇌부는 경상도에서 맡고, 용역 하청은 전라도를 주는 시스템인가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9 22:30   좋아요 0 | URL
각 지역마다 이런 일이 있으면 해당지역 조폭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관행인 것 같아요.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각 지역 조폭들에게는 꽤 수지 많은 장사라고 하니까요.이게 1~2년 된 일도 아니구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가 출간된 김에, 바우만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가끔 우리시대의 현자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에 몇 권 소개돼 있지만, 아직 그가 (포스트)모더니티 비판에서 갖는 지명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 '유동성' 시리즈 외에도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바우만과의 대화>, 최신작인 <윤리가 소비사회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등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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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2-08 00:48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로 중남미 쪽에서는 바우만의 글을 읽고 운동권이 된 청년들이 무척이나 많다고 그러드라고요.

로쟈 2009-02-08 10:4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스페인어본도 눈에 띄는 게 까닭이 있군요...

게슴츠레 2009-02-08 11:04   좋아요 0 | URL
<윤리가 소비사회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는 제목만 봐도 확 와닿는군요. 대학가에서 운동을 해야겠는데 뭔가 색다른 게 필요하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저를 포함해서요). 아예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축은 "이런 세상이 '옳으냐'"는 도덕주의적 변론으로 가고, 느끼는 축은 재밌고 신나고 명랑한 문화적 저항같은 것들에 매력을 느끼더군요. 전자의 메세지에 매력을 느끼는 이는 지극히 소수고, 후자는 전자와 차별화를 강조하면서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느끼는 때에 자본의 추상적 보편성을 사유의 마지노선으로 삼는 고진이나 바디우나 지젝이나 바우만야말로 진정으로 동시성을 가진 저자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바우만의 경우,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보니 딱히 독자적인 개념이나 체계를 만들지 않고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기 쉽게 비판의 지점들을 집어주더군요.

로쟈 2009-02-08 22:22   좋아요 0 | URL
<유동하는 공포>도 어려운 책이 아니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네요. 국내에선 생각만큼 안 읽히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2009-02-09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교 독서평설 2월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괴테문학에 대한 '갑론을박'을 다루려고 했으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와는 달리 국내에 소위 '괴테 비판서'가 소개돼 있지 않아서(독일에서도 드물 듯싶긴 하다) <파우스트>에 대한, 보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 파우스트의 형상에 대한 논란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은 괴테의 고전주의 드라마 <이피게니에>와 같이 다루려고 관련자료를 잔뜩 읽었으나 <파우스트> 얘기만으로 주어진 지면이 다 차버렸다(나중에 따로 다루어야 할 듯싶다). 고등학생을 독자로 고려한 글이어서 작품의 줄거리도 자세히 다룬 탓이다.   

고교 독서평설(09년 2월호) 파우스트의 구원은 정당한가? 

괴테 문학의 대명사 『파우스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란 구절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파우스트』는 괴테(1749~1832)가 전 생애를 걸고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자 독일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16세기경에 살았던 기인(奇人)이자 학자인 파우스트에 대한 민간의 전설에 흥미를 느낀 괴테가 처음 집필을 시작한 해는 1773년이다. 그리고 1만 2,000행이 넘는 이 대작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1831년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8개월 전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파우스트』가 괴테 문학의 대명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우스트의 방황과 구원 
‘비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방대한 분량의 『파우스트』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흔히 제1부를 ‘학자 비극’과 ‘그레트헨 비극’이라 부르고, 제2부는 ‘헬레나 비극’과 ‘지배자 비극’이라 부른다. '학자 비극’은 당대 최고의 학자 파우스트가 자신의 늙어 버린 육신과 학문 수준에 절망하던 차에 메피스토펠레스(악마)의 제안에 따라 계약을 맺는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약 조건은 현세에서 메피스토를 종으로 삼는 대신, 저세상에 가서는 그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는 악마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죽은 뒤에는 영혼을 내주겠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파우스트의 절망은 무엇이었나? 자신의 서재에서 늙은 파우스트는 이렇게 한탄한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는 평생에 걸친 공부를 통해, 가장 내밀한 곳에서 이 세계를 총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그러한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서재가 ‘감옥’에 불과했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부족해도 참아라! 부족해도 참아라! 이것이 영원한 노래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앎을 위해서 젊음을 희생하고 욕망을 억제했지만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빌리면, 그는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고 푸른 건 인생의 황금 나무”라는 깨달음에 뒤늦게 조바심을 낸다. 이제껏 세상은 그에게 인식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는 세상을 경험해 보려 한다. 그런 파우스트가 모든 소망을 들어주겠다는 메피스토의 제안에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메피스토가 마녀의 물약으로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선사하고, 다시 청춘을 되찾은 파우스트가 순박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그레트헨 비극’이다. 여기서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의 유혹에 빠져 어머니와 오빠를 죽게 만들고,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마저 물에 빠뜨려 죽인 죄로 참수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감옥으로 찾아와 도망을 권유하는 파우스트의 제의를 거부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한 덕분에 영혼만은 구원을 얻는다.         

