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3월호에 실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번 학기에 '당신 서재의 나침반'이란 연재물을 네 차례 싣게 될 예정인데, 그 첫번째 꼭지로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열린책들, 2009)을 다루었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종횡으로 엮어보는 것이 연재의 취지이며 대학원생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다.   

연세대학원신문(09. 03. 09) [당신 서재의 나침반] 번역의 탄생

책으로만 하는 공부를 사람들은 대개 높이 치지 않지만 적어도 대학원생의 공부라면 8할은 책으로 시작해서 책(혹은 논문)으로 끝난다(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필독 목록에 있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정리한 내용에 대해서 발표하거나 토론하는 것이 대학원생의 일상사다. 한데, 그 책은 어떤 책인가? 책의 분야가 아니라 분류를 묻는다. 책은 출판지와 쓰인 언어에 따라 국내서, 국외서, 번역서로 분류된다. 아무리 종류가 많아도 이 세 가지 범주로 분류 가능하다. 이 중 국외서(원서)를 논외로 하면, 대학원생이 읽는 책의 절반 이상은 번역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추정에 근거를 대보자면 이렇다.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에 따르면, “해마다 통계가 들쭉날쭉하지만 우리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 정도다. 의미 있는 인문사회과학서는 그 비중이 훨씬 높다. 언론에서 크게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서의 경우 번역서가 3분의 2 가까이 된다. 또 해마다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는 책의 절반쯤은 번역서다.”(<번역출판>, 머리말) 그 결과 어떤 경우엔 번역서 출간 속도에서 일본을 앞지르기도 하며, 전체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1위’다!   

  

말하자면 한국은 ‘번역 대국’이다. 한데, 이 ‘번역 대국’은 곧바로 ‘번역 강국’이기도 할까? 얼른 ‘그렇다’고 말하기가 좀 어렵다. 그 ‘강국’의 척도가 ‘주체적 역량’ 혹은 ‘자신감’의 문제라면 말이다. 예컨대 ‘real politics’란 말을 ‘현실 정치’라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굳이 ‘현실 정치(real politics)’라고 괄호 안에 원어를 넣어주면서 옮기는 것은 ‘친절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번역’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에서도 “배차(拜箚)에 참여하지 아니한 옥당들도 체직하였다”라는 식이라면 한문을 모르는 독자의 난감함은 여전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서 저자는 “해방 이후 두 세대가 지났지만 아직 한국은 정신적으로 독립국이 아니다 싶을 때가 많다”라고까지 토로한다. 번역서에는 한갓 번역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소위 ‘학문후속세대’로서 이 번역의 문제와 함께 학문 주체성의 문제도 고민해보는 것을 어떨까.   

먼저 우리가 쓰는 개념어들의 기원과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 시사해주는 바대로, 사실 우리가 쓰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들은 주로 메이지 시대에 서양어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대 일본의 지식인과 번역가들이 ‘society’를 ‘사회’로 ‘individual’을 개인으로 ‘modern’을 ‘근대’로 옮긴 것이므로 이 말들이 모두 당시로선 ‘신조어’였다. 가령 ‘individual’이란 단어는 처음에 ‘독일개인(獨一個人)’, ‘단일개인(單一個人)’ 등으로 영일사전에서 풀이되다가 ‘일개인’으로 번역되었고 그 뒤에 ‘일’이 떨어져나가 ‘개인’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에겐 일본어 문헌과 영일사전을 베낀 영한사전 등을 통해서 유입되었다. ‘개인과 사회’라는 개념틀 또한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에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기조의 영향을 받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입수했다. 이들 개념어가 사고의 도구상자 역할을 하는 한, 우리가 정신적으로 ‘독립국’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본식 개념어(한자어)들을 우리말로 ‘순화’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2007)에서 고종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순수한 한국어’란 없으며 모든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생각에서다. 가령, ‘쓰메끼리’는 ‘손톱깎이’로, ‘벤또’는 ‘도시락’으로, ‘쓰리’는 ‘소매치기’로 대체한다지만 일본어에서 훈독을 하는 단어들, 예컨대 ‘다치바(立場)’에서 온 ‘입장’을 ‘처지’로, ‘데쓰즈키(手續)’에서 온 ‘수속’을 ‘절차’로 바꾸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유형의 일본제 말들인 엽서(葉書: 히가키), 입구(入口: 이리구치), 출구(出口: 데구치), 할인(割印: 와리비키), 취소(取消: 도리케시), 조합(組合: 구미아이), 견습(見習: 미나라이) 등은 대체할 말도 마땅치 않다고 말한다. ‘순수한 한국어’란 오히려 언어민족주의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러한 언어 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보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번역의 의의가 줄어들 수는 없겠다. <번역의 탄생>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가령 일본에서는 10년쯤 전에 헤겔 <정신현상학>의 새로운 번역이 화제가 됐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헤겔의 저서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역자는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직역 그대로 ‘들이밀기’가 아니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의역하는 ‘길들이기’가 번역의 기본방침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개항 이후 외국의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던 시절에는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다. 하지만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도약하고 자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번역에서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것이 번역의 방법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의 경제 수준, 그리고 문화적 자신감과 연관된 문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미국으로 숭배대상이 바뀌었을 뿐, 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사무침>(푸른사상, 2008)과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고마움>(채륜, 2009)은 현재의 여건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 학문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다시 일깨워준다. 우리사상연구소에서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 1-5>(지식산업사)와 이기상의 <우리말 철학>(지식산업사, 2003)은 그런 고민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회과학자들이 펴낸 <우리 안의 보편성: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한울, 2006)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문 속의 미국: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한울, 2003)과 함께 일독해볼 필요가 있다.  

