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곧 써야 할 원고는 잠시 미뤄두고(생각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군), 주초에 읽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21의 편집장 칼럼인데, 안 그래도 오늘 장자연 수사 중간결과가 발표된 걸 보고 한국 권력집단에 대한 염증을 한번 더 느끼면서 필자의 '조롱'을 거들고 싶어서다. 법대생은 아니었지만 나도 예전엔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류의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대학원 동료와 후배들 가운데는 변호사가 된 이들도 몇 된다). 그땐 법전의 (한국어) 문장들이 맘에 안든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지금은 칼럼을 참조하여 훨씬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을 듯하다.  

한겨레21(09. 04. 24) P의 항변  

기자 P는 ‘펜 생활’ 15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종종 질문을 받는다.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그러면 P는 대답한다. P가 법대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법과 현실의 법이 너무나 달랐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헌법 제1조부터 거짓말이었으니, 법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P의 첫 번째 대답이다. 그러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이다. 왠지 도식적이다. 그렇게 물으면, P는 또 대답한다.

졸업 뒤에도 기회는 있었다. 90년대, 사법시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고시촌으로 스며드는 이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당시 법조담당 기자였던 P는 법에 대한 실망을 넘어 법조인에 대한 실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반말을 지껄여대는 판사들, 시국사건 재판에선 온순한 양이 되어 검찰의 논리를 답습하는 판사들, 늘상 재판 기록에만 파묻혀 ‘저러고도 창조적인 사고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판사들…. 피의자를 쥐어패는 검사들, 그러면서 상관에게는 그렇게 깍듯할 수 없는 검사들, 비리의 몸통엔 약하고 깃털엔 강한 검사들, 사법 정의보다 주제넘은 ‘나라 걱정’에 여념 없는 검사들….  

영화에서 본 멋진 변론 대신 주눅 든 자세로 재판장에게 선처만 호소하는 변호사들, 사건을 더 수임하느라 브로커를 동원하는 변호사들, 전관예우로 돈을 긁어모으면서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변호사들…. 나름대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P로서는 법조계의 어떤 직업에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대답이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의구심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는다. 지금이야 설마 그런 판사·검사·변호사들이 있으려고…. 정말 후회한 적 없니? 그러면 P는 대답한다.  

가끔은 후회한다고. 촛불집회와 관련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하는 판사들을 보며(기자로서 야간 집회 금지를 비판하는 기사를 아무리 써도 이 정도의 반향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국방부의 불온도서 지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군법무관들을 보며(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기자는 특종의 영예를 안았다), 우리 사회의 온갖 궂은일에 손길을 뻗치는 공익 변호사들을 보며(언론 보도는 상당 부분 이들에게 기댄다), 후회를 한 게 사실이다. 대개 ‘행위자’가 아니라 ‘전달자’여야 하는 운명이 성에 안 찼다는 얘기다.

그러나 P는 곧 항변한다. 법조계 대부분은 여전하지 않으냐고. 최근의 박연차 사건 수사만 보더라도 검찰은 죽은 권력에 강하고 살아 있는 권력에 비실대지 않냐고.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사건만 보더라도 법원은 여전히 정치적이지 않으냐고. 권력에 굴종하고 그러면서 권력을 지향하는 게 법조인의 DNA같다고. 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게 본래 법률가의 몫이건만, 이 정부 들어 검찰·법원에 부쩍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바람에 그런 기대는 지레 접었다고 P는 정색하며 말한다.  

무엇보다 신영철 대법관 사례가 P의 후회를 가로막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대법관이란 사람이 저 모양이라면, 누가 뭐래도 법조계의 최정점이자 법률가적 자존심의 화신이 돼야 할 대법관이 저 모양이라면, 이 땅의 모든 법조인이 법조인임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게 P의 생각이다. 그렇게 부끄러워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 참, 지난해 촛불집회 때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건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공화국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첫 답변으로의 회귀. 아무튼 지금이 행복한 P는 이 순간에도 법조계의 권력 지향자 또는 권력 굴종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칼럼을 쓰는 중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에게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같은 질문은 하지 마시라.(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09. 04. 24. 

