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대국 아메리카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두 권의 여행기에 대한 리뷰를 챙겨놓는다. 정확하게는, 각각 한국 작가와 일본 저널리스트의 미국 '횡단기'이다. '유재현의 미국 사회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거꾸로 달리는 미국>(그린비, 2009)은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그린비, 2009) 같은 그의 아시아 기행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싶다. 아시아에서는 걷고 미국에서는 달린다는 차이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아시아인에게 적대감부터 보이는 경찰과 자본주의의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두려워할지언정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나라, ‘미국’의 초상을 읽는다"고 하니까 말이다. <아메리칸 버티고>(황금부엉이, 2006) 같은 프랑스 철학자의 미국 기행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한편, 작년에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문학수첩리틀북스, 2008)린 첵으로 이름을 알린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는 <아메리카 약자혁명>(메이데이, 2009)에서 신랄한 고발서였던 전작과는 달리 아직 '미국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이유'를 살핀다. 곧 "미국 전역을 직접 발로 뛰면서, '보도가 전하지 않는' 미국 사회의 약자들의 변화를 위한 갈망과 행동 속에서 미국 사회에 남아있는 희망을 건져 올린다." 미국 사회의 두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1930년대 새크라멘토의 ‘후버빌’. 1929년 대공황을 맞은 미국에서는 직장과 집을 잃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거리로 내몰렸다. 미국 전역에 급조된 빈민촌이 양산되었다.

세계일보(09. 05. 30)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 사라진 ‘빈곤 대국 

“‘베트남전쟁. 미국의 가장 긴 전쟁,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미국의 병사들이 여기 잠들어 있다.’ 미국 곳곳에 산재한 전쟁 기념비에는 대부분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미국은 20세기 내내 전쟁을 벌여 왔다. 워싱턴DC의 바로 옆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와 링컨기념관 인근에 있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미군 51만7000여명과 유엔군 6만2000여명의 영혼을 상징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미화함으로써 애국주의를 고취하거나 전쟁을 찬양하는 기념비만 압도적으로 많고, 미국 어디에서도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이 미국을 횡단했다. 한 명은 한국의 소설가 겸 여행작가 유재현씨이고, 또 한 명은 일본 여성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 유씨는 미국 산업의 상징인 자동차로 62일간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 끝까지 2만5000㎞를 여행하며 미국의 추락상을 증언하고, 이를 제3세계의 정치, 역사와 연관해 설명했다. 고속도로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들을 통해 미국 운수노조인 팀스터의 쇠락과 미국 노동운동의 씁쓸한 현실을 짚어보기도 하고, 텍사스 등지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인한 멕시코의 비극을 돌아보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20층에 있는 증권회사에서 일하다 건물이 붕괴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츠츠미는 그 후 저널리스트로 변신해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글과 강연으로 미국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9·11로부터 2년 후, 테러 후유증과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또다시 미국에 가서 내가 만난 것. 그것은 보도가 전하는 잔악한 이미지와 정반대의 또 다른 미국의 얼굴이었다.”  



먼저, 유씨의 증언. “아시아인이 처음으로 북미 대륙에 발을 내디딘 곳은 미국의 서쪽 끝인 태평양 연안이었다. 18세기 중엽, 중국의 빈농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의 삶은 차별과 멸시로 점철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유씨는 오리건 주를 지나다 ‘라이스 밸리’라는 지명을 발견한다. 한때 중국인들이 벼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벼농사를 정착시킨 사람들은 일본인 이주민이었다. 중국인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그들은 힘들게 모은 돈으로 농지를 구입해 벼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2차대전이 발발하자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모두 적국 국민으로 취급해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캘리포니아 온타리오의 ‘부시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 속에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 미국인들은 공유지를 점거하고 텐트촌을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이 텐트촌에 부시빌이란 이름을 붙였다.

사실 미국의 역사는 아시아인들에게만 ‘배제’의 잔혹함을 보인 것은 아니다. ‘배가 고파요’라고 쓴 팻말을 들고 앉아 있는 흑인 홈리스들은 미국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다. 한때 미국 서부 지역에서 진보운동의 성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는 이제 홈리스만 가득할 뿐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멕시코였다. 현재 미국 영토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뉴멕시코, 네바다, 애리조나의 전부와 와이오밍과 콜로라도의 상당 부분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를 22번째 주로 편입시킨 미국은 이후 노골적으로 멕시코에서 영토를 노리기 시작해, 1846년 전쟁으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영토의 55%를 미국에 뺏긴다.” 

2008년 미국을 강타한 모기지론 사태는 미국 속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미국 대도시 강변에 이번 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텐트촌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텐트촌의 원조는 대공황 때 나타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버의 이름을 붙인 ‘후버빌’이다. 최근 나타난 텐트촌은 ‘부시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가져온 빈곤의 풍경을 고발한다.   

◇세계 부(富)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극빈자가 3000만명이 넘는 ‘빈곤 대국’이기도 하다.

다음은 츠츠미의 증언. “9·11 참사 이후 부시 정권이 ‘대테러전쟁’과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잠시 미국사회 ‘밖’을 주목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미국 사회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미국사회 ‘안’이 문제였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사실은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뉜 양극화사회이며, ‘빈곤대국’이라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계 부의 4분의 1 이상을 점유하면서도 31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고 있고,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4500만명을 넘으며, 2억3000만정이나 되는 총기가 나돌아다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란 점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은 없고 ‘빈곤대국’만 남게 됐다.”

츠츠미는 그러나, 언론 보도가 전해주는 미국사회의 현실에만 기대서 절망하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약자들의 변화를 위한 갈망과 행동 속에서 미국 사회에 남아있는 희망을 건져 올린다는 것. “전쟁이라고 하는 거대한 비즈니스를 계속하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고 경제적으로 구석에 몰려 고통 끝에 조국을 위한 버리는 말로 쓰이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 아들들을 전쟁에서 잃은 가난한 어머니들이나 무력한 마이너리티 젊은이들, 그리고 영웅이라 부릴 줄 알았던 노상에 잠든 노숙인의 귀환병들”이 바로 그들이고, 험난한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고개를 들고 일어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열심히 해내는 그들 속에서 츠츠미는 아직은 남아있는 미국 사회의 희망을 본다.

유씨의 시선에 들어온 미국은 사실 오늘날 남한사회의 풍경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유사 미국’을 지향하는 남한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닥칠 일이다.” 그러면서 유씨는 “우리는 미국이 아니라 이미 미국화를 완성한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한다”고 일침을 놓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츠츠미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 갇힌 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지적한다.(조정진 기자) 

09.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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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31 20:40   좋아요 0 | URL
루즈벨트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넣은 사건은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동정하는 사람이 없던데 역시 유재현씨는 다르군요.

로쟈 2009-05-31 23:40   좋아요 0 | URL
네, 그런 '팩트'들은 역사책에도 실어주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6-01 00:29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사건에 대해서 시간 내서 페이퍼에 한 번 써야겠군요.

로쟈 2009-06-01 23:59   좋아요 0 | URL
고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