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필름2.0>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중저가' 영화잡지이지만, <씨네21>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즘의 <씨네21>이 과연 세 배만큼의 제값을 하는 '고가' 브랜드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개최된 '1996년의 한국영화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를 계기로 '1886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를 특집으로 내건 이번주 기획만큼은 단연 돋보인다(이번 주 <씨네21>의 기획특집은 '영국배우의 힘'이다). 

이 특집과 관련해서, 10년전, 1996년의 이야기를 나도 풀어볼까 하다가 견적 대비의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냥 한 두 꼭지에 대해서만 참견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또 한편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를 발표한 송일곤 감독의 인터뷰 꼭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의 대담 꼭지이다. 

폴란드의 국립영화학교 우츠출신으로 우리에겐 영화보다 (모 통신회사) CF로 처음 알려진 그의 영화들 중에서 단편영화 <간과 감자>와 장편 <꽃섬>(2001), <거미숲>(2003) 등이 내가 본 작품들이다(그러니까 단편 <소풍>과 장편 <깃> 등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로선 너무 도식적이라고 여겨진 <거미숲>이 실망스러워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될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이라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어떨까' 싶은 눈길을 끈다.

이 신작과 관련해서는 얼마전 오마이뉴스(06. 03. 19)에 소개된 기사내용을 약간 재구성해서 잠시 따라가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은 한편의 연극같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편집 없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으로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 ‘마법사밴드’는 멤버 자은(강은비)의 죽음으로 해체된 인디밴드다. 음악을 통해 청춘을 보낸 그들에게 자은의 죽음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자은과 연인 사이였던 재성(정웅인)은 그들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강원도 숲 속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수(장현성)는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편, 보컬이었던 하영(강경현)은 자은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더 이상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자은을 기념하기 위해 재성이 운영하는 카페에 모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명수는 하영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하영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자영은 여전히 노래하기를 망설인다. 그들은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극복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송일곤 감독의 연출력이다. 카페의 1층은 현재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세 명의 멤버가 다시 만나는 장소이며, 과거의 공간인 카페 2층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힘겨워하는 자은과 재영의 갈등을 보여준다.

-형식미 단편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장편 <거미숲>, <깃>을 통해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마법사들> 역시 그만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거미숲>에서도 ‘숲’을 통해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을 표현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숲’을 통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이 영화는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에도 불구하고 카페 1층과 2층, 숲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변화를 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96분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할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 모두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중간에서의 작은 실수는 곧 촬영 종료를 의미하고, 모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진부함과 급격한 심리의 변화는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30분짜리 단편을 96분의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 <마법사들>은 3월 30일 CGV 인디상영관에서 개봉된다).

한편, <필름2.0>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이 영화적 실험의 배경: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2학년 가정의 중요한 수업 중 하나가 '마스터 샷'이라고 해서 끊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샷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코프스키나 소쿠로프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소련을 중심으로 영화미학이 발전했던 60, 70년대에는 시간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가 많은 이들의 화두였다. 그러면 우리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다."

Александр Сокуров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실험이 헐리우드쪽보다는 러시아나 북/동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의 사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1951- )의 <러시아방주>(2002, 99분)이다(역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 제목에서 얼핏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러시아의 보물창고라 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대한 감독의 공시적/통시적 사색과 명상을 담고 있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이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영화보다 흥미로웠던 건 본편 방송 이후에 덧붙여진 '메이킹 필름'이었다. 영화는 단 한번에 테이크로 모든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한 계산하에 모든 배우 및 스탭들의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했다(리허설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필름속에 담기는 내용만큼(혹은 그보다 더) 그 찍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아래 사진은 소쿠로프와 그의 스탭들.

그런 사정은 <러시아 방주>와 같은 방식으로 찍은 <마법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법사들의 러시아 방주?). 박영준 촬영감독의 고백: "<마법사들>에서 최고의 관객은 현장에서 감독님의 '오케이'를 들었던 현장 스탭들이다. 연극을 보듯 그 순간을 우리 모두 '생짜'로 본 거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뭐랄까, 우리 스스로 치유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손으로 흙 발라서 집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옆에서 거드는 송감독: "마지막 촬영 끝나고 나서 스탭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했던 것 같다." 

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법사들>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그 메이킹 필름이다(어떤 경우에 예술은 'picture'가 아니라 'picturing'에 깃든다). 그걸 찍을 비용이 '저예산'에 포함돼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06. 03. 26.

