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푸른역사 아카데미의 목요강좌에서 '<이방인> 다시 읽기'란 강의를 진행하기에(http://blog.daum.net/purunacademy/52) 강의자료를 챙기다가 두달 전에 읽은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 생각나 찾아서 옮겨놓는다. 민음사 세계문학판으로 다시 나온 <이방인>(민음사, 2011)을 거리로 삼았는데, 이후에 번역본은 <이방인>(열린책들, 2011)과 <이인>(문학동네, 2011) 두 종이 더 추가됐다. 가능하면 모두 비교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한겨레(11. 05. 09)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책세상 펴냄·1994)은 김화영 선생이 1987년에 번역해서 출간한 번역본의 3판 1쇄 버전이다. 그 책을 1995년에 읽은 것 같다. 최근 선생께서 20여 년 만에 새 번역본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신간 <이방인>(민음사 펴냄·2011)을 구입했다. 몇 페이지만 비교해봐도 어휘나 구문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그 강렬한 줄거리는 그대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슬퍼하기는커녕 한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누는 타입의 청년인 뫼르소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휴양지에서 한 아랍 청년을 총으로 쏴 죽이는데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도 상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는 이야기다. 

다들 배운 대로 소설의 3요소는 ‘주제·구성·문체’다. 간단한 이야기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예로 들자면, 하필 윤희중 같은 타입의 인물이 하필 무진이라는 공간에 던져졌기 때문에 하필 그와 같은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캐릭터 기념관이라는 게 있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지하생활자의 수기>), 멜빌의 ‘바틀비’(<필경사 바틀비>), 그리고 카뮈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이상(李箱)이 뫼르소보다 6년 먼저 탄생시킨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한 인물이 소설의 거의 전부다. <이방인> 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진, 그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게 관건인 그런 작품이다. 구성 자체가 그렇다. 작가는 1부에서 뫼르소의 성격과 그가 자행한 사건을 소개하고, 2부에서 그를 이해·오해하기 위한 법정을 열어 독자와 토론을 벌인다.

토론의 구도는 이렇다. 그는 사건 1(모친상)을 겪었고, 사건 2(살인)를 저질렀다. 이 두 사건의 관계를 조합하는 세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첫째, 1은 2의 근거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냉담할 정도의 인간이니 무고한 아랍인도 죽인 것이다. 둘째, 1과 2는 별개다. 그가 무정한 아들이건 말건 그것은 사법이 아니라 도덕에 속하는 문제이고, 그의 (비도덕 혹은 반도덕이 아니라) 무도덕은 오히려 우리의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성찰하게 하는 의의를 갖는다. 셋째, 1과 2는 은밀하게 매개돼 있다.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두 사건 모두에 등장하는 저 태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나 인간 뫼르소의 핵심이자 이 소설의 가장 깊은 신비인 이것은 가려져 있다.

첫 번째 시각은 바로 검사와 배심원의 논리 그대로다. 카뮈는 이런 통념적인 시각에 맞서 두 번째 시각을 제기하려 한 것 같다. 뫼르소의 무도덕은 정직함의 어떤 극단적인 양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다음날에는 애인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그토록 불편한가?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 뫼르소만의 것인가? 그는 단지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늘 하는 거짓말을 안 할 뿐이다. 더 나아가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이 지독한 문장은 카뮈의 다른 글에도 있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사르트르의 <벽> 서평, 전집 18) 이런 매력적인 단호함으로 카뮈가 (특히 미국판 서문에서) 두 번째 시각에 힘을 싣고 있지만, 또 이것이 작품의 윤리적 급진성을 잘 추려내는 독법이겠지만,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다. 세 번째 시각으로 봐야 할 뫼르소의 심연은 여전히 깊어서 그것은 백인백색의 탐구 대상이다. 이 예외적인 내면의 매력 덕분에 이 소설이 70년째 읽히고 있다.(신형철_문학평론가) 

11. 07. 17.  

