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얇은 분량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번주 언론리뷰들에서 크게 다루어진 책이 있다.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문학수첩, 2008)가 그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일본계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한겨레의 표기로는 '쓰쓰미 미카'). 알고보니 일본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젊은 일본 여성이 쓴 소박한 미국사회 심층취재기' 정도의 책도 우리는 안 갖고 있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든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리뷰를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08. 10. 11) '신자유주의 난민’ 넘쳐나는 미국

미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망이 얼마나 골수에 박혀 있는지는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 전쟁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거나, 그런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비판하는 글들에는 으레 ‘반미 좌파’라는 낙인을 찍거나 냉소적 빈정거림과 함께 ‘그래도 가장 잘살고 가장 강력한 미국’한테 배우고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댓글들이 붙기 십상이다. 부실 주택금융 파탄이 부른 대공황 풍문 속에 미국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체제가 실패로 귀착된 것이 거의 확실해진 지금도 그렇다.

개중엔 미국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이웃 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의 선택지는 그래도 미국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 또는 숙명론까지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글쎄, 이 현실론, 숙명론이야말로 바로 미국 때문에 조성된 일종의 자가발전적, 자기모순적인 뒤틀린 상황논리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근본적인 회의 또는 재검토를 해볼 필요가 있지만, 그 전에 먼저 미국이 과연 가장 잘살고 그래도 여전히 제일 잘나가는 나라인지부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과연 그런가?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문학수첩)라는, 젊은 일본 여성이 쓴 소박한 미국사회 심층취재기(원서는 문고판 이와나미 신서, 2008년 1월 출간)가 “그렇지 않다”는 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과잉 또는 허구의 이념적 잣대로 어쭙잖게 상대를 난도질하는 풍조 속에 갈가리 찢어져 이젠 서로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된 우리 사회에서 올해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고, <산케이신문>부터 <아사히신문>까지 고루 평가받은 이 이방의 베스트셀러가 현지취재 르포를 통해 전하는 미국 사회 실상은 그래도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도쿄에서 태어나 뉴욕주립대·시립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론을 공부하고 유엔 여성개발기금,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뉴욕지국을 거쳐 미국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하다 2001년 9·11 사태 때 무너져내린 세계무역센터 빌딩 바로 옆 건물 사무실에서 몸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파를 경험한 뒤 급속히 변해가는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 지은이 쓰쓰미 미카(38)의 현장보고는 남다른 강점이 있다. 정책 체험자나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구체적 증언을 통해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이제까지 미국의 실패에 대해 보고 들으면서도 먼 나라 얘기로만 여기던 사람들에게 바로 자신의 문제처럼 다가오게 만든다.

읽다 보면 절로 이런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밀어붙이고 있는 거의 모든 정책들이 실은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게다가 놀랍게도 그들 정책은 하나같이 이미 실패로 끝났거나 거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는 것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태가 이러한데도 우리 정부나 미국 신봉자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 뒤쫓아가기에 여념이 없다는 사실이다. 쓰쓰미의 문제의식 속에는 고이즈미와 아베 정권 때 미국을 열심히 추종한 자신의 조국 일본이 되풀이하고 있는 미국식 실패에 대한 탄식과 분노와 경계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쓰쓰미가 찾아가는 현장은 다섯 군데다. 첫 번째는 가난 때문에 비만아가 급증하고 있는 학교현장. 부시 정권이 가속한 신자유주의 민영화와 경쟁제일주의, 친대기업 규제완화가 빈곤지역 학교 지원금을 대폭 깎았고 이는 할인·무료 급식에 의존하는 아이들에게 비만을 부르는 싸구려 정크푸드 공급으로 이어졌다. 2006년 미국 국세조사에서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 수입이 2만달러 이하면 ‘빈곤’가정으로 분류된다. 2006년 미국의 빈곤인구는 3650만명으로 전인구의 12.6%. 그중 18살 이하 빈곤아동은 17.6%(6명에 1명꼴)로 2000년부터 5년 동안 11%(130만명)나 늘었다. 2006년에 하루 7달러 이하의 수입으로 삶을 이어간 미국인이 6000만.

두 번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쑥대밭이 된 뉴올리언스. 1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재난 뒤 2년이 지나도록 도심인구의 절반도 돌아오지 못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민영화에서 시작된 인재였다.

세 번째는 다른 선진국들 평균의 2.5배나 되는 1인당 의료비를 부담(연간 5635달러, 2006년 4인 가족 부담 평균 의료보험료는 1만1500달러)하면서도 유아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 중 가장 높고, 의료보험 미가입 인구가 4700만(2010년엔 5200만)이나 되는 의료현장. 2005년 전체 파산건수 208만건 중 204만건이 개인파산인데 그 절반 이상이 병원 치료비 때문이었다. 하루 입원한 맹장염 수술비가 1만2000달러. 의료보험 가입자도 속수무책. 의료 민영화의 귀결이다.