2부의 무대는 시공간적으로 더욱 확장된다. ‘헬레나 비극’의 배경은 중세의 궁정으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도움을 얻어서 헬레나를 지하 세계에서 불러내 결혼하고 아들도 낳는다. 헬레나를 그리스 어로 바꾸면 ‘헬레네’인데, 그녀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절세의 미녀다. 헬레나와 결혼한 파우스트는 지극한 행복감을 맛보는 듯싶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아들 오이포리온이 날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모한 시도를 하다가 죽고 만다. 헬레나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파우스트를 떠나고, 다시 파우스트 혼자 남게 되는 것이 ‘헬레나 비극’의 줄거리다. 고대 그리스의 여인 헬레나와 결혼한다는 설정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대목은 파우스트의 환상을 무대로 옮겨 놓고 있다.  

마지막 ‘지배자 비극’에서 파우스트는 황제를 도와 전쟁에서 공(功)을 세운 덕분에 거대한 땅을 하사받고 간척 사업을 벌인다. 지금까지의 온갖 영화(榮華)에도 만족할 줄 몰랐던 파우스트는 이 지상의 ‘지배권’을 획득하는 일을 마지막 과업으로 여기고, 바다를 막아 거대한 간척지를 만든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결실이 없는 파도는 그 비생산성을 퍼뜨리려 사방팔방으로 접근해 온다. …(중략)… 연이은 파도는 힘에 넘쳐 그곳을 지배하지만, 물러간 뒤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그것이 날 불안케 하고 절망으로 이끌었도다! 이 참을성 없는 원소의 맹목적인 힘이라니! 그리하여 내 정신은 감히 비약을 시도하려는 것. 여기서 나는 싸우고 싶다. 이것을 이겨 내고 싶다.”  

파우스트가 이겨 내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반복을 통해서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파도, 곧 자연의 지배력이다. 그는 이 자연과의 싸움을 위해서 거대한 제방 공사를 기획하여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짠다. 파우스트가 꿈꾸는 것은 그렇게 해서 얻으려고 하는 ‘자유로운 땅’이고 ‘천국’이다. 과연 그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인가? 

“밖에선 성난 파도가 제방을 때린다 해도, 여기 안쪽은 천국 같은 땅이 될 거야. 파도가 세차게 밀려와 제방을 갉아먹는다 해도 협동하는 마음이 급히 구멍을 막아 버릴 게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중략)…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파우스트는 지상에서 최고의 순간을 맛본다면 자신의 삶을 가져가도 좋다고 메피스토와 내기를 걸었고, 이 대목에서 마침내 그러한 순간에 도달한다. 이로써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메피스토는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수습해 가려 한다. 하지만 천사들이 내려와 “영원히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라고 노래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데려간다. 이것이 ‘지배자 비극’의 결말이자 『파우스트』의 대단원이다.  

파우스트는 구원받을 만한가
장엄한 합창과 함께 마무리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분명 감동적이지만 『파우스트』를 구성하는 네 가지 ‘비극’을 따라온 독자라면 한 가지 의문을 떨치기 힘들다. ‘파우스트의 구원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지배자 비극’이다. 이 대목에서 파우스트는 자신이 기획한 과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강압적인 통치자 또는 권력자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언덕 위 오두막집이 간척 사업에 방해가 되자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하며 메피스토에게 ‘처리’를 부탁한다. 그러자 메피스토가 보낸 부하들은 집주인인 노부부를 강제로 끌어내려다가 오두막을 통째로 불태우고 만다. 노부부가 그 화염에 희생된 건 물론이다. 비록 파우스트는 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눈이 멀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의 욕망은 이후에 더욱 거세게 불타오르지 않았는가!    