P.S. 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 번역본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휘영본 <이방인>(문예출판사)과 김화영본 <이방인>(책세상)까지 포함해 다섯 종 정도이다. 범우사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요 번역본을 갖고 있는 셈인데, 출간 순서대로 차례로 맨 서두 부분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儆白).'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휘영, 문예출판사)   

불어 'maman'을 '어머니'로 옮긴 게 특징적이며 경백(儆白)은 한자가 잘못 병기된 듯싶다(그렇게도 썼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였는지도 모른다'와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가 반복돼 리듬감을 주지만, 좀 늘어지는 느낌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책세상) 

'어머니'가 '엄마'로 바뀌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고 짧게 끊었는데,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원문도 그렇게 처리됐을 듯싶다. 한데,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가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로 변화한 건 개선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만으로써는'도 마찬가지다('그걸로는'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민음사) 

'경백(敬白)'이 '근조(謹弔)'로 바뀌었다. 그밖에 이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예정. 삼가 애도함.'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김예령, 열린책들) 

콤마(,)로 끊은 게 특징이다. 짧게 끊어지는 효과를 의도한 듯싶다. 전보문에 '삼가 애도함'이라고 쓰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전보문에 '근조(謹弔)'라고 한자가 병기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어 전보문이라면 '모친 사망. 명일 장례. 근조.' 정도이지 않을까(띄어쓰기도 안 할 듯싶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이기언, 문학동네)

가장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는 문장이다. 카뮈도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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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17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정말 조금씩 다 다르군요ㅎㅎ 제가 처음 구입해 읽은 <이방인>은 주우세계문학전집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김병일 씨란 분의 번역이었지 싶은데 그분 번역의 첫 문장도 위에 예를 드신 번역문들과 또 달랐던 것으로 기억되는군요.
저도 마지막에 예를 드신 이기언 씨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이참에 구입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방인>이 아니라 <이인>을 읽게 되겠군요^^

로쟈 2011-07-17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일 처음 읽은 건 주우판이었어요.^^

VANITAS 2011-07-1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와 책세상 판본의 역자가 동일하더군요 책세상판이 전집답게 해설이라던지 연보가 조금 더 추가되있고..저도 이번에 나온 '이인'에 관심이 가네요.

로쟈 2011-07-18 19:59   좋아요 0 | URL
연보는 이번에 나온 민음사판이 압권입니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에요.^^;

페크pek0501 2011-07-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뫼르소를 소재로 하여 생활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를 비난하는 대신 ‘뫼르소’ 같은 사람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어떨까."로 그 글을 끝맺었어요.

우리가 인간의 모든 유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하는 특이한 점이 그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괴물이죠. 저도 제 생각을 또는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번역의 비교, 잘 감상했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로쟈 2011-07-18 20:00   좋아요 0 | URL
네, 뫼르소도 있고 바틀비도 있고 또...^^

해원 2011-07-2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은 언제 읽어도 새롭습니다. 다시 서로 비교하며 읽는 재미를 가질 수 있겠군요.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정의

<일리아스>을 읽으면서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인데, 서양문학 '작가사전'으로 아주 유익한 책이다. 블룸 자신의 기준에 따라 100명의 천재를 선정하고 그 천재성을 10가지 범주로 분류해놓았다. 비록 서양문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무함마드와 <겐지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예외적으로 포함돼 있다) 이만한 규모의 작가론을 써낼 수 있는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해서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놀라우면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책의 구입을 계속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원서와 함께 구입했다. 그건 번역본이 '완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선 역자도 후기에 밝혀놓고 있으므로 완역본을 참칭한다거나 해서 독자를 속인 건 아니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애초에 원문 81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출판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출판사와의 협의에 따라 부득이 일부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 등은 일부 생략했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896쪽) 

번역문이 893쪽에 이르지만 814쪽의 원문을 다 옮긴 건 아니라는 자백이다(짐작에는 5-10% 가량을 덜 옮겼다). 한데 사정상 방대한 분량을 다 옮기진 못했다고만 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독자로선 아쉬움만 클 텐데, 일부 내용을 빠뜨린 이유를 저자 블룸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를 생략했다고 하나 내가 읽은 일부 대목들에서 생략은 그냥 임의적이었다. 역자나 출판사 사정으로 완역하지 못한 것을 애꿎게도 저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다. 

호메로스 편을 예로 들자면, 호메로스의 아이러니는 "자신의 창작이며, 때로는 자신의 승리 그리고 이전의 가인들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블룸은 <일리아스> 2권에 나오는 트라키아 사람 타미리스를 예로 든다. 제우스의 딸인 무즈들과 경연을 해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뮤즈들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고 노래하는 재주도 빼앗긴 시인이다. 그런 전례가 있기에 "호메로스는 뮤즈들과 경쟁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서두를 뮤즈(불멸의 여신)에 대한 간청으로 시작한다.   