P.S. 보너스로 덧붙이자먼, 감독 자신이 꼽는 <마법사들>의 베스트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두 남녀가 숲에서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한국영화에서 그런 룩을 처음 본 것 같다. 흑백이 강렬하면서도 컬러가 살아있고 표정들도 너무 잘 나타나 있고, 미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신이다. 우리 영화니 자뻑이기는 하지만." 아마 자뻑인 거 맞을 것이다. 한데, 사과를 먹는 장면은 <거미숲>의 정사장면에서도 나온다. (감자가 아니라!) 사과가 송일곤 감독의 '대상a'쯤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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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와 [필름]모두 좋아하지만 [씨네]의 경우 그 "값"을 한다고 봅니다. "3천원시장"을 [필름]이 포기했지만 [씨네]는 영화잡지에 바랄 수있는 "뽀대"가-표지사진하나만 보더라도-훌륭합니다. 내용은 [필름]의 경우 "이연걸 특집"에서 보듯 하나의 기사로 도배하는 경우가 왕왕있습니다.그리고 [필름]에는 토크2.1이 있지만 비평면이나 "김혜리가 만난사람들"같은 경우는 [씨네]가 독보적이구요.

로쟈 2006-03-2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씨네21>을 더 자주 봤었지만, 최근에는 주로 실망감을 안겨주더군요. 아마도 작년말에 '2005년 나의 베스트 초이스' 같은 기사 꼭지가 결정타였던 것 같은데, 기자들의 베스트 초이스의 대상이 (영화가 아니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 '수다'는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거라는 '편견'을 가진 저에겐 잡지가 좀 뻔뻔해 보이더군요. 이후엔 간혹 살 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happyant 2006-03-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로쟈님. 한때 씨네21의 열혈 애독자였습니다만, 근래의 씨네21은 예전의 그 톡쏘는 '취향'의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스스로의 '수준높음'에 도취된 듯 보입니다. 이번호 필름2.0은 정말 재밌더군요.^^

로쟈 2006-03-2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취이면서 매너리즘 같기도 합니다. 자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리뷰들이 아주 드물게 눈에 띄는 것이 제 시력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twoshot 2006-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는 아니고 또 제가 [씨네]의 내부자도 아니지만 '리뷰'에만 초점을 맞춰 말해보면:김소영,허문영,정성일등의 [전영객잔]은 필자들의 명성에 값할만큼 수준이 고릅니다. 다른 비평은 보통 신진들로 채워집니다. 또 김혜리, 정한석등의 일급 내부필진이 그 뒤를 받치고 있고요. 홍성남의 성실한 글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읍니다. "뭐 이정도면"하는 도취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최선의 의도'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그게 쉽지는 않겠다는 거죠...문예지들에 그득한 '도취와매너리즘'이 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로쟈 2006-03-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필름2.0>에도 두어 편의 읽을 만한 리뷰들은 실립니다. 해서 저의 불만은 정확히 <씨네21>이 <필름2.0> 3권 값을 하느냐입니다. 외부 필자들과 정한석 기자의 글들이 눈에 띄지만, '내부'는 예전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결정타는 '2005년 베스트 초이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수작이었습니다(막바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더군요). <씨네21>은 그 이후에 제게 아직 신뢰감을 회복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twoshot 2006-03-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처구니 없는 수작'에 대해서...다른 물건은 차치하고라도 아무개기자가 추천한 '디빅 플레이어'를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어리둥절했었습니다. 씁쓸했구요. 헌데 '생선회칼'과 '만년필'이 들어간 그 '페이퍼'가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물건들에 대한 페티쉬가 저의 취향에는 먹혔던 거죠. '하이비'같은 잡지에서 볼 수있는 억대 오디오는 아예 쳐다 보기도 싫지만...짐작컨대 그것은 씨네의 '엘리티즘'에 대한 내부의 가벼운 반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잡지의 잡스러움은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게 아쉬움을 넘어 좀 안타까웠지만...

로쟈 2006-03-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잡지에 대한 기대나 취향의 차이일 듯합니다. 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기 위해서 영화 잡지를 사 읽는 편이라.^^
 

봄이면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자작시가 'Don't cry for me!'이다. 물론 이 제목과 함께 떠올려지는 멜로디는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로 에바 페론이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 즉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이다. 한때, 봄바람이 날 때면, 나는 이 지구 반대편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가는 꿈을 꾸곤 했다. 나의 '이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또다른 삶'으로서의 이민에 대한 이러한 '몽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란 청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간혹 그러한 연민으로 자기연민을 쓰윽쓰윽 지운다, 지워버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영화 <해피 투게더>의 이미지들을 군데군데 찬조출연시켰다. 피아졸라의 탱고음악과 함께 잠시 아르헨티나로 떠나본다.

