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의 '손민호의 문학터치'(http://news.joins.com/issue/star/200601/4394/) 100회 기념(?) 칼럼을 옮겨놓는다. 얼마전 칼럼이긴 하나 말 그대로 문단의 재미있는 '뒷얘기'를 담고 있다.

중앙일보(07. 07. 03) 세상 물정 모르는 문단 … 미워할 수 없어

문학터치가 100회를 맞았다. 2005년 6월 4일 첫 ‘터치’ 이후 이태가 넘도록 부지런히 ‘터치질’(소설가 은희경의 표현)을 했다. 스스로 용하다 싶어 내처 특집을 기획했다. 문학터치가 본 21세기 문단 풍경이다.

한국 문단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집단(모임? 제도는 어떨까? 권력은 심한 것 같고, 여하튼…)이다. 이는 온전히, 취재원을 바라보는 기자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출입처와 비교했을 때 문단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문학 기자로서 가장 난감했던 건 기사 반응이었다. 기사가 마음에 안들 때의 일반적인 대응 절차는 다음과 같다.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거나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거나, 나아가 명예훼손 소송을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문단은 다르다. 논쟁을 건다. “너는 왜 이렇게 읽었느냐, 술 마시며 토론하자.” 이런 식이다. “잘 몰라서 그랬나 본데…”라며 제자 다루듯이 가르치려는 경우도 당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기사와 상관없는 제 3자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었다. “너처럼 이렇게 밖에 못 읽어내는 기자는 내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 썼다.

리뷰 기사는 본래 홍보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어서 어지간하면 반응이 무난하다. 그러나 문학은 꼭 그렇지 않다. 문인들 사이에선 종종 기사 품평회가 열리곤 한다. 기껏해야 술자리 안줏감이겠지만 분위기는 자못 심각하다. 우선은 어느 작품을 골랐느냐를 놓고 우열을 가리고 다음엔 어떻게 썼느냐를 따진다. 몇몇 표현을 둘러싼 갑론을박도 벌어진다. 문학터치는 ‘하여’란 부사가 도마에 올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문단에서 속보(速報)는 무의미하다. 첫 보도는 기자로서 당연한 영광이지만, 문학 기자로서는 문화부장 앞에서만 자랑스럽다. 근자의 예로 김훈의 『남한산성』을 들 수 있다. 누가 맨 먼저 보도했느냐는 심지어 작가도 관심이 없었다. 문단은 이 풍성한 텍스트로부터 기원하는 담론 형성의 과정을 기사에서 찾아내려 했다. 그러니까 문학 기사는, 보도된 순간부터 메타비평의 텍스트로 자동 전환한다.

아무래도 문단은, 문학 기자를 문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여기는 듯싶다. 기자도 ‘선생’으로 통하고 있어 하는 소리다. 호칭만 따졌을 때 문단은 ‘선생님’ 세상이다. 하물며 기자도 선생이니, 너도나도 다 선생인 셈이다. 여기서 나이는 상관없다. 문단 막내 격인 김애란(80년생·소설가)도 엄연한 선생이다.

문학 종사자 대부분이 실제로 강의를 맡고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이는 아마도 문학수업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가 글을 써오면 선생이 시뻘겋게 빗금을 긋거나, 악명 자자한 중진 K시인처럼 “이거 왜 썼어?”라며 제자의 기를 죽이곤 했다는 도제수업 말이다.

그래서인지 문단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위계적이었다. 문단 바깥에서 보면 문단만큼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곳이 없다. 기자 입장에서도 문인 한 명 한 명이 낱개의 출입처이고, 하나의 정부(政府)다. 더욱이 우리 현대사에서 문단만큼 진보적인 예술가 단체는 없었다. 그런데도 문단에선 거대한 기계음이 들린다. 때때로 삐걱대는 소음이 새나오긴 하지만, 척척척…, 컨베이어는 늘 일정한 속도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문단은 의외로 잠잠하다. 시끄러운 곳은 술자리뿐이다.

문단은 배타적이기도 했다. 문단 진입장벽이 높은 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네들만의 문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문단은 의외로 세상 물정에 어둡다. 문단 내부에서 한국 문학은 위기가 아니다. 문단은 좀처럼 위기를 말하지 않는다. 한국 독자가 한국 소설을 안 읽는 건 한국 작가의 잘못이 아니며, 한국 시가 고사 직전에 놓인 건 오로지 저 얄팍한 세상 탓이다.

그렇다고 문단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단엔 여전히 낭만이 흐른다. 춥고 배고프다고 문학이 내팽개쳐지는 광경을, 문학터치는 목격한 바 없다. 20년 가까이 대기업에 다닌 김기택 시인은 “한 번도 사무실에서 시를 쓴 적이 없다”고 소주잔을 앞에 두고 말했다. 조연호 시인은 십 년간 공무원으로 번 돈으로 지금 전업시인을 만끽하며 산다. 먹고사는 문제와 문학이란 행위는, 문단에선 섬뜩할 만치 무관하다.

문단엔 오늘도 술이 넘친다. 일전에 고은 시인이 “요즘 젊은 시인들은 술을 안 마신다”고 꾸짖기도 했지만, 글쎄다, 예전처럼 3박4일 마시는 일은 줄었다 해도, 문단은 변함없이 술과 더불어 산다. 정오에 시작한 점심 자리가 저녁을 지나고 자정을 넘기는 불상사가 수시로 발발한다. 20시간 가까이 마시다 해뜰 녘 귀가할 때의 기분은, 음 그러니까…, 만감이 교차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에게 문학은 요원한 꿈이다. 중앙 신인문학상엔 해마다 2000명이 넘는 응모자가 몰린다. 담당자로서 기가 찰 따름이다. 무엇이 문학을 동경하게끔 하는가. 왜 무수한 이들이 들끓는 밤을 보내는가. 문단 안과 밖에 한 발씩 걸친 처지에서 이 글이 비롯됐다. 오롯이, 문학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서였다. 하니 문단은 오해 마시라.(손민호 기자)

07. 07. 11.

 

P.S. 지난 세기의 문단 풍경을 다룬 책으론 역시나 기자 출신인 평론가 김병익의 <한국문단사 1908-1970)를 참조해볼 수 있다. 재미있는 책인데, 후속작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멀고 먼 댓글
    from 목록들 2007-07-20 11:39 
    로쟈님 스크랩보고, 해당 기사에 대해 네이버에 썼던 글을 옮깁니다.     에...또, 참 <인순이와 리듬터치>도 아니고 자꾸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낸 메일이 그렇게 당혹스러웠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상당히 곡진한 표현을 썼는데, 마치 내 작품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를 했네. 뭐 뜻은 대충 올바르게 이해한 건 사실이다. 제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그랬다. 그런데 그건 자격의 문제가 아니지 않
 
 
비로그인 2007-07-1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님.

로쟈 2007-07-13 08:28   좋아요 0 | URL
댓글까지 남기시다니!^^

루팡 2007-07-15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블로그에서 링크타고 알라딘 서재에까지 왔습니다

로쟈 2007-07-15 21:12   좋아요 0 | URL
'루팡'님이 흔적을 남기시니까 의외입니다.^^

니브리티 2007-07-2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코멘트가 없는 거 보니까 손민호 기자의 문단 뒷얘기들(내가 보기엔 문단과 문학의 경계가 없으신 거 같지만)과 문학의 낭만(혹은 대중화)에 한표를 던지시는 것 같군요. 손기자가 제일 '당황'했던 사건의 장본인이라 댓글 달아봤습니다..ㅋㅋ