<일리아스>를 예로 들면 "Anger be now your song, immortal one"이라고 부르는 식이다(블룸의 인용은 로버트 피츠제럴드의 번역이다. 교재로 좀더 많이 쓰이는 리치먼드 래티모어의 번역은 "Sing, goddess, the anger of Peleus' son Achilleus"로 시작한다). 번역본은 "불멸의 여신이여, 이제 노여움을 노래하소서"라고 옮겼지만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정도가 좋겠다('분노'란 말이 이 작품에서 갖는 중요성을 고려해서도, 원작에서도 첫 단어가 '분노(menin)'라는 점을 고려해서도 그렇다). 이를 통해서 "호메로스는 마치 이전의 시인들이 뮤즈들과 경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으므로, 자신만이 실질적인 최초의 시인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573쪽) 그리고 뮤즈(무사mousa)에 대한 간청을 서두로 삼는 것은 호메로스 이후 서사시의 전통이 된다.   

이 인용문에서 이어서 블룸은 "우리는 타미리스의 목소리를 빼앗은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How should one read the unvoicing of Thamyris?)"라고 질문을 던지고 두 문단에 걸쳐 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번역본에는 생략됐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이거나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로 간주된 모양인데, 애초에 그냥 '편역'이라고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호메로스 편은 물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서사시에 대한 평을 담고 있는데, <일리아스>에 한정하자면 생략된 부분은 한번 더 나온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에는 매우 복잡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나타난 아킬레우스의 보편성은 그의 탁월함은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574쪽)라고 지적한 다음 블룸은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두 영웅의 평판이 서로 엇갈려온 역사를 간단히 기술한다. 200년 전만 해도 아킬레우스가 더 걸출한 인물로 간주됐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작가들에게는 오디세우스(율리시스)가 더 인기를 끌었는데, 그건 "오디세우스의 영웅적이고도 악한 같은 측면이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풍부한 지략과 술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이어서 허클베리 핀과 셰익스피어의 율리시스적 인물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5행 더 나오지만 이 역시 생략됐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플라톤은 <일리아스>의 신들이 장난삼아 인간을 죽였다는 점을 참을 수가 없었다.(574-5쪽) 

원문은 "The Homeric gods, though we think of them as definitive for the ancient Greeks, were very troublesome for many who came after Homer, and for Plato in particular, who could not tolerate the idea that the gods of the Iliad, in particular, killed for their sport."(505쪽)인데, 앞부분을 잘못 옮겼다. '고대 그리스인(the ancient Greeks)'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옮겼기 때문이다(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이 동급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서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었는데, 'definitive'가 '한정적인'이란 뜻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결정적인'란 의미로 풀어주는 게 좋을 듯싶다. 욕심을 내자면 '절대적인'으로 옮기고 싶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의 신들이 절대적인, 확고한 지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들은 한마디로 '골치아픈 존재들'이었고, 특히나 플라톤 같은 경우는 역겹게 생각했다는 지적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다. "어느 면에서 호메로스의 신들은 어린아이이며,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비록 비극적인 인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게 블룸의 견해다. "아킬레우스는 성난 아이가 다친 고양이 새끼를 괴롭히는 것과 흡사하게 트로이인들을 도살한다." 아킬레우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블룸이 꼽는 것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여 다시 전장에 나서 포효하는 대목이다. "<일리아스> 제17권 '참호 위의 아킬레우스'에서"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는데, 문제의 장면은 제18권에 나오므로 아무래도 블룸의 착각 같다(원서의 편집자가 교정하지 못한 것은 의외다). 아테나 여신까지 가세한 포효 소리에 트로이군의 간담은 서늘해지는데 아예 쓰러져 죽기까지 한다.  

그와 아테나가 번갈아 함성을 내지르자 트로이인들은 공포심을 느낀 나머지 가장 용감한 전사 열두 명이 뒤로 주춤거리다가 동료의 창과 이륜전차에 목숨을 잃는다. <일리아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577쪽) 

블룸은 애덤 패리(Adam Parry)의 말을 빌려(번역본은 '애덤 페리(Adam Perry)'라고 오기했다), 아킬레우스를 "일상적인 언어를 수용하지 않으며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호메로스적인 영웅"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데, 여기서 그의 타자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577쪽)

이 대목은 "And yet Homer shrewdly gives the alienated Achilles no language of his own, in which his otherness could be explicitly disclosed."(507쪽)을 옮긴 것인데, 번역문 부정확하게읽힐 수 있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 데서 그의 타자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의 타자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언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혀야 한다.  

