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의 '손민호의 문학터치'(http://news.joins.com/issue/star/200601/4394/) 100회 기념(?) 칼럼을 옮겨놓는다. 얼마전 칼럼이긴 하나 말 그대로 문단의 재미있는 '뒷얘기'를 담고 있다.

중앙일보(07. 07. 03) 세상 물정 모르는 문단 … 미워할 수 없어

문학터치가 100회를 맞았다. 2005년 6월 4일 첫 ‘터치’ 이후 이태가 넘도록 부지런히 ‘터치질’(소설가 은희경의 표현)을 했다. 스스로 용하다 싶어 내처 특집을 기획했다. 문학터치가 본 21세기 문단 풍경이다.

한국 문단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집단(모임? 제도는 어떨까? 권력은 심한 것 같고, 여하튼…)이다. 이는 온전히, 취재원을 바라보는 기자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출입처와 비교했을 때 문단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문학 기자로서 가장 난감했던 건 기사 반응이었다. 기사가 마음에 안들 때의 일반적인 대응 절차는 다음과 같다.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거나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거나, 나아가 명예훼손 소송을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문단은 다르다. 논쟁을 건다. “너는 왜 이렇게 읽었느냐, 술 마시며 토론하자.” 이런 식이다. “잘 몰라서 그랬나 본데…”라며 제자 다루듯이 가르치려는 경우도 당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기사와 상관없는 제 3자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었다. “너처럼 이렇게 밖에 못 읽어내는 기자는 내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 썼다.

리뷰 기사는 본래 홍보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어서 어지간하면 반응이 무난하다. 그러나 문학은 꼭 그렇지 않다. 문인들 사이에선 종종 기사 품평회가 열리곤 한다. 기껏해야 술자리 안줏감이겠지만 분위기는 자못 심각하다. 우선은 어느 작품을 골랐느냐를 놓고 우열을 가리고 다음엔 어떻게 썼느냐를 따진다. 몇몇 표현을 둘러싼 갑론을박도 벌어진다. 문학터치는 ‘하여’란 부사가 도마에 올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문단에서 속보(速報)는 무의미하다. 첫 보도는 기자로서 당연한 영광이지만, 문학 기자로서는 문화부장 앞에서만 자랑스럽다. 근자의 예로 김훈의 『남한산성』을 들 수 있다. 누가 맨 먼저 보도했느냐는 심지어 작가도 관심이 없었다. 문단은 이 풍성한 텍스트로부터 기원하는 담론 형성의 과정을 기사에서 찾아내려 했다. 그러니까 문학 기사는, 보도된 순간부터 메타비평의 텍스트로 자동 전환한다.

아무래도 문단은, 문학 기자를 문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여기는 듯싶다. 기자도 ‘선생’으로 통하고 있어 하는 소리다. 호칭만 따졌을 때 문단은 ‘선생님’ 세상이다. 하물며 기자도 선생이니, 너도나도 다 선생인 셈이다. 여기서 나이는 상관없다. 문단 막내 격인 김애란(80년생·소설가)도 엄연한 선생이다.

문학 종사자 대부분이 실제로 강의를 맡고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이는 아마도 문학수업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가 글을 써오면 선생이 시뻘겋게 빗금을 긋거나, 악명 자자한 중진 K시인처럼 “이거 왜 썼어?”라며 제자의 기를 죽이곤 했다는 도제수업 말이다.

그래서인지 문단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위계적이었다. 문단 바깥에서 보면 문단만큼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곳이 없다. 기자 입장에서도 문인 한 명 한 명이 낱개의 출입처이고, 하나의 정부(政府)다. 더욱이 우리 현대사에서 문단만큼 진보적인 예술가 단체는 없었다. 그런데도 문단에선 거대한 기계음이 들린다. 때때로 삐걱대는 소음이 새나오긴 하지만, 척척척…, 컨베이어는 늘 일정한 속도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문단은 의외로 잠잠하다. 시끄러운 곳은 술자리뿐이다.