P.S. 신영철 대법관의 '이메일 재판 관여'에 관한 시사IN의 몇주 전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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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4-24 19:29   좋아요 0 | URL
"법전의 한국어 문장들이 맘에 안 들어서" 사법고시를 안 봤다는 대답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ㅎㅎㅎ 멋진 대답이군요. ^^

로쟈 2009-04-24 19:39   좋아요 0 | URL
"양친, 친양자, 친생의 부 또는 모나 검사는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친양자의 피양을 청구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이 혐오스러운 것이죠. 일본 법전을 그대로 베껴오다 보니 아직도 난해한 한자어에 어색한 구문 투성이입니다...

비로그인 2009-04-25 07:02   좋아요 0 | URL
법전이 인용해주신 이 한 문장과 모두 대동소이하다면 이것을 가지고 공부하는 법학도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 답답할 것 같아요. 그런 대답을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4-24 23:24   좋아요 0 | URL
85년 신동아를 보면 신영철 사건과 비슷한 일이 그때에도 있었어요.그때 지적된 문제점은 독립적인 판단을 해야 할 판사들조차 위계질서에 바탕한 인사권 때문에 윗사람 눈치를 본다고 했는데....우리나라는 뭐든지 위아래 따지는 버릇이 있어서 정말 문제입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게 몸에 완전히 배어 있어가지구요.인간관계에서 위계질서 외에는 없다고 여기니 문제지요.법조계도 마찬가지구요.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서평이 눈에 띄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필자인 이택광 교수의 기본적인 독후감은 저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는 것인 듯하다. 내가 알기에 이교수나 역자는 같은 대학에서 같은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젝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뚜렷한 '시차'를 보여주는 듯하다.  

교수신문(09. 04. 20) 자칭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 

애드리안 존스턴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출간한 그 해 미국의 캘빈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에서 지젝은 자신의 꿈은 “헤겔의 루터가 되는 것”이라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발언은 진심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이다. 여기서 루터는 “왜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예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에 바로 믿음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시차적 관점』은 헤겔에 대한 지젝의 입장을 빼놓고 접근할 수가 없는 책이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헤겔적 혁신을 시도한다. 그 대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어떻게 되살려내겠다는 것일까. 바로 여기서 지젝이 내뱉었다는 저 고백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자만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믿을 수 있다. 지젝의 입장에서 보기에,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운동의 패배뿐만 아니라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헤겔의 루터’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학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고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티크』에서 빌려 온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진이 다분히 칸트에 의거해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과 반대로 지젝은 헤겔에 근거해서 이 개념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물론 지젝의 헤겔은 그 옛날의 헤겔이라기보다 라캉의 혁신을 거친 헤겔이다. 이쯤 읽으면, 지젝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원’하려는 그 방식에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본뜻’을 망친 스탈린주의로부터 이 ‘위대한 이론’을 분리시키는 것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젝은 엉뚱한 말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스탈린주의의 결합 그 자체가 바로 요점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이지만, 지젝은 실천에 무기력한 부정변증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젝의 말을 요약하면, 그의 라캉-헤겔주의적 철학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뼈”라는 최상위와 최하위를 오가는 헤겔적 무한판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적 무한판단은 둘이 아니라 하나(또는 전체) 자체에 내재한 수많은 간극을 모두 살피는 사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적 기능 상실은 양극단의 투쟁이라는 ‘기본 법칙’이 “대극의 양극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극성’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지점으로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이율배반’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임슨 역시 『시간의 씨앗』에서 지젝과 비슷하게 이율배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성으로 인한 변증법의 무력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지젝은 제임슨과 달리, 이런 이율배반이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하는 기반”도 존재하지 않아서 결코 고차원적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할 수 없는 대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변증법의 장애라기보다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간극은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대립구조라기보다, 하나의 내부에 상존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젝은 이런 양극성, 또는 이율배반적 대립을 “하나 자체에 내재적인 긴장, 간극, 불일치로 대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런 이율배반은 서로 다른 두 극단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시차’에 불과한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런 시차는 다양한 현대이론들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자 입자라는 것, 신경생물학에서 신경의 반응을 뇌의 회백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존재론에서 존재론적 지평을 그 기원으로 환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지평으로부터 존재적 영역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 라캉의 실재계에서 나타나는 실증적이지 않고 실체적인 일관성을 결여한 다양한 관점의 결락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과 충동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시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이 스스로 밝히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시차의 개념은 데리다의 ‘차이’(diff´erance)를 상기시킨다. 시차는 하나와 그 자체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미시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지젝은 시차와 데리다의 차이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연관성에 대한 적절한 이론화를 통해 데리다의 메시아적 정치학을 세속화한 레비나스적 ‘도래할 민주주의론자들’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 지젝은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 내재한 유물론적 속성으로 후기 철학의 정치학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지젝의 의도가 얼마나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지젝이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책을 자신의 주저로 손색없는 책이라고 밝히면서 그의 철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과연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역시나 그렇듯이, 이 책은 너무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분석하다가, 갑자기 정신분석학을 논하고, 여기에 신경과학, 문학, 영화, 정치에 관한 언설들이 마구 뒤섞인다. 지젝을 읽어온 독자라면 정신 사나운 지젝 특유의 스타일이 그렇게 낯설지 않겠지만, 여하튼 멋모르고 책을 집어든 독자에게 좌절감부터 덥석 안기기에 충분하다. 이런 다채로운 스타일을 두고 지젝은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를 통해 개념이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내부로부터 개념의 형식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지론이 곁들여진다. 이를 보면, 서문에 그가 왜 ‘개념들의 확장’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반헤겔주의자 들뢰즈와 정통 헤겔주의자 지젝은 말 그대로 ‘시차’인 것이다. 기발한 자화자찬에 절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이택광 경희대·영문학) 