패리가 지적했듯이, 햄릿은 공공연하게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뛰어났고 또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비극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에 비해 영웅 아킬레우스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비극을 거의 표현하지 않으며 또한 표현할 수도 없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무능력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아킬레우스가 처한 궁지를 애절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리스 최고의 인물이지만 간절한 승리의 염원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리아스>를 쓴 시인 호메로스의 천재성은 아킬레우스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577쪽)  

여기까지가 블룸의 <일리아스> 읽기다. 기회가 닿으면 블룸의 <오디세이아> 읽기도 마저 다루고 싶다. 그전에 <오디세우스>도 완독해야 하고, 이왕이면 <율리시스>까지 완독해야 할 테니, 먼훗날이 되겠지만... 

11.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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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7-1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덜어낸 분량이 많군요. 5~10%라니... 정말 원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번역본을 듬성듬성 읽기는 했지만 블룸은 치밀한 논리 전개보다는 통찰력있는 언어들을 뱉어내는 비평가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의성'과 '계발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읽어야 될 것 같더군요. 언젠가 오역을 지적하신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하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벌써 상당한 분량일 것 같은데요. 국내 번역서들을 읽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7 12:24   좋아요 0 | URL
나중에 덜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킵하면서 번역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게 못마땅해서 사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나머지 90%에 대해선 참고/인용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낫긴 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현대문학을 잘 모르지만 블룸은 남성,백인,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문학만을 가치있다 여기는 비평가죠.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에서 블룸을 이리 평가합니다. "정전적 인문주의라 불리는 오만한 유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대중연사인 해럴드 블룸은 정신의 활기 넘치는 현존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부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블룸은 언제나 공개강연에서 받은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고, 다른 주장들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며, 그저 단언하고 확언하고 읊조릴 따름입니다. 이것은 자기상찬이지 인문주의가 아니며, 물론 진일보한 비평도 아닙니다."
블룸의 비평관을 저 개인적으로는 수상쩍다 여기고 있습니다.

로쟈 2011-07-18 20:04   좋아요 0 | URL
'정전적 인문주의'란 말을 맞습니다(대개의 '고전'주의자들처럼 블룸 또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죠). 셰익스피어주의라는 게 있다면 셰익스피어주의자이기도 하고요. 활기가 없는 것도 맞습니다. 인터뷰 같은 걸 보면. 동시에 '자아'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래도 저는 그의 작가론과 작품론을 참고합니다. 배우는 게 있어서요...

2011-11-14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할일이 너무 많으면 손을 놓게 되듯이 읽을 책이 너무 많아도 바라만 보고 있게 된다. 책상 위와 아래 잔뜩 쌓인 책들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얇은 책 한권을 빼든다.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다. 이번주에 나온 책으로 에이미 굿맨과 데이비드 굿맨의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마티, 2011)와 같이 묶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책들도 너무 많아서 사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연하지만, 이번주에 책을 고른다면 이 두 권부터 시작해도 좋겠다. 일은 손이 닿는 데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독서 또한 그렇다.  

       

한겨레(11. 07. 16) 위기의 ‘대의 민주주의’ 노동자부터 주부까지 추첨으로 뽑아 국회로!

데모크라시는 그리스어 ‘데모스’와 ‘크라토스’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곧 민주주의는 ‘전체인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체제를 뜻한다. 아테네처럼 작은 도시국가에서는 그것이 가능했으나 인구가 많은 현대의 국가에서 모든 이들이 모여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도입된 것이 대의기관으로서의 국회다. 국회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에 의해 선출되어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대표하여 각종 법령을 제정하고 국가의 대사를 결정한다. 원론적으로 그렇다.

현실은 그게 아니다. 대한민국 18대 국회는 299명 정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41명, 47%가 서울대 출신이다. 법조인 출신은 60명으로 20%. 반면 노동자 출신은 3명, 단 1%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은 국회의원 중 14%에 불과하며, 유권자의 41%를 차지하는 19~39살은 7명으로 2%인데 전체 인구의 17%인 50대는 142명으로 48%를 차지한다.