 

Don't cry for me!

눈이 내리고 눈꺼풀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봄이다 궂은 일도 아니다 


엊그제 내다버린 어항 속 개구리밥처럼

희망은 뿌리 없이도 푸른빛을 띠었고

사랑은 사당 사거리로 가는 길처럼 꽉 막히다가

이게 아니구나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하긴

 

봄이다 다행이다

몇 년만에 본 여자는 아르헨티나에 갔었다는 여자는

사지가 멀쩡하고 아이도 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남편은 외교관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눈은 내리고 바람은 분다

사실은 잘 모른다

나도 언젠가는 이민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중이다

 

봄이다 봄바람 이젠 궂은 일도 아니다

몇 년만에 본 여자는 아르헨티나에 갔었다는 여자는

하필이면 사지도 멀쩡하고 아이까지 있을까

나는 혼자 이 여자를 사랑했나 보다

흔한 일이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눈은 더 내리지 않고 바람도 더 불지 않는다

그래도 봄이다 눈꺼풀이 감긴다   

 

눈은 더 내리지 않고 바람도 더 불지 않는다
그래도 봄이다 눈꺼풀이 감긴다  


엊그제 또 내다버린 어항 속 개구리밥을 걱정하다가 
나는 배가 고프기도 하고 아침 내내 꽉 막히던 길에 부아도 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울지 않을 테다

 

봄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나는 이민 간다


봄이다 봄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

여전히 눈이 내리고 눈꺼풀이 내리고 바람이 불겠지

이게 아니구나 싶어도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

나는 여차하면 이민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중이다

 

나는 한푼도 예금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때나 울지 않는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


봄이다 봄바람 다행이다 이젠 정말 궂은 일도 아니다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06. 03. 26. 

 

P.S. 이 글은 '집'에서 쓰는 본격적인 첫 페이퍼이다. 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의 이미지 여행이 가능한 것은 물론 인터넷 덕분이다. 인터넷-몽상 때문에 이제 이민 가는 건 정말로(!) 글렀다고 봐야지. 나는 매번 짐만 꾸리다,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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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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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3-2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로티를 좋아하시는군요.

로쟈 2006-03-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로티가 문학 전공자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들만 하거든요.^^

사량 2006-03-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티의 책은 <실용주의의 결과>만 읽어보았는데, 저는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더랬습니다. 로티는 문학이나 글쓰기라는 것에 꽤나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정작 문학 작품들을 갖고 이야기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적어도 그 책에서는요. 나름대로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대륙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을 많이 수용하려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문학적 체취가 잘 맡아지지 않는 철저한 미국식 글쓰기였다고나 할까요...

로쟈 2006-03-27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저도 언급했지만 말씀대로 로티의 '문학적' 편향은 철학내에서의 입지입니다(더 좁히자면, 미국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이고, 그는 철학자에서 '대문자 진리'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철학의 종언'을 고하는 철학자들 계보에 서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적 논변 방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이데거나 데리다를 진지한 철학자로 취급하지 않는 동네에서 (그가 '사적인 철학자'로 분류하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지지하는 예외적인 '철학자' 정도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같은 책에는 오웰이나 나보코프 등의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03-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나 김동식 교수도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라고 하지요. 전 로티가 데리다 등과 비슷한 이야기를 함에도 그리 난해하지는 않은 (물론 비교적으로) 글쓰기를 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로자 님이 보시기에 이 책의 전반적인 번역 상태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자인 박지수 씨는 "그리 자신이 없다"라고 했는데... 저도 로티의 논변이나 문체에 흥미를 느끼는 터라 영문판도 구매해 뒀거든요.

로쟈 2006-03-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원서를 갖고 있는데 대조해가며 완독하지는 않았(었)고, 중간 부분에서 대척인간(?)이 나오는 대목을 꽤 어려운 내용인 걸로 압니다. 한데, 제가 읽은 다른 글들을 고려해 본다면, 로티는 전혀 어려운 철학자가 아니죠. '그리 난해하지 않은'이 맞습니다(오역의 건덕지가 별로 없는 게 정상일 거 같구요)...