09.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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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3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유럽학문 용어를 한자문화권에 맞게 번역한 일본의 공헌은 한자문화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국적을 떠나서 인정해 주어야 된다고 봅니다.

로쟈 2009-03-31 22:31   좋아요 0 | URL
'한자문화권에 맞게'란 표현은 어폐가 있지 않을까요?^^ 일단은 자신들을 위한 번역이었을 테니까요. 우리가 얻어쓰게 된 건 부수효과겠지요...

푸른바다 2009-04-01 19:52   좋아요 0 | URL
저도 '한자 문화권에 맞게'란 표현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번역이기도 했고, 그들에게 한자란 '지적 권위'의 상징이었기에 용어들이 매우 어려운 한자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understanding을 '오성'으로 번역한 경우겠지요. 이런 식의 예는 부지기수고 중국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학문 용어를 일상어에서 멀어지게 한 병폐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챔피언이 된 김연아 선수의 선전이 국민들을 기쁘게 한 휴일이었지만,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경기 수원역 광장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시민단체 회원이 경찰에 연행돼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니까. 매일같이 '이런 나라, 이런 대통령이 어디 있나'라고 개탄해보지만, 알다시피 이미 눈하나 꿈쩍할 이들이 아니다. 이럴 땐 작년 여름의 시간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복잡한 반성'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기 마련이다. 최근에 나온 '촛불 관련서'에 대한 대학가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혹 참고가 될까 싶어서...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3. 23) 그래도 촛불은 뜨거웠습니다  

2008년 여름은 뜨거웠다. 너도나도 ‘뜨거운’ 촛불을 손에 들고 ‘뜨겁게’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1987년을 회상시키는 뜨거운 향연은 국내외 언론들의 주목을 받으며 약 두 달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촛불은 끝났다. ‘30개월 미만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연령 제한’이라는 석연치 않은 결과를 남기고 끝나버린 2008년의 여름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본 책이 출판되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가 그것이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촛불 집회가 소통을 원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민주화의 효과가 중단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이 ‘운동’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p.8)

‘시민들은 광우병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진심 어린 서찰을 원했다. 그러나 빈번히 단단하게 막히 차벽 앞에서 소통을 말하는 정부의 민심과의 불통을 확인해야 했다.’(『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p.92)
 