0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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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4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4-2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의 논리를 모르겠네요. 그냥 비아냥인가요?

로쟈 2009-04-24 09:13   좋아요 0 | URL
'그래 너 잘났다' 정도이겠죠. 그래도 나은 편인 게, 읽지도 않고 욕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요...
 

이번 4.29 재선 지역 가운데 울산 북구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간의 단일화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단일화가 필수적이라는 데 모두가 동감하지만 정작 단일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인 듯싶다(서로의 명분을 앞세우다가 필패의 국면으로 가는 것일까?). 어제오늘 일간지의 두 관련 시론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4. 21) '좌파 분열’이란 신화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를 뜻한다. 사회민주당은 1903년 영국 런던 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분열됐다. 분열의 직접적 원인은 당원의 자격문제였다. 레닌은 당원은 당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계급의 전위(前衛)인 자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멘셰비키는 당원 자격을 직업혁명가들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볼셰비키에 반대하고 서유럽의 사회민주당들처럼 대중정당이 돼야 한다고 맞섰다. 이 사소해 보이는 이견에는 혁명에 대한 근본적 입장 차이가 담겨 있었다. 볼셰비키는 폭력적 정권 탈취를,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1917년 10월 마침내 정권을 잡은 것은 볼셰비키였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꽤 널리 퍼진 속설이 있다.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러시아 혁명사만 봐도 그렇다.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는 이념지형상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좌파였다. 멘셰비키는 상대적으로 우파였다. 현대에도 좌파가 반드시 분열하란 법은 없고, 우파가 반드시 부패로 망하란 법도 없다. 유럽을 들여다보면 우파도 분열로 망한 경우가 많고 좌파가 부패 때문에 몰락하기도 한다. 또 부패했으나 망하지 않고 건재한 우파도 있다. 끝없는 부패 추문 속에서도 50년 이상 장기 집권해 온 일본 자민당이 그 사례다. 분열이건 부패건 좌파·진보, 우파·보수 어느 한 편의 전유물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생각컨대 좌파=분열이란 등식엔 검증되지 않은 신화적 요소가 개입돼 있다.