2006-03-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8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철학의 거장들>은 아는 후배가 교정을 보기도 했었는데 번역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그런데, 번역서들을 읽다 보면 그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라는 걸 아시게 될 거 같습니다. '철학입문'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처지는 못되고, 다만 제 경우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학년때는 러셀의 <서양철학사> 같은 걸 추천받기도 했었지요. 아무거나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한권 독파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3794 2006-03-2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6-04-17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의 글을 읽으니 '인식론의 거미줄'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조차 저에게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김수영의 '한꺼번에 혹은 동시에'론에 더 관심이 가네요^^
로티도 역시 이름만 아는 철학자였는데, 한 번 책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여기 오면 읽을 책이 자꾸 늘어서 큰일이에요^^;;

로쟈 2006-04-1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 때문에 인생 허덕이고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죠(^^;)...

자꾸때리다 2006-10-0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 부분 심리철학 부분을 자세하게 읽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 번역은 괜찮지만 전반부 번역에는 상당히 많은 오역이 있습니다. - 김영건 박사의 코멘트더군요. 전반부 심리철학 부분이 오역이 상당히 많다고...
 

 

 

 

 

김선욱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판단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사회와철학연구회,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를 (오래전에) 정리한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서 아렌트에 관한 논문을 활발하게 쓰고 있는 연구자들은 김비환, 김석수, 김선욱, 서유경 등 4-5명 정도이다. 김선욱은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정치철학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연구자이며 <칸트 정치철학 강의>의 역자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양서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6)을 출간한 바 있다. 참고로, 아렌트의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이진우 교수 등의 번역으로 조만간 역간될 예정으로 안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정치 현상에서 이론적 논의를 시작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취한다. 아렌트는 이성적 접근, 도덕적 접근 등은 정치영역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정치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정치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서의 다양성 혹은 복수성(human plurality) 때문에 존재하는 공적 영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종래의 정치철학은 이성 개념을 핵심으로 사용하여 정치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 유형, 즉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한다(<인간의 조건> 참조). 노동이란 우리의 신체의 유지를 위한 신진대사에 필요한 소비의 대상을 마련하는 활동을 말하고, 작업은 보다 항구적인 물건을 만들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는 활동을 뜻한다. 반면에 행위란 자신의 모습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며 자신의 개성을 알리려는 시도인데, 이러한 행위가 바로 정치행위의 핵심이다. 하지만, 플라톤 이래의 서양정치철학사에서 이러한 정치의 특성이 적절하게 고려되지 못했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에서 확인된다.

소크라테스는 의견들이 경쟁하는 정치 영역을 염두에 두었던 반면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기초 아래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재단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은 관조적 삶을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두었고, 이 양자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플라톤식으로 철학적 이념이 정치영역에 부과되면, 언어는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지 않게 되고 단지 주어진 철학적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즉 언어적 행위(action)가 단순한 기능적 작업(work)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아렌트의 유명한 전체주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직결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어떤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렌트가 지적한 정치영역 내에서의 철학적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정치문제에 있어서의 이성이나 합리성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의미한다. 이성은 정치영역에서 의견의 복수성을 파괴하는 기능을 할 것이고, 인간의 기본조건인 복수성의 파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아렌트는 이렇듯 서양의 정치철학을 거부했지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정치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어지는 인간이 지적 존재나 인식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회 가운데 살고 있는, 복수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독특한 정치 개념에서 중요한 개별자, 개별자를 다루는 정신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사교성 등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 <판단력 비판>을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배양시킬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로 생각했다.

우리는 취미판단을 내릴 때 다른 사람과 공통적이라는 느낌에 바탕을 둔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감각을 공통감각(common sens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달리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에 어울리게 해주는 별개의 감각"을 의미한다. 이 공통감이 판단의 소통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며, 우리로 하여금 의사소통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해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서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합리성의 작용은 거부되지만, 하버마스(1929- )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렌트의 판단이론과 합치될 수 있다. 아렌트가 판단을 통해 타인의 동의를 구할 때 전제하는 요소가 하버마스가 설명하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의 조건과 겹치며, 아렌트가 판단의 소통가능성의 근거로서 얘기하는 공통감 개념은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의 언어학습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간의 차이도 분명한데, 하버마스의 이론이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복수성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양자는 언어의 기능에 주목하여 의사소통 가능성에 착안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각각 공통성과 특수성이라는 정반대의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에서 드러나는 아렌트 정치사상의 특징은, 판단이론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합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1세기 문화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효과적인 접근법을 하버마스보다는 아렌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핵심은 서로 다르면서도 소통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 자신은 문화개념과 판단이론을 적극적으로 연결하지는 않았으나, 문화적 차이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국제관계가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바 있다...