특히 촛불에 대한 기록을 담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는 기본적으로 촛불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기억의 낭만화를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머리말과 달리 ‘평화롭게 아스팔트 길 위에서 유모차를 끌고 걷는 광경은 눈물겹도록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데모를 하러 나온 건지, 애들 데리고 마실 나온 건지 모르게 촛불시위는 유쾌, 상쾌, 통쾌와 발랄함이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등 기본적으로 촛불을 ‘우리 편’으로 가정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오히려 그 해의 촛불이 민주주의의 상징임을 남기기 위한 기록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반면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머리말에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촛불시위가 문제적이다’라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촛불 시민들은 운동권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 되어갔다’고 표현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와 달리 촛불집회가 ‘현 정부를 길들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촛불집회가 진정한 직접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1부와 문화정치학적으로 분석한 촛불에 대해 다룬 2부, 그리고 촛불의 숨어 있는 주체에 대해 짚어 본 3부까지 촛불집회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이 이어진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서 ‘촛불소녀와 더불어 촛불집회의 상징이 되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모차 부대에 대해서도 이 책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인다. 1부 첫장 에서 저자는 유모차 부대의 등장을 ‘유모차에 탄 아이들의 절대적인 나약함을 ‘무기’로 삼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나약한 동료 시민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던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반적으로 ‘이론은 늘 비관주의적이어야 한다’는 1부 두 번째 장의 주장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지나치게 회의주의로 빠지는 부분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1부 첫 장이다. 저자는 폭력이 수반되지 않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다시 한 번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 다른 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책에서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방법은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왜 그렇게 무기력 했을까’ 라는 비관적인 논조로만 첫 장의 끝을 맺어 아쉽다.

비판 일색으로 보이지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속에서도 촛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10일 집회 중 일어난 일이다. 컨테이너 장벽 앞에 연단을 쌓는 것에 대해 ‘장벽 앞에 연단을 쌓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는 의견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연단으로 표출하자’는 의견이 갈렸다. 결국 컨테이너 높이의 스티로폼을 쌓았지만 경찰 해산 전까지 시민들간의 토론과 연설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자치의 힘을 과시했다’는 한 문장 외에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통해 조금씩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촛불집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을지 모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리 꺼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해 촛불은 언젠가 다시 타오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박고은기자)   

대학신문(09. 03. 28) 촛불을 그리워하는 그대에게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5%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정치에 신경 쓰기 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정치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이 때,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는 촛불시위에 다시 주목한다. 경제 문제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정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거니와 ‘촛불에 대한 성찰’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을 사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를 비롯해 인터넷 논객, 기자, 교수 등의 필자들이 참여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시위를 성찰한다. 『당대비평』은 “그간의 촛불 담론이 긍정적 효과에 주목했다면 이 책은 촛불 주체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했다”며 집필 의도를 설명했다.

촛불시위는 복잡한 쟁점들을 담고 있는 사안이었다. 저자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촛불시위를 분석한다. 그들은 촛불시위 때 과학 담론이 정부, 대중, 전문가 사이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비정규직 문제에 촛불 주체들이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 설명한다.

『당대비평』 한보희 기획위원은 촛불 주체들의 정체성을 ‘법’을 통해 살펴본다. 당시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집시법과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범법자로 여겨지곤 했다. ‘법에 대한 무지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형법의 원칙은 모든 실정법이 그 원리로 따르고 있는 ‘법들의 법’ 중 하나다. 이에 따르면 촛불시위 참여자들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법들의 법’조차 국민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법의 속성을 고려하면 이는 섣부른 결론이 될 수 있다.

국민이 국민일 수 있는 자격은 법률로 그 요건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국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법률 판결의 주체가 국민보다 우선한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으로 제정된 권력의 주체인 ‘대한민국 국민’과 헌법을 만드는 권력의 주체인 ‘대한국민’을 구분해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법 속에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면 법 이전에 ‘대한국민’이 있는 것이다. 이런 법적 해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만 살아오던 이들이 촛불시위를 통해 ‘대한국민’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촛불은 꺼졌고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라며 우리를 채근하지 않는다. 대신 촛불에 대한 관심 혹은 반성만은 끄지 말 것만을 당부한다. 행동에는 관심과 반성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유병준기자)  

09. 03. 29. 