인류가 발명한 정치체제 가운데 그래도 가장 나은 게 이 꼴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그 대안으로 국회의원을 추첨으로 뽑는다면? 책 <추첨 민주주의>는 이런 도발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우선 역사적으로 뜬금없는 얘기가 아니다. 아테네의 정치도 기본이 추첨이었다.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꼽는 까닭은 시민들이 민회에 모여 결정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으로 보면 행정, 입법, 사법의 전 분야에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추첨으로 공직을 충원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에서도 용례는 발견된다. 14세기 피렌체에서는 예비 선정위원회를 통과한 이들을 대상으로 비밀투표를 실시해 3분의 2 이상 득표한 사람들의 이름을 가죽가방에 넣은 뒤 무작위로 선택해 행정관을 뽑았다. 베네치아는 13세기 후반부터 추첨과 투표를 혼합해 최고 지도자인 도제를 뽑기 시작해 1798년 공화국이 붕괴할 때까지 이 제도를 유지했다. 이런 추첨 대표 방식은 현재 사법 배심제의 형태로 그 예가 남아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46개국에서 운영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시범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책은 추첨제의 장점에 대해 파고들어 간다. 우선 추첨을 하면 국민 전체의 구성과 근접한 국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선거비용을 댈 수 있는 부자, 학벌 좋은 전문직 엘리트,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입에 침을 튀기는 ‘미디어형 인물’이 아니라 일용직 노동자부터 전업주부까지 국회로 진출할 수 있다. 이러한 소시민들이 의회의 주인이 되면 의원은 특권이 아니라 봉사가 되며 의사당은 정쟁공간이 아니라 일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또 추첨을 하면 부패가 줄어들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선거 시스템은 원천적으로 부패 가능성이 내재돼 있다. 입후보하려면 일정 금액을 기탁해야 하고, 선거자금이 없이는 운동원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당선되면 그동안 들인 돈을 벌충하려는 유혹을 견디기 힘들고, 다음 선거에 또 나오려면 자금을 든든히 마련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추첨제에서는 재선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설혹 된다 하더라도 돈과 무관하므로 부패와 무관하다. 설혹 부패한다 해도 현재의 의원들보다는 덜할 것이다. 이와 함께 거수기 역할도 사라진다. 뒷배 역할을 하는 이익단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며 소속정당의 이데올로기를 단체로 대변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 내 투표부정을 폭로했던 이지문씨는 덧붙인 글에서 “추첨제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것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며 제도의 성패는 결국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현재 대의제 민주주의가 능사는 아니며 보완할 여지가 많은 제도임을 환기하는 것으로도 읽힌다.(임종업 선임기자) 

경향신문(11. 07. 16) 풀뿌리 민주주의 만들고 있는 ‘시민 영웅들’

미국의 진보적 독립언론인 ‘데모크라시 나우!’의 창립자이자 진행자인 에이미 굿맨(54)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평범한 시민들”의 저항을 취재해 담아냈다. “용기와 신념을 갖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들고 있는 평범한 영웅들이 “장기적이고 진정한 변화”를 일궈나가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2006년 8월 아랍 출신의 미국인 건축가 라에드 지라르는 케네디 공항에서 보안요원들에게 탑승을 제지당했다. 문제는 그의 티셔츠였다. 거기에는 영어와 아랍어로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안요원들은 그 셔츠를 벗기고 ‘뉴욕!’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혔다. 그들은 앞자리로 지정된 지라르의 탑승권을 찢었으며, 맨 뒤의 화장실 옆 좌석번호가 적힌 탑승권을 내밀었다. 지라르가 이 ‘황당한 굴욕’을 ‘데모크라시 나우!’에 출연해 공개하자, 그 고백은 “인종 프로파일링에 대한 시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티셔츠가 수천장이나 만들어졌고, 많은 예술가와 학생들이 그 옷을 입은 채 공항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결국 ‘문제의 티셔츠’는 비행기 탑승에 아무 지장이 없는 ‘평범한 티셔츠’로 복귀했다. 아울러 이 시위는 외모와 옷차림을 검열하는 미국식 애국주의와 인종주의에 경종을 울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휩쓸었을 때의 일이다. 대통령 부시는 2주가 지나서야 폐허가 된 도시를 찾아와 “여러분이 마을과 생활을 재건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진풍경이 벌어졌다. 숨진 주민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일을 군, 경찰, 지방정부가 수수방관했다. 시신들은 도로와 벌판에서 부패했다. 곧이어 재난 복구에 ‘민영화’가 도입됐다. 부시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내놨던 ‘캐니언 장례회사’가 시신 한 구당 1만2500달러를 받아가며 수습에 나섰다. 집 잃은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카니발 크루즈 라인’이라는 회사의 선박에 수용됐다. 저자는 “공화당의 자금줄인 이 크루즈 회사는 휴가철 요금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을 챙길 수 있었다”고 꼬집는다.