06.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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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3-24 18:50   좋아요 0 | URL
'늘'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가끔'만 기억해 주십시오.^^

이리스 2006-03-24 22:06   좋아요 0 | URL
에.. 그럼 이따금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앗.. ^^;;

마늘빵 2006-03-25 00:2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또 퍼갑니다. ^^

2006-03-2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5 13:54   좋아요 0 | URL
**님/ 예, 들어오긴 했는데, 계속 버벅대서 (바이러스)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문의해주신 '예술공론장'은 말이 됩니다.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있어야 될 거 같구요. 다만, 맨마지막 문장 정도가 저에겐 좀 모호합니다. 예술의 사회적 실천모델이 '예술공론장'으로 규정된다고 해서, 그 규정가능성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구원과 해방'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인지. 좀 건너뛰는 내용이 아닌가 싶은데, 요약문이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twoshot 2006-03-25 16:29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에 관한 페이퍼를 두어 번 올린 바 있는데, 관련기사가 눈에 띄어 다시 옮겨둔다. 하던 일이니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모종의 책임감에 떠밀려서. 일단,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제하에 오르는 무대 소개.

한국일보(06. 03. 23)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무대에 오른다. 27일 대학로 라이브소극장에서 열리는 ‘제1회 문학 나눔 콘서트’.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강정, 황병승, 김민정씨가 나와 자신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인디록밴드 ‘모레인’이 이들의 시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연극연출가 박정의(극단 초인)도 배우들과 함께 시를 테마로 한 퍼포먼스를 선뵐 예정이다. 진행은 소설가 이명랑씨가 맡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학 작품을 책 바깥으로 끌어내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회 참가 시인들은 서정과 서사, 뚜렷한 시적 메시지 등 전통적인 시의 소통 구조를 배격하는 대신 내면에 밀착된 언어에 천착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시인 강정은 “그들은 애당초 공공의 광장이란 걸 믿지 않”으며 “그 허물어진 공간을 제 멋대로 부유하며 (바퀴벌레들처럼) 자신들만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전념한다”('한국일보' 12월12일자 ‘강정의 나쁜 취향’)고 말한 바 있다. 첫 회 제목은 그의 이 언명에서 차용됐다. 공연은 무료이며, 모든 관객들은 시인들이 서명한 작품집을 받을 수 있다. 4월에는 소설가 김종광 이기호와 황신혜밴드, 5월에는 젊은 서정시인 문태준 손택수 신용목이 참여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참고자료로서 '젊은 바퀴벌레'의 명명자이자 그 자신 '쇠잔한 바퀴벌레'이기도 한 강정 시인의 기고문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무비위크> 199호).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자리에 갔다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지인 몇몇이 모여 단촐하게 한잔하는 자린 줄 알고 밍밍하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모인 사람들의 수와 면면에 새삼 놀란 것이다. 시집출판기념회가 그토록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건, 내 기억으론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그 잊혀진 10년 사이, 내가 시의 바깥에 있었거나 시가 나의 바깥에 있었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독립적인 삶의 거점처럼 여겨졌다.


-고종석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이른바 ‘시인공화국’이다. 인구 대비 시인의 숫자를 봤을 때도 그렇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시인 모시기’를 봐도 그렇고, 아주 가끔 특정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독서풍토를 봐도 그렇다. 출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시집 출간은 숫제 시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윤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늘 소위 정통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출간한다. 시를 문학의 본령이라 여기고 숭상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시인공화국은 여전히 번성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가을에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유독 많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대략 15년 동안의 무관심과 침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최근 젊은 시집들의 득세는 심상찮은 기미가 있다. 이들의 연령대를 훑으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걸치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시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환상적 이미지와 자폐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 컴퓨터 문화에 대한 탐닉 등은 이들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될 만하다. 과잉되거나 뒤틀린 자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유약하면서도 섬세한 어조로 삶의 스산한 비의를 읊조리는 이들 감수성의 촉수는 외부세계로 뻗어있기보다는 자아의 심부를 향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소통불능의 자폐적 진술로 흐르지만, 그 자폐는 의외로 고집스럽고 사나워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시가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예민한 성감대’라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시는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는 한 개인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 전체의 아픔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때때로’ (자주 쓸 수 있다면 그건 힘이 아니다)가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삶의 무미한 디테일들을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스스로의 내구성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엿보이는 자폐적인 이기성을 나는 존중한다. 동시에, 천성적인 유약함을 내밀한 읊조림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두텁게 하는 그들의 타고난 ‘비사교성’에 더 강퍅한 지지를 보낸다.