4·29 재선이 치러지는 울산 북구에서 좌파 진영 후보 2명의 단일화가 관심거리다. 민주노동당 김창현 후보와 진보신당 조승수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 우리 중 한 명만 나가면 한나라당 후보를 이긴다”며 단일화를 다짐해왔다. 문제는 21일로 단일화 2차 시한이 다가왔는데도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굳이 양김 단일화에 실패한 1987년 대선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진보정당은 거대 여당의 독주 속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울산 북구에 좌파 회생의 시금석이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진보는 소탐대실(小貪大失)로 좌파=분열이란 신화를 입증하려는가.(김철웅 논설위원)    

한겨레(09. 04. 22) 두 진보정당은 시험대에 올랐다

필자는 지난 2월4일치 〈한겨레〉 ‘시론’을 통하여 현재 진행되는 국회의원 보궐선거 및 다가오는 지방자치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간의 선거 연대를 촉구하였다. 이후 양당 사이에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위한 후보 단일화 논의가 계속되어 선거 연대가 가시화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후보 등록 마감 전 단일화는 무산되었고, 현재 민주노동당의 김창현, 진보신당의 조승수 두 후보는 각각 후보 등록을 하고 별도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일차적 이유는 울산 북구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주노총의 투표를 불법으로 유권해석했기 때문이다. 200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동조합이 선거운동 기간 전에 예비후보에 대해 조합원들을 상대로 선전 행위를 하지 않고 투표를 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지만, 이번 울산 북구 선관위는 이러한 중앙선관위의 해석도 무시한 것이었다. 이후 민주노총 울산본부도 내부 이견이 발생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총투표를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선거운동 기간 중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쉬워 보이지 않는다. 두 정당 및 후보 사이에 분당으로 인한 구감(舊感), 진보 정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경쟁, 여론조사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이견 등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 소속 인사들은 과거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사이의 단일화 실패와 그로 인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맹비난하였지만, 이제 두 진보정당이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두 정당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은 없다. 그렇지만 두 정당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단일화 실패 이후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예상이 되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당장 양 정당과 후보는 단일화 실패를 상대 당과 후보 탓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낼 것이다. 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비난은 더 가중될 것이다. 입으로는 ‘진보 대연합’을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쟤네들은 안돼”라고 되뇌며 서로를 적대시할 것이다. 보수정당보다 경쟁 진보정당을 더 미워하고 경원시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다가올 지방자치 선거에서도 겉으로는 후보 단일화를 거론하겠지만 속으로는 각개약진의 길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냉소와 실망은 커질 것이다. 이 경우 진보정당의 미래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노동자 정치 1번지’라는 상징성을 갖는 울산 북구의 국회의원 한 석에 대한 양당의 열망은 치열하다. 게다가 단일화가 되면 당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일방의 자발적 양보나 살신성인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경우 후보 단일화는 양 후보와 정당에 대하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외부적 세력이 있거나, 또는 양 후보와 정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여 서로의 이해(利害)를 합리적으로 분배·조절할 수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현재 시점에서 첫 번째 경우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도덕적 힘을 가진 세력은 없으므로, 두 번째 경우만이 유일한 선택지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도부와 두 후보는 즉각 만나야 한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 그리도 외쳐왔던 진보의 대의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를 내세워 진보의 원내 교두보를 추가할 것인지, 그리고 양보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혜택을 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두 정당 지도부와 두 후보의 그릇과 정치력을 지켜보고 있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두 진보정당의 정치적 선택은 적어도 향후 10년간 진보 정치의 명운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0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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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귀가해서 한숨 돌리고 잠시 뉴스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신간 리뷰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경제학계를 뒤흔든 차세대 블록버스터!'라는 광고문구를 띠지에 달고 있는 책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한즈미디어, 2009)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제목이 다소 긴데, 표지대로 하면 초점은 '왜 부국의 원조가 빈국의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가?'이고 기사의 제목대로라면, '국가간 빈부격차 왜 해결되지 않을까'이다. 한마디로, "'부의 탄생'과 '빈부격차'라는 인류역사와 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소개된다(저자 자신은 '가설'이라고 얘기하지만). 2007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자세한 서평이 기대되는 책이다. 경제서이긴 하나 보관함에 집어넣는다.

