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에 관한 페이퍼를 두 편 쓰는 것이 오늘의 일정 중 하나이다. 그게 단지 '하나'일 뿐이니 다른 일정들을 어찌 소화해야 할는지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할일은 많고 갈길은 멀다(곧 도서관에도 다녀와야 하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두번째 텍스트 '벤야민의 이름'을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텍스트는 재작년에 읽고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글로 정리한 바 있다. 데리다의 벤야민 읽기에 대한 정리는 차후로 넘겼었는데, 대충 그 '차후'의 시간이 된 것. '법과 폭력'을 키워드로 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책들을 더는 미룰 수도 없고 해서 읽어나가고자 한다.

'폭력'에 관한 책들은 세상의 폭력만큼이나 많이 나와 있지만,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함께 내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들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나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 등이다. 만약에 더 여유가 생긴다면,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인류학 책들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은 예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예외 상태> 같은 책들이 필독 목록이다.  

국역본 <법의 힘>을 읽으면서 내가 참조한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이다. 영역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Routledge, 1992)에 실린 것인데, 이 텍스트는 영어판 데리다 선집인 'Acts of Religion'(Routledge, 2001)에도 재수록돼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데리다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정리하겠지만, '현지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않아서 일단은 텍스트의 문턱까지만 정리해두도록 한다('읽기 위하여'란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영역본의 경우 국역본 72쪽의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으로 시작되는 문단부터가 본문이고, 이 강의의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63-72쪽)은 미주로 돌려져 있다. 그걸 읽겠다는 얘기이다. 이 '서언'에서 데리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이란 제목의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왜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를 시도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그 해명을 그는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1)먼저, "나는 의도적으로 이 텍스트가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유령의 논리'에 들려 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 이상이고 살아있는 것 이상"인 이 유령의 논리 혹은 법칙은 (나치의 유태인 '청소'라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적합하다. 게다가 벤야민 자신이 '유대인'이며, 그의 텍스트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다.

(2)그리고 또 관심사가 되는 것은 벤야민의 특유의 언어관이다. 벤야민은 표상(=재현)으로서의 언어를 명명(=이름부름)으로서의 언어와 대립시키는데, 전자가 기술적, 효용적, 기호론적, 정보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명명과 호명, 이름 속에서 현전의 선사 내지는 호출"을 언어의 소명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이름에 대한 사상이 신들림 및 유령의 논리와 접합되는지 묻게 된다."(65쪽)

  

(3)벤야민의 폭력비판론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는 한편으로 형식적인 의회/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며 때문에 1920년대초의 반의회주의적, 반계몽주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독재론>의 저자 칼 슈미트가 벤야민의 논문을 칭찬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칼 슈미트에 관한 문장은 영역본에 빠져 있다).   

(4)벤야민의 이 기묘한 논문에서 대의(=표상)이라는 다면적/다의적인 문제는 그가 제시하는 정초적/보존적 폭력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소위 정초적 폭력은 때로는 보존적 폭력에 의해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하여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에 대해 벤야민이라면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질문한다. "벤야민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데리다가 제시하는 잠정적인 의견에 따르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볼 때,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본다. 오히려 "표상의 언어에 대립하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나 시학의 복귀, (...) 그것들의 도래를 말하게 될 것"으로 본다.  

정리하면, 데리다는 1942년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벤야민의 1921년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로 읽겠다는 것. 그게 그의 취지이다. 그리고 이 취지가 놓여 있는 두 가지 맥락.  

(1)먼저, 데리다 자신이 '철학적 민족성 및 민족주의'라는 3년짜리 세미나를 기획하면서 '칸트, 유대인, 독일'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이미 1년간 진행했다는 것. 칸트에게서 '독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유대계 독일 사상가/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데리다가 주목하게 된 것은 몇몇 유대인 독일 사상가와 비유대인 독일 사상가들 사이의 유사점들(analogies)이다. "독일 식의 어떤 애국주의(대개는 민족주의이지만, 때로는 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의 군국주의이기도 하다)"(굵은 글씨는 국역본에 누락된 부분)가 코헨이나 로렌츠바이크, 그리고 부분적으로 후설 등에 나타난다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다(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적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벤야민과 칼 슈미트, 그리고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텍스트들 간에 보이는 어떤 '친화성'이다. "이는 단지 의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대한, 폴레모스와 전쟁, 폭력 및 언어의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해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70쪽) 이 대목은 약간의 교정이 필요해 보이는데(굵은 글씨 '적개심'이 빠져야 한다), 영역본을 인용하면 이렇다:

"Not only because of the hostility to parliamentary democracy, even to democracy as such, or to the Aufklarung, not only because of a certain interpretation of the polemos, of war, violence and language, but also becasue of a thematic of 'destruction' that was very widespread at the time."(66쪽)

구문상으로는 'Not only A, not only B, but also C' 형태이며, 'A나 B뿐만 아니라 C도'란 뜻이겠다. 여기서 '적개심(hostility)'은 A에 나열된 항들에만 걸리며 '해석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내가 본 불어본의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벤야민, 슈미트,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것은 (1)의회 민주주의,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적개심과 (2) 투쟁(polemos)과 전쟁, 폭력, 그리고 언어에 대한 특정한 해석 (3)해체/파괴라는 주제, 세 가지인 것. 물론 하이데거식의 '해체/파괴(Destruktion)'와 벤야민의 '해체/파괴(destruction)'론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양차 대전 사이에 '해체/파괴'라는 주제가 거의 강박적인 수준이었다는 데 데리다는 주목한다.

(2)또 다른 맥락은 뉴욕 예시바 대학의 카르도조 법학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콜로키움(사진은 이 콜로키움에서 강연하는 데리다의 모습). (서문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여기서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법의 힘>의 제1부)라는 강연문을 읽어나갔으며, '벤야민의 이름'은 비록 낭독되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데리다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궁극적으론 '벤야민의 이름'이란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을 낳은 것은 벤야민 텍스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 마지막 구절은 한밤중의, 또는 우리가 더 이상 또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의 밤의 쇼퍼(=나팔)처럼 울려퍼진다." 나중에 다시 반복되겠지만, 벤야민의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125쪽, 서명은 내가 집어넣은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을 따라가면,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문장, 종말론적인 마지막 문장은 서명과 봉인을 명명하고, 이름(Walter)과 '주권적인 것(die waltende)'이라 불리는 것을 명명한다. 발텐발터 사이의 이러한 '유희'는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의 '논증적' 힘의 역설은 이 힘이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의 분리에서 생겨난다는 데 있다."(71쪽)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고틀리히 게발트(신의 폭력)... 발텐데(주권)... 발터(벤야민)'라고 하여, 시적인 음성논리에 따르자면 '신의 폭력=주권=벤야민'이라는 유사 계열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유희'는 합리적/논리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한데, 역설적으로 '논증적(demonstrative)' 힘을 갖는다(이것은 '논증 아닌 논증'이기에 '역설적'이다) . 이때 '논증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게 하는 힘', 곧 (신비한) '설득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이 분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의 논리와 기표 논리의 분리이다. 가령 아래서 (A)의 번역문은 기의의 논리를 따른 것이고, (B)를 음역해서 읽을 경우 기표의 논리를 따른 것이 된다(그러니까 '벤야민의 이름'이 갖는 효과는 낭독할 경우에만 발휘될 수 있다).  

(A)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

(B)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

벤야민 텍스트에서 이 두 논리는 서로 따로 논다. 그래서 유희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는 전혀 유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벤야민이 특히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논문에서 우연하지만 의미심장한 일치들(고유명사들이야말로 이것들의 고유한 장소이다)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유희는 한편으로 의도된 것이면서 신비주의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데리다의 본격적인 독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는 벤야민 텍스트의 이러한 면모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데리다 텍스트의 입구이자 문턱이다(그리고 이 글의 출구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 이제 다른 스타일로, 다른 리듬에 따라 벤야민의 짧지만 당혹스러운 한 텍스트에 대해 약속했던 독해를 시작해보자."(72쪽)   

06. 01. 31.

P.S. 데리다에 대한 또 다른 페이퍼는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에 대한, 역자의 취향에 대한 낭패감과 유감을 담은 글이 될 텐데, 몇 마디 앞당겨 쓴 글은 조금 전에 날아가버렸다. 때로 신의 은총과 폭력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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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Se 2009-02-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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