문단은 배타적이기도 했다. 문단 진입장벽이 높은 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네들만의 문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문단은 의외로 세상 물정에 어둡다. 문단 내부에서 한국 문학은 위기가 아니다. 문단은 좀처럼 위기를 말하지 않는다. 한국 독자가 한국 소설을 안 읽는 건 한국 작가의 잘못이 아니며, 한국 시가 고사 직전에 놓인 건 오로지 저 얄팍한 세상 탓이다.

그렇다고 문단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단엔 여전히 낭만이 흐른다. 춥고 배고프다고 문학이 내팽개쳐지는 광경을, 문학터치는 목격한 바 없다. 20년 가까이 대기업에 다닌 김기택 시인은 “한 번도 사무실에서 시를 쓴 적이 없다”고 소주잔을 앞에 두고 말했다. 조연호 시인은 십 년간 공무원으로 번 돈으로 지금 전업시인을 만끽하며 산다. 먹고사는 문제와 문학이란 행위는, 문단에선 섬뜩할 만치 무관하다.

문단엔 오늘도 술이 넘친다. 일전에 고은 시인이 “요즘 젊은 시인들은 술을 안 마신다”고 꾸짖기도 했지만, 글쎄다, 예전처럼 3박4일 마시는 일은 줄었다 해도, 문단은 변함없이 술과 더불어 산다. 정오에 시작한 점심 자리가 저녁을 지나고 자정을 넘기는 불상사가 수시로 발발한다. 20시간 가까이 마시다 해뜰 녘 귀가할 때의 기분은, 음 그러니까…, 만감이 교차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에게 문학은 요원한 꿈이다. 중앙 신인문학상엔 해마다 2000명이 넘는 응모자가 몰린다. 담당자로서 기가 찰 따름이다. 무엇이 문학을 동경하게끔 하는가. 왜 무수한 이들이 들끓는 밤을 보내는가. 문단 안과 밖에 한 발씩 걸친 처지에서 이 글이 비롯됐다. 오롯이, 문학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서였다. 하니 문단은 오해 마시라.(손민호 기자)

07. 07. 11.

 

P.S. 지난 세기의 문단 풍경을 다룬 책으론 역시나 기자 출신인 평론가 김병익의 <한국문단사 1908-1970)를 참조해볼 수 있다. 재미있는 책인데, 후속작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멀고 먼 댓글
    from 목록들 2007-07-20 11:39 
    로쟈님 스크랩보고, 해당 기사에 대해 네이버에 썼던 글을 옮깁니다.     에...또, 참 <인순이와 리듬터치>도 아니고 자꾸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낸 메일이 그렇게 당혹스러웠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상당히 곡진한 표현을 썼는데, 마치 내 작품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를 했네. 뭐 뜻은 대충 올바르게 이해한 건 사실이다. 제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그랬다. 그런데 그건 자격의 문제가 아니지 않
 
 
비로그인 2007-07-1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님.

로쟈 2007-07-13 08:28   좋아요 0 | URL
댓글까지 남기시다니!^^

루팡 2007-07-15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블로그에서 링크타고 알라딘 서재에까지 왔습니다

로쟈 2007-07-15 21:12   좋아요 0 | URL
'루팡'님이 흔적을 남기시니까 의외입니다.^^

니브리티 2007-07-2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코멘트가 없는 거 보니까 손민호 기자의 문단 뒷얘기들(내가 보기엔 문단과 문학의 경계가 없으신 거 같지만)과 문학의 낭만(혹은 대중화)에 한표를 던지시는 것 같군요. 손기자가 제일 '당황'했던 사건의 장본인이라 댓글 달아봤습니다..ㅋㅋ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조르주 소렐(1847-1922)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2007)이 번역돼 나왔다. 낮에 잠시 신간도서들을 검색해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 이 책의 번역을 안면이 있는 출판사들에 제안하고 싶었을 만큼 평소 궁금하던 책들 중의 하나이다(아마도 지젝의 책에서 소렐이 언급되는 걸 읽었을 듯하다).