결국 시민들이 나섰다. 뉴올리언스 9구역은 “가장 활기차게 재건이 진행”된 곳이다. 거기에는 주택을 복구하고, 이재민에게 의료와 법률 서비스, 기초적 생필품을 제공하려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인 ‘커먼 그라운드’의 본부가 있다. 그들은 단돈 50달러와 3명의 봉사자로 출발한 지 며칠 만에 이슬람사원에 진료소를 열었고,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에게 4만달러를 지원받아 저소득층을 위한 생필품 보급소를 설치했다. 본부 앞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자동차로 구경만 하고 지나가는 당신, 내 고통을 구경하려면 차를 세우고 값을 지불하라. 여기서 1600명이 숨졌다.” 



책에는 이 밖에 도서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염탐하는 일을 거부하며 ‘애국법’에 항의한 코네티컷주 도서관의 사서들, 반전연극을 공연하려다 제지당한 고등학생들, 이라크전 파병을 공개 거부한 육군 장교 등이 등장한다. 모두 ‘데모크라시 나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이다. 1996년 태동한 이 인터넷 매체는 “깊이 있는 뉴스 전달과 진보적 관점의 시사 분석”을 모토로 삼는다. 광고나 기업의 후원이나 협찬을 받지 않고 공공재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사이트 회원들과 시청자의 후원금, 방송중계업자들이 지불하는 저작권 사용료, DVD와 책, 머그잔 등을 판매한 수입으로 제작비를 충당한다. 민주주의를 빙자한 선정주의, 뻥튀기 제목을 동원한 ‘낚시질’은 보이지 않는다. “풀뿌리 시민영웅들”이 주요 등장인물이지만, 노엄 촘스키, 나오미 클라인, 슬라보예 지젝, 우고 차베스 같은 ‘유명 인물’도 종종 등장해 진행자 에이미 굿맨과 시사 문제를 주고받는다.(문학수 선임기자) 

11. 07. 16.   

P.S. 추첨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 2006)도 참고할 수 있다. 대의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비뽑기(추첨제)가 갖는 의의에 한 장이 할애돼 있다. 그밖에 민주주의 관련서로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 고성국의 <10대와 만나는 정치와 민주주의>(철수와영희,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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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트주의 청산과 추첨민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01 21:42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낮에 쓴 칼럼인데, 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 2011)의 문제의식을 풀어놓고 싶었다. 같이 참고한 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쓴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다.경향신문(11. 08. 02) [문화와 세상]엘리트주의 청산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진단하고 비판함으로써 소위 ‘강준만 한국학’이란 걸 세워온 강준만 교수가 최근 <강남좌파&g

아무래도 올여름 독서계의 대세는 '십자군'인 모양이다. 첫권이 나온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에서 김태권의 만화 <십자군 이야기>까지. 찾아보니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은 몇 권 소개된 적이 있다. 내친 김에 한데 모아놓고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세계사 교과서에서나 잠깐 들여다본 1000년 전 세상의 이야기다(지금은 그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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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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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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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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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07-17 13:24   좋아요 0 | URL
살라딘 볼만하죠..

로쟈 2011-07-17 16: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참에 구하려고 합니다.

심술 2011-07-18 16:30   좋아요 0 | URL
혹시 시오노 작가님 새 책이 왜 문학동네에서 나왔는지 아시는 분?
제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데 아직까진 속시원한 대답이 없어요.
덤으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는 어쩌다 부엔리브로에서 나오게 됐는지
지금은 한길사에서 나오지만 90년대 처음 나올 때는 시아출판사에서 나왔던
쌀로메 유모 이야기는 어떤 사연을 걸쳐 그리 된 건지도 알고 싶은데
아시는 분 계시면 좀 알려 주세요.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시오노 나나미를 가장 먼저 소개한
신한종합연구소가 1993년에 출간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천년 상,하권은
왜 한길사가 아닌지 제가 알기에 답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쟈 2011-07-18 20:05   좋아요 0 | URL
독점 계약이 아니라면 판권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출판사에게 넘어가죠.

심술 2011-07-19 07:1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쉬운 걸.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름없는괴물 2011-07-19 12:28   좋아요 0 | URL
재밌긴 할 거 같지만 로마인 이야기라는 전과가 있는 작가이기에 역사책을 가장한 소설을 또 얼마나 꾸며냈을까 염려되는군요.

로쟈 2011-07-19 23:1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불어로는 '이야기'와 '역사'를 같은 단어로 쓰기도 하죠...
 

이번주 '프레시안books'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715144535).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2011)에 대한 것인데, 원고는 아침에 부랴부랴 2배속으로 작성해 보냈다. 일독해볼 만한 흥미로운 책이다.  