 

-대의에 얽매이거나 시류적인 일반론의 강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사적 언어’는 한 개인의 편협한 광증과 무기력함이 편의와 실용으로 무장한 21세기적 속도의식에 맞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시란 세계보다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세계보다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음으로써 저 혼자 아득바득 빛나고 저 혼자 용케 신성하거나 철없이 솔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자기치장술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지만, 그 왕따는 시를 씀으로써 선점하게 된 특출한 고독이나 진배없다. 그 고독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언정, 적게나마 목격한 이들에겐 일방향의 삶을 근원부터 다시 살피게 하는 끈끈한 설득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시인들의 언어가 좀 더 거칠고 생경하고 느리고 육감적이길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첨단의 주방 귀퉁이에 알을 슨 바퀴벌레처럼 느닷없이 악명 높아지길 바란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일말의 악의 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미련하게 잠든 세상을 가끔씩 놀래켜 주는 것. 그게 시의 존재의의고 시의 존재방법이며 시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방어이다. 시인공화국은 시의 궁창이자 시의 궁전이다.

 

이어서 시인 강정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 연초의 기사. <시인 강 정 “나를 뒤집는 전복의 힘으로 시를 쓰지요”>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민일보(06. 01. 08.) 지난해 12월말 시인 강정(35)은 홍대 앞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강정이 10년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은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공연장에서의 그의 격렬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낭송했다는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본다.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쪽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에 발표했을 때부터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시다. 찢어진 눈이며 껑충한 귀며 강정을 본 순간,어쩌면 우리가 찾던 토끼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친구인 시인 이준규가 제목의 영감을 주었는데,30분만에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만든 르네 클레망의 작품에서 따왔어요.”

 

 

 

 

 

 

 

 

 

 

 

-30분만에 무려 80행을 써내려간 그의 머릿속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스무 두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내놓은 이래 그의 탐미적인 언어는 시를 떠나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을 종횡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의 표창을 날려왔다. 2000년대에 등장한 황병승 장석원 김행숙 등 젊은 시인이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기 전,말하자면 그는 10년전부터 미래파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라 칭하는 한편 이들 미래파 후배 시인들을 ‘바퀴벌레’라 호칭하며 이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낡은 공간을 부식시키고 냄새를 풍기지요. 이 친구들의 존재 방식은 사물을 흉물스럽게 바라보는 느낌 그 자체에 있는데, 일상적이지 않고 낯설다 뿐이지 실은 그들의 시에 새로운 세계의 총체성의 기미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표면에 떠 있는 감정들을 슬슬 건드려주는 정도의 신서정 계열의 시편들은 비록 대중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진검승부를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결핍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단이 되어야 해요. 자기가 써왔던 것,했던 것을 까뒤집는 전복이 필요하지요. 요즘 들어 이성복 시인을 제외하고는 선배시인 가운데 그런 전복의 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근래의 서정시들은 거개가 ‘자기가 눈 똥을 보고 이쁘다’고 자평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이번 시집 가운데 표제시는 빼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강정의 시적 매커니즘은 우주와 몸의 대비에 있다. 빛까지 빨아들이는 우주의 카오스처럼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혼돈성,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들,성적이고 관능적 환상들,끝까지 규정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는 언어가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우리 시보다 외국의 번역시를 읽을 때 언어를 뛰어넘는 느낌을 받아요. 언어를 삐딱하게 놓는 행위랄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들,뒤섞여 나오는 것들…. 사람도 잡종이 더 이쁘잖아요. 시를 쓰면서 모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마음의 모국을 떠나 외계를 발견하는 우주인,그게 시인이지요.” 강정은 우리 시단의 블루칩이다. 

 


 

 

 

 

 

 

 

시인의 마지막 발언에서 시인/평론가 이장욱이 이 '바퀴벌레 시인'들을 다룬 글의 제목을 '외계인 인터뷰 - 시적 윤리와 질문의 형식'라고 붙인 이유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지구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이 시인들이 굳이 국적에 연연하겠는가?!..

 

06. 03. 2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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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렇게 '문학의 현장'이 느껴지는 글은 요새 접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3-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과문하신' 탓입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인들이고 시적 경향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