귀가길에 한 서점에 들렀다가 마침 들어와 있길래 단번에 손에 들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한 권으로 출간된 것이니까 저작권이 말료된 책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번역을 시도했다면 공연한 수고를 보탤 뻔했다. 프랑스 생디칼리즘이 전공인 역자가 생디칼리즘 사상가의 책을 옮긴 것이므로 믿어봄 직한 번역이 아닐까 싶어서이다. 책소개를 위해 조르주 소렐을 검색해봤더니 바로 뜨는 게 진중권의 칼럼이다. 무려 8년전의 칼럼. 짐작엔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2002)에 포함돼 있을 법하다(<폭력과 상스러움>은 오래전에 읽고 어디에 방치해놓은 책이라서 바로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참을 수 없는 권력의 폭력'이란 타이틀이지만 부제는 사회주의는 '폭력에 고도의 도덕성을 부여한다 (조르주 소렐 <폭력에 관하여>)'이다.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폭력에 관하여>, <폭력론> 등으로도 표기된다.

 

한겨레21(99. 02. 04) 참을 수 없는 권력의 폭력

“(노조는) 시장의 근본적 기능을 방해(하므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정비하고 사회보장의 망을 확충(하는 대신) 노동조합의 독점적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말이다. 여기서 ‘독점적 권력’이란 곧 파업권을 말할 게다. 노동조합이 어렵게 쟁취한 이 ‘권력’을 과연 ‘법률’이나 ‘사회보장’과 맞바꿀 수 있는가.

이 견해의 반대편에 소렐의 혁명적 조합주의가 있다. 소렐은 노조의 ‘권력’에 열광한다. 이 힘을 ‘사회보장’과 맞바꾸러 의회에 간 사회주의를 ‘계급의 적’이라 비난하며 그는 ‘폭력의 이념’을 선전한다. “의회? 노동자여, 부르주아를 닮지 말라. 폭력은 도덕적이다. 민주주의를 타도하라!” 이 맹목적 힘이 세계에 가져올 ‘구원’은 어떤 것일까? 공산주의 아니면 파시즘일 게다. 가령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그람시, 파시즘의 창시자 무솔리니는 둘다 소렐의 추종자였다.

오늘날 소렐이나 벤야민처럼 총파업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노조는 왜? ‘권익옹호’와 ‘사회보장’은 노동자의 개인적 정당활동을 통해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잖은가. 고종석의 말마따나 노조는 “노동의 질을 낮추고(…) 물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며 궁극적으로 실업을 늘”리지 않는가. 글쎄? 먼저 난 “현대 시장경제에서 노동조합이 단 하나 남은 권력”이라는 그의 말에 찬성할 수 없다. 왜? 노조는 유일한 권력이 아니다. 실은 또 하나의 권력이 있다. ‘국가.’ 난 국가가 총자본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고전적 견해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 그게 만인의 이해를 공정하게 대변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국가란 제도화된 폭력이다.

합의와 타협은 투명한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성적 대화 뒤엔 늘 끈적끈적 물질적 ‘이해’와 뭉클뭉클 ‘힘’이 숨어 있다. ‘힘’ 없는 ‘대화’는 공허하다. 소렐은 옳다. ‘대화’ 없는 ‘힘’은 맹목이다. 그래서 소렐은 틀렸다.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다. 그래서 난 벌거벗은 ‘힘’의 충돌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서 의회를 옹호한다. 하나 ‘대화’를 위해 ‘힘’을 거세하는 데엔 반대한다. 왜? 거세당한 자는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노조는 국가라는 ‘독점적 권력’을 견제하는 ‘힘’으로 남아야 한다. 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

그래서 난 노조의 ‘권력’을 국가에 반납하자는 제안에 반대한다. 폴란드와 중국의 자유노조운동을 보라. 거기엔 합법적 폭력을 분쇄하는 자유의 기운이 있잖은가. ‘한국 노동자, 세계 노동자계급의 전위.’ 재작년 노동자총파업을 어느 독일신문은 이렇게 평했다. 세계자본의 일방적 공세 속에서 터져나온 이 ‘힘’이 기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때 한국 노동자들, 멋있었다. 싸가지 없는 국가에 본때를 보여주었다.

총파업은 메시아다. 국가라는 리바이어던과 마주선 잠재적 메시아. 단 우리는 이 메시아를 탈신학화해야 하고, 그 ‘힘’의 행사가 맹목으로 흐르지 않게 늘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이성’의 포장지로 ‘힘’을 감추는 근대 자유주의의 위선, ‘힘’의 망치로 ‘이성’을 두들기는 좌우익 탈근대의 악마성. 근대와 탈근대를 모두 넘어서려는 나의 유물론은 그래서 힘의 비판, 폭력비판이 되어야 했던 거다.(진중권)

07. 07. 10.