 

P.S. 그간에 나온 '촛불 관련서'를 다시 '호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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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from Post-Modern Times 2009-03-29 19:39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2.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3-29 22:04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Sati 2009-03-29 22:02   좋아요 0 | URL
아는 분과 휴대폰 얘기하다가, 애니콜 기본 벨소리중에 "여보쪠요. 쪈와와쪄요." 이거가 좋긴 하지만 삼성꺼라 번번이 싸이언을 사게된다고 했더니, "긍정적으로 살아. 그냥 사. 삼성 없으면 어쩔려구? 우리나라 1위 기업인데."하더라는... 나로 말하면 삼성이 바다에 기름부어놓고 배째라 하고 있는 것이 미워서 불매운동중인데, 아무데나 지네 편한데 갖다 붙이는게 '긍정'의 '시크릿'이라는. 반말 ㅈㅅ요^^

로쟈 2009-03-29 23:28   좋아요 0 | URL
사회가 덜 성숙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호구 노릇이나 하지요...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 출간된 김에 '지젝의 주저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시차적 관점>의 출간을 앞둔 시기에 그가 자신의 '주저'라고 꼽은 책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를 포함한 네 권이었다. 모두가 국내에 소개돼 있으므로 바야흐로 읽어주기만 하면 되겠다. 읽기로 마음 먹으면 여름까지는 풍성한 읽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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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적 관점-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 마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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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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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3-29 18:03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2판이 나와있군요. 지젝 스스로가 몇몇 부분은 비판했던 책이니만큼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큰 수정없이 표지만 바꾸고 서문만 덧대서 그대로 나왔을런지? 한국에도 2판이 번역되어서 나오면 좋으련만...요원한 일이겠죠?

로쟈 2009-03-29 18:21   좋아요 0 | URL
짐작엔 서문만 다시 썼을 듯싶은데요(원서의 편집 미스는 교정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한국어판이 절판된 마당인지라 2판의 번역판이 다시 나오면 좋겠어요. 제목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바로 잡아서...

[해이] 2009-03-29 18:19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도대체 언제 재판이 나올까요....

로쟈 2009-03-29 18:22   좋아요 0 | URL
이게 안 팔리는 책은 아니니까 다시 나오겠지요. 몇몇 오류를 바로 잡아서 빨리 나오면 좋겠습니다...
 

'이주의 문학서'를 꼽는 걸로 새로 나온 책들에 대한 '눈팅'을 마무리할까 한다. 샨사나 조이스 캐롤 오츠 같은 저명한 작가들의 신작들이 출간됐지만 한 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베가북스, 2009)다. 작년 부커상 수상작이라고 하니까 작품성은 이미 공인받은 터이고(인도 출신 작가로는 살만 루시디, 아룬다티 로이, 키란 데사이에 이은 네 번째 수상자라 한다), 요즘 관심의 한 축이 인도쪽으로 쏠리고 있는 탓에 눈길이 안 갈 수 없다. 게다가 '날 것 그대로의 인도'를 보여준다고 하는 점도 마음에 든다(비카스 스와루프의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바로 연상케 한다). 일단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03. 28) 부조리와 비극, 날 것 그대로의 인도 

“절대로 갠지스강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똥이며, 지푸라기며, 물에 잠긴 시체의 일부며, 썩은 물소 고기며, 일곱 가지 산업폐기물 따위를 입안 가득히 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인도에 대한 낭만과 환상을 싹 걷어낸 인도 작가 아라빈드 아디가(35)의 장편소설이다. 가난과 차별, 악취와 오물, 살인과 부패로 가득한 소설은 ‘진짜 인도’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비천한 계급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된 주인공 발람이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통해 인도사회의 위선과 부조리를 거침없는 입담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뼈마디가 앙상하고 온몸에 가난이 새긴 흉터가 가득했던 발람의 아버지는 아들만이라도 다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학교를 보내지만 결국 발람은 학교에서 끌려나와 미래라고는 없는 노예의 삶을 강요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델리의 부잣집에 운전기사 겸 하인으로 들어간 발람은 주인 아쇽을 존경하고 충성하지만 주인은 결국 아내가 저지른 자동차 사고를 하인인 그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주인에 대한 애증 속에 갈등하던 발람은 결국 주인을 죽임으로써 종살이로부터 탈출을 기도한다. 그리고 ‘기술 및 아웃소싱의 세계적 중심지’ 방갈로르로 숨어들어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달린 사무실과 은색 랩톱을 가진 기업가가 된다. 발람이 털어놓는 ‘살인의 추억’은 속죄를 위해서가 아니다. 발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옹호하거나 방어하지 않지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위해 단 한 번의 살인이 필요했다”고 또렷이 말한다.