엽합뉴스(09. 04. 20) 국가간 빈부격차 왜 해결되지 않을까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맬서스의 덫'(Malthusian Trap)에 갇혀 있었다. 인류의 소득 증가는 인구 증가에 가로막혀 번영을 지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인류의 생활 역시 부자와 귀족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구석기나 중세, 심지어 산업혁명 초기까지 별 차이가 없었다.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활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수렵시대 이후 오랜 세월 지속해온 맬서스의 덫을 단번에 풀어버렸지만, 부의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지 못하고 일부 국가에만 집중됐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부터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사회만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이른바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가 발생하면서 국가 간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그레고리 클라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교수가 지은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한스미디어 펴냄)는 산업혁명에 따른 부의 탄생과 확대, 그리고 국가 간 빈부격차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우선 '맬서스의 덫'을 풀어버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한 이유는 고도의 제도적 정체성과 인구통계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영국은 적어도 1200년 이후 사회적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고정성 혹은 정체성을 보였으며, 1300년부터 1760년까지 인구 증가 속도는 더뎠다. 반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유층의 출산율이 높았고, 중산층의 가치가 문화나 유전자에 반영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산업혁명이 촉발된 것은 기존의 경제학이 설명하는 것처럼 정치, 법률, 경제 등의 제도가 급작스럽게 발전했기 때문이라거나 식민지 개척, 지리학, 자원 등의 요인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 폭력, 성급함 등으로 대표되는 수렵채집인의 속성을 버리고 근면, 합리성, 교육 등 좀 더 경제적인 속성을 채택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문화가 심층적으로 변화하면서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오랜 정착생활의 경험과 안정성의 역사를 지닌 사회만이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을 변화시켜 경제성장에 적합한 효율적인 속성을 지닌 인류로 탈바꿈시킨다"고 강조한다.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데는 인구통계학적 특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은 1600-1800년 당시 영국처럼 근면, 인내, 정직, 합리성, 호기심, 학습 등 중산층의 가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지만 상류층의 출산력이 일반 계층의 출산력을 약간 상회하는 선에 그쳐 영국처럼 빠른 속도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상류층의 출산율이 높았던 영국은 모든 자녀가 부모의 부를 세습 받지 못했지만, 교육수준이 높은 나머지 자녀가 직업을 찾아 사회계층 구조상의 아래 단계로 내려가면서 중산층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이는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안정성의 역사를 지니지 못한 사회는 산업화라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서 "현대의학과 항공기, 휘발유, 컴퓨터 등은 과거 200여 년간 이뤄진 기술적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만 아직도 '맬서스의 덫'에 걸려 있는 아프리카 사회에서 기술적 진보는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어서 빈곤층을 양산하는 데 '큰 공'을 세울 뿐"이라고 말한다. 이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경제 대국들은 저개발 국가의 경제발전이란 명목으로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했고, 지금은 빈국을 돕는다는 취지로 부국의 지원과 원조가 물밀듯이 이뤄지지만, 이는 세계적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오늘날 부국들이 허울 좋은 원조를 통해 겉으로는 인심을 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통합이 아닌 배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난한 나라에 제시할 만한 경제발전 모형이 적어도 서구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그 결과 지금 인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부자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의 행복지수는 전혀 증가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이러한 지적들은 세계적 빈부격차를 줄일 근본 방안이 어디에 있는지, 나아가 물질적 풍요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진정한 경제적 행복과 번영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정천기 기자) 

09. 0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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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1 08:12   좋아요 0 | URL
인구통계학이라 --a
흥미롭긴하네요 ^^

로쟈 2009-04-22 08:42   좋아요 0 | URL
네, 새로운 접근법 같습니다...
 
누가 니체를 읽었다 하는가

서평후보로 꼽아두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는 바람에 잠시 독서를 미뤄두고 있는 책이 김진석 교수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 2009)이다. 책은 이달초에 구입을 했으니까 좀 됐다(니체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전작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다.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하게 되면 겸사겸사 유고들까지 읽어볼 계획이다). 나는 책소개라도 해놓은 줄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넘어갔던 모양이다. 강준만 교수의 칼럼으로 뒤늦은 소개를 대신한다.   

한겨레(09. 04. 20) [강준만칼럼] 약자의 원한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아마도 약자들의 복수와 원한에 내재하는 합리성 혹은 정당성을 창조적으로 인정한 덕택에 발전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이해해보자. 그것은 약자들의 원한과 분노가 창조적으로 인정되면서 새로 태어난 권리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묘하다. 니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의 깊은 구석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니 말이다. 김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논하다가 “니체의 철학을 논의하는 책이니만큼, 이 정도에서 만족하자”고 했을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아니 철학이 뭐길래, 그렇게 점잔을 빼야 한단 말인가?