P.S. 본문에서 언급된 벤야민의 폭력론과 그에 대한 데리다의 읽기는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더불어 이에 대한 나의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10363 참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yoonta 2007-07-11 02:50   좋아요 0 | URL
앗 조르주 소렐의 책이 번역이 되었군요. 어서 한권 구입해야겠네요. 그런데 고종석씨가 정말로 노조의 '힘'을 반납해야한다고 했다면 정말 실망이군요. 진중권의 말대로 대화를 위해서라도 힘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고종석씨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온건한 부르주아지식인이라고 보면 적당할듯 하네요. 그가 말하는 자유도 힘이 없이는 누릴수 없는 법인데 그는 이마저도 헌납하라고 하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인듯.

로쟈 2007-07-11 08:25   좋아요 0 | URL
그러한 '가능한 포지션'일 뿐이죠...
 
과학을 읽다

한국일보(07. 07. 10) [과학을 읽다]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우리 몸은 유전자를 운반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자 학계는 이러한 유전자 중심적 시각에 대해 꽤 비판적이었다.  

유전자 결정론, 환원론 등과 같은 공격이 쏟아졌다. 도킨스가 1982년 <이기적 유전자>의 후속편이자 비판에 대한 반박편으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을 쓴 배경은 이렇다.
지금은 진화생물학의 교본처럼 인정 받지만, 솔직히 <확장된 표현형>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학계의 논쟁을 염두에 둔 터라 비전공자를 위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도킨스는 진화생물학계 내부의 적들과 반(反)진화론자들의 주장을 일일이 거론하고, 복잡한 논리와 시니컬한 수사로 그들을 공략하고 있어 독자들은 갈피를 잃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상대성장측정연구’니 ‘적응지형도’니 하는 낯선 개념들이 과도하게 쏟아지는 데다, 비문이 난무하는 무성의한 번역까지 더해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많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의 생존(복제) 목적을 위해 진행되어 온 것이 곧 생물의 진화”라고 단언한 데 이어 <확장된 표현형>에서 “자기복제자는 자신을 운반하는 개체 수준을 넘어 외부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즉 유전자가 한 개체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특정한 형태나 행동(즉 표현형)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유전자 복제라는 목적을 위해 다른 종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 행동을 원격 조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에 기생하는 Ti 플라스미드가 박테리아를 통해 식물로 옮겨지면 감염된 식물은 암에 걸린 것처럼 무한히 증식하고, 오파인이라는 물질을 합성한다. Ti 플라스미드는 숙주인 박테리아가 오파인을 에너지원으로 쓰도록 만들어 오파인이 풍부한 환경에서 박테리아가 번성하게 한다.

오파인은 또한 박테리아 사이의 성행위랄 수 있는 접합을 촉진시키는데, 접합된 박테리아끼리 유전자를 교환할 때 플라스미드도 복제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신도 번성하게 된다. 달팽이의 뿔에 침입해 기생하는 한 흡충은 뿔 속에서 진동해 뿔을 곤충처럼 보이게 한다. 새가 뿔을 먹어 흡충이 다음 숙주로 옮겨가려는 전략이다. 더욱이 흡충에 감염된 달팽이는 어두운 곳을 선호하는 원래의 본성에서 벗어나 밝고 트인 곳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 역시 새에게 노출되도록 하기 위해 흡충이 달팽이의 행동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개체를 넘어 확장된다. 특정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유전자군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나’라는 하나의 개체는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도킨스가 끝으로 덧붙이는 문제의식이다.(김희원 기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ilocinema 2007-08-11 19:53   좋아요 0 | URL
"내가 너고, 네가 나다"의 무한반복.
 