“저는 그날 밤 델리에서 주인의 목을 따버린 것이 실수였노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저는 말할 것입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아니, 단 일 분이라도, 하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불편한 진실로 가득한 소설이 무겁지 않은 것은 걸쭉한 입담과 블랙유머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작가의 필력과 작가가 전하려는 희망적 메시지 때문이다. 소설은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노력의 소중함을 역설하며 현재진행형인 인도사회의 부조리와 비극을 끊어내려 한다. “인도의 젊은이들이여, 그대 혁명의 책은 바로 그대들의 뱃속에 들어 있도다. 그것을 배출해내서 읽으라!” 2008년 부커상 수상작이다.(이영경기자) 

09. 03. 28. 

 

P.S. 이번주 신간 중에는 샤시 타루르의 <네루 평전>(탐구사, 2009)도 포함돼 있다. 한겨레의 짧은 책 소개는 이렇다  

인도. 한국인들에게는 ‘종교·명상·카스트의 나라’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영역에서 인도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불린다. 두 인식 사이의 골은 깊고 넓다. 이를 메우려면 인도의 첫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그는 간디와 함께 ‘현대 인도’를 빚어낸 두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네루 평전>(원제 Nehru-The Invention of India)의 지은이는 말한다. “네루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너무 커서 주기적으로 재점검해 봐야 할 정도다. 오늘의 인도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네루라는 한 사람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왜 그런가? 인도라는 거대한 집을 오래도록 떠받쳐온 네 개의 기둥, 곧 ‘민주주의 제도+세속주의+사회주의 경제+비동맹 외교’를 세운 이가 바로 네루라는 게 지은이의 평가다. ‘카스트의 나라’ 인도가 오늘날 국제정치 무대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도 ‘다원적 민주 국가’로 불릴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는 것이다. 네루는 최상층 힌두 브라만 계급 출신이었지만 농민과 일체감을 느꼈고, 종교를 중시하는 종파주의는 극단적으로 멀리했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다 9번 체포되고 10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격정적이고 급진적인 성품이었지만, 인종과 언어가 복잡한 인도의 통합을 위해 필요한 중도적 리더십을 지향했다. 네루는 이렇게 ‘자기’를 눅이며 무엇을 꿈꿨을까? “바라건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4억의 인민입니다.” 네루의 꿈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네루 사후 인도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그래도 인도의 지식인들은 ‘네루’를 쉼 없이 재검토한다.(이제훈기자) 

한데, 얼마전에 읽은 <거꾸로 가는 나라들>(난장이, 2009)에서 저자 판카즈 미시라의 네루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첫 여성 총리를 지낸 그의 딸 인디라 간디에 대한 평가는 더욱 신랄했고. 네루에 대한 상반된 역사적 평가가 있다는 점 정도는 알아두어야겠다. 여하튼 이 복잡한, 복잡해보이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로 몇 권의 책을 꼽아둔다. 저자가 모두 인도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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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28 23:20   좋아요 0 | URL
소설과 함께 인도인이 보는 인도는 흥미롭네요. 특히 네루 평전요

로쟈 2009-03-29 08:28   좋아요 0 | URL
네루나 간디에 대해선 세계위인전으로만 읽는 터라 우리가 약간의 환상도 갖고 있는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3-29 17:14   좋아요 0 | URL
인도가 티벳 분쟁때 달라이라마에 동조하고 중국과 국경분쟁도 하는 등 중국과 사이가 안 좋은 시절엔 중국 공산당에서 네루를 완전히 악질로 취급하더군요.

로쟈 2009-03-29 23:26   좋아요 0 | URL
언젠가 둘이 전쟁도 했지요. 러시아까지 포함해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국 트리오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3-30 23:12   좋아요 0 | URL
예.그때 소련이 인도 편들었는데 인도가 참패했지요.중소 분쟁이 한참 심할 때였지요.제3세계의 맹주는 누구냐를 두고 인도,중국,인도네시아가 3파전을 벌였던 때입니다.
 

이번주에 주목을 끄는 철학서는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난장, 2009)과 한자경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서광사, 2009)이다. 후자는 국내 필자가 쓴 <정신현상학> 해설서 가운데 가장 상세한 듯싶다. 하지만 별다른 소개기사는 눈에 띄지 않기에 <고대 원자론>에 관한 기사만 옮겨놓는다.  