니체는 ‘약자의 원한’을 혐오했으면서도 그것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무수한 얼굴을 가질 것임을 예감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건 그 얼굴의 정체성을 놓고 사회적 갈등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 갈등은 자주 ‘약자의 원한’을 혐오하는 쪽으로 결말을 맺는 것 같다. 그것이 창조적 결실을 맺은 뒤엔 어김없이 타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자신의 약점은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서 생기는 차별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강점에서 오는 이로움이나 명예는 그대로 누리면서 차별을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런 이중적 태도는 ‘강약’(强弱)이 상대적이며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의 도시 거주자가 ‘서울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선 농촌에 대한 ‘도시 패권주의’에 눈을 감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약자의 원한’이 자주 드러내는 한계이자 모순이다.

‘약자의 원한’을 타락시키는 매개는 늘 돈이다. “돈은 원초적으로 무의식의 대상”이라고 한 제임스 힐먼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모든 정치경제 시스템을 바꿔 놓았지만 단 하나 바꾸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돈 시스템이다. 돈은 혁명 위에 존재한다. 수많은 혁명가들과 개혁가들이 종국엔 돈으로 망가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의식의 세계에선, 그들의 패가망신은 ‘권력·금력·명예 3분법의 파괴’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 인간의 삶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지만, 사회적 인정의 기준과 투쟁 방식이 너무 획일화돼 있다. 가장 이상적인 건 권력·금력·명예의 3분법이 지켜지는 것인데, 세 가지를 모두 갖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게 당연시되는 풍조마저 만연해 있다. 그런 풍조를 타고 공직의 기회비용에 대한 과대평가가 발생한다. 자신의 역량이라면 공직에 있지 않고 개인적인 돈벌이로 나섰을 때에 어느 정도를 벌었을 것이라는 계산을 자기 위주로 하고, 권력을 이용해 그 돈을 취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죄책감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단죄의 형평성에만 집착한다. 강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약자의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원한’이 가져온 사회적 축복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꼭 필요하리라. 김 교수는 니체를 가리켜 “인간 사회가 문화적으로 고양되기 위해 필요했던 폭력에 대해 너무 생생하게 증언하느라 미쳐버린 증인”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의 성찰을 압박하는 위악적 달인이라고나 할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오랜만에 두뇌훈련도 할 겸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09. 04. 19.  

P.S.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5장에서 안 그래도 하이데거와 니체에 관한 대목들을 읽던 차였는데, 마침 내일자 강준만 교수의 칼럼이 김진석 교수의 책을 다루고 있어서 옮겨놓았다. 책상맡에 있는 책을 한번 펴보는데, 박홍규 교수의 니체 비판서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을 정면으로 다룬 장도 눈에 띈다. 지젝의 용어를 빌자면, 두 대립적 관점이 니체의 '윤리 정치적 이율배반'이다. 기회가 되면 나대로 이 문제를 정리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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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4-19 23:56   좋아요 0 | URL
저도 김진석 선생의 새 책 얼마 전에 구입하고 언제쯤 독서의 기회가 올까 나름 '일발장전' 중인데, 좋은 소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체의 '발광'에 대한 김진석 선생의 '진단'을 읽고 있자니, 일전에 지젝이 <폭력(Violence)>에서 니체가 발광한 원인에 관해 눙치듯 언급했던 그 예의 번뜩이는 '재기'가 떠오릅니다. 어쩌면 니체 자신도 빠져 있었을지 모르는 이 '약자의 원한'에 관해서는ㅡ지젝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바이지만ㅡ슬로터다이크의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과 함께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역시나 기본적으로 '사회적 정의' 혹은 '해방'을 약자의 원한과 분노에 기초한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로쟈 2009-04-20 00:00   좋아요 0 | URL
지젝의 인용을 보니 슬러터다이크가 하이데거론도 썼더군요. 니체 얘기는 주로 주판차치를 참조하고요..

Claire 2009-04-21 23:18   좋아요 0 | URL
이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나도 약자의 원한이라는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못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