교수신문(07. 07. 09) 괴델의 수학과 신학

오늘날 학자들의 학문적 야망을 절제하도록 만들며, 과학자들의 과학적 활동을 겸손하게 만드는 위대한 수학적 업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로 일컬어지는 오스트리아 부뤼노 출신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 사진)의 불완전성 정리(1931)가 바로 그 업적이다.
괴델의 제1 불완전성 정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기본 산술을 포함한 모순 없는 수학적 시스템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즉 이러한 조건을 갖춘 수학 시스템 내에서는 증명될 수도 없고 동시에 반증될 수도 없는 수학적 명제가 존재함이 증명된 것이다. 이 때 사용된 수학적 명제의 진리값은 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된다. 그러므로 참이면서 증명이 불가능한 수학적 명제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괴델에 의하면 수학의 진리는 수학의 증명방법에 의해 정복될 수 없다.

괴델의 제2 불완전성 정리는 모순 없는 수학적 시스템 내에서 그 시스템의 무모순성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예를 들면, 공리적 집합론의 토대가 되는 체르멜로-프렌켈의 공리적 집합시스템(ZFC)이 무모순하다면, ZFC의 무모순성은 ZFC 내에서 증명될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어떠한 수학 시스템에 모순이 없다면, 그러한 수학 시스템 내에서는 그 자체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괴델은 수학적 증명을 위해서 안전하다고 알려진 수학의 형식 시스템이 결코 안전할 수 없는 불완전한 시스템임을 증명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수학에는 이성적 증명을 넘어서는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수학적 증명을 넘어 존재하는 진리는 더 이상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수학자들이 선택해야할 믿음의 대상이다. 그래서 수학자 하워드 이브스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수학은 신학의 한 분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신학으로서의 수학은 수학에 의해서 그 자체가 신학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수학의 위대한 점이다. 괴델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수학자의 마음이 가지는 위대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괴델은 불완전성 정리가 단지 수학자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괴델은 수학자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서 가야하는 수학자의 능력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수학자들이 n단계에서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그 한계를 안다면, 새로운 공리를 추가함으로써 새로운 n+1단계로 나아가, n단계의 불완전성과 결정불가능성을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경계란 있을 수 없다. 수학적 증명이라는 도구에 의해 환원될 수 없는 수학적 진리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괴델은 자신을 유신론자이며 기독교의 루터교 신자라고 밝혔으나, 신학전문가로서 활동을 하거나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합리론적 신학’이라고 표명하며 철학적 형이상학과는 다르다고 구별하였다. 괴델은 수학적 무한과 절대적 무한의 실재성을 굳게 믿었다. 세계 내에 실현되는 무한으로서의 물리적 무한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신 안에서 실현되는 무한을 절대적 무한이라고 생각하였다. 괴델에게 신학적 무한과 수학적 무한은 분리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무한은 수학자나 신학자에 의해서 구성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괴델은 무한집합 기수의 크기와 관련된 연속체가설(CH)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CH는 정수의 집합(셀 수 있는 무한)과 실수의 집합(셀 수 없는 무한) 사이에 무한 집합은 없을 것이라는 칸토르의 가설이었다. 괴델은 제2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ZFC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장본인이었으나, ZFC에 CH를 새로운 공리로 추가할 때, ZFC의 다른 공리들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결국 연속체 문제에 가부간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무한은 괴델에게 실재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거나 포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괴델이 생각한 ‘신의 정의’
괴델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남겨진 증명은 1970년의 완성작이었지만, 그의 증명작업의 흔적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30년 이상 이 문제를 고민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증명에서 괴델은 단지 3개의 정의와 5개의 공리를 사용했다. 이때 괴델이 생각한 신의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신의 정의) x가 신의 속성을 가진다는 것의 필요충분조건은, x가 모든 긍정 속성들을 가지는 것이다.

괴델은 먼저 x가 신의 속성을 가진다면(즉, x가 신과 같은 존재라면), 신의 속성은 x의 본질임을 증명하였다. 다음으로, x가 신의 속성을 가진다면, 신의 속성을 가지는 x가 필연적으로 존재함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증명에는 2차원 양상논리가 사용되었고, 마지막 단계에서 다음이 유도되었다.

(1) 신의 속성을 가진 x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면, 신의 속성을 가진 x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2) 신의 속성을 가진 x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1)과 (2)의 전건긍정법(modus ponens)에 의해, 신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임이 증명되었다.

