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4월호에 실은 연재글을 옮겨놓는다.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출판사, 2009)을 실마리 삼아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보았는데, 애초엔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을 중심적으로 다루려고 했었다. 막스 베버가 두 책을 이어주는 조인트다. 결과적으로 세넷을 더 자세히 다루지 못해 아쉽다(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그는 개인적으로 '올해의 재발견'이다).  

   

연세대학원신문(09. 04. 07) [당신 서재의 나침반] 고민하는 힘 

필요 없는 것을 생각할 여가가 있으면 전문지식을 익히고 유용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기. TOEIC이 900을 넘지 않으면 취직이 힘들다며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기. 이런 각박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식 프로그램을 필사적으로 소화하기.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가 엿본 한국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분명 그런 학창시절을 보내면 일류 기업에 취직할 수 있고 높은 월급을 받는 엘리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청춘이기 때문에 마음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열정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라는 것이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에서 내비치는 그의 염려다.  



하지만 경제 불황과 취업대란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대다수 한국 대학(원)생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열정의 상실에 대한 염려보다는 ‘루저(loser)’로 전락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일 것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생활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청춘’이라도 담보로 내놓으려 하지 않을까. 물론 문제는 장래를 담보로 학자금을 대출받고 청춘을 불사르며 학업에 매진하여 기적적으로 ‘성공의 사다리’에 올라탄다 한들 “거기에 남는 것은 이상하게 부풀린 오만과 영혼을 잃어버린 사고”밖에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소고기 협상은 미국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오만과 사고를 사례로 떠올릴 수 있겠다). 무엇이 문제이며 우리의 고민이어야 할까. 



막스 베버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러한 ‘마지막 인간’이 도달하게 될 지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 따르면, 베버의 ‘마지막 인간’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언어학적 의미를 넘어서 대저 ‘의미’란 무엇인가? 아니 ‘의미의 의미’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우리’를 거쳐서 관심과 고려의 범위를 ‘그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걸 뜻하지 않을까. “당신 없는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란 노래가사를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그들까지도 행복하지 않다면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 말이다. 그건 ‘다 살리는 일’을 뜻하는 우리말 ‘다스림’과도 상통한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으론 ‘함께 살아감(living together)’이다. 이 ‘다 살리는 일’과 ‘함께 살아감’이 정치의 본래적 목적이고 의의다. 그것을 달리 ‘전체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무엇이 ‘전체’인가? 무엇보다도 ‘인류 전체’를 가리키지 않을까. 흔히 쓰는 말로는 ‘전체 인구’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2008)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인용하는 바에 따르면, 2002년 기준으로 세계인구는 62억 명을 넘어섰으며 매년 7,700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증가율은 불균등해서 ‘선진국들’의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는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앙골라 같은 최빈국의 인구는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인구 과잉’이라는 당면한 문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은 부자들’이 양산해내는 것이다. 비교적 인구가 적은 부국들이 전 세계 에너지의 2/3를 소모한다. 이런 과소비적 생활방식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유지하려면 현재의 부존자원은 턱도 없이 모자란다. 때문에 식민주의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의 열매’는 결코 모두에게 공유될 수가 없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하면서 기대 수명이 절반으로 떨어져도 선진국의 제약회사들은 적당한 가격의 약을 공급하는 데 난색을 표하며 그들의 죽음을 방치했다. 장기간의 빈곤과 분쟁의 여파로 아프리카를 떠난 이주자들이 ‘유로피언 드림’을 꿈꾸며 밀항을 시도하다가 여러 차례 지중해에서 수장(水葬)됐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방안은 마련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이제 그만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우리’의 기득권을 지키는 안전한 방책이라고 믿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경제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불평등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인 산물이지만,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그 불안전성/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격차만이 아니다. ‘두 국민 사회’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민국가 안에서의 계층간 소득격차와 그에 따른 사회적 위화감이 위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미 마르크스가 160여 년 전에 자본주의 하에서 “딱딱한 모든 것은 녹아 사라진다”(『공산당선언』)라고 공언한 바 있지만, 바우만이 ‘유동적 근대’라고 명명한 오늘날 그 유동성은 우리의 삶에 거대한 공포를 드리우고 있다.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에서 바우만은 아예 “다가오는 세기(=21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그 재앙의 근원을 직시하는 것만이 유일한 치료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  



그러한 근원을 직시하는 데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도 도움을 준다. 세넷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민간부문에 군대의 조직 원리를 도입한 일에서 소위 ‘사회자본주의(social capitalism)’의 기원을 찾는다. 사회자본주의적 관료제는 사람들에게 예측할 수 있는 ‘합리화된 시간’ 관념을 심어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력에 비추어 앞으로의 승진 경로와 늘어날 재산 규모를 그려볼 수 있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면서 노후를 설계해나갈 수 있었다. 비록 베버는 이러한 관료제 하의 삶을 ‘쇠창살’에 갇혀 지내는 것에 비유했지만, 세넷이 보기에 베버의 비판은 일면적이다(작년 조사에서 한국의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1위가 공무원이었으며, 그들이 꼽은 이상적 배우자 직업도 공무원이었다).

오늘날 다수의 노동자들이 관료제적 ‘쇠창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을 들씌우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이라는 더 잔혹한 올가미이다. 사회자본주의는 과거의 이름이 되었다. 피라미드적 관료제 사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것은 무한경쟁을 독려하는 ‘승자독식사회’다. 1%의 승자가 모든 걸 다 차지하고 나머지 99%가 퇴출되고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승자독식사회』(웅진지식하우스, 2008)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보도록 한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라고 말하기엔 아직 젊다. 아직은 ‘전체’를 생각해야 할 나이다.  

09.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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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저도 읽고 참 좋았고 써먹을 대목이 많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캐피털리즘과 신자유주의와 인간성파괴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로쟈님 오늘도 좋은 책 소개에 감사하며 좋은 하루되세요 ^^

로쟈 2009-04-11 00: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써먹을 대목이 많은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