네 번째는 학자금과 생활비 지원을 미끼로 삼아 가난한 고교생들까지 입도선매식으로 포섭해가는 군 모병 현장.

다섯 번째가 병참은 물론 전투까지 민간기업이 대체해 가는 군사부문 민영화 현장. 이 역시 불법이민자 등 더는 갈 데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지독한 가난을 돈벌이 기반으로 삼고 있다. 거기엔 ‘켈로그 브라운 앤 루트’ 같은 민간 파견회사가 있고, 그 뒤엔 대형 석유 서비스·건설업체 핼리버튼, 블랙워터 유에스에이 등이, 또 그 뒤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핼리버튼 시이오(CEO)였던 딕 체니 부통령 등 유력 정치인들이 있고 그들과 유착한 기업과 언론이 있다.

결국 이렇다. 신자유주의로 세상은 소수의 가진자와 대다수의 빈곤층으로 양극화한다. 양극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못가진자들 사이 경쟁은 격화하고 그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반면 가진자들은 못가진자들을 더욱 싸게 더욱 쉽게 부릴 수 있게 되고 그걸 토대로 더욱더 많은 부를 쌓아올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파고든 곳도 바로 이 확산일로의 빈곤지대다. 쓰쓰미가 찾은 현장 다섯 곳의 비극은 바로 빈곤을 축재의 원천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빈곤 비즈니스의 귀결이자 그 출발점이다.(한승동 선임기자)

조선일보(08. 10. 11) 먹고 살 돈이 없어서 그들은 전쟁터로 향했다

"사실은 정말 괜찮은 일자리가 있는데 말이죠."
미국 뉴욕주 뉴버그에 사는 트럭운전사 마이클 브라운은 2005년 8월 모르는 남자로부터 귀를 솔깃하게 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브라운 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돈을 많이 빌려 쓰고 계신 것 같은데…." 빚독촉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정말 괜찮은 일자리가 있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전화를 건 남자는 국제적인 규모의 파견회사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연봉이 6만5000달러(약 9000만원)인 트럭운전사 자리가 있다"고 했다. 목소리는 친절하고 밝았다.

마이클은 수입이 너무 적어 하루하루가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아들의 병원 수술비는 마이클의 지급능력을 훨씬 넘어 있었고, 빚을 갚지 못해 '돌려막기'를 하는 사이에 그의 이름은 다중채무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네,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다음날 곧장 취업 설명회장으로 간 마이클은 자신의 일터가 전쟁중인 이라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루 12시간, 주7일 근무. 사망해도 시체는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현지에서 화장된다는 설명에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이어진 연봉 이야기에 참가자 전원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참전을 결정하는 장면이다.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의 저자인 츠츠미 미카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옆 빌딩의 노무라 증권에서 일하던 중 9·11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저널리스트로 변신했다. 저자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 아래 생명이나 안전, 국민의 생활에 관한 국가의 중추기능이 극단적으로 민영화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단숨에 추진됐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역시 '민영화된 전쟁'의 희생자이고, 이는 국가 차원의 '빈곤 비즈니스'(빈곤층 대상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사업)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인간이 대량으로 소비되는 구조의 심각성을 고발한다. 빈곤층 지원비용 삭감으로 인해 아동들이 저렴한 정크푸드만을 찾아 발생하는 비만 문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통해 드러난 민영화된 재해대책의 부실함, 공적 의료보험이 없어 비싼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는 중류층, 공부할 돈이 없어 군대로 가는 학생들…. 일본인인 저자는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뒤쫓고 있는 오늘날 일본에 경고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마이클은 약속된 급료를 다 받았을까? 다 받았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마이클은 방사능 물질에 노출된 탓으로 귀국 후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힘들게 번 돈은 치료비로 바닥이 났다. 마이클은 집에 누워서 지내고, 부인이 밤낮으로 일해 연명하고 있다.(김상민 기자)

0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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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꾸로 달리는 빈곤대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30 11:27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두 권의 여행기에 대한 리뷰를 챙겨놓는다. 정확하게는, 각각 한국 작가와 일본 저널리스트의 미국 '횡단기'이다. '유재현의 미국 사회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거꾸로 달리는 미국>(그린비, 2009)은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그린비, 2009) 같은 그의 아시아 기행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싶다. 아시아에서는 걷고 미국에서는 달린다는 차이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아시아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09   좋아요 0 | URL
이와나미에서 나왔다면 저자의 수준은 안심해도 되겠군요.기행문이 여행안내서 수준을 넘어 문명비평의 경지에 이르르려면 저자의 수준이 아무래도 높아야죠.

로쟈 2008-10-12 19:42   좋아요 0 | URL
네, 겉보기보다는 탄탄한 책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