괴델의 신 존재 증명에 관하여는 신학적으로 더 많은 논쟁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괴델의 의도가 신의 존재를 완전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신을 ‘모든 긍정 속성을 가진 대상’으로 정의해도 충분하다는 것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괴델은 신의 유일무이한 속성을 수학적으로 규정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신의 속성과 동등한 속성을 가진 대상을 수학적으로 다루어 본 것이다.

괴델에게 신학이 무한한 신에 대한 연구라면, 수학은 무한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과 수학 자체는 무한하지 않다. 두 시스템은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유한 속에 있는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절대 무한을 다룰 수 있을까? 괴델은 무한한 대상과 유한한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 다리는 바로 ‘직관’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학에서의 컴팩트화(compactification)에 비유할 수 있다. 다룰 수 없는 무한의 열린 구간에 한 점을 추가함으로써 닫힘과 한계가 있는 무한집합을 만들어, 마치 유한한 대상을 다루듯이 유한한 작업을 통해서 다룰 수 있게 된다. 괴델에게는 그 한 점이 바로 ‘직관’이었다.

괴델에게 신학과 수학은 모두 컴팩트화의 작업이었다. 역사에는 수학과 신학을 분리하지 않았던 지적 전통에 기여했던 거인들이 있다. 피타고라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칸트, 칸토르. 이들은 모두 수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괴델에게도 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

무한은 신비로운 영역이 아닐 수 없다. 무한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같고, 전체와 부분이 같다. 이러한 직관을 허용하고 또한 요구하는 곳이 바로 무한의 세계이다. 수학과 신학은 추상적인 무한의 세계를 공유한다. 그래서 두 학문은 다른 어떤 학문들보다도 이성과 논리만으로 정복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을 향하여 접근하는 과정을 밀접하게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학적 증명과 수학적 진리가 완전한 동의어가 될 수 없다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신학적 증명이 신학적 진리와 완전한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전해주는 메시지와도 같다.

괴델 이후, 수학과 신학을 포함하여, 배우고 묻는다는 의미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참다운 희망의 근거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에서 발견될 것이다.(현우식/ 연세대·신학과 과학)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ravinsky 2007-07-09 23: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괴델.. 매우 관심이 가는데 손을 댈 엄두가 안 나네요.
근데 신의 존재에 대해서 수학자들마다 다른 것 같은데
칸토르는 집합론을 발전시킨 주된 목표 중 하나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었다고 하고
괴델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하고
근데 서용순 박사님에게 듣기로는 이스턴의 정린가 뭐시긴가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허; 참.

물론 전 자연신학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로쟈 2007-07-10 23:47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넌센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명 자체보다는 그런 증명을 시도하는 괴델에게 조금 더 관심이 가네요...

2007-07-11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7-11 00:24   좋아요 0 | URL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yoonta 2007-07-11 03:19   좋아요 0 | URL
넌센스는 아닐텐데요.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에서 사용한 수학적 방식과 위에서 언급된 신 존재의 증명은 기본적으로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자가 넌센스라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도 넌센스가 되는 셈이죠. 괴델이 신존재증명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실체적 신의 존재증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란 무엇인가를 논증하는 시도라고 보여집니다.

로쟈 2007-07-11 08:46   좋아요 0 | URL
신은 무한자이다. 수학적으로 무한은 증명될 수 있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는 식의 논법 아닌가요?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이러한 논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더불어, 인간인식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은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게 된다, 고 yoonta님은 믿으시는 건가요?

mravinsky 2007-07-11 10:0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표상주의가 끝났는데 인간 이성의 신존재증명이 가능하다고는...물론 신존재부정도 가능하지는 않지만요...

yoonta 2007-07-11 13:13   좋아요 0 | URL
로쟈님: 님이 말씀하시는 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이지 괴델의 논법이 아닙니다. 고로 괴델과는 무관한 동어반복이네요. 갑자기 괴델과 관련된 잡설을 한번 늘어놓고픈 충동이..^^
 

지난주에 구내서점에 갔다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의 소설 <카우치에 누워서>(시그마프레스, 2007)가 출간된 걸 보았다. 원저는 'Lying on the Couch'(1996). 나는 역자의 말을 조금 읽고서야 저자가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리더스북, 2006)의 저자와 동일인이라는 걸 알았다.