 

프레시안(11. 07. 15) 한국에 톨스토이 없는 이유는? '식민지' 없어서!? 

<세계 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펴냄)는 평론가 조영일의 세 번째 책으로 나온 네 번째 책이다. 그의 해명에 따르면 네 번째로 기획된 책이지만 한권을 앞질러 출간된 것이어서 그렇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2008년), <한국 문학과 그 적들>(2009년)이 '한국 문학 비판 3부작'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이며 그 마지막 권보다 먼저 나온 게 <세계 문학의 구조>이다. 조영일은 앞서의 비평집들이 보여준 날선 비판으로 '한국 문학 비판의 대표 주자'란 평판까지 얻었는데, <세계 문학의 구조>는 적어도 제목만으로는 '비판'보다 본래의 '비평'에 더 다가간 느낌이다. 그는 '세계 문학의 구조 비판'이라고 쓰지 않고 그냥 '세계문학의 구조'라고 적었다. (보론으로 실린 글 역시 '세계 문학 전집의 구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조영일의 비평적 입지는 독특하다.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 다수를 번역한 '전담 번역자'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긴 했지만(한국 문단에 큰 파문을 던진 <근대 문학의 종언>이 그의 손을 거친 번역이다) 동시에 한국 문학(그의 표현으론 '한국 문단 문학')의 경계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이거나 (다수의) 매몰찬 기각인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 보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글을 써내는 비평가에 속하면서도 정당한 평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불편한 물건'으로 간주되는 일이 많았다. 사뭇 논쟁적인 주장과 함께 여러 차례 실명 비판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논쟁이 벌어진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 방증이다. 끊임없이 손수건을 내던지지만 아무도 그의 '결투 신청'에 응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의 비평에 간혹 끼어 있는 논리적 비약이나 논거 부족 등이 상대할 여지를 축소시킨다는 의견도 나온다. <세계 문학의 구조>의 '책머리에'만 보아도 그렇다. 서두이다. 

"지금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백낙청)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못 분명한 사실 같다.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5쪽)

 

백낙청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펴냄)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러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나르시시즘이다. 보통은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정도로 진술하는 게 문맥상 온당하다. 그래서 그런 식의 문장 연결이 불편한 독자들도 있을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미리부터 책을 덮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나름 '슬로우 스타터'라서 그렇다.

스스로 '장편 비평'이라고 장르를 규정한 이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건 모종의 '자부심' 혹은 '기개'이다. 일단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제목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장이 일사불란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주제를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니고 "근대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오히려 핵심을 구성하지만 조영일은 당당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대담한 제목을 붙였다. 더불어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책 이름만을 박아놓았다(물론 출판사 이름도 하단에 들어 있지만). 



아무런 표지 장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내용'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조영일은 "나는 최근에야 스스로를 문학비평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까지 '책머리에'에 적었다. 이를테면 <세계 문학의 구조>에서 우리는 국민 문학과 국민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그의 주장을 읽으며 비평가 조영일의 '탄생' 또한 목도하게 된다. '3부작'을 완결 짓기 전에 <세계 문학의 구조>를 미리 펴내야 했던 이유 혹은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을 듯싶다. 조영일은 이 책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한다.

"<세계 문학의 구조>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단 '장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내용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세계 문학의 일부로서만 '한국 문학'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7쪽)

 

'장편'이란 말이 '장편 소설'을 연상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연작'에 가깝다. 네 개의 장과 보론이 조금씩 소재와 초점을 달리하면서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런 형식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습니다' 체 문장이다. 마치 강연 원고처럼 읽히는데, 짐작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1장 '세계 문학으로'는 노골적으로 가라타니의 '세계공화국으로'란 구호를 패러디하고 있다(<세계 문학의 구조> 표지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표지와 유사하다. 실제로 조영일은 가라타니의 이 최신작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스타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근대 문학의 종언'론의 견지에서 다시금 백낙청을 비롯한 민족 문학론자들의 세계 문학론을 비판한다. 진즉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비평의 화두로 삼아온 백낙청은 괴테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세계 문학의 이념을 재정립한다. 요는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조영일의 비판은 흥미롭게도 세계 문학에 대한 괴테와 마르크스의 주장을 그 문맥에 맞게 다시 읽는 것이다.