“밤이 점점 깊어 가는 것 같구나. 하지만 마음속엔 밝은 빛이 빛난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서둘러 완성해야겠다. 주인의 말보다 위력이 있는 것도 없으리라. 여봐라, 하인들아!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내가 대담히 계획했던 일, 멋지게 이루어 다오. 연장을 잡아라. 삽과 괭이를 놀려라! …(중략)… 이 위대한 일 완성하는 데는 수천의 손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족하리라.” 

이러한 독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파우스트는 자신을 ‘주인’이자 수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지에 속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하인’이자 ‘지체’가 될 것이다. 이것을 파우스트적 ‘영도자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록 그의 의도가 버려진 땅을 일구어 모든 사람을 위한 낙원을 만들려는 것이라지만, 그의 방법은 결코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독일에서는 ‘영웅적 지도자’ 상의 모델이 되고, 동독에서는 민중 동원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과연 역사적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지배자 비극’에 등장하는 개발 지상주의자 파우스트는 근대의 기획자이자 근대성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이때의 근대는 무한한 소유욕과 지배욕을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근대 자본주의’다. 이미 ‘학자 비극’에서 파우스트는 ‘그의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소망’이라 토로하였다. 그렇듯 무한히 팽창하려는 파우스트적 욕망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구현한 것, 그것이 바로 ‘근대 제국주의’ 아니던가.  

파우스트의 명령을 받고 세계를 일주하며 무역 거래와 약탈을 일삼아 부(富)를 챙겨 돌아온 메피스토의 이런 독백은 괴테가 통찰한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단 두 척의 배로 떠났던 우리가 스무 척이 되어 항구로 돌아왔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는 싣고 온 짐을 보면 알 거야. 자유로운 바다에선 정신도 자유스러워지는 법, 사리 분별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중략)… 전쟁과 무역과 해적질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삼위일체인 것을.”   

그런 ‘수완가’ 메피스토를 감독관으로 하여 파우스트가 벌이는 최후의 사업이 대규모 제방 공사다. 하지만 그의 무절제한 욕망 추구는 곧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공사 중인 수로가 얼마나 길어졌는지 매일같이 보고하라고 명령하는 파우스트의 등 뒤에서, 메피스토가 인부들은 그 ‘수로(Graben)’를 ‘무덤(Grab)’이라 부른다고 중얼거리는 데서도 암시된다. ‘헬레나 비극’에서 파우스트가 꿈꾸었던 행복과 마찬가지로 ‘지배자 비극’에서 그가 꿈꾸는 지상 낙원 또한 한갓 주관적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 파우스트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파우스트의 영혼은 충분히 구원받을 만한가?   

괴테 자신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는 『파우스트』를 완성하기 직전인 1832년 6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파우스트의 구원을 위한 열쇠는 “영(靈)들의 세계에서 고귀한 한 사람이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게 되리라.”라는 천사들의 합창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이는 작품의 서두에 놓인 〈천상의 서곡〉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라고 한 하느님의 말과 호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방황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파괴하였더라도 여전히 그 방황은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혹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는 없을까?  

파우스트의 개발주의 VS. 메피스토의 허무주의
파우스트는 “내가 세상에 남겨 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자연의 허무에 맞서서 끝까지 어떤 ‘흔적’을 남겨 놓으려 한 것이 파우스트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파우스트의 죽음을 놓고 메피스토는 “어떤 쾌락과 행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줄곧 찾아 헤매더니,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라고 평한다. 메피스토가 보기에 모든 창조는 결국엔 무(無)로 휩쓸려 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영원한 허무를 더 좋아하며, 유위(有爲)보다는 무위(無爲)를 예찬한다.  

 

괴테의 시대 이후 두 세기가 흘렀다. 지금은 과연 파우스트의 개발주의와 메피스토의 허무주의 중 어떤 태도에 더 점수를 줄 수 있을까. 미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보여 주는 ‘인간 없는 세상’의 연대기가 참조가 될 수 있겠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바로 다음 날부터 자연이 ‘집 청소’를 하기 시작해서 곰팡이는 벽을 갉아 먹으며, 빗물은 못을 녹슬게 하고 나무를 썩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살던 집들은 50년이면 대부분 허물어지고, 습지와 강을 메워 만든 도시들은 물에 잠길 것이다. 300년 뒤면 세계 곳곳의 댐들이 무너지고, 1,000년 뒤엔 인간이 남긴 인공 구조물 가운데 도버 해협의 해저 터널 정도만 남아 있게 된다. 물론 과다하게 배출된 이산화탄소처럼 인간이 남긴 부정적 유산들이 모두 제거·정화되는 데는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다. 파우스트의 바람과는 달리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09.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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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3: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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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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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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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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