   

한겨레(09. 03. 28) 2500년 전 원자론, 인류에 쾌락을 선사하다

<고대 원자론>은 ‘원자론’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경~360년경·사진), 에피쿠로스(기원전 342~271년),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4년경~55년경)의 사유 세계를 해설한 책이다. 고대철학 전문 연구자인 장 살렘 프랑스 파리1대학 교수가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용으로 썼으며, 그 밑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양창렬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이 원자론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닌 의미는 이 책의 부제 ‘쾌락의 원리로서의 유물론’에 드러나 있다. 지은이는 이 세 사람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정초했으며, 거기에 입각해 ‘쾌락의 윤리학’을 설파했다고 말한다. 이 세 원자론자, 그중에서도 특히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현대 철학의 관심사가 된 것은 젊은 카를 마르크스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22살의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 두 사람의 사상을 비교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썼다. 마르크스는 이 논문을 통해 헤겔 관념론의 자장 안에서 커가던 자신의 사유를 일신할 계기를 마련했다. 일종의 유물론적 도약의 발판을 찾아낸 셈이다.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은 마르크스의 이 논문을 서술의 배경 또는 발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고대 유물론자들의 사상을 해석한다. 마르크스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를 극적으로 대립시켜 선배를 기각하고 후배의 편에 선다면, 살렘은 두 원자론자의 차이보다는 같음 쪽에 무게를 싣는다. 원자론이라는 큰 묶음 속에서 두 사람의 생각의 이어짐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관계는 어떤가. 지은이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를 각각 장을 나눠 따로 설명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철학은 포개진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보다 200여년 뒤에 살았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철두철미하게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에피쿠로스의 발자국을 그대로 좇았다. 루크레티우스의 의미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탁월한 주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300편에 이르는 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알려면 루크레티우스의 충실한 해설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루크레티우스를 설명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가 공유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은 “전 우주는 물체와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 내부는 물체로 채워져 있되, 물체가 운동할 수 있는 것은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물체는 더는 나눌 수 없는 미립자의 집합이다. 이 미립자, 곧 원자를 일종의 레고라 한다면, 이 세계는 그 레고들의 결합인 셈이다. 이 ‘레고랜드’에는 창조주나 절대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신적 존재 없이 이 세계는 스스로 작동하고 변화한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이 갈라지는 지점은 ‘원자의 운동’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빗방울처럼 위에서 아래로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고 말한다. 떨어지면서 충돌하고 되튀고 얽힌다.

그런데 같은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면 서로 충돌할 일이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제안하는 ‘클리나멘’(편위)이다. 에피쿠로스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원자들이 조금씩 수직에서 비껴나는 이탈 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이 이탈이 바로 편위다. 이 편위가 있기 때문에 원자들은 서로 충돌할 수 있고 일종의 ‘브라운 운동’을 할 수 있으며, 그 편위의 자유 운동 속에서 모임과 흩어짐을 통해 세상 만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원자론적 자연학에 기반해 윤리학이 펼쳐진다. 에피쿠로스에게 자연의 세계는 윤리의 세계와 친연성을 넘어 어떤 일치성이 있다. 자연의 클리나멘은 사유의 클리나멘으로 이어지며, 이 사유의 클리나멘에서 사유의 의지, 사유의 자유가 도출된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흔히 ‘쾌락주의 철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데, 그때의 쾌락주의는 ‘오늘을 즐겨라’(카르페 디엠) 식의 ‘안달하는 쾌락주의’와는 종류가 전혀 다르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쾌락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쾌락은 욕망의 절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고통의 부재’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그런 쾌락을 두고 ‘아타락시아’(평정심)라고 했고, 아타락시아를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아테네 교외의 정원에 세운 학교(‘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가르친 것은 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길이었다. 철학이란 “추론과 토론을 통해 행복한 삶을 얻어내는 활동”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다시 말해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삶을 지혜롭게 통찰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유물론이 쾌락의 원리, 행복의 원리가 되는 이유다.(고명섭 기자) 

09.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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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3-28 21:23   좋아요 0 | URL
한자경씨의 책들은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ㅎㅎ 새 책을 내셨다니 너무 반갑네요~

로쟈 2009-03-28 22:20   좋아요 0 | URL
이 분이 칸트철학과 불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두 번 받으셨죠. 저도 칸트에 관한 학위논문은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