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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ㅣ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