가령 "민족적 편협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민족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공산당 선언>)는 게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명한 주장이었다. 조영일은 이 주장에 앞서 마르크스가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들 대신에 새로운 욕구들이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들은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들 및 풍토들의 생산물을 요구한다"고 적은 대목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세계 문학을 세계 시장의 형성과정에서 생겨난 '민족적 자족성의 불가능'에서 나온 파생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교정한다. 한편, 괴테의 경우는 세계 문학을 '촉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조영일에 따르면 그 배경은 전쟁이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보편적 세계 문학이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이 너무나도 두려운 전쟁에 의해 시달린 나머지, 재차 자기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외국의 많은 것들에 대해 깨닫고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이제까지 몰랐던 많은 정신적 욕구를 여기저기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괴테의 '정신적 욕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욕구'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그것은 참혹한 전쟁을 통해 획득하게 된 어떤 강제적 충동이 만들어낸 '초국가적 연대감'이라는 것이 조영일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세계 문학 구상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대한 구상과 나란하다. "자연의 계획이 뜻하는 것은 전 인류 안에 완전한 시민적 연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는 칸트의 구상은 보편적 문학에 대한 구상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공화국이 국민 국가를 지양한 것이라면, 세계 문학 또한 국민 문학(혹은 민족 문학)을 지양한 것이다.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란 구호에 맞서 저자가 '민족 문학에서 세계 문학으로'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세계 문학, 혹은 세계 문학의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라면, 조영일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건 국민 문학의 기원이란 주제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일본 근대 문학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감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소위 '국민 서사'라는 게 가능하자면 그것은 국가 간 전쟁과 같은 일대 사건을 요구한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일본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세키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에 일어난 러일 전쟁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이제까지 일본 문학이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러시아란 대국도 무찌른 만큼 문학 쪽에서도 대단한 무엇이 나올 거라는 전망을 그는 피력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 국민 문학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그렇듯 근대 전쟁과 근대 문학은 '상호 협력'했다는 것이 조영일의 시각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영일은 "국민 전쟁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국가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나라는 근대 문학이 발달했으나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란 물음의 답은 그대로 주어진다. 근대적 서사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으로서 식민지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곧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의 잣대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사가 좀 부실해 보이는 것은 작가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이렇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한국 근대 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제국주의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그리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3쪽)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이다. 같은 세대의 젊은 비평가들 가운데 가장 명민하거나 유려한 비평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조영일은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이다. "한국에는 근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 없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는 비평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그가 각주로 처리한 대목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도 "한국에는 애당초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게 없다. 본문에 충분히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조영일은 미리 입막음해놓고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해놓고 '충분히 썼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 마무리이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근대 문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와 이문열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흥미로운 논거이지만 충분한 논거인지는 의문이다.

'장편 비평'이 '이론'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건 아니라고 조영일은 말할지 모르겠지만, 근대 문학과 세계 문학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주장에 더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다음 '장편 비평'을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1.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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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1-07-1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영일씨 글들은 항상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좀 더 많이 팔려도 될텐데...

로쟈 2011-07-16 08: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2011-07-1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6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1-07-1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언젠가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해서 달았던 댓글의 논리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군요. "제국주의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이 논리의 배면에 숨은 논거들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암튼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을 말할 때는 어떤 아우라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러한 아우라를 한국문학에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제가 고진의 논리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이유였고 제가 고진이 말하는 류의 '근대 문학'은 한국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된 동기였지요.
중국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루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루쉰에게 느끼는 아우라를 그 중국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그에게 루쉰은 이미 낡은 작가였습니다. 암튼 근대 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논의들은 좀더 많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6 17:16   좋아요 0 | URL
주장을 더 확장하자면 중국도 자체의 근대문학을 만들어내지 못한 나라이고 우리처럼 수입(이식)했던 것이죠. '근대문학'을 갖고 있는 나라는 사실 많지 않고요...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44   좋아요 0 | URL
루쉰을 '낡았다' 여기는 건 중국인들이 루쉰을 국민문학으로만 학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한국인이 국어교과서를 통해 학습한 현대의 작가들을 고루하다 느끼는 것처럼요. 하지만 국민문학이라지만 루쉰은 다르죠. 제가 함께 얘기 나눴던 중국인은 중국인을 혐오스럽게 그렸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루쉰을 싫어하더군요. 국민작가로 불리는 작가 중에 자국민을 저리 혐오스럽게 그린 작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건 같은 항렬로 놓고 보는 이광수나 후타바테이 시메이, 나쓰메 소세키를 비교해봐도 알수 있을듯 하구요.
루쉰이 근대 너머를 바라봤다는 인식이 든다면 '낡았다'는 생각은 안 들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