찾아보니 심리치료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더 국내에 소개돼 있었지만 내가 과문한 건 갖고 있는 얄롬의 책이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한권 뿐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하고 막바로 구입했었다. 아직 책장에 모셔두고는 있지만).  

 

 

 

 

해서 돌아보니 얄롬의 카우치 3부작이라 할 만한 소설들이 다 소개돼 있다(그가 더 많은 소설들을 썼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럴 만한 개연성은 충분해 보이지만). 그게 바로 <카우치에 누워서>,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쇼펜하우어, 집단심리치료>(시그마프레스, 2006) 세 권이다. 물론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저명한 철학자를 다룬 두 작품에 비해 신간은 "환자가 거짓을 고백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엮어낸 이야기"라고 하니까 양상이 약간 다르긴 하다. 그리고 원서의 출간순서로는 <카우치>가 가장 빠르며 <니체>, <쇼펜하우어>의 순서이다.

요는 한데 모아놓고 읽으면 좋겠다는 것. 사실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들을 꾸준히 출간해낸 역자나 출판사쪽의 노고도 높이 평가할 만한데, 이번에 책을 낸 시그마프레스는 얄롬의 책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시그마프레스, 2000)를 내서 좋은 평가를 얻고 용기를 낸 듯도 싶다(사명감이 보태졌는지도 모르겠고).



 

 

 

알라딘을 기준으로 할 때 실상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보다 많이 팔려나간 책들이 얄롬의 심리치료 사례와 임상에 관한 책들이고, 이 중 두 권이 시그마프레스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어서 <사랑의 처형자>는 현재 (알라딘에서) 품절상태이다. 더 많이 읽히면 좋지 않을까 싶다.

한데, 이 정신과의사는 왜 소설을 쓸까? 그게 제창하는 방법이 '실존적 심리치료'여서가 아닐까? 마치 '실존적 정신분석'을 주장했던 사르트르가 철학자이면서 소설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듯이, 심리치료의 '마스터' 또한 '이야기꾼'을 자임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듯싶다. 마음을 치료한다는 것 자체가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면 말이다. 

가령 이번에 나온 <카우치에 누워서>만 하더라도 소설의 얼개는 "환자를 분석하고 마음의 치료를 돕는 정신과 의사, 정신과 의사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사기를 치는 환자, 정신과 의사에게 거짓된 고백을 하고 분석케 하는 환자, 그런 거짓 고백을 통해서도 올바른 치료로 이끄는 정신과 의사, 정신과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를 파괴하는 사람들...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서 의사는 조금씩 성장해 가고, 환자의 고통이 치유된다"는 것이니까.

해서, 떠오르는 제안. 남들 다 떠나는 여름 휴가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는, 그래서 마음이 좀 착잡하신 분들은 집에서 소파를 카우치 삼아, 아니면 베개로 '카우치'를 만들어놓고 드러누워 얄롬의 책들을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 그의 책들을 비치 파라솔 아래서 읽는다는 건 넌센스일 듯하지만 스스로가 환자 겸 의사가 되어 '치료의 선물'을 음미해보는 건 괜찮을 듯싶다. 물론 얄롬의 치료도 공짜는 아니다...

07. 07. 09.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hilocinema 2007-08-11 21:21   좋아요 0 | URL
게을러서인지 정신과 의사인 제게도 포착되지 않았던 얄롬의 책을 소개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이 궁금해서 바로 주문을 해야겠는데요.

Bliss 2008-04-05 09:53   좋아요 0 | URL
얄롬을 알고 읽는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지난 겨울부터 줄곧 그의 책을 모두 읽어 보고 있는데요.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분야를 그처럼 치밀하고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감탄하며 존경하고 있습니다. 로쟈님 글을 읽으니 니체...와 카우치.. 쇼펜하우어... 는 3부작 시리즈가 맞습니다. 3권 모두 추리소설 보다도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그 중 쇼펜하우어..에 대해 서평과제를 앞두고 있습니다. 로쟈 님의 코멘트를 기대해도 될까요? ^^


로쟈 2008-04-07 21:15   좋아요 0 | URL
알고는 있지만 읽지는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Bliss님의 서평이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